촌장 패거리가 핍박한 게 고르곤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입으로 들은 사연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괴물이 있는 숲으로 쫓아내겠다며 마을 여자들을 겁주었다고 한다. 놈들이 괴물 다음으로 자주 입에 담던 멸칭이 마녀였다는 게 우연일까.

 

다 때려서 분이 풀렸는지, 아니면 기운이 빠졌는지 이 일을 맨 처음으로 시작한 여자가 몽둥이질을 멈췄다.

 

여자가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머뭇거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예전에, 제가 모르고 독버섯을 따려고 할 때 말려주신 분이 계셨는데…. 죄송합니다. 마을 어른들이 고르곤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말해서, 정말로 그런 줄 알아서 겁먹고 도망쳤어요. 너무 늦은 사과고, 그분이 지금 여기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죄송합니다.”

 

놀랍게도 고르곤 한 사람이 그 말에 응답했다.

 

“너, 기억한다. 덕분에 아직도 살아있군?”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여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촌장과 그 조카를 때릴 만큼 때려서 분이 풀린 다른 여자들이 그 옆으로 다가와서 섰다. 구타에 가담하지 않은 하인 중에서도 두 명이 더 나왔다.

 

직후에는 두서없는 사과가 이어졌다. 촌장과 그 패거리들이 겁주는 말을 고스란히 믿은 것. 잡혀 온 메두사를 도울 엄두를 내지 못한 것. 싸움이 이어지는 도중에도 겁먹고 떨기만 한 것….

 

항복하면 살려주신다 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지금 해야겠다고. 여자들이 입을 모아서 한마디씩 하던 말이 곧 결론을 맺었다.

 

나는 내 곁에 서 있던 스테노를 돌아보았다. 이미 한 차례 자비를 베풀었으니 용서까지 바라는 건 지나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방금 한 말을 조금 정정하겠다. 주동자들을 이미 처단하기는 했지만, 고르곤을 핍박하는 일에 동참한 자들이 아직 이 마을에 남아 있다. 그러니 우리와 함께 싸울 여자들은 무기를 들어라.”

 

여자들이 움직였다. 제일 먼저 사과한 여자가 떨어트린 몽둥이를 다시 주웠고, 창고에서 도끼를 꺼내 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 겁이 없는 몇몇은 죽은 용병들이 떨어트린 무기를 주워 왔다.

 

스테노가 같은 내용을 큰 소리로 다시 외쳤다. 그러자 가까운 민가에서도 몇 사람이 더 나왔다.

 

다 모아보니 열 명이 넘었다. 스테노가 놀랍다는 투로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데. 이러면 피아 구분을 잘해야겠군. 어디서 스카프 같은 거라도….”

 

뭐가 좋을지를 고민하며 웅성거리던 여자들 사이에서 맨 처음으로 움직인 여자가 다시 튀어나왔다. 여자가 죽은 페르세우스에게 다가가서 바닥에 고인 피에 손을 푹 담갔다. 그리고는 뺨 위에 거칠게 도식화한 비늘 무늬를 그렸다.

 

“이러면 같은 편인 걸 알아보시겠지요?”

 

스테노가 낮게 감탄사를 흘렸다. 이런 건 예상 못 했다는 반응이었지만, 불쾌하다는 투는 아니었다.

 

그러자 다른 여자들도 앞다투어서 그 일에 동참했다. 개중에 손이 빠른 여자들은 옆 사람의 머리를 풀어서 여러 갈래로 굵게 땋았다.

 

빗질할 시간도 없이 급하게 한 머리모양이다 보니 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당히 한 줌씩 쥐고 새끼줄처럼 굵게 땋아놓은 게 전부여서, 몇 시간씩 공들여서 만든 머리모양과 비교하면 거칠고 엉성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치고 투쟁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의 각오를 담아내기에는 그래서 더 어울렸다.

 

고르곤처럼 머리를 땋고, 뺨에 비늘 무늬를 그려 넣은 여자들이 결연한 태도로 무기를 고쳐 쥐었다.

 

여자들의 용기에 감동한 것과 별개로,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침음을 흘렸다.

 

셰본이 그런 내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이 속삭였다.

 

“냉정히 말해서, 병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말에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싸우러 온 고르곤들은 난전에서도 자기 몸 하나쯤은 지켜낼 수 있는 전사들이다. 하지만 이 마을 여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냥 보통 사람, 움츠러들어 있다가 이제 겨우 일어난 사람.

 

그것도 적군보다 압도적으로 수가 많다면 모를까, 다 모아 봤자 겨우 열두 명뿐인.

 

항복하면 죽이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받았으므로, 민간인은 뒤로 빠져있는 편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존엄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가 어디서 따로 구해다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고민 끝에 스테노에게 물었다.

 

“이 마을 남자들, 적당히 비실비실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말하면서도 이미 답을 알았다. 왜 안 되겠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디버프 마스터다.

 

 

 

 

그 뒤로 한동안은 업보를 정산하는 시간이었다. 마을에서 유명한 성추행범, 아내를 때리던 남편, 괴물이 사는 숲으로 쫓아내겠다고 겁주며 어린 딸을 학대하던 아버지가 차례로 두들겨 맞았다.

 

세리포스 주민들은 페르세우스와 그 부하들이 전멸한 뒤 각자 집으로 도망쳐서 문을 걸어 잠근 상태였다.

 

우리는 조를 나누어서 한 번에 한 집씩 돌았다. 그러면서 항복할 사람, 그와 별개로 두들겨 맞을 사람,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사람을 각각 분류하고 마을회관으로 보냈다.

 

그러는 동안에 고르곤처럼 머리를 땋은 여자들의 수는 스무 명으로 늘었고, 덕분에 고르곤 마법사들이 개입할 일은 차츰 줄어들었다. 뒤로 갈수록 더 늦기 전에 항복하라고 호통치거나 가벼운 디버프를 걸어주는 일만으로도 충분해져서였다.

 

먼동이 터올 무렵에 우리는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다. 고르곤과 함께 싸운 사람들은 마당의 오른편에, 항복했거나 무력으로 제압당한 인간들은 왼편에 모였다.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마을회관의 정문에서 다르마가 걸어 나왔다.

 

스테노가 물었다.

 

“메두사는?”

 

“죽을 끓여 먹인 뒤에 주문으로 잠재웠다. 부상이 심하지는 않았고, 사제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했으니 잘 먹고 푹 쉬면 금방 괜찮아질 거다.”

 

스테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당에 모인 인간들에게 쏘아붙였다.

 

“너희가 지금 살아있는 건 저기 저 인간 용사 덕분이다. 네놈들 때문에 메두사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면, 나는 오늘 이 마을을 불태우고 너희를 전부 죽였을 테니까.”

 

마당이 또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스테노가 하르페를 들어서 왼편에 무릎 꿇은 인간들을 가리켰다.

 

“그러니 마을을 비우고 꺼져라. 정오까지는 시간을 주겠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이 마을이나 어둠숲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놈들이 있다면, 그때는 전부 죽이겠다.”

 

하르페가 가리키는 방향이 또 바뀌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자못 흉흉했다.

 

“특히 끝까지 저항한 놈들! 너희는 어디에서든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자비를 베풀어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니까. 들었으면 꺼져!”

 

그러자 무릎 꿇은 인간들이 엉덩이라도 걷어차인 양 우르르 일어섰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귀중품이라도 챙기려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스테노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그때 다르마가 입을 열었다.

 

“잠시만, 덧붙일 말이 있으니 모두 멈춰라.”

 

고르곤처럼 오싹하게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권위를 담은 목소리였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던 인간들이 모두 멈추어 섰다.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전부 살인 미수범이거나, 최소한 동조자들이다. 미수에 그쳤으니 즉결처분에는 반대하겠지만, 그에 맞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르마가 육척봉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그자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니 선택해라. 황야로 쫓겨나서 자유롭게 죽을지, 아니면 속죄하는 삶을 살며 목숨만은 보전할지. 아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로서는 후자를 권하고 싶군. 방향을 알려줄 테니 타라자드 교화소로 가서, 자수하고 그에 맞는 형벌을 받아라. 그곳에서 땀 흘려 노동하고 음식과 누울 자리를 얻어라.”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르마 곁으로 모여들었다. 다르마가 특별히 언급했듯이 아이가 딸렸거나, 아니면 입성이 유독 초라한 인간들이었다.

 

후자의 경우 귀중품을 챙겨서 떠나봤자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 집을 구할 자신이 없고, 몸을 의탁할 친척 집도 없는 사람들이겠지.

 

다르마가 모인 사람들에게 교화소로 가는 길을 알려주면서 덧붙였다.

 

“후회하는 자의 사제들은 거짓을 알아본다. 함부로 죄를 숨기거나 축소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설명이 끝나고 사람들이 도로 흩어진 뒤에, 스테노가 조금 빈정거렸다.

 

“형벌이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명줄이군. 내버려 두면 올겨울을 나기 힘든 사람이 많았을 테니까. 사제님다운 자비인가?”

 

“저대로 풀어놓으면 잘해봐야 화전민이고, 태반은 노상강도나 산적으로 변한다. 네가 말했듯이 그중 상당수가 올겨울을 넘기지 못하겠지만, 다음 해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지역의 치안을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되겠지. 그러니 여기 남을 사람들에게도 내가 제안한 방식이 더 나을 거다.”

 

정확히 그 말대로였다. 1회차에서 나는 다르마보다 스테노를 먼저 영입했고, 스테노와 함께 교화소로 향하다가 다르마를 습격한 강도들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것도 스테노가 이끄는 고르곤 마법사들에게 끝까지 저항해서, 또 마주치면 죽이겠다고 공언한 인간.

 

스테노는 약속한 대로 그놈을 죽였고, 이게 어떤 맥락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모르는 다르마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네. 아니…. 이건 중독 페널티인가?’

 

나는 시야를 가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날려 보내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쨌거나 그건 이번 회차와는 무관한 사건이다.

 

스테노는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지만, 그래도 다르마의 설명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회관의 앞마당에는 이제 나와 셰본, 다르마, 고르곤 마법사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싸운 여자들만 남았다.

 

스테노가 하르페를 칼집에 넣어서 허리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마당의 오른편에 모여있는, 동족을 배신하고 고르곤을 편들기로 선택한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고르곤처럼 머리를 땋고, 뺨에 비늘 무늬를 그려 넣은 여자들.

 

스테노가 잠시 망설였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기보다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색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스테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고르곤 마법사들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이미 안다는 듯이.

 

스테노가 괜히 헛기침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우리와 함께 싸운 여자들은, 고르곤과 함께 사는 것도 괜찮다면 여기 남아라.”

 

여자들이 안도하며 서로 끌어안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떠나라고 말하면 그 순간부터 저 사람들의 안전은 보장하기 어려웠다. 패배에 승복한 것과 별개로, 세리포스 주민들에게는 저 사람들이 여전히 배신자로 보일 테니까.

 

그자들이 혹시라도 보복하지 않는지 우리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게 최선….

 

갑자기 현기증이 심해지는 바람에 나는 조금 비틀거렸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와 동시에 상황에 집중하느라 무시하던 경고 메시지들이 시야를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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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마법, 모험과 환상,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출간작 🐉드라고의 기사🐉, ⚡회색 탑의 마법사⚡, 외전집 🌨어느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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