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47. 잠자는 사자

48. 리버스




47. 잠자는 사자


어째서 유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일까. 어째서 유리는 미련하게, 기름통 진들레에게 기어이 불씨를 던져버리고 만 것일까. 

어젯밤의 소등은 내겐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다. 영혼이 납작 짓밟힌 기분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유리야, 혹시 그거 알아? 너와 나 사이에는 불변의 법칙이 하나 있어. 나는 너를 밀어내도 너는 나를 밀어내선 안 된다는 거야. 왜냐고? 산다는 건 원래 그런 거야.

철푸덕 -

“아얏!”

산책로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무릎을 뾰족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련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만치 앞선 위치에서 뛰고 있던 유리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있잖아. 네 본성은 참고 싶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란다. 벗은 몸은 허벅지를 찌르며 넘어갔어도, 내 아야 한마디엔 급제동을 가하고 마는 네 다리처럼 말이야.

“하아… 하아….”

유리가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쉰 다음, 고개를 움직여 돌아본다. 서둘러 아픈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문질렀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하려면 체력을 길러야 한다면서, 유리는 매일 새벽마다 조깅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공부광은 아침잠 많은 내가 좀비처럼 제 뒤를 쫓아다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잘만 쏘다녔다.

“다쳤어?”

유리가 멀리서 물어온다. 연기가 나게 무릎을 문질렀다.

“무릎 까졌어. 이리 와서 봐봐.”

유리가 마침내 허리를 편다. 한참은 갔던 산책로를 터덜터덜 걸어 되돌아온다. 쓰러져 있는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유리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어디. 안 보이는데?”

“요기 말이야. 요기. 까졌잖아.”

손가락으로 무릎을 콕 가리켰다. 무릎을 들여다보던 유리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간다.

“아냐. 자세히 봐. 자세히 봐야 보여. 피부 벗겨졌단 말이야.”

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벽 공기만큼이나 싸늘한 얼굴이다.

“멀쩡하잖아.”

“어디가 멀쩡해. 따가워 죽겠는데.”

“아 어디가 벗겨졌다는 거야.”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유리의 손이 내 종아리 뒤를 감싸 쥐었다. 순간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얼마만의 유리 손길이야. 짜릿해. 전율이 느껴져. 너무 그리웠어. 어쩜 좋아. 오롯이 그 손길을 즐기고 있다가, 아뿔싸,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부릅떴다. 

유리가 경멸어린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경멸받아도 마땅했다. 유리를 현혹하려 고군분투를 하는 이 와중에도 난,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유리의 잔머리마저도 예쁘다 느끼고 있으니까. 어우, 땀 섹시한 것 좀 봐. 나는 홀린 듯 손을 들어 유리의 이마로 가져갔다.

탁 -

유리가 내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내게서 시선을 떼며 말한다.

“홀딱 벗고 쇼를 하지 않나, 있지도 않은 상처를 보라질 않나.”

“….”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유리는 그렇게 말한 뒤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나를 한시도 내버려 둔 적이 없던 유리의 입에서 도리어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신선한 충격이 밀려왔다. 

유리가 내 다리를 타넘어 산책로를 되돌아간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유리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그렇게 칼같이 잘라내. 어떻게 저렇게 두부처럼 썰어내. 이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거였으면 뭐 하러 20년이나 붙들고 있었냐. 시간이 아깝지도 않았나 봐? 나는 주저앉은 채로 바락 소리 질렀다.

“넌 내가 귀찮냐?!”

유리는 대답 없이 산책로를 걸어갔다. 뿌연 안개 속으로 제 몸을 감출 때까지, 유리는 끝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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