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하지만 주 된 내용은 가상의 내용입니다. 








거사 날이 정해졌다. 사흘 전 독서회 사람이 다녀간 이후로 아이들은 며칠 내내 정재현 집에 지내면서 경성 시내 지도와 총독부 내부 지도를 보며 주변 지형을 꼼꼼히 살폈다. 폭탄을 직접적으로 던지는 건 독서회의 몫이라해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인 듯 했다.


정재현을 찾아왔던 독서회 사람이 몇 년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사람과 친분이 닿아 폭탄은 그 쪽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했는데, 애들은 의열단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번 거사를 어떻게서는 더 성공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어차피 총독부 건물을 한 번에 날릴 생각은 아니니까 거사로 인해 총독부 인사 한 두 명이라도 죽으면 그게 성공이지 않겠냐 말하던 애들 사이에서 박지성은 조용히 곁눈질로 지도를 살폈고 나는 그런 박지성을 말리지 못했다. 


이번 거사에도 당연하다는 듯 제외된 박지성이라 굳이 볼 필요 없다고 나재민이 몇 번이나 말렸음에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으니 나라고 박지성을 말릴 수 있었을리가 없지. 

 




"저잣거리에 나가겠다고?"


"아무래도 떠도는 말을 주워듣기 쉬우니까"

 




나갈 채비를 하는 정재현과 이동혁을 가만히 쳐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사 날이 정해졌다해도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고, 거사를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정보가 있어야한다. 


총독부 내부나 그 주변에 순사가 몇 명이나 있는 지, 중일전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나라 안팎의 분위기를 알아야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테니까


총독부 건물을 완전히 폭파시킬 계획이 아니기 때문인지 애들은 당연하다는 듯 다음 거사에 대해서도 얘기하곤 했다. 총독부 다음은 종로서를 쳐야할 지 아니면 친일파부터 척살해야 할 지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아이들 속에는 김도영도 포함이었다. 


친일파 얘기는 늘 김도영이 먼저 주도하곤 했다. 죗값은 꼭 돌려받아야 할 거라며 제 아버지에 대한 얘기도 서슴지 않았던 김도영이라 저잣거리에 나가겠다며 옷을 다 껴입은 정재현을 힐끔대다 자연스레 김도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재현 집에서 김도영의 본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김도영이 제 집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한 번쯤은 제 어머니를 만나러 갈 법도 한데 김도영은 정재현 집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나름의 다짐이라는 걸 알아서, 김도영이 그만큼 독립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걸 알아서 그 누구도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못했고

 




"어찌 그리 빤히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잘생겨서"


"...어?"

 




갑작스런 내 말에 김도영 얼굴 위로 당황함이 퍼져간다. 한껏 당황한 얼굴이 이내 붉게 변하고 귀끝까지 붉어지는 걸 본 김정우가 때를 놓치지 않고 김도영 옆에 딱 붙어 장난을 걸었다. 

 




"아주 활활 타는구만~"


"시끄러워"

 




제게 들러붙는 김정우가 귀찮다는 듯 손을 쭉 내미는 김도영때문에 박지성이 웃음을 터트렸고 김정우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정재현이 정장 재킷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그 뒤를 이동혁이 따라 나서는 걸 보다가 나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서는 나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내게 꽂혔고 그 시선들을 뒤로 한 채 의자에 대충 걸어뒀던 외투를 껴입자 옆에 있던 나재민이 대뜸 내 앞으로 제 팔을 쭉 내밀었다. 


내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팔을 내민 나재민이 앉은 채로 날 올려다봤고 지금 뭐하냐는 듯한 그의 시선에 현관 앞에 멈춰선 정재현과 이동혁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나재민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설마 따라 가실 생각입니까?"


"떠도는 말 중에 중일전쟁에 대한 얘기가 있다면, 그나마 내가 빨리 알아듣지 않을까 싶어서요"

 




뻗은 손을 거두지 않고 걱정어린 눈을 한 채로 서 있는 나재민을 응시하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싸고는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손등을 다독였다.


분명 신문을 통해 전해듣는 것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미래에서 온 내가 이들보단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조금이라도 더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저잣거리에는 정재현 말대로 온갖 상인들이 있고 게중에는 일본인들과 거래하는 이들도 있으니 일본 본토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떠도는 말들이 있을거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역사와 맞아떨어지는 지도 알아볼 수 있을테니까

 




"너무 걱정마요 재민씨. 어차피 잠깐 나갔다 오는 건데 뭐"

 




얼마 전 일본 순사들에게 나재민이 크게 다쳤던 그 이후로 아이들은 내 안전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쓰기 시작했다. 유난이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하는 아이들을 이기지 못해서 이젠 애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재민이 뭘 걱정하고 뭘 우려하는 지는 알겠지만 매일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이제 갑갑할 정도라 나가서 떠도는 얘기를 들어야 될 것 같다. 12월이 되면 확실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일본이 난징을 점령한다. 그리고 일본은 전선을 더 확대시키고 그만큼 조선인들도 징집해갈텐데


내 말에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나재민의 손등을 연달아 토닥토닥 하고 있는데, 아직 나가지 않고 현관 앞에 서 있던 이동혁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나재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혼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저와 정재현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진짜 말그대로 저잣거리만 잠깐 돌고 들어올거라는 말이 이어지고 나서야 나재민의 손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 걱정되면 같이 다녀오던가"

 




턱을 괸 채 책을 보고 있던 박지성이 나재민을 향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던 나재민이 이내 박지성과 함께 쓰고 있는 방으로 빠르게 걸어가더니 외투와 총 한 자루를 갖고 나온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야겠다며 재킷 안 쪽 주머니에 총을 넣고 단추를 잠근다. 나재민까지 나갈 채비를 끝내고서야 정재현이 문을 열었고 집에 남아 있을 세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진짜 오늘이 장이 열리는 날이었나보다. 전차가 다니는 큰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임에도 저잣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단정한 세라복을 입은 학생들도 보여서 나도 모르게 신기한 듯 쳐다보다 문득 저것도 일제 영향이라는 걸 알고 입 안이 씁쓸해졌다. 유관순 열사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저고리에 치마였는데. 그러고 보니 나도 학교 다닐 때 하복이 세라복이었던 게 기억나서 기분이 이상하다.


일제의 잔재가 참 오랫동안 남아있었구나 싶어 걸음이 뒤쳐졌는데 그런 날 발견한 이동혁이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붙어섰다. 

 




"무얼 그리 보세요"


"저 교복 말이에요, 저것도 일제가 들여온 거잖아요"


"그렇지요. 누나도 저 옷을 아십니까?"


"나도 중고등학교때 여름 교복이 저거였어요. 몇십 년이 흘러도 쉽게 없어지지 않았네요 일제 잔재가"

 




막상 학교 다닐 때는 별 생각없이 입고 다녔는데 이렇게 과거로 거슬러 와보니 결국 그것 역시도 역사의 산물이었음을 깨달았다. 말없이 교복입은 학생들만 응시하는 내 옆에서 이동혁도 학생들을 쳐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다 이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아왔다. 

 




"이러다 길이 엇갈리겠습니다."


"어 그러네, 언제 저만치 갔대. 빨리 가요 동혁씨"

 




손을 먼저 잡은 건 이동혁이었는데 막상 그를 붙잡고 이끈 건 나였다. 앞서 걸어가던 정재현과 나재민은 어떤 좌판 앞에 멈춰서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며 주변 상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좌판 주인이 원래 경성 사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온 모양인지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자 주변 상인들이 관심을 가지며 좌판 주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와 이동혁도 슬쩍 그 사이를 파고들어 나재민과 정재현 옆으로 다가섰는데, 

 




"내가 눈으로 똑똑히 봤다카이. 이-렇게 큰 배에 군인들이 우르르 올라탔다니깐은? 어데로 가냐고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깐은 상해로 간다 하더라고"


"그게 다 일본놈들은 아닐 거 아녀, 조선인들도 섞여 있던가?"


"내는 모르지. 그냥 군복을 입고 있응께 군인인갑다 한거지. 헌데 그 놈들이 항구에서 구걸하는 얼라들도 끌고 갈라는기라. 그래갖고 조선사람들이 모여서 어린 아들은 안된다고 말리고 난리도 아니였다니깐은"

 




좌판 주인의 말에 곳곳에서 군인들을 욕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린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다는 것에 혀를 내두르며 쌍욕까지 서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걸음 물러서자 정재현이 그런 날 따라 나왔다. 


저 주인 말대로면 지방에 있는 일본 군대들이 상해를 통해 중국 본토로 들어갔다는 소리인데. 중일전쟁에서 난징 대학살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행태를 보인 그 사건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일본 군대가 중국 본토로 꾸준히 들어가는 거겠지


좌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데 그런 내 옆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정재현이 어, 하는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면 사람들 사이에서 그제야 빠져나온 나재민과 이동혁이 우리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고 이내 주변을 살피던 나재민이 고갯짓을 하며 골목길 안 쪽을 가리킨다.


거리 한복판은 워낙 오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얘기를 편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게 구석진 골목길인 모양이다. 골목길로 먼저 들어선 나재민이 마지막으로 정재현이 들어오고 나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이었다. 

 




"종로서에서 부른 군대도 중국으로 빠진다는 소리가 있나봐"


"시기가 맞아 떨어지면 다행인데..."


"일단 떠도는 얘기들을 그 쪽도 알고 있는지 서신을 보내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정재현의 말에 이동혁과 나재민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조금 전의 나재민처럼 주변을 살폈다. 한껏 예민해진 날 눈치챘는 지 정재현이 말없이 내 손을 잡아왔고 손등을 감싸는 온기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목길을 제일 먼저 빠져나간 이동혁 뒤를 정재현과 내가 따라붙었고 마지막으로 나온 나재민은 북적이는 저잣거리를 한 번 쓱 훑어보고는 걸음을 뗐다.














목적은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얘기들을 주워듣기 위함이었고,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곧바로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애들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아까 갔던 방향과는 반대 방향 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뭐...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건 언제까지 잡고 있게?"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리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네가 이해해주면 안될까"


"음..."


"혹 싫은 것이야? 싫으면..."


"사람 지인짜- 많다 그치, 손만 붙잡고 갈게 아니라 줄이 있으면 이렇게 이렇게 묶어야 될 수준인데"

 




잡은 손을 휙휙 흔들며 하는 말에 웃음을 터트린 정재현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그를 따라 킥킥 웃었다. 장이 서는 규모가 꽤 컸는지 사람이 정말 많긴 했다. 


경성 거리 자체가 넓어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여기는 일본인들이 자주 가는 메인 거리는 아니라 이렇게 북적이는 건 처음본다. 그 덕에 이리저리 치이기도 해서 제일 끝에서 걷던 나는 결국 이들에 의해 자리가 바뀌고 말았다.


앞서 걷던 나재민이 잠깐 멈춰선 사이 정재현이 나를 저와 이동혁 사이로 끌어당겼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위치때문에 결국 킥킥 웃음이 터졌다. 잘난 보디가드가 셋 씩이나 생겨버렸네


세 사람 사이에 끼인 채로 주변을 구경했다. 혼자 살다보니 시장을 갈 일 보다는 마트와 편의점이 훨씬 더 편했기때문에 이런 모습들 자체가 꽤 오랜만에 접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시대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상인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북적임 자체는 마냥 낯설지만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간다. 지금 이 상황만 보면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로운 것 같지만, 종종 보이는 순사들의 모습은 이 평화도 결국 우리가 원하는 평화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한다. 


아무렇지 않게 허리에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순사들이 조선인들 사이를 태연하게 걸어다니는 모습이 너무 이질적인데, 이미 여기 사람들은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졌다는 게 입안을 자꾸 씁쓸하게 만들어서, 

 




"...어?"

 




억지로 순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꾸 보고 있다간 거하게 욕만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이라 억지로 고개를 돌리는데 저 앞에, 문을 닫은 가게 앞에 모여있는 여자애들이 눈에 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그리 특별할 건 아닌데도 이상하게 시선이 간다. 딱 봐도 십대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들이라 그런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을 살피는데 돌연 걸음을 멈춘 나때문에 세 사람이 어찌 그러냐 물어왔지만 뭐라 답하기가 애매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이상하게 자꾸 저 아이들에게 눈이 간다. 


장이 선 거리에서 뭔가를 사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 이상하게 신경쓰인다. 하필 여자아이들만 모여있는 것도 그렇고, 하필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는 가게 앞에 서 있는 것도 그렇고.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여자아이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살펴봤다. 네 명의 아이들이 각자 손에 보따리 같은 걸 들고 있는 걸 확인한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가는 게 있어서

 




"여주야?"


"아가씨"


"누나!"

 




앞뒤 잴 것도 없이 무작정 뛰어갔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설마설마 하면서도 만약 그러면 어떡하나 싶어서 단숨에 아이들 앞까지 뛰어가선 게 중에서 그나마 키가 제일 큰 여자 아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자 경계심과 의아함을 품은 아이가 날 쳐다본다. 

 




"저기 얘야, 혹시 여기 왜 있는 지 알려줄 수 있어? 어른도 없이 아이들만 있어서 걱정이 돼서 말이야"

 




갑자기 뛰어와 저들을 붙잡고 대뜸 질문부터 하는 내가 충분히 이상해보일텐데도 아이들은 경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날 바라봤고, 키 큰 아이가 제 손에 들고 있는 보따리를 내 눈 앞에 보여준다. 

 




"비단 공장에 돈 벌러 가요"


"비단 공장...? 거기가 어디있는 곳인데?"


"중국인가? 배타고 간댔는데요, 거기 가면 고향에 돈도 부쳐주고 돈 많이 번다고 했어요"


"누가? 누가 그랬어?"


"어, 우리 동네 제일 가는 부잣집 아저씨가 얘기해줬어요. 자기처럼 부자되려면 저기 저 배타고 갔다오면 된다고"

 




아... 누가 둔기로 머리를 내려친 듯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텅 비어버렸다. 지금 중국은 일본과 전쟁중이다. 상해를 일본이 점령했다고 신문에 몇 번이나 대서특필 됐을텐데, 그런데도 돈을 준답시고 어린 아이들을 중국에 데려간다는 건....


어떡하지. 이 애들을 어떡하지. 어떻게든 중국으로 가지 않도록 말려야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내 뒤에 나란히 서 있던 세 사람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날 내려다보고 있다. 


세 사람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을까 아니면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하고 있으려나. 뭐가 됐든 아이들 앞에서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밀려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꾹 눌러 삼키며 다시 아이들을 마주했다. 

 




"꼭 가야 될까? 지금 중국은 너희끼리 가기엔 위험하거든, 언니가 다른 나라에서 와서 알아"


"왜 위험한데요? 저랑 애들은 소학교도 다니다 말아서 신문을 잘 못 읽어요"

 




미치겠다. 어떡하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순박한 네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내 쪽으로 가까이 붙어선 정재현이 허릴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인다. 

 




"무엇 때문에 그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느라 쪼그리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정확히는 몰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감지한 세 사람을 보다 아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빠르게 설명했다. 

 




"공장은 거짓말일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조선아이들 돈으로 꿰어서 끌고 가는거야 분명. 저렇게 보내면 안 돼"

 




소학교를 다니다 말아서 글을 잘 모른다고 해도 애들도 눈치가 있으니 최대한 돌려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나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돈, 돈을 주면 되는데. 저 어린 아이들이 돈때문에 중국까지 가려고 짐을 싸들고 나왔으니 애들이 필요한 돈을 주면 되는데 막상 갖고 나온 게 얼마 없다.


원래 우리 목적은 저잣거리를 한 바퀴 돌며 분위기를 살피러 온 거였으니 애초에 돈을 많이 갖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넉넉히 갖고 오는건데


세 사람을 향해 있던 몸을 다시 아이들 쪽으로 돌려 키 큰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에 달린 허름한 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에 꽂힌 핀을 본 순간 내가 머리에 꽂고 있던 핀이 생각났다.


단숨에 손을 뻗어 머리를 고정시켰던 핀을 풀자 묶여있던 머리가 옆으로 흘러내렸고, 

 




"양장점에서 값 나가는 물건들 사들이기도 한다며, 이거, 이거 팔면..."

 




차마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김도영이 직접 내 손에 쥐어준건데. 김도영이 사줬던 핀은 순사 놈 발에 밟혀 산산조각났고, 그래서 김도영이 이걸 다시 내 손에 쥐어준건데. 도영이가, 도영이가 준건데...

 




"여주야"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정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고갯짓이 뭘 의미하는 지는 알겠다. 그러지말라고, 팔지 말라는 거겠지.


하지만 우리 눈 앞에 있는 애들이 넷이다. 저 네 명의 아이들 손에 어느 정도의 돈을 쥐어주지 않으면 저 아이들은 또 다시 그 말도 안 되는 공장 얘기에 넘어갈지도 모른다. 조선도 아니고 먼 타국까지 저 어린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얘들아, 언니가 잠깐만 저기 저 앞에 양장점 좀 다녀올게, 그러니까 그 때까지 여기 꼼짝말고 있어야 돼 알았지? 금방 다녀올테니까 제발, 제발 여기 있어. 누가 와도 바로 따라가지말고 언니가 올거라고 얘기하고 응?"

 




아이들 눈에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생판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저들을 붙잡고 부탁을 하고 있으니 분명 이상하다고 여길텐데도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싫다는 말 한 마디 하지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애들을 보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뜀박질을 했다. 


오른손엔 김도영이 준 핀을 쥐고 이를 악물고 뛰었다. 뒤에서 세 사람이 날 따라 오는 지 아닌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냥 미친듯이 뛰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저 아이들을 데려간다는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헉헉대며 양장점 앞에 도착하자마자 벌컥 문을 열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선 나때문에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던 사장이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고 그 와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그런 사장 앞으로 성큼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이 핀, 이것, 값 좀, 후... 쳐주세요, 한 시가 급합, 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던 사장이 내가 건넨 핀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알겠다며 작은 바구니를 가져와 핀을 거기에 담았다.


완전히 새거도 아니고 중고 물건이니 원래의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안 한다. 그냥 얼마가 됐든 빨리 돈으로 돌려줬으면 하는 마음과 초조함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계속 깨물면서 사장만 빤히 쳐다보는데 그런 내 옆으로 나재민이 다가섰다. 

 




"아가씨, 핀을 저대로 팔면..."


"몇 시에요? 어? 애들 아무 일 없겠죠? 아직 안 왔겠지?"

 




조급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날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나재민의 손이 내 이마에 닿았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땀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제 소매 끝으로 조심조심 닦아주는 나재민덕분에 급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재민 옆으로 이동혁이 다가서며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는데 사장이 내 앞으로 돈을 건넸다. 손을 탄 것이라 값을 후하게 쳐줄 수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는 사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그 때

 




"재현이?"

 




낯선 목소리가 정재현을 불렀다. 나와 나재민, 이동혁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는데 정재현이 아는 사람이었는지 놀란 얼굴을 한 채로 부른 사람을 보고 있다.


가게 안 쪽에서 걸어나온 중년 여성은 양장을 차려입은 채 정재현을 보고 있었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정재현이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든다. 정재현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가족인 거 같진 않은데.


누구인지 물어보기도 애매한 분위기라 우리는 정재현과 중년 여성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우리쪽으로 시선을 돌린 정재현이 낮은 목소리로 여인에 대해 소개했다. 

 




"도영이 어머님이시다"


"...뭐?"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떡 벌린 채 중년 여성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저 분이 김도영 어머니시라고? 김도영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운 것도 모자라 그의 손에 자금이 될 만한 물건들까지 쥐어준 어머니가 눈 앞에 있는 저 분이라니...


정재현 말을 듣고 보니 김도영과 눈매가 참 많이 닮았다. 분위기마저도 닮은 것 같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나재민과 이동혁도 그제야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여주, 라고 합니다."


"아가씨가 도영이에게 서신을 보냈던 그 아가씨인가요"


"네? 아, 어... 맞습니다."

 




어느새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여인의 물음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나재민이랑 같이 김도영 집에 가서 편지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말하시는 것 같다.


분명 그 편지는 김도영네 하인이 받아갔는데 그의 어머니가 편지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시는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여인을 빤히 쳐다봤는데, 이미 여인의 시선은 내가 양장점 사장에게 건넨 머리핀에 꽂혀있었다. 


김도영이 들고 온 가방 안에 있던 패물들 중 하나였으니 그의 어머니는 단번에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이 맞았는지 핀에 꽂혀있던 시선이 곧 나를 향하더니 싱긋,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우리 도영이가 고운 아가씨에게 이걸 주었던 모양입니다."


"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김도영이 나한테 준 걸 내가 팔아버렸으니 어머니 입장에선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싶어서, 어쩌면 저 핀의 원 주인은 김도영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스치면서 당혹스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말끝을 흐리는 날 힐끔거린 정재현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여인의 시야에서 날 완전히 차단시키듯 막아섰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울려퍼진 건 정재현의 낮은 목소리 뿐이었다. 

 




"도영이는 잘 있습니다. 별 일 없이..."


"...다행이구나. 재현이 너도 무탈한 듯 하니"

 




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나는 그 침묵을 더 지켜볼 수 없었다. 아까 그 아이들에게 빨리 돌아가야하니까. 언제 일본놈들이 와서 아이들을 데려갈 지 모르는 상황이라 손에 쥔 돈을 조금 더 꽉 쥐고는 여인, 그러니까 김도영의 어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부디 건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여인이 바란 건 이런 인사가 아니라, 김도영의 안전과 그의 안부에 대한 얘기들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풀어놓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나름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몸을 틀자 이동혁과 나재민도 여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곤 날 따라 양장점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서 있던 정재현마저 양장점 문을 열고 나오는 걸 확인하고 아까 뛰어왔던 것처럼 다시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는데, 닫힌 문이 열리면서 도련님! 하며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김도영의 어머니 옆에 서 있던 하인이 웬 봉투를 손에 쥐고 정재현에게로 빠르게 걸어갔고 정재현 손 위로 그 봉투를 쥐어준다. 얼떨결에 봉투를 손에 쥔 정재현이 당황해 눈만 깜빡이는데

 




"마님께서 주신 겁니다. 꼭 보탬이 되길 바란다 하시었고, 부디 무탈하라고 그리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정재현의 답은 들을 생각도 없는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여인의 말을 전달하고는 망설임 없이 돌아선 하인의 모습에서 문득 김도영이 보였다. 도영이는 어머니를 참 많이 닮았구나 싶어서, 

 




"갑시다, 이러다 늦으면 어찌합니까"

 




멍 때리고 있던 나와 정재현을 재촉한 건 이동혁이었다. 나재민은 이미 저 만치 앞서 가고 있었고 이동혁의 재촉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직 그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야 할텐데,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어야 할텐데


손에 돈을 꽉 쥐고 사람들을 피해가며 저잣거리를 가로 질러 아까 아이들이 있던 곳에 도착하니 정말 다행이게도 아이들은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줄곧 서 있었던 탓에 다리가 아픈지 두 명은 아예 바닥에 철퍼덕 주저 앉아 있었고 둘은 쭈그리고 앉아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밀려와 순간 코 끝이 찡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고르며 아이들 앞에 다리를 접고 쪼그려 앉았다. 저들 앞으로 그림자가 생기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아이들이 놀란 눈을 깜빡이며 날 쳐다본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언니가 달리기가 늦어서"


"...우리 오라버니는 기다리라고 해놓고 안 왔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날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아이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고 오롯이 받아들이는 아이를 쳐다보다 작은 두 손 위로 돈을 내려놓자 아이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날 올려다본다. 

 




"이 돈 갖고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 중국은 위험하니까 혹시 누가 중국에 있는 공장에 돈벌러 가자고 해도 절대 따라가지 말고"


"아씨는 누구신데 돈을 줘요?"


"아..."


"우리 오라버니가 도움을 받으면 받은 이를 꼭 기억해야 된다 했어요"


"...그냥 책으로 봐야만 했던 사람. 여튼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렴, 누가 오기전에 얼른 가야 해"

 




내 말에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나재민과 이동혁마저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고 보따리 안에 돈을 꾹꾹 눌러담았다.


정재현이 제 손에 쥐고 있던 봉투 안에서 돈을 더 꺼내들고 키가 제일 큰 아이 보따리 안에 돈을 쑥 집어넣자 아이가 놀란 눈으로 정재현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나와 정재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아이들도 키 큰 아이를 따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이럴 시간에 빨리 전차를 타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잊어도 된다고 은혜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아이의 어깨를 슬쩍 밀자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옆에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간다. 


전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사람들로 인해 아이들의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경성역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그래서 저들의 고향까지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도착하기를,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도 빌고 또 빌었다. 

 




"우리도 갑시다. 혹 저 아이들을 데리러 온 놈과 마주치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무사히 잘 도착하겠죠?"


"아가씨가 그리 빌었을테니 잘 도착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리 될 겁니다. 이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나재민이 내 손목을 가리켰다. 내 왼쪽 손목엔 내가 애들에게 만들어준 팔찌와 똑같은 소원팔찌가 걸려있다. 나만 안 할 수는 없다며 다 같이 똑같은 걸 해야 한다는 김정우 말에 애들이 보는 앞에서 내 것도 만들어서 손목에 걸었었는데.


팔찌를 쳐다보다 내 손목을 가리키고 있던 나재민 손 위로 내 손을 척하니 겹쳤다. 그러자 나재민의 시선이 내게 닿았고, 나는 별 말 없이 몸을 틀어 우리가 처음 왔던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까 정재현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무겁지는 않았는데 돌아가는 길은 이토록 마음이 무겁고 걸음마저 무겁다.


우리가 아이들 손에 쥐어준 돈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서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서 자꾸만 발이 멈추려는 걸 애써 버텨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이니 뒤돌아보지 말자 싶다가도 자꾸만 아이의 눈빛이 떠올라서 절로 한숨이 터져나온다. 마음이 무거운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정재현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누구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고 이내 그의 집이 눈 앞에 보이고 나서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동시에 긴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 정재현이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그리고 거센 바람에 실려 온 먼지가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아, 소리를 내며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누나?"


"눈에 뭐가 들어간 거 같은데"

 




가까이 서 있던 게 이동혁이라 내 눈가에 그의 손끝이 닿았다. 감고 있는 눈을 천천히 뜨게끔 손을 움직인 이동혁이 잠깐만요, 하더니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까끌거리는 느낌이 남아서 본능적으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이동혁이 연이어 후, 후 입김을 불었고 그제야 괜찮아진 느낌에 그의 손등을 톡톡 다독였다.


괜찮냐고 물어오는 정재현과 나재민에게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자 정재현이 닫혀있던 문을 열었고 테이블에 모여 앉아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곧장 우리를 향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김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잘 다녀왔어?"

 




싱긋 웃는 얼굴을 보는데 진짜 뭐 그게 신호라도 된 것 마냥 갑자기 눈 앞이 뿌옇게 변했다. 그리고 여주야? 하고 날 불러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그대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우뚝 선 채로 우는 나때문에 놀란 김도영이 서둘러 내 앞까지 다가왔고, 

 




"밖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어찌 그래, 응? 여주야"

 




조금 전에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바람때문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거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라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그냥 자꾸 눈물이 나서 뭐라 말 한 마디를 꺼낼 수가 없었다.


김도영의 어머니를 마주친 것도, 김도영이 준 핀을 내 마음대로 팔아버린 것도 그냥 다 서러워서 내 앞에 서 있는 김도영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엉엉 울었다. 

 




"끅, 도, 영아, 흐... 미안, 해... 미안해, 도영, 아..."

 




제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내는 여주를 감싸 안은 도영은 말없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흘러내린 긴 머리칼이 손 끝을 스쳐감에 알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단정히 머리를 묶고 있던 핀이 사라졌다는 것을, 제가 직접 손에 쥐어준 것이 보이지 않다는 걸.


해서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잣거리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여주에게 준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연유가 있었겠구나. 


제 어머니가 아끼던 패물 중 하나였다. 제게 소중한 이가 생긴다면 건네주라며 장난스레 웃어보이던 어머니를 떠올린 도영이 그 핀을 꽂고 해맑게 웃던 여주를 떠올렸다. 사진에 남기겠다며 제가 선물로 준 것을 꽂고 사진사 앞에서 웃던 그 얼굴을.


제게는 귀하고 귀하기만 한 봄인데, 그 봄의 눈물이 마를 새가 없다. 이토록 험난한 난세에 떨어지는 바람에 웃는 얼굴보다 우는 얼굴을 더 많이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웃게만 해주고 싶은데 그조차도 역력지 않음을 알아서.

 




"여주야 나는 괜찮아, 미안해 하지마라"

 




괜찮다는 말에도 품에 안긴 여주는 고개만 저을 뿐이라 도영은 한숨을 삼키며 여주를 조금 더 품 안에 끌어당겼다. 그래 울고 싶은만큼 울고 털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허전한 여주의 뒷머리를 제 손으로 느리게 쓸어내린 도영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저 머리핀 하나일 뿐인데, 두 번이나 그 핀은 형체를 잃었고 그게 마음에 걸린다. 꼭 저들과 여주의 미래를 뜻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입안이 쓰다. 


우리가 헤어질 것임을 모르지 않는데, 이미 우리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을 이리 확인시켜줘야 하나. 존재하는 지도 모를 신을 탓하며 도영은 여주를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는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일부러 날을 맞췄던 건 아닌데, 18화를 쓰다보니 점점 삼일절이 다가왔고, 그래서 삼일절에는 밤피꽃을 꼭 올려보자 마음 먹었고...그러다보니 만오천자가 넘어버렸고...

역사는 후손들이 기억하지 않으면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근현대사를 배우는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알아야 하니까. 이 글은 제 손에서 제 머릿속에서 그저 상상으로 만들어진 글일 뿐이지만, 실재하는 역사가 있기때문에 저도 상상하며 이 글을 쓸 수 있는 거라서 오늘은 그 역사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듭니다. 날이 날이다보니 더 그런거 같고... 

먼저 가신 분들이 남겨주신 땅에서 오늘도 행복하고 편안한 하루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눈덩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