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해상 무역이 꽃피는 국가 게덴은 마지막 도시국가까지 합쳐 거대한 무역 국가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건 바깥사람들이나 아는 사실이었다.

알리그레 게미. 게덴의 팽창에 맞서 마지막까지 버텼던 도시국가의 왕이라고 전해졌던 여자를 볼 수 없게 되었으니.

게덴, 게덴. 정말 대단한 서 대륙의 지배자다. 알리그레는 구속된 손목을 흔들거렸다. 다신 칼을 쥐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잘린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반지하 감옥의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마른 알리그레의 몸을 우울하게 비췄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진 지 오래일 뿐이다. 넓은 서 대륙에 정착했던 게일 족 특유의 짙은 녹색 머리카락이 등 근처에서 푸석푸석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더러운 오물이 묻어 이제는 암녹색처럼 보였다. 황 녹색 눈동자가 절망에 젖어 깊은 먹물처럼 뜨겁게 가라앉았다.

"일랑."

알리그레는 긁는 듯한 목소리로 일랑을 불렀다. 차갑고 두꺼운 벽돌들이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고 니아는 천혜의 요새였다. 북쪽엔 몬스터가 판을 치는 가이센 숲이 있고 라일어스와 고 니아를 가로지르는 리알프 산맥이 라일어스와 마일즈, 지라드를 동시에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이센 숲은 위협적이었지만 동시에 자원이 풍부한 장소였고 오랜 대치에도 견딜 수 있었다. 지라드에 동맹 제의를 보냈고 라일어스의 팽창을 걱정하던 지라드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일랑. 라이어스의 간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인가."

알리그레는 조용히 속삭였다. 일랑. 가장 신뢰하는 여자였다. 가이센 숲 외곽에서 땅에 묻혀있는 마법석을 캐내듯 일랑과 마주했다. 아직 그가 젊은 왕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알리그레보다 맑은 연두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아이는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죽은 모부를 돌보며 근처 버섯과 열매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빈민가에 사는 인간 중 빈민가에서조차 쫓겨나 가이센 숲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가이센 숲을 토벌하기 위해 들어간 날, 그런 가정을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는 작고 어린 몸으로 여러 차례 몬스터와 마주하고 살아남는 법을 익혀 넝마가 된 옷에 식칼을 묶어 허리에 매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모부를 묻고 숲을 빠져나와 아이를 양딸로 삼아 무술을 가르쳤다.

누구보다 굳세라고 일랑. 이름에 칼날을 담았다. 정성껏 키웠다. 친딸처럼, 친여동생처럼 10살 차이 나는 그 어린 것을 키워내었다. 얼굴에 주름이 늘고 일랑을 후계자로 지목한 뒤에도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랜 항전이 힘들었던 것일까. 일랑은 언제나 전쟁의 선두에 섰고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도 짙어져만 갔다. 그때부터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앞, 혹은 뒤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일랑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어느 날, 리알프 산맥에서 큰 산불이 일어난 날, 고 니아의 방어선은 완전히 뚫리고 말았다.

일랑을 찾아 전장을 뛰어다녔다. 서늘한 칼날이 들끓는 피로 뜨거워질 만큼 적을 베어 넘기며 일랑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일랑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라일어스의 지배자, 에페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일랑은 이미 적장의 손에 붙잡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일랑……."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둘은 벽을 사이에 두고 감옥에 갇혔지만, 그날 이후로 일랑이 알리그레의 부름에 답하는 경우는 없었다. 간수들은 일랑의 배신에 대해 속삭였다. 일랑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며 자신의 모든 병사를 베어 넘겼다고. 오로지 알리그레와 일랑만이 감옥에 들어갔다. 창살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열기와 한기를 각 한 번씩 번갈아 전해주는 동안, 옆 감방은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를 반복했다.

"어째서 나만을 살려둔 게냐."

일랑의 감방이 열린 채로 다시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그레는 알고 있었다. 또다시 열기와 한기가 감옥 안을 뜨겁고 차갑게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리그레는 다만 절규하듯 일랑을 찾아 헤맸다.

"너까지 없다면 어찌 나 혼자 살게 한 것이냐…."

라일어스의 겨울은 유독 추웠다. 알리그레의 입김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창작 여성서사


메이 세계관 중 게덴 지도가 안 보이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칸막이. 앞 뒤는 볼 수 있지만 옆은 보지 못한다. 단절, 고독

에페라는 이름이 둘이나 나왔네요. 에페는 게덴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게덴이 에펠레아 신과 헤일로안 신을 섬기거든요.


아리드알의 숲, 히리루스, 마력의 흐름과 같은 세계관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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