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장을 아무렇게나 시작해 본다. 보통 이런 걸 견디지 못한다. 첫 문장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편인데, 오늘의 나는 용인해 주기로 한다. 오늘은 평소와 많이 다른 날이다. 5시 45분에 깨 버렸는데 다시 잠들지 못해서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그런데 어제 하루 종일 핸드폰을 봤더니 지겨워서 이내 몸을 일으켜 양치를 하고 세수는 안 하고 미세먼지를 확인했더니 ‘좋음'이라 창문을 활짝 열고 오랜만에 하타 요가를 30분 했다. 사실 일어날 수 있었던 건 어제 산 새 원두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우유가 떨어져서 평소와 달리 얼음을 먼저 넣고 블랙 그대로 커피를 마신다. 과연? 기대한 맛은 아니지만 아는 맛, 맛있는 맛이다. 


정신건강의학과 방문 네 번째였던 어제, 진료를 이만 마치기로 했다. 약 처방보다는 장기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 상담이 더 도움되겠다는 결론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의사 선생님보다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었다. 지난번 처방받은 ‘프로작'으로 알려진 항우울제를 일주일 내내 미루며 먹지 않았다. 아침 약이라 속이 쓰릴까 봐 먹기 싫었던 것이 표면적 이유이고, 더 진짜인 이유는 여기서 더 붕붕 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잠이 줄고 식욕이 줄고 생각이 이리저리 튀는 과각성 상태(나의 자체 진단이다.)에서 ‘활력을 준다'는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 나의 얘기를 듣고 무기력 상태로 진단했던 선생님은 이미 약에 거부감이 깃든 나의 자의적 해석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소개해 준 상담 센터에서 부모와의 ‘다이내믹'과 나를 힘들게 하는 본질적인 문제 사이를 이야기해 보기로 마무리되었다. ‘다이내믹'이란 표현으로 요약하며 함축된 표정으로 말을 줄이는 선생님의 본론을 더 듣고 싶었지만… 알겠다고 했다.


진료를 받으면서, 또 근래에 알게 된 사람들에게 나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이라고 자주 구분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작년에, 생애 주기 별로 무엇에 빠져있었는지 그래프에 적어보는 활동으로 처음 인지했는데, 나는 그 수평선 위에 뚜렷하게 수직선을 그어 내릴 수 있었다. 1기 OO, 2기 OO, …. 지금은 5기 OO 쯤 되는 것 같아요. 그게 2021년 5기 OO, 1기 덕복의 대사였고 그 사이 또 몇 가지 커다란 업데이트가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자아를 바꿔 끼우며 살아가고 살아남았다. 내성적인 관종 오타쿠였다가, 입에 칼 물고 설치는 ‘기 쎈 애'였다가, 재기 발랄한 90년대생 신인류였다가, 성장 욕구로 눈알을 번뜩이는 90년대생 ‘요즘 것'이었다가… 요즘의 나는 매일 다른 나를 정의할 하나의 컨셉을 못 찾고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남에게 보이는 기준으로 꾸린 컨셉으로 무의식 중에 연기하는 삶을 그만 살기로 한 것이다. 


‘연기하는 나’를 자각한 후로 종종 그것에 관해 생각했다. 물론 사회적 동물로서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자아를 연출하며 산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이라는 저명한 책이 있다.) 다만 나는 “인간은 원래 그렇다보다는 “나는 왜 그럴까가 궁금한 쪽이란 얘기다. 이유를 파고들면 뿌리에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1기 OO, ‘내성적인 관종 오타쿠를 출발점으로 둔다면 그것이 사랑받지 못하는 유형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 ‘내성적이며…’로 시작하는 생활기록부는 시험지에 그어진 빨간 빗금처럼 틀린 기분이 들게 했다 - 이전의 오답을 보완해서 새 학년엔, 새 지역에선, 새 회사에선 더 매력적인 컨셉을 꾸린 것이다. 왜 사랑받고 싶은지 고찰하다가, 예수도 안티가 칠천만이라지만 그쪽은 오조오억에게 사랑받잖아, 안티 칠천만에 팬 오조오억 vs 나를 싫어하는 3명에 좋아하는 5명 사이 밸런스를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후자겠지, 그렇게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으로는 끝도 없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세 장쯤에서 뭔 글을 쓰고 있는 건지 회의감이 들어 새 창을 열어야겠지, 그럼 마감을 못할 테고… 그러니까 좀 전에 이 글을 시작했을 때 떠오른 생각에 초점을 맞춰 보자.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괜찮은 연기자라고 생각했지만 서서히 소진되어 ‘본체가 자주 튀어나오고 있었다. 다만 이제 내 얼굴을 떠올리면 아이라인과 눈썹을 그리지 않은 희미한 인상이 기본값인 것처럼 나의 어떤 특징을 - 가령 앞서 말한 내성적인 관종 오타쿠 적인 면모를 - 그냥 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성숙해진 덕분도 있지만 ‘사랑받는 사람 유형이 다양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도 후자일지도. MBTI의 부흥과 함께 “그런 사람도 있다라는 전반적 이해와 더불어, 자신의 MBTI를 조금이라도 매력적으로 인식시키고픈 16개 집단의 진심 가득한 협동으로 모든 유형이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애예요가 된 덕분에. 나는 점차, 집에서는 드라마를 보며 매회 눈물을 좔좔 쏟는다는 점, 상대가 힘들어하면 감정 이입해서 함께 힘들다는 점, 그 사람 그런 말을 왜 했지? 하며 잠을 설친다는 점을 굳이 설명하지 않게 됐다. (그래… 한동안 INFP 자아가 맘에 들었음을 인정한다.) 그 점도 여전히 나의 일부지만, 더 이상 너 왜 이렇게 영혼이 없어, 감정이 없어, 너 싸패야? (이건 졸라 말넘심) 같은 반응을 피하기 위해 나의 INFP스러움을 어필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사랑받는 사람 코스프레를 그만두려면 그냥 나를 나 자체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에 앞서 그런 사랑이 있다는 믿음도. 절망편을 먼저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경험이 별로 없다. 나부터도 기본값의 나는 늘 마음에 들지 않아 덧칠을 했으니까. 희망편은 필요를 인지했다는 것, 경험을 찾아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으면 나도 사랑을 나눠줘야 하는데 나는 좀 짝사랑받고 짝사랑하고 싶어 하는 기괴한 경향이 있다…만 이것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리라 믿어보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믿음이 첫 번째로 나오니까 일단 믿습니다.


쓰다 보니 작년 한 계절에 거쳐 쓰고 고쳐 쓴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적인 글들을 다시 한번 퇴고한 내용이 됐다. 이전 버전의 나라면 아… 한 얘길 또 하고 앉았네 하며 글을 날려버렸을지 모르겠다. 오늘 자 최신 버전의 나는 이 글을 친구들에게 읽히고 조금 더 후련해할 것이다. 지금은 아침 10시 35분으로 평소의 나라면 알람이 울린 뒤에도 한 시간 넘게 핸드폰이나 만진 죄책감으로 무거운 몸을 일으킬 시간이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글을 쓴 건 또 처음이다. 글을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도… 


*노래 제목임! 이예린 - 사람은 이상하고 사랑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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