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 씨, 좋은 저녁이야."


"아, 이라 님! 일은 다 끝나셨어요? 식사는요?"


"일은 끝났고, 식사는…식사라기보단 간단하게. 당신은 어쩐지 바빠 보이네. 이 저녁에 어디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앗, 많이 티 나나요? 오늘도 델 님을 만나기로 해서요."


"오늘도…네. 그렇지, 요즘 자주 그 사람을 보러 가는 것 같았으니. …에스텔 씨. 오늘은, 나와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어쩐지 살짝 수심이 깃든 것만 같은 이라의 눈빛에 에스텔은 가슴이 철렁했다. 틈만 나면 약았다고 하는 주제에, 본인이 제일 약았어. 분명 그의 이런 모습에 자신이 약해진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으니 이러는 것이겠지. 하지만 닷새 전 그 바닷가에 다녀오며 약속까지 미리 해 두었으니 이렇게 비에 젖은 강아지 눈으로 바라봐도 곤란할 따름이었다. 자신에게 톡 떨어지듯 안긴 제 연인을 마주안은 채, 에스텔은 머리를 굴렸다. 약속은 지키면서 이 사람과 같이 있으려면…그렇다면…!


"그래도 미리 약속한 걸 깰 순 없으니…괜찮으시다면 저랑 같이 가실래요? 바다도 멋지고, 밤하늘도 예쁘게 보이는 곳이고, 델 님…정말정말 좋은 분이신데…."


 마침 보름달도 밝게 빛나고 있겠다, 에스텔은 동행을 결심한 이라의 손을 잡고 아쿠아리아 근처 바닷가로 뻗어 있는 문 로드를 건넜다.


***


"아, 오늘은 미리 안 나오셨네. 그럼…."


 달빛을 받아 은은한 흰빛을 뽐내는 조개껍데기를 하나 주운 에스텔은 조심스럽게 그걸 물에 빠뜨렸다.


"이러면 곧 오실 거예요. 잠깐 별이나 보면서 기다릴까요? 오늘도 밤하늘이 참 예쁘네요."


 그렇게 에스텔이 별에 얽힌 신화들과 델에게서 들은 별 이야기를 이라에게 한창 조잘거릴 때 쯤, 바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델이었다.


"델 님!"


 반가움에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에스텔에게 델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요, 에스텔 씨. 조금 늦었죠? 사실…고집쟁이 한 명 좀 데려오느라…."


"누가 고집쟁이라는 거야."


 그렇게 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또 하나의 인영은….


"오리온 왕자?!"


"너는…이라 왕자로군. 회담은 이미 끝났을 터인데, 왜 다시 온 거지?"


 경계심이 깃든 오리온의 목소리에 에스텔은 반사적으로 이라를 지키듯 그의 앞에 섰다.


"오리온 님, 이라 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델 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부탁한 거예요."


"맞아. 오리온도 참. 그 땐 좋은 이유로 만난 건 아니었지만, 결론도 깔끔하게 났었고, 어차피 이렇게 만난 거 이왕이면 앞으로라도 좋은 추억이 많은 사이로 남는 것이 좋지 않겠어?"


 조금 탐탁잖은 표정의 오리온과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라를 보며 에스텔은 문득 두 사람이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분명 입 밖으로 냈다간 두 사람 다 난리가 날 것을 직감한 그녀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다만 델 뒤에 서 있는 오리온이 자신의 연인과 비슷한 연유로 이 곳에 왔다면, 하고 생각하니…무심코 에스텔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에스텔 씨, 갑자기 왜…."


"아아, 아뇨. 저번에 듣기로는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하셨으니…저도 델 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답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걸 더블…데…이트라 한다던데…. 아아…하하, 뭐 이름이야 어쨌든, 좋잖아요. 이렇게 별은 아름답고 파도가 잔잔히 노래하는데. 같이 별을 보며 얘기나 나눠요. 오늘은 분명, 좋은 밤이 될 것 같네요."


 델에게 보여주고 싶어 들고 온 별자리판을 괜히 손가락으로 핑그르르 돌리며 에스텔은 세 사람에게 살풋 웃어보였다.


 그 후 적당한 바윗가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에스텔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내 에스텔은 오른손에는 별자리판을 들고, 왼손은 하늘로 뻗은 채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쪽에 제일 크고 밝은 별 보이시나요? 여기서 열한 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 검지 세 개 만큼의 위치를 보면…사각형으로 별이 배열되어 있는데, 찾으셨나요? 이게 천마자리거든요. 오늘은 약속대로 여기 대한 얘기를 들려드릴게요. …옛날 옛날에, 한 공주님이 살았습니다…."


 델은 꿈꾸는 듯한 얼굴로 에스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심코 그 옆얼굴을 본 오리온은 그대로 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바다와 노을을 한번에 담은 듯한 그 예쁜 눈동자가 새삼 빛나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오리온이 무심코 미소를 지을 무렵이었을까.


"오리온, 왜?"


 델 또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오리온을 돌아보자, 오리온은 한동안 온화하지만 약간의 의구심을 얼굴에 띄운 제 연인을 바라보다 괜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냥, 별을 보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너를 봤을 뿐."


 하지만 오리온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어, 델 또한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다 오리온의 손을 살짝 잡았다.


"왜에, 사실 좋아하면서. 전에는 에스텔 씨가 오리온이랑 이름이 똑같은 별자리에 대한 얘기도 해 주셨는걸? 맞죠?"


"아, 네. 오리온 님, 궁금하시면 들려드릴까요? 이 시간에 보려면 한 달쯤 더 있어야 해서 하늘엔 없지만…."


"…사양하지. 들을 거면 보면서 듣는 편이 나을 테니. 괜히 벌써부터 힘 빼지 않아도 돼."


"오리온…! …미안해요, 에스텔 씨. 오리온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좀 낯을 가린다고 해야 할까…. 대신 사과할게요."


"하하, 괜찮아요. 나쁜 분이 아니라는 건 알 것 같거든요."


"앗, 정말요? 후후, 어떻게요?"


 왠지 말수도 적어 보이는데 괜히 벌써부터 힘 빼지 않아도 된다 온화한 톤으로 굳이 덧붙인 말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아까 그 델 님을 향한 사랑의 눈빛을 봤…다고 말하기에는 왠지 오리온의 반응이 걱정돼 에스텔은 머리를 굴려 다른 대답을 급조했다.


"어…델 님 통해서 들은 것도 있고, 제가 모르는 부분이라도 델 님이 기꺼이 만남을 이어나가시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엣취…!"


"추우면 얘기하지."


 어깨에 무언가 올라가는 감각에 무심코 옆을 돌아보자 겉옷을 벗은 채 조금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한 이라가 눈에 들어와 에스텔은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잠깐 재채기 한 것 가지고 뭐 이렇게까지…그리고 이러면 이라 님이 춥잖아요! 이제 곧 겨울인데…. 이러다 본인만 감기라도 걸리면…."


"후후, 날 걱정하는 거야? 그럼…이렇게 하면 따뜻하지 않을까?"


 이라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뻗어 에스텔의 어깨를 끌어안자, 에스텔은 얼굴을 붉히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아, 못 살아 진짜…. 보는 눈도 있는데…."


 그리 말하면서도 이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에스텔을 델도, 오리온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이좋은 한 쌍이네, 라고 델이 생각할 무렵이었을까.


"…델."


 오리온에게 이름을 불린 델이 그를 바라보자, 오리온은 조금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 입을 열었다.


"너는 춥지 않은가?"


"아니, 별로?"


 조금 심통 난 표정으로 오리온 또한 델을 폭 끌어안자, 델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다 이내 꺄르륵 웃었다.


"아, 갑자기 추운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오리온이 이렇게 안아주니 추운 것도 이제 잘 모르겠네."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말하며 오리온은 델을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줬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에스텔은, 왜 둘이 연인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픽 웃었다.


"왜 그래, 에스텔 씨?"


"아뇨, 그냥 좀 재밌어서요. 오늘 이렇게 넷이서 만난 것도 상당한 행운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에스텔이 다시 한 번 웃어보이자, 델 또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런걸요? 정말로…조금 쌀쌀하긴 해도 날도 맑고. 바닷속에선 별이 잘 안 보이는데, 에스텔 씨를 만나면서 별 볼 일도 많아져서 좋아요. 저번에 사라사도 좋아했었고. 오리온도 아직 여기 잘 있는 거 보면 말은 안해도 나름 만족하고 있을 거예요. 후후, 이게 다 에스텔 씨 덕분이네요? 고마워요, 에스텔 씨."


"앗, 네에에…."


"하긴, 보탈리아도 맑은 날보단 흐린 날이 더 많으니 이렇게 별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해저 분들도 그렇고…정말 잘 됐네요. 이렇게 에스텔 씨와 직접 하늘을 보고 별과 관련된 신화를 듣는 것도 얼마만인지…. 같이 오자고 해 줘서 고마워, 에스텔 씨."


"아뇨, 뭐…고마울 것까지야…."


"…뭐, 별이 떠 있는 하늘도 아름다웠고…덕분에 델이 즐거워했으니, 나도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고맙군. 에…스텔."


"세 분 다…. 아, 아무튼간에 다들 좋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조금 쑥스러운 듯 저 멀리 수평선으로 눈을 돌린 에스텔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이라는 문득 들리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델이 한 소절을 부르자 그 다음 소절부터 에스텔이 목소리를 더해, 두 사람의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바닷가에 울려퍼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조용히 그 맑은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노래를 마친 델은 짧게 숨을 들이쉬다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후후, 제대로 기억하고 있네요? 기쁜걸요?"


"그냥, 이런 건 잘 안 잊어버리기도 하고, 아무래도 델 님이 알려주신 거니까…."


"아하하, 에스텔 씨도 참. 그렇게 말하는 건 어디서 배운 거예요?"


"따로 배운 건 아니고…아무튼, 델 님이 알려주신 건데 잊어버리면 안 되죠."


 그리 말하며 조금 쑥스러운 듯 손을 꼼지락거리던 에스텔의 손등을 쓸어내리던 이라는 에스텔을 향해 웃어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네. 저번에 정원에서도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이 곡이었구나."


"네. 아쿠아리아에 전해 오는 전승 중 하나를 담은 노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곡은 내용 자체는 세간에도 꽤 알려진 편이긴 했지만, 곡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곡인지는 몰랐거든요. 가사가 아름답죠?"


"맞아. 델이 직접 알려 준 건가?"


"네. 정확히는 사라사 님까지요. 사라사 님은 오늘 일이 있어 오기 힘드실 거라 들었지만요."


 에스텔이 아쉬운 듯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자 오리온은 짧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래저래 신뢰받고 있군. 뭐, 내가 생각해도 너 같은 인간이라면 꽤 신용할 수 있겠다만."


"앗, 그런…가요…."


 이거, 인정받은 건가. 에스텔이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기쁜 듯 멋쩍은 미소를 짓자, 이내 오리온은 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델을 너무 자주 불러내진 마."


 그렇게 말한 오리온에게 델은 장난기있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왜? 혼자 있긴 외로워서? 그럼 같이 오면 되잖아!"


"델…!"


 그 대화를 듣던 에스텔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야."


"아, 죄송해요.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흠…그런가. 오늘은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지. 뭐, 불러내는 것 자체는 반대가 아니니까…종종 와도 좋아. 델도 즐거워하고, 델뿐만 아니라 사라사에게도…너에 대한 얘기는 종종 들었으니."


"이라 님도 같이 와도 돼요?"


"상관없어."


 잘 됐다는 듯 미소를 띄운 에스텔의 손을 꼭 잡으며 이라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나도 기쁜걸. 자, 에스텔 씨.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가 볼까? 다음에도 본다면 이렇게 좋은 시간 가지면 좋겠네."


"조심해서들 가요!"


"네! 델 님이랑 오리온 님도요!"


 그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아쉬운 듯 간간히 뒤를 돌아보는 에스텔과 그 어깨를 꼭 안은 채 걷는 이라의 모습을 지켜보며 델은 짧게 웃었다.


"저 두 사람, 화기애애하네."


"그렇긴 하군."


"오리온도 참. 그래도 막상 나와 보니 좋았지?"


"…나쁘진 않았어."


"하여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자, 그럼 우리도 이제 들어가 볼까?"


 조금 아쉬운 듯 오리온과 손을 맞잡고 별이 총총 빛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델은, 이내 오리온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띄며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내 오리온도 픽 웃으며 수면 아래로 사라지고, 이내 잔잔해진 밤바다가 하늘의 별을 비추었다.

『드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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