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기 일보직전을 읽지 않고 읽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리고 혐스일 아닙니다! 주의! 


미일보 세계관에서 스팬담이 청소년 시절 가이드로 각성한 걸 스스로 인식했다면? 을 가정한 외전입니다.
스팬다인은 그런 경우 차라리 스팬담을 장관으로 만드는 게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서 여러가지를 교육시켰을 것 같습니다. 이세상에 공짜는 없고 세상은 냉혹하다는 걸 주입식으로 배웟겠져... 덕분에 계산은 빨리 돌아가지만... 계산만 할 줄 아는 바보인... 스팬담... 기엽게 봐주세요...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오 이건 짧게 쓸 수 있겠는데 라고 생각한 내용이라 손풀기로 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졋네요...하하...곧 혐스일로 찾아뵙겟습니다.






"루치. 그 명단의 가이드 중에 마음에 차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예."

스팬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비각인 가이드 중 미혼에, 성별이 여성인 사람은 모조리 명단 안에 넣었고 그 중 미모가 빼어나거나 배경이 든든한 여성은 따로 추가 자료까지 넣어줬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가? 눈이 아주 성층권 밖에 달린 모양이군. 스팬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애초에 장관인 내가 왜 이런 뚜쟁이같은 일을 해야 하는 거야.

"그래도 아무라도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는 건 어때? 의외로 만나보면 마음에 들 지도 모르잖아. "
"싫습니다."

스팬담은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누가 만나서 결혼하라고 했나? 최소한 만나보고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라고. 그래야 나도 노력은 해봤는데 잘 안됐다고 보고할 거 아니야.

스팬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치는 지금 항의를 하고 있는 거였다. 각인을 하기 싫다는 거겠지. 이해는 한다. 각인이란 모든 센티넬의 꿈과 낭만처럼 노래되지만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바보같은 행위었다.

단 한명의 가이드에게서밖에 가이딩을 받지 못하게 된다니,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인 짓이다. 센티넬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각인한 가이드가 죽거나, 납치당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이해는 한다고. 애초에 각인을 하라는 명령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부당한 거니까. 사실 말도 안되게 인권 침해적인 발상이었다.

문제는 루치가 그런 말도 안되는 발상을 해야할만큼 규격 외로 강하다는 것이었다. 루치가 입국을 할 경우 전쟁 선포로 간주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국가도 있었다. 그걸 과잉대응이라고 하기엔 루치는 단신으로 무장테러단체를 와해시킨 전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니 내부에서도 루치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루치가 다른 국가로 망명하기라도 한다면? 갑자기 테러조직에 투항한다면? 그리고 루치가 수행한 기밀 임무도 너무 많았다. 누설되는 순간 치명적인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부에서는 루치에게 더 강력한 목줄을 채우길 원했다. 그게 가이드와의 각인이었다.

스팬담은 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루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고개를 숙여 명단을 넘겨보는 척을 했다. 누가 봐도 엄청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길이었다.

사실 루치 입장에서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임무를 실패한 적도 없고, 불만을 표한 적도 없는데 배신할지도 모르니 각인이라는 족쇄를 차라는 명령을 들은 거니까. 스팬담은 이 명령을 루치에게 전달하던 날 루치의 쏘아보는 눈빛에 찔려서 죽을 뻔했다. 물론 스팬담은 이게 절대 명령이나 강요가 아니며 어디까지나 원하는 상대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가이드로 삼아주겠다는 일종의 약속이자 혜택이고 권리일 뿐이라고 열심히 돌려서 설명했지만 루치가 그 속뜻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노망난 노친네들 같으니라고. 통제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한테 반감을 사면 어쩌려는 거야.

"...좋아, 네 의견은 존중되어야지."

스팬담은 입 안이 자꾸 마르는 것 같아 물을 한모금 마셨다. 저 녀석이 노려보는 걸 견디느니 차라리 그 노친네들한테 미쳤냐고 쏘아붙이는 게 쉬울 것 같았다.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할 걸 그랬다. 저 쓸데없는 명단을 만드는 수고를 하기 전에 말이다.

"내가 위쪽에 잘 말해둘테니 이건 없던 일로 해. 아직 각인하고 싶은 상대가 없는 걸 어쩌겠어. 물론 나도 강요하고 싶지 않고..."
"각인하고 싶은 상대는 있습니다."

스팬담은 순간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뭐라고?

"...방금은 없다며."
"그 명단 안에 없다고 한 겁니다."
"...이 명단에 없는 가이드하고 각인을 하고 싶다고?"
"예."

루치가 각인을 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그 상대가 '미혼 여성'이 아니라는 점이 더 충격적이었다. 스팬담은 그 가이드의 이름을 묻기 전에,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 물었다.

"...그 가이드 우리 기관에 등록된 건 맞지?"
"예."
"...호옥시 기혼이라든가...?"
"미혼입니다."
"아.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그러면 성별이 남성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이런. 스팬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유감스러웠다. 스팬담은 남의 성적 지향에대해선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루치만은 달랐다. 가이드와 달리 센티넬은 유전되는 형질이었고, 루치의 유전자라면 분명 자손도 훌륭한 센티넬로 태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치가 딱히 원하는 상대가 없으면 적당히 어린 가임기 여성을 붙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남자라니.

스팬담은 생각에 잠겼다. 각인은 그 사람과 하더라도 여자 애인은 따로 만들라고 권유해볼까? 대외적으로 진짜 가이드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 게 좋으니 일종의 더미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진짜 애도 낳으면 좋고. 일단 각인한 가이드가 있다면 여자 애인은 가이드든 아니든 상관 없는 거잖아? 센티넬이어도 괜찮고. 센티넬 사이에서 태어난 애는 더 강하다던데.

"흐으음. 그래서 그 가이드 이름이 뭔데?"
"스팬담 장관."

스팬담은 저의 이름이 불렸기에 고개를 들어 루치를 보았다. 루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루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사람을 볼 뿐이었다. 뭐지. 누군지 알려주기 싫다는 건가?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이렇게 강제 짝짓기 같은 상황에서 맺어지기 싫다는 그런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불렀으면 말을 해."

루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팬담은 약간 울컥했다. 아니, 말하기 싫으면 그냥 말하기 싫다고 하던가. 누군 원해서 이렇게 중매쟁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내가 누가 누구랑 각인했는지 사생활이 궁금해서 알고 있겠냐고. 센티넬 기관 장관이라 알기 싫어도 알아야 하는 거지.

"스팬담."

이제 아예 장관도 안 붙이는 군. 정말이지 버릇없다고 생각한 순간, 루치가 책상 너머에서 몸을 숙여 바짝 얼굴을 붙였다.

"저는 당신하고 각인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겁니다."

스팬담은 들고 있던 컵을 떨어트릴 뻔 했다. 아니, 사실 떨어트렸지만 루치가 바로 잡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딸꾹. 너무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다. 루치가 컵을 쥐여주고 천천히 마시라고 권유했다. 스팬담은 저도 모르게 그 지시를 따르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왜? 언제부터?

...라고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유는 너무 명확하니까. 각인된 가이드가 죽는 순간 센티넬은 '아직 폭주를 하지 않았을 뿐인' 폭탄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루치가 각인하자 마자 그 가이드를 죽이고 싶어하는 곳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루치를 합법적으로 제거하고 싶어하는 윗대가리도 포함해서 말이다.

각인한 가이드가 사고로 죽는다면, 폭주를 앞두었을 뿐인 센티넬은 합법적으로 '안락사' 가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루치가 너무 강하다는 것 외엔 제거할 명분이 없었지만, 각인한 가이드가 생기는 순간 '가능성'이 생긴다. 루치는 그 위험을 고려한 거겠지. 명단 안엔 상당한 권력자들의 딸도 포함되어있었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권력자들은 자기 핏줄이라 하더라도 필요하면 가차없이 희생해버리지. 자기 목숨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인간이 정말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루치의 선택은 더없이 합리적이었다. 내가 스스로를 죽이거나 다른 국가로 납치되게 꾸밀 수는 없으니. 무엇보다 센티넬 기관의 장관은 세상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는 인물이었다. 정말이지 기분나쁠 정도로 냉철하군. 허를 찔린 느낌이라 참으로 당혹스럽고도 불쾌했다.

"제가 원한다면 그 누구와도 각인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랬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루치가 명단 안의 여자 가이드를 지목했을 때를 가정하고 한 약속이었다. 루치는 생긴 거 하나는 끝내주니 그 어떤 여자라도 각인을 격렬히 거부하진 않을 거라는 계산을 하고 한 말이었단 말이다. 물론 사랑하는 약혼자가 있거나 하는 예외가 있을 순 있지만 그럴땐 사별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고로 가장해서.

그런 경우의 수까지 고려했지만 본인이 대상이 되었을 경우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스팬담은 고민했다. 어떻게해야 저 더럽게 합리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 있지?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내려고 애썼지만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딱히 안 될 이유가 없었다. 하면 좋은 점은 있어도.

내가 루치의 가이드가 되면 가이드를 핑계로 루치를 제거하기는 어려워지지만 애초에 제거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루치가 배신할 확률도 없어지고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될수록 내 입지도 올라갈 것이다. 가이드를 경호하는데 추가 인력도 들어가지 않고 가이드가 망명하거나 자살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해보면 해 볼 수록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장관님."
"잠시 말 걸지 말아봐. 생각 중이니까."

그럼에도 승낙이 꺼려지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각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 때문이었다. 각인이 일어나는 정확한 조건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연구가 되었지만 그 연구는 결국 어느시점에서 이 행위를 섹스라고 부를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사무적이고 건조하게 각인만을 하려고 해도, 겉에서 보기에 그 행위는 섹스와 전혀 다를 것이 없어지게 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스팬담은 경험이 없었다.

...스팬담은 자신이 경험이 없다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 적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적합한 결혼 상대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연애나 성적 쾌락을 위한 관계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딱히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섹스 한 번 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위험들이 번거로웠을 뿐이다.

스팬담은 루치를 흘끗 보았다. 저 새끼는 진심인거겠지? 아니, 물론 진심이 아닐 이유는 없지. 이보다 합리적인 선택지는 없을테니까. 일단 각인을 한번 해두면 이런 귀찮은 견제도 더이상 없을테고. 맞는 선택이긴 한데... 진짜 그 수단이 그런 거라는 게 신경이 안  쓰이나? 남성인 직장 상사랑 그런 행위를 하는게? 아니, 저 새끼한텐 뭐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 물론 나도 그런 행위에 대단한 의미부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좀 무서웠다. 좀이 아니라 많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경험이 없으니 무섭다는 건 죽어도 말할수가 없었다. 자존심의 문제였기도 했고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합당한 거절의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웃음이나 당하겠지.

비웃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의식 없을 때 해달라고 할까? 마취라든가. 그러려면 각인 과정이 무서우니까 마취를 하겠습니다, 하고 계획을 관련 부서에 제출하고 병원을 잡은 후 수술실에서 마취의가 동반한 상황에서 cctv로 녹화되면서 그 짓을 해야하겠지. 그쯤 되면 내가 의식이 없다 한들 전혀 괜찮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의식 있는 상황에서 한 후에 기억이 안 날때까지 벽에 머리를 박는게 합리적이겠군. 스팬담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각인은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성행위를 개시한지 5분 이내에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불쾌한 경험이더라도, 5분 정도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정도면 안 한거에 가깝다고 우길수도 있을 거 같았다. 스팬담은 치열한 고민 끝에 결심을 했다.

"...좋아."
"승락하시는 겁니까?"
"그래.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스팬담은 심호흡을 했다. 승낙을 하긴 했는데, 이 결정을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가 고민이 되었다. 다른 상대라면 하기 전에 이렇게 결정되었다고 보고서를 썼겠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넣는다면 부하직원과 곧 잠자리를 가질 예정이라고 쓸데없이 예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후 보고도 괜찮겠지? 어느쪽이든 내키지 않지만...

"그럼 지금 해도 됩니까?"
"...뭐?"
"여기서 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스팬담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하는 루치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앞으로 5초 이내에 대답하지 않으시면 무언의 긍정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안 돼. 절 대 안 돼."

미쳤나??? 왜 여기서 한다는 선택지가 나오는 거지? 도대체 왜? 어? 아직 근무시간이고 여긴 내 집무실인데??

"왜 안 됩니까?"
"도대체 왜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됐어. 왜 안돼냐고? 내가 여기서 하기 싫어."
"제가 원한다면, 그 상대가 거부한다 하더라도 각인하는 걸 용인해주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한 거지 어디에서나 해도 된다고 한 건 아니거든?"
"그럼 어디가 좋습니까?"

스팬담은 빠르게 고민했다. 빨리 대답하지 않으면 루치가 그냥 여기서 하겠다고 통보할까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디가 좋냐고? 센티넬 기관에는 각인한 센티넬과 가이드를 위한 공간이 있긴 하지만 거기 출입코드는 기록으로 남았다. 대외적으로는 절대 비밀이지만 비각인 가이드나 센티넬이 그 방에 출입하면 바로 위쪽으로 알림이 간다. 쓸데없이 그런 기록을 남기는 건 절대 사양이다.
숙박업소나 호텔에 방을 빌리는 것도 곤란했다. 스팬담은 보안상의 이유로 어디로 이동하나 그 위치가 마크되는 중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방을 빌리고 거기서 루치랑 만난다면 당연히 실시간으로 보고가 올라간다. 지금부터 여기서 합니다, 하고 쓸데없이 광고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따져보니 차라리 여기서 하는 게 가장 절차가 간단하고 보안이 확실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역시 생리적인 거부감이 너무 컸다.

"...내 집에서 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루치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준비? 무슨 준비? 하는데 뭐 준비가 필요한가? 스팬담은 잠시 고민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게 뭔지 말고 싶지도 않았다.

스팬담은 자기암시가 잘 먹히는 편이었기에 스스로에게 각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에 의해 하는 불가피한 행위일 뿐이니까. 특히 센티넬이면 몰라도 가이드는 각인이라고 해서 뭐 특별히 대단한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고 했다. 센티넬은 각인하는 순간 대단한 황홀경을 느낀다고 하지만.

그 순간 상당히 어색할 거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딱 그 정도 걱정일 뿐이었다. 그런 걱정에 하루종일 골몰해있기엔, 센티넬 기관의 장관이란 자리는 너무 바빴다. 스팬담은 정말로 그 생각을 금방 치워버렸다. 퇴근할 때까지 루치에 관해서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을 정도였다.


스팬담이 루치에 대해 떠올린 것은 집의 현관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그러고보니 집에서 하기로 했지. 걔가 내 집을 알기야 알 텐데 정확히 언제 하기로 했는진 정했던가? 설마 내가 전화로 불러야 하나. 업무용 번호로? 아니면 사적 번호로? 이것도 업무의 일환이긴 하지만 업무용 번호로 남기는 건 좀...

그리고 스팬담은 문을 열자마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루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가 왜 내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데? 그것도 샤워가운 하나만 걸치고서. 준비한다는 게 먼저와서 씻겠다는 거였나? 아니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긴 하지만... 그보다 내가 열쇠를 줬던가?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보안 관련 문제니까. 그렇지만 그걸 물을 기회는 없었다.

루치가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스팬담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거 같았다. 지금, 뭘? 왜?

스팬담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행동을 제지할 수도 없었다. 그만, 이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하려는 시도는 전부 짧게 끊긴 단모음같은 신음으로 새어나올 뿐이었다. 스팬담은 말로 하려는 걸 포기하고 루치의 혀를 씹었다.

루치는 전혀 아프진 않은 기색으로 단지 의문스럽게 스팬담을 내려다보았다. 젠장. 그래도 피라도 날 줄 알았는데. 혀도 근육이라는 건가. 괴물같은 센티넬 새끼들. 루치의 머리카락이 위로 흘러내리고 있어서 간지러웠다. 잠깐만. 스팬담은 어느새 자기가 침대에 누워있고, 옷이 절반쯤 벗겨진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할 말이 있습니까? 아니면 원하는 거라도?"

어느정도는 맞춰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루치의 말에 스팬담은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일단 지금 순간에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각인하는데 키스는 꼭... 할 필요 없지 않나?"
"하면 안되는 이유는 있습니까?"

아니, 그런 이유는 딱히 없지만. 물론, 경험이 없다는 것이 키스도 포함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니, 첫키스같은 거에 의미 부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스팬담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이 더 나오지 않았고 그걸 납득이라고 받아들인 건지 루치가 다시 입을 맞추었기에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숨이 가쁘고 머리가 빙빙 돌아서 생각을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잠깐만. 잠깐.

스팬담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루치가 이 행위를, 순전히 각인만을 위해서, '어쩔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면.

혹시 이거 5분 안에 안 끝나는 건가...?

스팬담이 그 가능성을 떠올렸을 땐,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같은 건 없었다. 


스팬담이 도대체 왜, 라고 물을 때마다 루치의 답은 간단했다. 

'그러고 싶어서.'

키스를 하는 것도, 각인이 끝났는데도 행위를 멈추지 않은 것도, 가이딩 할 때마다 악수면 되는데 굳이 섹스를 하는 것도 다 그러고 싶기 때문이란다. 그 대답 앞에 스팬담은 무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루치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적어도 국가기관 내엔 존재하지 않았다. 스팬담이 할 수 있는 건 근무 시간 내에 하는 건 체력적으로 무리니 최대한 삼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 뿐이었다. 물론 그 부탁은 루치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루, 루치."
"말씀하십시오."
"자리만 옮기면 안 될까? 지금 꼭 하고 싶다면 차라리 가이딩룸에서..."
"여기서 하고 싶습니다."

스팬담은 이를 꽉 물었다. 보통은 여기서 자포자기했지만, 이것만큼은 정말정말정말 싫었다. 사람에게는 물러날 수 없는 마지노 선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싫어."
"그렇습니까?"
"정말로 싫어. 진짜로. 엄청."
"그렇군요."
"제발 부탁인데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하면 안 될까...? 응?"

물론 심리적 마지노선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스팬담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늘어나는 건 아니었다. 스팬담은 그냥 필사적으로 부탁을 했다. 루치가 그걸 들어주길 바라면서.

루치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점이 싫은 겁니까?"
"...그걸 꼭 말해야해?"
"말해야 제가 납득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왜 안 돼냐고? 장관 집무실에서 그따위 짓을 하고 싶을리가 있나!! 그리고 여긴 아버지가 일했던 장소이기도 하다고! 나한텐 의미가 깊단 말이야! 무엇보다 저기 전대 장관 초상화가 주르륵 걸려있는데!! 하다가 아버지 초상화랑 눈마주칠 일이 있냐!! 그리고 나는 하루 대부분을 여기서 일하는데 그 짓을 했던 자리에 도로 앉아서 일해야 하는 나의 입장도 좀 생각하라고!!! 스팬담은 이런 이유들을 최대한 열심히 피력했다. 그렇지만 루치는 그 이야기를 들이며 입꼬리를 천천히 올릴 뿐이었다.

"그렇군요.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루치는 말했다.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걸 들으니 더 하고 싶어졌습니다."
"잠깐, 왜,"
"당신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장소에서 할 때의 얼굴이 궁금해졌거든요."

특히 시도때도 없이 제 생각이 날까봐 곤란하다니, 안 할수가 없는 이유 아닙니까. 참 귀여운 유혹입니다. 루치의 말에 스팬담은 그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들리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아킹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