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렇다고 애 말을 덜컥 들으면 어떡해!]

"뭘 어떡해, 그냥 자기 갈 길 가는 거지."

[여보, 태형이는 아직 고등…….]

"고등학생인데, 뭐."


여자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채 깊게 가라앉은 눈을 두어 번 꿈벅였다. 눈시울이 화끈거리기는 했지만, 무엇인가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눈물이 모두 말라버린 것인지, 혹은 그것이 흐를 길목을 막아버린 것인지. 널따란 통유리 너머로는 곧 자신이 타고 날아오를 비행기의 모습이 보였다. 공항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조만간 탑승이 시작될 것이다.


"여보. 생각해봐. 우리는……. 우리가 걔를 한국에 두고 가던 때 말이야. 태형이는……."


너무 어렸는데.


수화기 너머로는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옆에서는 태한이가 '뭐야? 엄마, 무슨 일이야?' 하고 제법 진지하게 참견하려는 소리가 한 번씩 날 뿐이었다. 얘도 어른 행세를 하려고 그러나.


"태형이가 참 많이 컸더라, 우리가 없는 새."


그렇지만 나는 그게……. 나는 그게 자꾸만 우리 탓인 것만 같아, 여보. 우리가 내린 선택이잖아, 그러니까 그 대가도 우리가 치뤄야지. 여자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직도 어깨 위에 바지런히 올라와있던 아이의 동그란 턱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한 번 너를 끌어안아볼 수 있을까 싶어 한참동안 그 몸을 품에서 놓지 못했다. 너는 여전히 작은 내 아이인데. 어느 순간 이 한 품으로도 버거울 만큼 커버렸다. 아이는 아마 혼자인 것이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어른이 되어서, 이것이 자신의 분명한, 후회 없을 '답'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그 남자는……. 믿을만한 양반이야?]

"으음……."


여자는 손톱 끝을 따각따각 짓씹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날,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태형의 병실을 며칠이고 뜬눈으로 지킨 사람이었다. 그녀는 장담컨대, 살며 그렇게 크고 훤칠한 알파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제게 허리를 꾸벅 숙이던 모습은.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혹은 포기한 사람처럼 덤덤하게, 그러나 진솔하게 사과를 건네던 그 모습은…….


'모두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품은 탓입니다. 태형이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나직하게 울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비구름이 몰려오는 소리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지? 여자는 전화를 끊은 뒤, 창공을 한 번 올려다보며 희미한 웃음을 내걸었다. 어쩐지 한국의 장마가 조금 그리워질 것 같았다. 





운명방정식

W. 삐요삐요 (@ComPpiyo)






보충수업이 다시 시작된 학교는 여느때처럼 시끌벅적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이 교복이 완전히 반팔로 바뀌었다는 것과, 에어컨을 틀기위해 꽉 닫은 창문 너머로는 드디어 오랜 기다림을 견딘 매미의 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 아직 입시가 코앞이 아니라 긴장이 덜 된 걸까,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수업을 듣고있으면 점심을 먹기도 전부터 도롱도롱 잠이 밀려오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여름 하늘은 한 번씩 파도에 휩쓸려온 모래처럼 비구름을 몰고왔고, 몇 분간 온 땅을 함몰시키듯 힘차게 비가 내리고 나면 언제 심통을 부렸냐는듯 선연한 무지개를 내걸기 일쑤였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다시 이 교복을 입게 될줄은, 또 다시 이 학교로 돌아오게 될줄은 몰랐는데.


이것은 모두 태형이 내린 선택이 자아낸 결과물이었다. 


남준은 불편한 태형의 다리가 걱정스러워 한동안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등하교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지만, 태형은 아직 식당을 채 정리하지못해 정신이 없는 고모를 혼자 두고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차피 정식으로 시민권 초청을 받았으니 고모는 곧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그 이별의 순간까지만이라도 태형은 고모와 함께이고 싶었고, 남준은 그런 태형의 결정을 존중했다. 대신, 등하교는 내가 도와줄 수 있도록 해줘요. 태형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큰 남자가 단단히 토라져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그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하여튼, 남준의 제안대로 반을 옮기기로 한 것 만큼은 옳은 결정이었다. 기존의 교실보다 고작 한 층 아래, 바닥과 천장으로 나뉘어진 이곳은 자신이 지금껏 알고있던 것과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 새로운 교실의 동급생은 대부분 베타였지만, 그 사이에는 오메가도 몇 명 있었다. 숫자가 많지는 않더라도 이들의 존재가 태형에게는 기묘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특히 그 누구도 태형을 예전처럼 적나라한 곁눈질로 힐끗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편안했다. 특이체질이라는 얘기를 했을때는 시선이 조금 모여들었지만, 뒤이어 여기저기서 작은 탄식처럼 '와, 부럽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는 '오메가'라는 단어도, '히트'라는 단어도,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 어느 것도 금기가 아니었다.


오늘은 달에 한 번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뼈가 바지런히 붙은 것 같으면 보조기구도 떼어내고, 슬슬 재활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고. 태형은 조퇴서를 받기 위해 고작 한 층 위의 교무실에 다녀왔을 뿐인데도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이마를 손등으로 문질러닦았다. 자리에 앉으며 주섬주섬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자니, 옆자리에서 엎드려 자는줄로만 알았던 동급생 하나가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자신을 쳐다본다. 조퇴서는 받아왔어? 응, 이번 수업만 듣고 가려고. 아, 졸라 부럽다……. 하고 투덜거리는 녀석의 얼굴에서는 진심 어린 부러움이 묻어나왔다.


"근데 너한테서 되게 좋은 냄새 난다. 약간, 시원한 향수 냄새 같은 거……. 알파 냄새 같은데?"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정국이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도대체 뭘 묻혀다니는 거냐며. 알파, 알파라면 당연히 아저씨 뿐인……. 태형은 그제야 오늘 아침, 차에서 내리기 전 수줍게 남준의 넥타이를 당겨버린 스스로의 손길을 떠올리고 뺨을 붉혔다. 킁킁, 아무리 어깨를 이리저리 뒤틀며 냄새를 맡아본들 냄새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태형은 누군가가 남준의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마치 이마에 커다란 도장을 써붙이고 있는 것 같아서. 아니 그치만, 고작 몇 초였는데……. 몇 초 뿐이었는데. 아쉬울만큼 금방이었고, 순식간에었는데. 태형이 화끈거리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떡하지……."

"뭘 어떡해, 그냥 그런 거지. 오메가에게 냄새를 묻혀두는 건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야, 그래서 알파도 제어할 수가 없대."

"진짜? 근데 왜 그러는, 거야? 왜 냄새를 묻혀?"

"음……."


녀석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치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던 문제를 직면한 사람처럼. 


"물건으로 치면 이름을 써두는 거 아니려나."


이건 내 거, 하고.


태형은 아직도 아침의 푸릇푸릇하고 말캉한 촉감이 남아있는 입술을 혀로 한 번 할짝였다. 괜히 목이 바싹 마른다. 그때, 복도에서 '강민규 학교 왔대!' 하는 고함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똑똑히도 들려왔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아이들이 와르르 창가로 쏟아졌다.






여자는 의연한 척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도 렌즈가 자신의 아들을 향해 돌진하듯 가까워지자 눈을 질끈 감는다. 이윽고 세상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퍽, 퍼억 하고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화면을 선명히 가로지르는 잡음과 함께 영상이 끝나는 순간, 남준은 으드득 소리가 날때까지 간신히 어금니를 맞부딪혔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다시 한 번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벌써 몇 번이나 돌려본 영상인데도 볼때마다 화가 났다. 작고 어둑한 상담실 내부에 이윽고 여린 여인의 흐느낌이 흘렀다. 여자는 손수건에 뺨을 파묻고 가만히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남준도 바보는 아닌지라, 저따위 눈물에 속아넘어갈 생각은 없다.


"이게 저희가 증거로 제출할 영상입니다, 보시다시피 아드님의 아주 잘 나와있으니 괜히 변호사 선임에 시간 낭비 마십시오. 아, 혼자 독박 쓰기 싫으면 지금껏 폭력에 동조했던 친구들 신상을 털어놔도 좋고요."


그리고 이런 자리 불편하니, 앞으로 개인적인 연락은 받지 않겠습니다. 남준이 탁 소리가 나게 노트북을 닫자 여자의 흐느낌이 더욱 더 커졌다.


"태형이에게는 더욱 더 연락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습니까?"

"제발요, 선생님……. 제발 부탁입니다, 저희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서……."


정말이지 사람을 질리게 하는 모자였다. 남준은 다시 한 번 까드득 이를 갈았다.


"솔직히 학생이 알파라는 것, 그리고 아직 미성년자라는 걸 감안했을 때 형이 그리 무겁게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태형의 변호인단은 강민규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둘, 태형과 민석을 증인으로 출두시키지 않는 것 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피해를 감수했으니. 하지만 태형이 단 1초라도 이 놈을 마주하는 것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욕심일까. 남준은 가만히 몸을 숙여 괴물같은 모자 쪽으로 상체를 완전히 기울였다. 멱살을 쥘 때만 해도 꽤 큰 놈인줄 알았더니, 놈은 그래봤자 열여덟짜리 소년이었다. 남준의 짙은 그림자가 강민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하게 뒤덮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학생을 눈여겨 볼 겁니다."


그래서 학생이 가는 모든 곳을 쫓아가, 어떻게든 학생의 삶에 훼방을 놓을 겁니다. 내가 가진 모든 정보와, 재력과, 인맥과, 시간을 동원해서. 해외로 도망쳐도 상관 없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술래잡기가 될 테니까요. 마치 한 마리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가슴 속에서부터 나직하게 차오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평생 학생이 저지른 짓을 잊지 않을 거고, 또 온 세상이 잊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상처는 무뎌지고, 흉은 사라진다. 태형은 이를테면 언제나 맑은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 같아서, 분명 머지않아 더 행복한, 더 사랑스러운 추억만을 빼곡하게 채워넣기에도 바쁠 것이다. 다시는 오메가라는 이유만으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지 않도록.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하지만 이제 남준에게는 자격이 있다, 정당하게 얻어낸 자격이. 김태형이라는 작은 오메가의 삶을 위해 분노하고, 화를 낼 자격이. 


그때, 줄곧 묵묵부답이던 녀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놈은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마른 나뭇가지같은 웃음을 내지었다. 마지막까지 허세 뿐이라니 역시 상대해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만 보니 남준의 두 눈을 빤히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동자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두려움 마저도. 


"왜? 걔는 그냥 흔해 빠진 오메가잖아. 당신은 능력도 좋고, 그까짓 오메가……. 주변에는 걔보다 훨씬 더 괜찮은 오메가가 널렸을 거 아니야, 씨발, 김태형이……. 김태형이 대체 뭔데?"


 그 새끼가 대체 뭔데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쾅, 하고 녀석의 주먹이 책상을 세게 두드렸다. 한쪽 다리가 부실한 테이블이 휘청거리며 물잔이 엎어졌다. 여자가 사색이 되어 강민규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만 해, 민규야! 민규야, 제발 그만해……. 도대체, 씨발……. 왜 김태형한테……. 놈은 죽음을 목전에 둔 짐승처럼 광기를 흩뿌렸다. 저것이 과연 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일까. 


남준의 대답은 '그렇다' 였다.


"내 오메가니까."


남준은 다시 한 번 더 또렷하게 대답을 되새겼다. 놈에게도, 자신에게도.


"내 오메가니까."


다른 대답은 필요없다.





온 학교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애초에 고등학생의 삶이랄 건 대체로 잔잔한 연못처럼 큰 기복이 없으니, 조그마한 조약돌이 떨어지기만 해도 그 파동이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정국은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아래층의 상황을 구경중인 동급생 놈들을 올려다봤다. 하나같이 눈동자에 호기심을 자글자글 내걸고 있었다. 


"기어이 강민규를 보내는 놈이 나타났구나."

"너 그 선배 얼굴 본 적 있어? 순둥해보이던데……."

"변호사부터 완전 장난 아니래. 존나 부잣집인가봐."

"근데 강민규네 집안도 존나 잘 살잖아……."

"나 어제 TV 토론회에서 강민규네 아빠 봤는데. 졸라 까이더라."


그러다 놈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트린다. 주제도 모두 중구난방에 가만 들어보면 다들 할 말만 하고있을 뿐인데, 놈들은 자그마한 점처럼 멀어지는, 추락하는 강민규의 뒷모습을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유흥거리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저 자식이 지나가기만 해도 개처럼 빌빌거리던 새끼들이.


"전정국!"


그리고 그 순간, 등 뒤로 낯익은 온기가 와락 매달리듯 업혀오는 바람에 정국은 정수리까지 전류가 흐르기라도 한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으억! 으아! 두 사람의 바보같은 비명소리가 겹쳐지는 사이에도정국은 재빠르게 태형의 허리를 낚아챌 수 있었다. 휘청거리던 몸이 정국의 단단한 팔뚝에 안착하자 태형이 씨익 머쓱한 웃음을 내걸었다. 심장이 마치 육상을 할때처럼 쿵쾅쿵쾅 내달리고 있었다.


"아, 혀엉!"


아, 나, 진짜, 진짜 놀랐잖아요! 자신도 정국 만큼이나 놀란 게 분명하지만 상황이 재밌어 죽겠다는듯 웃고있는 태형의 얼굴을 보자 괜히 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형은, 왜, 다리도 아직 불편하면서, 다치면 어쩌려고!"

"어엉, 미안. 근데 네가 놀라니까 더 재밌잖아."


정국이 겨우 잠잠해짐 심장을 쓸어내리며 눈을 흘겼다. 태형은 성한 쪽 어깨에 가벼워보이는 가방을 둘러매고 있었다. 병실에서 몰래 자극적인 과자를 욱여넣던 때보다야 확실히 생기가 넘쳐보여 다행이긴 했지만. 조퇴해요? 응, 병원 가야해서. 정국이 머뭇거리다 '데려다줄까요?' 하고 내심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태형이 샐쭉한 웃음을 내보였다.


"아저씨 오셨어. 지금 교문 앞이시래."

"……그, 그럼."

"으엉?"

"교문 아래까지라도 부축해줄까요?"


지지리도 미련한 놈.


"아냐, 아냐. 너 연습 지각하면 또 코치한테 맞는다."


나 가볼게! 태형은 목발을 짚지 않은 손을 커다랗게 붕붕 흔들며 인사를 했다. 정국은 절뚝거리면서도 올곧게 교문을 향해 걸어가는 태형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봤다. 허공으로 머쓱하니 뻗은 손 사이로는 자신이 등신같이 놓쳐버린 사람에게서 나던 낯선 잔향이 바람과 함께 흩어진다.


"어떡하냐, 전정국."


같이 육상을 하는 동급생 하나가 넋을 놓고있던 정국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헝클어버린다.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쳤지만, 놈은 더 크게 킬킬거릴 뿐이었다. 


"뭘 어떡해."

"저런 대단한 놈이 네 오메가가 아니라서 어떡하냐고."


정국은 따악, 하고 손바닥으로 놈의 뒷머리를 세게 후려갈겼다. 아악! 머리는 무슨 돌덩어리같은 놈이 답지않게 앓는 소리를 낸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운동화로 발길질까지 몇 번 하고나자 녀석이 미안하다며 두 손을 들어보이지만, 아직도 표정에는 재수없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 새끼를 믿고 시시콜콜한 속내를 털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곧 훤칠한 남자 하나가 반가운 표정으로 태형을 향해 걸어온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곧은 직선을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하나의 커다란 점이 된다. 수천 년만에 만나기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동그랗게 끌어안는 모습을 왜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을까, 자신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이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볼록하게 솟아오른 태형의 광대뼈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태형의 허리를 다부진 팔로 감싸안고는, 절뚝이는 몸이 편안히 기대어올 수 있도록 한쪽 어깨를 조금 우스꽝스럽게 늘어트린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해서도 곧죽어도 쓰러지지않고 버티는 모습이 딱 자신이 알던 김태형 닾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입안이 텁텁해졌다. 자신이 알고있던 가장 자유롭고, 반짝이는 김태형은 트랙 위를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서로에게 지탱하듯 포개어져 느린 걸음으로 멀어지는 태형의 모습이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워보였다. 정국은 가만히 반대쪽 운동화 끈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가락 끄트머리에 단단한 매듭이 걸려드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매듭은 꼭 이렇게, 양 손가락이 빨개질때까지 팽팽히 당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내 오메가가 아니라니. 피식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김태형의 알파가 아닌 거지.






"응, 내일부터 재활 받기로 했어. 석고 풀었더니 몸이 5키로는 가벼워진 거 같아."

[그래도 아직 험하게 움직이는 건 안 되지? 그냥 고모한테 같이 가달라고 부탁 해…….]

"에이, 안그래도 요새 막바지 정리때문에 바쁘신데 어떻게 그래.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멀지도 않아."

[바로 가는 지하철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동안은 어떡할 거야?]

"아저씨가 태워주시겠대. 그, 우선 오늘은……."


아저씨 댁에서 자고가려고. 태형이 잘못이라도 한 아이처럼 쭈뼛쭈뼛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으아아, 소파에 물 떨어진다. 오늘도 머리를 꼼꼼하게 말리지 않은 탓이다. 소파에서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숙인 뒤, 불편한 자세로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발등 위로 톡 톡, 데구르르, 차가운 물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태형아.]

"으응?"

[……행복하니?]


태형은 뜻밖의 물음에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형 씨, 머리 말려줄……."


그리고 시기 적절히 욕실에서 수건을 찾아 나온 남준이 전화를 방해해서 미안하다는듯 멋쩍게 웃어보였다. 가만 보니 남준은 자신에게 내어준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남자의 탄탄한 가슴팍에 그려진 귀여운 코끼리 캐릭터가 예기치못하게 우스꽝스러워서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했다. 태형은 남준에게 들어와도 괜찮다며 손짓을 하면서도 엄마에게는 확실한 대답을 들려주는 것을 잊지않았다. 


응, 엄마.


"나는 행복해."


그제야 태형을 바라보고있던 남준의 시선에 묘한 표정이 어른거린다. 


"그러니까……. 엄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행복한 만큼. 태형은 몇 번이나 수화기에 입술을 쪽쪽 찍으며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통화가 끝난 것을 확인한 남준이 물기가 촉촉한 태형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극세사 수건을 감싸듯 둘러온다. 남자의 커다랗고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손끝이 조심스럽게,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꽃을 다루듯 두피를 어루만지는 기분이 좋았다. 어머님이 아직 걱정이 많으신 모양이에요, 하고 남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태형은 오랫동안 따뜻한 물 속에 잠겨있었던 탓에 조금 쪼글쪼글해진 손가락으로 남준의 미간 사이를 꾹꾹 짓누르며 웃을 뿐이었다.


"오늘 강민규랑은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음…….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냥, 합의는 없을 거라고만."

"그래도 영상이 남아있어서 진짜 다행이에요, 사고 났을때 잃어버린줄로만 알았는데……."

"그러게요, 덕분에 증거를 제대로 건질 수 있었으니까요. 어떻게 그 상황에 카메라를 챙길 생각을 다 했어요."


남준이 반짝반짝 웃음이 가루처럼 부서지는 태형의 광대를 기특하다는듯 엄지로 쓰다듬으며 웃었다. 참, 카메라 하니까 생각난 건데…….


"태형 씨, 혹시 민석 학생과 연락 돼요?"

"민석이요? 네에, 최근에 연락했어요. 곧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내려갈 거래요, 할머니 건강 문제도 있는 것 같고……."

"희경 씨가 말이에요."


태형이 귀를 쫑긋거렸다.


내가 태형 씨를 도와주려고 했던 후견인 프로그램 기억하죠? 끝내 서명을 하지 못했던 그 서류가 기억났다. 아마 아직도 남준의 브리프 케이스 한 구석에 처박혀 있을지 모르겠다.


"희경 씨가 민석 학생을 돕고싶대요, 후견인이 되어서. 검정고시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대학만이라도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와아, 민석이를요?"

"네, 희경 씨도 오메가잖아요. 마음이 많이 쓰였나봐요."


태형이 잠깐 대답을 망설이자 남준이 슬그머니 말을 얹었다.


"혹시 아직도 약혼녀라는 말 마음에 두고있는 거예요? 절대 태형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이미 집안에도 다 얘기했어요."

"아, 알아요! 그건 저도 아는데……."


남준은 어서 얘기해보라는듯 예의 그 보조개가 오목하게 패인 웃음으로 태형을 안심시켰다. 역시 괜히 어른은 아닌 모양인지, 남준은 눈치가 참 빠르다. 그것도 꼭 속내를 들키기 싫을때만. 희경이라는 여자는 좋은 사람인 게 분명하다, 남준이 믿고 의지하는 상대라고까지 했으니. 하지만 좋은 분이라는 걸 아니까……. 너무 좋은 분이라서, 과분할 만큼. 그래서, 그래서 더 불안한 건데. 태형은 모처럼 어린아이같은 분함이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 분명한 남준의 웃음이 오늘따라 짓궂다. 자신이 모든 정황을 전해듣기 전까지 내심 얼마나 불안해 했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혹시 질투해요?"

"아니, 아니에요! 아니거든요, 질투……. 질투하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는 제가 아직도 어린애인줄 아세요? 저 다 컸단……."


그 순간, 와락, 하고 온 몸이 남준의 품속에 파묻힌다. 남준이 불쑥 태형의 종아리 아래로 팔을 밀어넣고는 그대로 소년을 달랑 안아올린 것이다. 으아! 태형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덩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발육이 끝난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가벼울 리 없는데, 남준은 힘든 내색 하나 없다.


"내려주세요!"

"목발이 방에 있잖아요."

"저, 저 그래도 걸을 수 있단 말이에요!"


물론, 남준은 태형이 귀끝까지 새빨간 자두처럼 익어버린 것을 보고도 태형을 내려주지 않았다. 바둥거리면 힘만 더 들어요, 가만히 있어요. 결국 태형이 남준의 어깻죽지에 뺨을 파묻고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착한 아이를 대하듯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길은 또 왜이렇게 얄미운지.


"저 이러다 걷는 법 잊어버리겠어요……."

"그럼 내가 평생 안고다닐게요."


하지만 커다란 손바닥이 동그란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감촉이, 또 남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할때마다 웅웅 울리는 진동이 싫지만은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긴밀하게 이어진 하나의 선이 된 것만 같아서. 태형은 맞닿은 심장이 쿵쿵, 쿵쿵, 하고 불규칙적으로 뛰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 먼저 마음을 고백한 것은 자신인데, 아직도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것을 보듬듯 자신을 꽉 끌어안는 순간, 파르르 떨리기까지하는 손끝에서 낯설고 농밀한 어른의 탐욕이 느껴지는 순간들. 


태형은 남준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남자의 탄탄한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분명 아저씨도 자신과 똑같은 바디워시를 문질렀을 텐데, 인공적인 향으로는 감히 지울 수 없는 청량한 나무 냄새가 시원하게 정신을 파고든다. 태형이 남준의 어깨 위에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도……. 아저씨처럼 페로몬이 진했으면 좋겠어요."


아저씨는 이제 나만의 알파니까.


남들이 다 눈치챌 수 있도록 이름이라도 콱 새겨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태형은 어리숙하지만 제법 탐욕스러운 손길로 남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무향의 페로몬이라는 것을 원망할 날이 올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남준은 태형의 손바닥을 끌어와 따뜻한 뺨을 파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문득 이 남자의 세상 속 김태형은 어떤 향을 하고있을까, 궁금해졌다. 자두향이라던가. 여전히 달콤해요. 달고, 새큼하고, 청량하다고, 어떻게 이 좋은 걸 모르고 살았을까, 싶을 만큼 좋다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 태형에게는 가장 따뜻한 한 줄기 위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서야 설명 할 방법이 없잖아, 그렇지? 태형이 남준의 허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며 생각했다. 


익숙한 기분이다. 천장이 새하얀 병원와 사각거리는 환자복,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낯선 어른. 정신이 좀 들어요? 하고 묻던 그와……. 


'운명적이라는 거네요!'


뭣도 모르고 짝짝 박수를 치며 신기해하던, 철 없는 김태형. 낯익은 풍경이 꿈처럼 펼쳐진다. 


남준은 태형의 몸을 출렁이는 매트리스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깊숙히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춰온다. 소년의 몸을 더 꽉 끌어안고 바지런한 콧잔등 위에 꾸욱 탐욕스러운 입맞춤을 새겼다. 설렘으로 파르르 떨리는 소년의 속눈썹이 입술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해답을. 우연과 우연과 우연이 만났을 때부터. 남준은 가만히 눈을 감고, 이제야 온전히 자신의 품에 안긴 오메가를 한없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김남준 더하기 김태형. 


시작은 우연이었을지언정.


그 끝은……. 





운명방정식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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