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은 죽음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죽음은 나에게 늘 친절했다. 평판과는 달리 아름다워서 입 맞추고 싶은 꽃과 같았다. 그건 죽음이 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도 안다. 무서워 죽겠으니까. 당신도 알길 바란다. 죽음이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게 한다는 것을.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탄생으로부터도 도망쳤을 것이며 이 끔찍한 세상에 떨어져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에 비하면 삶은 얼마나 온화한가.

내가 젊었을 때 만난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순수한 사람이고, 괴물이라고 한다면 내가 만난 괴물 중 가장 무서운 그를 무엇으로 칭하든 간에, 그가 내 삶을 바꾸었고, 나의 영원한 반쪽이며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나의 신에게 작별을 고하는 기도를 드린 후 내 초상화를 불태웠다. 곧 그와 재회할 참이니 이제야 나의 초상화를 받아 볼 그에게 조금은 덜 미안하고자 소소한 악행을 저지른 셈이다. 그러니 그가 나를 용서할 것은 당연하다. 수백 번 넘게 붓을 들고도 결국 그의 눈은 그리지 못한 채 소각당한 수많은 미완성 초상화들도 용서해 줄 것이다. 만일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가르쳐 주리라.

손이 떨려서 엉망이지만 부디 이 글을 끝낼 수 있기만을 바란다. 내가 악마에 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든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를 만났던 순간과 그와 함께 보낸 시간에 가감 없이 사실만을 기록할 것이다.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해도 좋다. 불태워 버리지만 않는다면, 미친 사람이 죽기 전에 남긴 글이라며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삼아도 좋다. 이 종잇장에 허락된 물리적 시간 동안만이라도 나와 그의 부도덕한 이야기가 못다 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기에. 그런데도 굳이 이 글을 불태우는 자가 있다면,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주장하겠지. 웃기지 마라! 나의 신은 이 종이 몇 장에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증명해 주지. 다수가 믿는 신념이라고 해서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오길. 내가 사랑하는 신이여, 내가 옳고 당신도 내 말에 동의한다면, 미래엔 부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주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허상이거나 독재자일 뿐이요.

내가 신에게 불경스럽도록 허물없이 대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보통 사람들보다는 친했던 줄로 안다. 열 살 때부터 수도원에서 살았으니까. 그런 주제에 경매장에 출입하는 은밀한 취미가 있었다. 성직자라는 신분으로 속세의 문화에 관심을 보여 좋을 것이 없으므로 준비를 단단히 했다는 점을 언급해 둔다. 로브를 뒤집어쓰는 것은 물론, 수염을 붙이고 얼굴에 그림자를 그리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력 싸움을 할 처지가 아닌 내가 경매에 참여하는 건 그림들 때문이었다. 화가, 즉 신의 몸종인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불온한 그림들이 그곳에서 날개를 달았다.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음지의 그림쟁이들에게서 끈끈한 동료의식을 느꼈다. 합류하기는커녕 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과감한 시도를 눈감아주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죄였다.

그런 장소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났으니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경매인 두 사람이 내 키와 비슷한, 금칠이 벗겨진 나무판을 들고 나왔는데, 희한하게도 문이 달려있어 처음엔 그게 그림인 줄 몰랐다. 경매인이 그 문을 열기 전에 말했다.


“경고하겠습니다. 보여 드릴 그림엔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 번을 팔았으나, 두 번 되돌아 왔습니다. 소유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면치 못한다는 그 그림입니다. 이번엔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경매인이 액자의 문을 열었다. 나는 안을 보자마자 너무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뻔했다. 그림 속에 악마가 서 있었다. 신의 명을 따르는 몸인 나를 너무도 당당하게 직시하며. 보통 성직자들이 그리는 악마와는 달리, 그는 사람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싸 창백한 얼굴만이 유령처럼 떠 있었고, 붉은 피부나 흉악한 이빨도 없이, 그저 가만히 노려만 보는 얼굴엔 오히려 고결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 가질 법한 기품이 있었다. 곱실거리는 검은 머리칼을 뚫고 나온 두 개의 뿔과 끝이 뾰족한 꼬리, 그리고 죽음 같은 분위기만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그림임은 명백했다.

나쁜 그림임을 알면서도 매료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경매가 시작되자 가치는 치솟기만 했다. 모두 나처럼 남루한 옷으로 신분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들이 입에 담는 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난생처음으로 느낀 물욕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 재앙인지! 악마는 나만을 바라보았다. 문득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악마가 내게 해답을 귀띔했다. 물욕을 가르쳐 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지도록 부추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을 섬기는 내 손에 거둬지길 바라는 구원의 요청을 어떻게 거절하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수염을 떼었다. 모든 이들이 나의 돌연한 행동에 놀랐다. 몇몇은 내 얼굴을 알아보고 신속히 자리를 떴다. 내 입에서 태연한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저 저주받은 그림은 신의 몸종인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끔찍한 불행으로 몰아넣은 악마의 그림을 찾아내기 위해 이 경매에 수년간 참여해왔습니다. 저 용서 받지 못할 그림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고, 신에 대한 모독입니다. 더 이상 존재해선 안 됩니다. 모두 신의 법률을 따르는 분들이시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불태워야 합니다.”


악마는 나의 차지가 되었다. 액자에서 그림만 분리해 돌돌 말아 품에 넣고 서둘러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신이 나에게 작은 체구를 선물한 것이 마치 그 순간을 위한 것만 같았다.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림을 바닥에 펼쳤다.

가까이서 보니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최소한의 빛이 쓰인 그림 속에서 그의 얼굴만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투명한 빛으로 사람의 피부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돌아가신 나의 스승의 솜씨라면 가능하리라. 최소한의 채색으로 완벽한 순간에 붓질을 멈춘 것이다. 나는 기름등을 들고 있었는데, 일렁이는 불빛 때문에 악마가 마치 저를 관찰하는 나를 주시하는 듯 그 앞에서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참이나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그 그림을 탐했다. 차갑고 생동감 있는 눈동자에서 순수함과 호기심을 발견했을 땐 온몸이 오싹해졌다. 장식이라곤 없는 검은 옷은 어느 양식에도 맞지 않는 이색적인 것이라 마치 어둠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화가는 이 악마를 실제로 눈앞에 두고 그리기라도 한 것일까? 배경을 보고 생각했다. 피사체를 완성하고 그것으로 만족한 나머지 배경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듯했다. 벼락이 떨어지는 새카만 나무를 예의상 그려 놓은 티가 날 만큼, 그림의 목적이 분명했다. 나는 탄식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은 성스러움이 밴 내 손은 절대로 이런 야만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기에.

가끔은 나도 악마를 그리긴 했지만,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교훈을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악마를 단독으로 그리는 것은 악마를 숭상한다고 여겨지는 불경한 행위였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사고가 당연하기에 사람들은 선이 존재하는 이유는 악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걸 잊었으며 무엇이 악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 그림은 내가 강조하고 싶은 악마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길들지 않은 것.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는 것. 자유. 호기심. 유혹. 그리고 의심. 그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나는 그림을 옷장 안에 붙이고 옷으로 가렸다. 끼니를 거르며 그와 비슷한 그림을 흉내 냈다. 소문이 퍼졌음은 분명했다. 악마를 그린다는 배덕을 극복하느라 손이 벌벌 떨렸는데도 어쩐지 내 붓끝에서 자꾸만 그가 살아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의 얼굴로 그리려 애썼다. 그 악마를 태워 죽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모두가 모인 가운데 가짜 그림을 태웠다.


그날, 자다가 한밤중에 눈이 뜨였다. 다시 잠들려고 뒤척이는데, 침대맡에 누가 서 있는 게 아닌가? 발작하듯 깜짝 놀라 신의 이름을 외치자, 시커먼 형상이 어둠 속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뿌옇고 흰 얼굴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동굴 안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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