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생각 없이 주문했던 음식이 너무 매웠다. 한 숟가락을 떠서 넘기는 것도 벅차서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남은 음식을 모두 노란 봉투에 묶다가 화가 울컥 났다. 이렇게 매운 건 쿠션을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냉장고 안에 있던 손바닥만 한 우유 팩을 연신 비워내며 허공에 성을 냈다. 맞아, 요즘은 세상이 너무 맵다니까. 식단관리차 드레싱도 없는 맨 샐러드를 먹던 보쿠토 씨가 내 하는 양을 보며 큭큭 웃었다.

  현대인은 자극을 추구한다. 청소하며 틀어둔 뉴스에서, 몇십 년 전보다 지금 먹는 음식이 훨씬 짜고 맵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어느 프랜차이즈 음식점 CEO가 한 ‘양산되는 외식 산업에서 살아남으려면 첫 한 입이 소비자를 <자극>해야 한다.’고 말한 인터뷰도 본 적이 있다. 현대인은 단편적인 자극을 추구한다. 내가 먹은 쿠션 없이 매운 음식이 그랬고, 치즈가 잔뜩 올라간 조미료 맛 가득한 등갈비가 그렇듯. 비단 음식의 문제는 아니었고, 사회의 많은 부분은 점점 살에 와닿을 만큼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직원들과 대화를 하다가, 아침 드라마를 즐겨보는 직원이 문득 말을 꺼냈다. 요즘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 말이다. 사랑에 죽네, 사네 하며 눈물을 짜내다가 평범하게 행복한 결말을 맞는 드라마의 시청자 게시판에 진부하고 재미없다며 악플이 잔뜩 달렸단다. 현대인은 겨우 집안의 역경 따위를 이겨내고 결혼한 재벌 3세와 서민의 사랑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나 뭐라나. 그 재벌 3세가 알고 보니 나와 피가 섞인 형제였다거나, 알고 보니 흑막이었다거나, 하는 정도의 반전은 있어야 자극을 느낀다며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 직원은, 오늘도 아마 그런 자극적인 드라마를 보고 출근했을 것이다. 또 언제는 편집장으로부터 좀 더 선정적인 코멘트를 요청받았다. 타사보다 잘 팔리려면 그 수밖에 없다는 게 이유였다. 드라마 이야기든 편집장의 이야기든 아주 틀리진 않다고 생각했다. 먹는 것도, 보는 것도, 일하는 것도 모두 자극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판매자 입장에선 팔리는 것을 내놓아야 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게 자극적인 것이라면, 산업도 응당 거기에 맞추어 가야 했다. 단편적인 자극의 연속이었다.

  결혼 평균 연령이 늦춰지고 아예 결혼하지 않는 인구도 늘어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자극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사랑이니, 연애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진부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편집되어 세상에 판매되는 사랑과는 달리, 현실의 사랑은 그만큼 자극적이지도, 그만큼 단편적이지도 않다.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랬다. 긴 시간 흔들리는 배에 탔을 때처럼 울렁거리지도 않고, 잔뜩 취한 날처럼 머리가 팽팽 돌지도, 매운 걸 먹었을 때처럼 식도까지 아리지도 않는다. 나와 내 연인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우리의 사랑이 만화나 드라마였다면, 아마 경쟁사보다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릴 수도, 악플 없이 호평을 받으며 최종화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진부함에 가까웠다. 누구나 보쿠토 씨에 대해서 유별나다고 말하지만, 보쿠토 씨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유별나다기보다는 차라리 진부한 편이었다. 그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는 너무 뻔했다. 비 소식 하나 없던 하늘에서, 꼭 사람 놀리듯 퇴근 시간에 맞추어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회사 앞에서 우산 하나를 들고선 나를 기다렸다. 지나가듯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한정판 운동화를 하루 반나절 꼬박 그 앞에서 기다려서는 두 켤레를 사왔다. 대학생 때 내가 좋아했던 학교 앞 디저트를 사기 위해 왕복 두세 시간을 왔다 갔다 하는 건 그 사람에겐 일도 아니었고, 어쩌다 내가 아프기라도 한 날이면 내가 잠들 때까지 머리맡에서 손톱을 뜯으며 불안해했다. 다른 데 있어선 조금도 종잡을 수 없어 속상하기까지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은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이미 한 번 유행을 거친 드라마나 만화처럼 뻔했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눈앞에 있었고, 안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그의 품 안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그런 뻔한 점을, 만약 만화나 드라마였으면 ‘잘 팔리지 않았을’ 그 사람의 연애 방식을 사랑한다.

 

 



 

  아카아시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거 알고 있어. 결혼해줘!

 

 

  바로 몇 달 전, 보쿠토 씨에게 청혼을 받았다. 이미 결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양가 인사까지 마치고, 심지어 식장과 날짜까지 잡은 상태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은 매일 삶에서 확인하는 부분이니 청혼 같은 거 없이 가자는 내 얘기는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날이 갈수록 어깨가 넓어지고, 근육이 붙어 영 불편하다며 비싼 돈 주고 맞춰놓곤 몇 번 꺼내 입지도 않던 정장까지 갖춰 입은 보쿠토 씨가 그 어떤 날처럼 떨고 있었다. 여전히 그때처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뻔하게 무릎을 꿇고, 뻔하게 비싼 반지를 내게 끼워주며 나에게 청혼했다.

 

 

  누가 결혼하자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해요?

 

 

  우느라 앞도 제대로 못 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뻔뻔해도 결혼은 해줘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진부와 전부

Coco

 

 

 

 

 

  요즘 우리의 소일거리는 틈나는 대로 집 안 구석구석을 뒤져 정리하는 것이었다. 다용도실 한구석에 놓고 모른 체하던 물건들이나, 나란히 놓여 있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나 실수로 떨어뜨려 금이 간 상패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보고 먼지를 털어주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게 취미였다. 몇 년을 같이 산 집에는 같이 산 세월만큼 물건과 먼지가 쌓였다. 결혼을 앞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동거하던 집은 이제 신혼집으로 불릴 테지만 아마 생활은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달라질 거 없는 사랑에 서류를 새로 쓰듯, 한 호적에 두 이름이 나란히 올라가게 될 듯 사소한 변화처럼, 우리의 평소 같은 집에도 약간의 정돈이 필요했다. 나와 보쿠토 씨는 먼지를 터는 데 흥미를 붙였다. 박물관도 아닌데, 집에서는 뽀얀 먼지와 함께 추억이 자꾸 올라왔다.

 

 

  “이 상자, 처음 보는데요?”

  “어, 뭐야?”

  “보쿠토 씨 거 같은데, 열어봐도 돼요?”

  “응. 나도 궁금하다.”

  “이상한 거 든 거 아니죠?”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입니까?”

 

 

  다용도실 수납장 가장 구석에서 빛바랜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나나 보쿠토 씨나 기억에 전혀 없는 물건이라 호기심이 동했다. 종이상자 위 뽀얀 먼지를 털어내자 먼지에 유독 약한 보쿠토 씨가 콜록댔다. 아마 적어도 몇 년은 손길이 닿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다락에서 할아버지의 유품 상자를 발견한 서양 영화 속 어린 소년들처럼 들떠 상자를 열었다.

 

 

  “와, 이게 뭐예요?”

  “헉! 여기 있었네!”

 

 

  상자 안에는 예쁘게 개어진 것은 후쿠로다니의 유니폼이었다. 할아버지의 유품으로부터 시작되는 판타지 영화처럼 뻔한 전개였다. 상자 위에 전부 먼지가 앉은 탓에, 안에 들어있는 유니폼은 조금 쿰쿰한 냄새가 나는 걸 제한다면 어제 빨아 넣어둔 것처럼 깔끔했다. 4번과 5번, 보쿠토 씨와 내가 각각 2학년 3학년이자,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첫해의 유니폼이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추억에, 널브러진 다용도실은 잠시 현실에서 멀어진다. 파도 같은 추억에 젖어 유니폼을 꺼내어 몸에 대보고 내 기억보다 훨씬 짧은 바지의 고무줄을 늘여보기도 했다. 보쿠토 씨도 신기한지 몸통의 반만 한 유니폼을 들어보고 펼쳐보고, 한참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어요? 반납해야 하잖아요.”

  “음. 글쎄?”

 

 

  보쿠토 씨는 무언가를 숨기는 데 소질이 없었다. 거짓말이라도 하려고 하면 꼭 이런 식으로 눈을 돌렸다. 보쿠토 씨는 그 점에 대해, 단지 내가 보쿠토 씨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자기가 뻔한 건 꿈에도 모를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몰래 가져온 것으로 간주할 거라고 겁을 주니, 그제야 손가락 끝으로 유니폼의 소매를 뱅뱅 꼬며 실토한다.

 

 

  “몰래 가져온 거 아냐. 내가 감독님한테 달라고 졸랐어. 그으러니까, 졸업할 때! 졸업 선물로.”

  “졸업 선물로 감독님한테 유니폼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감독님은 그걸 들어주셨어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보쿠토 씨가 졸업한 다음 해에 유니폼이 바뀌었던 것도 같다. 디자인은 그대로였으나 오래 입어 색이 바래거나 헤진 부분이 없었고 재질로 조금 더 좋은 것으로 바뀌었었다. 당시에는 주전인 선배들이 모두 빠진 자리를 홀로 채우느라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또 감독님 엄청 졸랐죠? 가지고 와서는 까먹을 거면서 왜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해요?”

  “아카아시, 왜 10년은 된 얘기로 날 혼내는 거야?”

  “그때 알았으면 그때 혼냈겠죠.”

  “하지만 꼭 가지고 싶었단 말야. 우리한테 소중한 거잖아.”

  “소중한 건 소중한 거지만, 그래도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잖아. 나랑 아카아시가 같이 코트에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고. 나는 이 시간을 더 붙잡고 싶은데, 아카아시는 아닌 거야?”

  “…….”

  “물론 까먹은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재작년까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얼른 유니폼을 추슬러 몸에 안는다. 10년은 된 걸 내가 돌려주고 오랄까 봐서, 용돈을 모아 산 장난감을 들킨 어린 애처럼 군다. 저 사람은 프로 선수 중에서도 특히 손에 꼽히면서도, 국가대표에서도 에이스 넘버인 4번을 받아놓고도, 아직도 서툴렀던 그때, 고등학생 때의 배구를 추억했다. 어쩌면 수만은 될 법도 한 경기와 십여 년은 된 본인의 배구 인생에서 자꾸 고등학교 2, 3학년 두 해를 꼽았다. 단지 나와 함께 코트에 섰다는 이유만이었다. 내가 올린 공을 때린 건 고작 두 해에 불과하면서, 더 능력 좋은 세터와 합을 맞추면서도, 가끔은 실수를 하기도 했던 고등학생 아카아시 케이지 선수가 올린 공과 그 선수와 함께한 경기를 기억했다.

  고등학교 이후에도 배구를 계속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래도 고등학교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제법 속상했던 것 같다. 이제 내 인생에서 배구가 차지하는 파이가 줄어들 게 무서웠다. 그 시절처럼 전력을 다해 속상하거나 행복하지도, 사력을 다해 뛰어다닐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 시절을 끝냈을 때, 나는 알 수 없는 번아웃에 시달리지도, 무력감에 열이 오르지도 않았다. 저 사람이, 나의 연인이, 나의 스타가 나의 서툴렀던 배구를 기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젠 나만의 스타가 아닌, 일본 배구 팬 모두의 스타가 된 저 사람이 나의 배구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젠 입까지 삐죽이며 괜히 툭툭댄다. 유니폼 바지가 제 손으로 몇 뼘인지 재어보고 어깨의 선을 따라 검지로 죽 긋다가, 배에 적힌 넘버를 따라 허공에 대고 그린다. 모기 만한 소리로 맨날 나만 소중하지. 하고 삐진 티를 낸다. 눈에 찔린다고 징징거려 돌아다니던 고무줄로 묶어준 앞머리가 보쿠토 씨의 움직임에 따라 달랑댄다.

 

 

  “누가 보쿠토 씨만 소중하대요? 누가 그래요? 또 미운 소리 하지?”

  “가져다주고 오라고 했으면서.”

  “각색에 소질 있으시다니까. 언제 그랬어요?”

  “흥.”

  “흥은 무슨.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이제는 코트에 있던 시간보다 코트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종종 이런 식으로 나를 그때 그 코트 안으로 데려갔다. 가장 소중했던 시간, 그래서 종종 꺼내어 보며 추억해야 할 기억을, 저 사람은 이런 식으로 바로 지금인 양 만들었다.

  보쿠토 씨가 들고 있는 유니폼 중 내 것을 가져와 내 몸에 대어보았다. 고등학생 때와 체격이 많이 달라지지 않아 어쩌면 맞을 것도 같았다. 다시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좋다. 내가 더는 아무 말 없이 유니폼을 만지작거리자, 보쿠토 씨가 얼른 말을 건다.

 

 

  “입어볼래?”

  “……. 그럴까요?”

 

 

  바지를 벗고 얼른 유니폼 바지부터 꿰입는다. 당신 몸이 얼마나 커졌는데 들어가겠냐고 한소리를 해도 듣질 않는다.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더 말렸다간 또 한참을 칭얼거릴 걸 알아서, 그냥 내버려 두고 나도 옆에서 유니폼을 입어본다. 4번과 5번, 우연히 받은 번호는 마침 또 연달아라, 그게 그렇게 좋았던 고등학생 때를 회상하며.

 

 

  “아카아시는 딱 맞네? 얼굴도 그대로야. 완전 고등학생 같아.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

  “속여서 미안해요. 저 고등학생이에요.”

  “거짓말.”

  “안 믿을 거면서.”

 

 

  그래도 살이 좀 쪘지, 라고 생각했던 게 민망하게 학생 때 유니폼이 딱 맞았다. 반면 열심히 몸을 키운 보쿠토 씨는… 고등학생 때의 유니폼이 맞을 리 만무했다. 먼저 입던 하의는 결국 무릎 위로 올릴 수조차 없어 포기한 지 오래였다. 상의는 어떻게 입긴 입었으나, 저건 의류 학대에 가까웠다. 언젠가 쇼핑하러 갔다 우연히 들른 편집숍에서 본 손바닥만 한 여성복 같았다. 저런 걸 누가, 어떻게 입느냐고 기함을 했는데, 입으면 들어가긴 하겠구나 생각이 든다.

  청소하느라 죄 엎어두어 어지러운 다용도실과 앞머리는 달랑 묶어 올리고 크롭티 같은 유니폼을 입은 보쿠토 씨. 주변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 웃음이 났다.

 

 

  “유니폼 입으니까, 다시 고등학생 된 것 같아.”

  “제대로 입지도 못했으면서요.”

  “분위기가 말야, 분위기! 고등학생 놀이할까? 어디부터 할까? 다시 그때처럼 고백해볼까? 어디 보자, 무릎 꿇고.”

  “잠깐만요. 역시 각색에 재능 있는 거 맞다니까. 그때 무릎 꿇으려고 꿇은 거 아니잖아요. 넘어져 놓고는.”

  “아카아시는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문제라니까. 집중해! 지금부터 아카아시는 2학년, 나는 3학년인 거야. 여기는 다용도실이 아니라 학교 체육관이고, 우리는 이제 자율연습을 다 끝내고 집에 가려는 타이밍인 거야. 자, 다시 고백할 거야.”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한쪽 무릎을 꿇어 올린다. 앞에 머쓱하게 선 내 손을 잡고, 시선을 올려 내 눈을 마주친다. 금빛 눈이 조명에 반짝인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거두고는, 그때처럼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연다.

 

 

  “아카아시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알고 있어. 사귀어 줘!”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연히 한쪽 무릎을 꿇었는데 마침 내가 있어서, 눈이 마주쳤는데 몇 초도 마주보기 힘들어서,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이나 화끈화끈한 얼굴엔 다른 이유를 알면서도 괜히 운동 핑계를 대던 그때처럼. 우리의 집이 아닌 후쿠로다니의 체육관 구석으로 돌아간다. 천장은 조금 더 높아지고, 바닥은 대리석이 아닌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으로.

 

 

  “누가 사귀자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해요?”

 

 

  맞잡은 손끝까지 홧홧해지는 느낌마저 그때 그대로다.

 

 

 

 

 

 

 

 

  연애 시작 이전에 서로 마음을 떠보며 줄타기하는 게 그렇게 괴롭다는 걸 안다면, 아마 연애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적을 것이다. 그것이 고등학생인 내가 내린 결론이다. 다른 부원들이 전부 도망간 시간까지 단둘만 체육관에 남았던 이유는 배구가 좋기 때문일까 아니면 같이 연습하는 저 사람이 좋기 때문일까 묻는다면 아마 나나 보쿠토 씨나 대답을 못 할 것이다. 보쿠토 씨는 공을 올려주는 쪽이 꼭 내가 아니더라도 아마 지겨울 만큼 연습을 해댔을 테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할 때만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보쿠토 씨의 마음을 짐작은 하나 확신하진 못하니 괜히 알량한 착각만 늘어갔다.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가, 이 마음은 일방이라고 체념했다가, 다시 그래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짝사랑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하는 건 진부하지만, 진부한 표현이 아직도 쓰이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날도 한참에 걸친 둘만의 자율연습이 끝난 건 밤이 한참 늦어, 경비 아저씨께 한 번 경고를 들은 뒤였다. 덩달아 초과근무를 한 네트도 내려서 개어두고, 체육관 구석구석까지 멀리도 날아간 공을 열심히 주어다 창고 구석으로 넣고, 창문이 잘 잠겼나 확인했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시간 늦었잖아.

  내일도 일찍 나와야 하니까 그냥 들어가셔요. 괜찮으니까.

  아카아시랑 더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주장의 권한으로!

  부일지부터 제대로 쓰시면 생각해볼게요.

 

 

  부일지 얘기에는 어찌할 줄 몰라 입을 삐죽였다. 말로 할 테니 받아 적어달란다. 엄청나게 배구 한 거 말곤 쓸 게 없는데 어떡해! 핑계라고 대는 건 늘 이런 식이었다. 그럴 거면 주장 내려놔라, 이거 쿠데타다, 하잘 데 없지만 소중한 대화를 하며 마지막으로 체육관을 점검하고 나가려던 차였다. 좀 까불거린다 싶던 보쿠토 씨가 쾅! 소리와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시선보다 낮아진 곳으로 눈을 내리니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걸려 한쪽 무릎을 꿇고 넘어진 보쿠토 씨가 보였다.

 

 

  괜찮아요?

  나 지금 완전 멋없어.

  괜찮아요. 꼭 지금만 그런 건 아니잖아요.

  아카아시!

 

 

  항상 나보다 약간 위에 있던 보쿠토 씨의 눈이 낮아진 게 어색했다. 일으켜주려고 손을 뻗었다. 문득 익숙하던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처럼 손이 맞닿는 순간이 부담스러워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쳐냈다. 마주치는 시선은 닿기가 무섭게 서로 피해버렸다. 보쿠토 씨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카아시.

  네.

  할 말 있는데, 들어줄래?

  일어서서 말해요. 무릎 아프겠다.

  아니. 마침 이 자세라서 딱 좋은 이야기야.

 

 

  장난기가 가신 눈이 체육관의 핀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게 무슨 시그널인지 알 것만 같아,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몸이 꼬였다.

 

 

  아카아시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알고 있어. 사귀어 줘!

 

 

  눈을 꼭 감은 채 빈손을 내민다. 꼭 꽃 한 송이를 내밀 듯이.

 

 

  누가 사귀자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해요?

 

 

  보쿠토 씨가 내민 손을 잡았다. 더는 높아진 체온이나 눈치 없이 빠른 심장박동에 다른 이유를 댈 필요가 없어졌다. 눈을 꼭 감고 악을 쓰며 탄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직후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실감이 없는 것처럼, 짝사랑의 롤러코스터에 내린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실감이 없던 그 시절은 아직도 종종 간질거리곤 했다.

 

 

 

 

 

 

 

 

  “뻔뻔해도 사귀어주는 거지?”

  “그럼요.”

 

 

  그때 보쿠토 씨의 고백처럼, 나의 대답도 그때와 같다. 보쿠토 씨가 일어나 내 몸을 껴안는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받고 비벼댄다. 묶은 앞머리가 볼을 간지럽혔다. 내 등 뒤로 두른 보쿠토 씨의 두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가 쭉 풀리고, 두꺼운 손이 내 등을 쓸어 내린다. 보쿠토 씨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평소보다 긴 호흡이 내 살을 들이마셨다 내뱉는다.

 

 

  “왜 이렇게 떨어요?”

  “차일까 봐 무서워서.”

 

 

  내 속 정도는 빤히 보면서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도, 이르지만 결혼반지도 나눠 꼈으면서도 내가 고백을 거절할까 봐 무서웠다고 말한다. 하얀 뺨을 두 손으로 잡아 짧게 입 맞춘다. 사랑하는 눈썹과 뜨거워진 눈가도 쓸어 준다.

 

 

  “내일모레면 결혼할 사람을 왜 차요. 아직도 고등학생이네, 보쿠토 씨는.”

  “아니야. 고등학생 때랑 다른 게 하나 있어.”

  “보쿠토 씨가 더 커다래진 거?”

  “내가 고등학생 때 보다 지금 더 아카아시를 사랑해.”

 

 

  꼭 저렇게 뻔하고 유치한 말을 했다. 동그란 뒤통수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손끝을 간질인다.

 

 

  “완전 뻔하거든요?”

  “뻔한가?”

  “네. 완전요.”

 

 

  짧게 몇 번 입을 맞추며 농담을 하니, 그제야 긴장해있던 보쿠토 씨의 얼굴이 풀어진다.

 

 

  “그럼 유니폼 입은 김에 뻔하게 야한 거 하러 갈까?”

  “진짜 미쳤나 봐. 진지한 게 3분을 못 가.”

  “뻔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네요.”

  “하지 마, 하지 말아요? 우리 청소하는 중이었거든요?”

  “힘도 안 주고 있으면서 뭘 하지 말래? 갑시다, 부주장님.”

 

 

  차일까 봐 무서웠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 어느새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보쿠토 씨가 실실 웃는다. 하체를 은근하게 뭉개다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안는다. 보쿠토 씨에게 번쩍 들려 안겼다는 게 웃겨 헛웃음이 난다. 허공에 달랑 들린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내려놓으래도, 역시 보쿠토 씨는 그런 건 들어줄 줄을 모른다. 누가 말려, 진짜. 달려드는 입술을 기꺼이 받아주면,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체육관에서 다시 대리석 바닥의 우리 집 다용도실로 돌아 온다.

 

 

 

 

 

 

 

 

  결혼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오래 생각한 결혼이니 준비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만 생각만 하던 것을 현실로 옮기는 게 제법 일이었다. 절차가 많고 복잡한 건 각오한 바였지만, 직장을 다니며 준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이 많은 나를 배려해 보쿠토 씨가 대부분을 처리했다. 결혼은 둘의 이벤트이니 똑같이 반을 갈라서 하자고 해도, 그럼 아카아시는 하고 싶은 걸 말만 해달라고 했다. 상상은 내가, 실행은 보쿠토 씨가 하는 말도 안 되는 결혼식 준비였다. 부일지도 제대로 못 쓰던 보쿠토 씨는 메모장 가득히 해야 할 일을 리스트업 해 처리해가고 있었다. 손바닥 반만 한 휴대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리스트 앞의 동그라미에 칠을 하는 게 요즘 보쿠토 씨의 사소한 즐거움이었다. 식 정도는 재밌게 하고 싶다며 청첩장도 주변에 부탁해 특별하게 만들자고 했고, 입을 옷도 아버지의 오랜 거래처에서 신경 써서 맞추자고 했다. 보쿠토 씨가 결혼식 예산안이라고 짜둔 걸 보고 헛웃음을 쳤다. 내가 지금 자릿수를 잘못 센 거 맞죠? 하니 제대로 센 거 맞단다. 자기 자신을 좀 더 믿어보란다. 잔뜩 신난 저 사람을 말릴 재간도 없었고, 솔직해지자면 나는 저 사람의 저런, 이 사랑에 조금도 재지 않는다는 점을 사랑했기 때문에, 한 번뿐인 식에 있어서만큼은 보쿠토 씨의 안목과 선택을 믿기로 했다. 물론 너무 오버하는 것들이나 보쿠토 씨의 리스트 중 실없는 것들, 예를 들어 ‘아카아시한테 매일 뽀뽀해주기.’, ‘누나들한테 아카아시 차 바꿔 달라고 하기.’ 같은 건 내 선에서 몰래 정리했다. 옆에 끼고 부일지 쓰게 시키던 때보다야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왔어?”

  “저녁 하고 있었어요? 내가 해준다니까.”

  “금요일이잖아. 금요일엔 아카아시는 쉬세요.”

 

 

  퇴근 후 귀가하니, 현관까지 달려 나온 보쿠토 씨와 맛있는 냄새가 반긴다. 내 머리를 만져주고 가방을 받아주는 손에 물기가 묻은 걸 보니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쿠토 씨는 요리는 제법 하면서 칼질은 영 서툴러서 자꾸 손을 다치곤 했다. 배구 하는 예쁜 손 다칠까 봐서 요리는 못 하게 했는데도 꼭 집에 있는 날이면 내 입맛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두곤 했다. 내가 집에 돌아오는 시간에 맞추어 준비를 시작했는지, 이미 식사 준비는 대강 끝나있었다. 국만 퍼서 놓으면 된다며 돕겠다는 나를 밀어낸다. 거실 바닥이며 소파 위에 카탈로그와 메모지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니 저녁 준비 전까진 또 한참을 식 준비에 여념이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걸 손으로 추슬러 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린다. 부산떨며 인덕션 앞에 붙어 국의 간을 보고 프라이팬을 한 번 뒤집는 보쿠토 씨의 등을 바라본다. 언제나 든든했던 그의 등이었지만 곧 애인이 아닌 남편이 될 보쿠토 씨의 등은 유독 든든했다. 항상 내 앞을 지켜주는 등이었고, 혹은 내가 넘어지면 언제든 나의 뒤로 와 나를 안아주는 등이었다. 새삼스레 보쿠토 씨의 등이 너무 든든하고 사랑스러워,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딱딱고 넓은 등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만으로 금방 위로가 된다. 직장에 치였던 일주일은 보쿠토 씨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엄마야? 아카아시, 왜? 저녁 말고 다른 거부터 먹게?”

  “그냥, 보쿠토 씨가 좋아서요.”

  “왜에. 회사에서 속상한 일 있었어? 편집장이 또 못살게 굴었어?”

 

 

  저 사람은 내가 등에 얼굴을 비비며 엉겨오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을 알아챘다. 보쿠토 씨가 등 뒤로 손을 뻗어 내 몸을 토닥인다. 다정한 손길과 단단한 등이 좋아 더욱 엉기며 응석을 부려도 싫은 내색 없이 나를 토닥이며 이유를 묻는다.

 

 

  “짜증 나, 진짜. 편집장도 자꾸 못살게 굴고, 일정은 자꾸 꼬이고. 특집은 또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맨날 회의하고. 맨날 더 재밌는 거 가져오래. 지들이 하던가.”

  “그랬어? 세상이 아카아시를 못살게 굴었어? 진짜 나쁜 놈들이네. 회사 없애줄까?”

  “응. 회사 터뜨려줘요. 나 회사 안 다닐래.”

 

 

  자기는 간이 센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단지 나를 위해 간을 맞춰둔 저녁 식탁도, 저녁 식사 내내 내가 짜증을 부려도 정말 속상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대꾸해주는 것도, 다 좋았다. 생각하다 보면 또 웃음이 나고 말았다. 고등학생 땐 부주장을 그렇~게 못살게 군다고 선배들이고 감독님이고 늘 보쿠토 씨에게 잔소리했었는데, 다 커서 보니 되려 상황이 역전됐다.

 

 

  “웃네? 봐봐,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저 다정한 얼굴을 보고, 저 든든한 등을 보고 어느 누가 고등학생 때처럼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못살게 군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고.

 

 

 

 

 

 

 

 

  고등학생 때 보쿠토 씨는 늘 응석받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금방 풀이 죽어서 다시 기 세워주려면 여러 명이 얼러야 하는 것도, 텐션에 응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금세 흥이 떨어져 버리는 것도 그랬다. 확실히 그때의 보쿠토 씨는 좀 감당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우리의 연애 소식을 들은 후쿠로다니 선배들은 하나같이 ‘아카아시, 괜찮겠어? 물론 보쿠토 정말 좋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괜찮겠어?’ 하는 반응을 보였다. 죄 예전 일이다. 보쿠토 씨는 고등학교 졸업 즈음에는 그런 구석으론 몰라볼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땐 성인이 될 즈음이면 초등학생이 어느 날 키가 훌쩍 크듯, 중학생이 사춘기를 겪듯 별일 없이도 성숙해지는 줄 알았다. 막상 내가 졸업을 했을 때, 더는 청소년으로 불리지 못하게 됐을 때가 되어서야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에 올라갔을 때, 보쿠토 씨는 이미 원하는 팀이라면 어디든 입단할 수 있는 주목받는 선수였다. 고교리그에서도 물론이었지만, 주목도 자체가 달랐다. 마음 한구석에선 그게 제법 무서웠다.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꼬마 애 같았고, 보쿠토 씨는 이미 정상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그 사람의 그 차이가 무서웠다. 게다가 내가 더는 배구를 하지 않으니, 앞으로도 코트 안에 있을 저 사람에게 더는 내가 중요하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공동의 추억이 나에게 더 소중해질까 봐. 그래서 저 사람이 나를 조금 덜 사랑할까 봐서. 같이 있을 때도 에이전시나 구단 등 보쿠토 씨를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에게서 오는 전화로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기 힘들 정도였다.

 

 

  안 받아도 돼요?

  지금 우리 데이트 중이잖아.

  받아요.

  싫어. 왜 내가 너랑 있는데 다른 데 시간을 써야 해?

  고집 좀 부리지 말아요.

 

 

  테이블에 올려둔 보쿠토 씨의 전화기가 왕왕 진동했다. 보쿠토 씨는 보쿠토 씨대로 바빴고, 나는 학교에 적응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수많은 고민이라던가, 현실의 스트레스 같은 걸로 그때의 나는 자주 보쿠토 씨에게 짜증을 냈다. 저 사람이 나를 덜 사랑하게 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나를 계속 사랑한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했던 것도 같다. 그날 데이트에서도 내가 좀 딱딱하게 굴어서 분위기가 얼어붙은 차였다. 그래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손을 꼭 붙잡고 카페에 앉았다.

 

 

  배구 계속 할거잖아요. 그럼 오는 전화도 좀 받고 해요. 중요한 게 뭔지 생각을 하란 말이에요, 나랑은 다음에도 만날 수 있고.

  아카아시, 지금 나한테 네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너, 그렇게 얘기하지 마. 나한테는 무조건 아카아시가 우선이야. 배구보다 나보다 더.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다분히 속이 상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나쁘게도 이런 식으로 보쿠토 씨의 사랑을 확인받는 게 좋았다. 이상한 불안은 매번 이런 식으로 풀어졌다. 내가 저 사람에게 소중하다는 걸 확인받는 이런 순간들에서. 내가 알량한 안도감에 입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푹 숙이면 그새 표정을 풀고 밉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저 사람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른 채 더 넓은 사회에 버려진 나의 뒤에, 그리고 앞에, 늘 옆에, 나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는 저 사람이 있어서.

  이제는 스물보다 서른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말도 안 되는 응석을 버리지 못했다. 내 세상에서는 아카아시가 최고, 최우선이니까 아카아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보쿠토 씨는 늘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를 자꾸 응석받이로 만들었다. 내 버릇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은 전적으로 보쿠토 씨 책임이었다. 한번은 이 얘기를 했더니 그럼 자기가 책임질 테니 평생 응석이나 부려달랬다.

 

 

 

 

 

 

 

 

  식을 며칠 앞두고, 회사에서 배려를 받아 일주일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보쿠토 씨는 드디어 ‘백수인 내가 아카아시를 독차지할 수 있게 됐군!’하고 좋아했다. 비시즌에도 쉴 틈 없이 바쁜데 다 미뤄둔 걸 내가 모를 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함께 있는 평일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 결혼식은 날짜만 기다리면 됐다. 보쿠토 씨에게 힘내줘서 고맙다며 애교스럽게 입을 맞췄다가 겨우 일어났던 침대로 다시 엎어진 건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내내 살을 맞대고 있다가 해가 지고 나서야 겨우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걸 모두 한 보쿠토 씨의 표정이 뿌듯해 보여서 등을 꼬집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잇자국이 가득한 게 뭐가 그렇게 좋다고.

  그간 열심히 먼지를 털어낸 집은 기분 탓인지 제법 광이 나고 새로워 보였다. 가구 중 몇 개를 새로 들이기도 했고 배치를 바꾼 곳도 있었다. 몇 년을 같이 살던 집이 제법 신혼집 태가 났다. 옷을 챙겨입을 기운도 없어 속옷 한 장씩을 입고 이불을 둘둘 만 채로 거실 창가로 나왔다. 이불 속에서 보쿠토 씨 품에 안겨 해가 넘어가는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봤다. 도쿄의 저녁 도로는 차와 사람으로 붐볐다. 창문에 비친 보쿠토 씨는 창밖이 아닌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창을 통해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미소 짓는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언제나 나와 같은 속도로 내 눈을 보며 걸어주는 저 사람은 사랑이 아닐까? 몇 년 전까지도 하던 고민이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던 때에.

 

 

  “아카아시.”

  “응.”

  “케이지.”

  “왜요?”

  “있잖아, 결혼이라는 거 그렇게 두근거리지 않았거든. 겨우 그런 거 없어도, 이런 법적 효력이 있는 종이 한 장쯤 없어도 우리는 계속 서로 사랑을 할 테니까.”

  “네, 맞아요.”

 

 

  봄바람이 창에 맞아 기분 좋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득한 아래에서 차들이 클락션을 울리고 옆집에선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하는지 베란다를 통해 맛있는 냄새가 타고 넘는다. 평범하고 뻔하고 아무 일 없는 풍경이다.

  창을 통해 마주 보던 시선을 돌려, 내 옆얼굴을 바라본다. 나도 기꺼이 고개를 돌려, 숨소리마저 닿을 거리에서 그를 마주 본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앞두고 나니까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아. 너무 좋아서. 네가 내 남편이 되고, 우리를 축복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류 한 장에 너와 네 이름이 같이 올라간다는 게.”

  “보쿠토 씨.”

  “응.”

  “저 사랑해요?”

  “응. 다 줘도 모자를 만큼 사랑해.”

  “나도 사랑해요.”

 

 

  꼬박 몇 년을 만났지만, 아직도 저 사람은 사랑한다는 한 마디를 뱉는 걸 그렇게도 어려워했다. 고등학생 때의 고백도 그랬고,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만 번은 뱉었을 사랑한다는 말도 매번 벅차다 말했다. 그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는 쪽이야말로 전생과 그 전생에서 모두 덕을 쌓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보쿠토 씨는 나를 향한 그 엄청난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웃기는 사람이라니까. 보쿠토 씨가 졸라서 결혼하나요, 우리? 나도 당신 엄청 사랑해요. 결혼 안 해줬으면 울면서 결혼해달라고 따라다녔을 거야.”

  “진짜? 아카아시, 나 사랑해?”

  “처음 듣는 얘기처럼 놀라네?”

  “들어도 들어도 설렌단 말야.”

 

 

  그리고 꼬박 몇 년을 만났지만, 아직도 저 사람은 나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그렇게 그때의 소년처럼 떨었다. 마음이 간질거리고 믿기지 않는다며. 아직도 처음처럼 이 사랑이 울렁거린다고 말했다. 보쿠토 씨에게 있어 나를 향한 자기의 사랑은 당연한 거면서, 내가 하는 이 사랑은 늘 감사한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나랑 왜 결혼까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보쿠토 씨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요.”

  “응, 그건 맞아.”

  “나도 가끔은 내가 미워 죽겠는데, 보쿠토 씨는 한 번을 나를 안 미워하잖아.”

  “어떻게 내가 널 미워해?”

 

 

  여전히 시선은 잠시도 나에게서 떨어뜨리지 않는다. 맑은 눈 만큼이나 마음이 맑은 사람이었다.

 

 

 

 

 

 

 

 

  가끔은 내가 너무 미운 순간이 있다. 사소하게는 며칠 전 아침에도 늘 타고 내리던 버스에서 한 정거장 늦게 내렸을 때도 그랬고, 실수로 자리에 커피를 쏟았을 때도 그랬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으며 눈이 점점 낮아지는 순간에도 그랬다. 성인이 되자마자부터 아무도 모르게 넣어왔던 소설들은 전부 좋은 소식 하나 없이 기각되었다. 글로 먹고사는 건 나의 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오래전에 체념했던 차였다.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직업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취업마저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게 그렇게 힘들었던 때가 있다. 이 자괴감을 차마 나에게 돌리기도 힘들었던 나는, 대신 그 간사한 감정을 보쿠토 씨에게로 죄 돌렸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자꾸 이 사랑을 의심했다. 술이라도 취한 날이면 당신은 이렇게 잘 사는데 내가 당신 발목을 잡을 수 없다고 마음에도 없는 미운 말을 했다. 학생 신분을 벗어야 한다는 건 끊임없이 세상에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걸 못하는 조급한 마음이었다. 슈퍼 루키에서 막 블랙 자칼의 에이스가 된 그도 그만의 애로가 있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도 내가 미우니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도 나를 미워하길 바랐던 자기 파괴적인 시기였다.

 

 

  내가 너무 미워요. 그래서 보쿠토 씨도 나를 미워했으면 좋겠어요.

 

 

  힘이 들 법도 했다. 아무리 단단한 보쿠토 씨여도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보쿠토 씨여도 못 견딜 법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지는 순간을 모른 척하고 싶을 만도 했다. 게다가 이건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어린 나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아카아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아카아시가 지금 조금 돌아가서, 그래서 스스로가 미울 수 있어. 하지만 그러지 마. 돌아가도 괜찮아. 어떨 땐 멈춰 있어도 괜찮고. 그래도 아카아시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하지 마. 부탁할게.

  내가 어떻게 당신을 계속 만나요. 내가 이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한테 사랑해달라고 말해요?

  헤어지자고 말해도 좋아. 그런데 지금은 안 돼. 네가 만약 내가 미워진다면… 그때는 슬프지만 받아들일게. 하지만 네가 미워서 나와 헤어지는 건 안 돼. 부탁이야, 아카아시.

 

 

  잘 풀릴 거라는, 지금 경험이 나중에 네 밑거름이 될 거라는 가벼운 위로가 아니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괜찮다는 말도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차라리 나를 미워해도 좋으니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몇 번이고 고쳐 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박박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면, 보쿠토 씨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그걸 죄 주워와 조각을 맞췄다. 내가 술에 취해 세상이고 나고 당신이고 미워 죽겠다고 주먹질이라도 하면 그걸 다 맞아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가 혹시 나쁜 짓이라도 할까 봐 오사카 구단에서 도쿄 집을, 그 먼 거리를 오가며 나를 살폈다. 사랑이 마주 보는 게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언제나 내 눈을 보며 늘 같은 속도로 걸어주는 저 사람은 사랑이 아닐까? 불안한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지었다. 사랑이라고. 내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고민도, 그 사람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고민으로 끝났다.

  내가 직장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말 많은 보쿠토 씨는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씹었다. 축하한다는 짧은 문장 안에 자꾸 물기를 묻혔다.

 

 

 

 

 

 

 

 

  “내가 보쿠토 씨를 많이 사랑해요.”

  “그래?”

  “가방에서 지난달 영수증이 나와서 꼭 한 번은 뒤집어줘야 하는 것도 사랑하고, 나 일하고 있으면 꼭 옆에 와서 책을 읽는 것도 사랑하고, 섹스할 때 내 몸 위로 땀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도 사랑하고, 먼저 먹어도 되는데 밥이 다 식을 때까지 나를 기다리는 것도. 다 사랑해요.”

  “그래?”

  “그래도 보쿠토 씨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못 할거예요.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해.”

  “내가 아카아시를 더 사랑한다고? 아닐걸? 결혼도 먼저 하자고 해놓고는.”

  “너무 결혼 얘기를 안 꺼내길래 이러다 다른 놈이 채갈까 봐 선수 쳤을 뿐이에요.”

 

 

  도쿄의 밤은 시끄럽지만, 우리의 집은 고요하다. 고요하게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체온을 느끼며, 심장박동을 느끼며, 사랑을 느끼며.

 

 

  “아카아시는 나를 너무 사랑해.”

  “맞아요.”

  “맨날 엉엉 울면서 다른 사람 앞에선 울지도 않잖아. 힘든 티도 안 내면서 꼭 나한테만 응석 부리고.”

  “놀리는 거 같은데요, 그거.”

  “아니야. 그런 거 전부 아카아시가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잖아. 매사 담백하면서도 꼭 나한테는 아이처럼 구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그리고 결혼 얘기도 아카아시가 먼저 꺼낸 거다? 내년에 결혼하자고 작년에 분명 말했다? 역시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분명 그랬다? 나 그다음에 구단 들어가서 자랑했어. 아카아시한테 청혼받았다고.”

  “그걸 누가 청혼으로 쳐요. 그리고 각색이 조금 들어간 것 같은데요. 보쿠토 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게 아니라, 보쿠토 씨랑 결혼하고 싶으니 괜찮으면 조절해보자고 했거든요?”

  “아무튼간에, 아카아시는 자꾸 내가 자기를 너무 좋아한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카아시도 나를 너무 좋아해. 아카아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의 작은 사랑에도 감사할 줄 아는 저 사람이 좋다. 내가 말도 않고 내심 원하는 것조차도 다 눈치채고 들어주는 저 사람이, 나의 손톱만 한 상처에도 자기 배가 찢어진 듯 호들갑을 떠는 저 사람이, 나의 이 작은 사랑을 사랑한다. 나에 관한 것이라면 늘 기민한 사람을 놓치긴 싫었다. 결혼하자는 이야기는 분명 내가 먼저 꺼낸 게 맞지만, 청혼을 한 건 아니었다. 함께 산책하러 나간 주말에, 이 사람과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저 단단한 손을 잡고 든든한 등에 기댈 수 있는 게 좋아서, 어제도 퇴근하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 온 뻔한 저 사람이 좋아서, 괜찮으면 결혼하자고 말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몇 달 전, 보쿠토 씨에게 청혼을 받았다. 이미 결혼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양가 인사까지 마치고, 심지어 식장과 날짜까지 잡은 상태였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은 매일 삶에서 확인하는 부분이니 청혼 같은 거 없이 가자는 내 얘기는 듣지 않은 게 분명했다. 속이 물속 보듯 빤히 보이는 사람이기에 뭘 꾸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날은 종일 연락이 안 됐다. 걱정은 되었지만 역시 ‘무슨 일 생겼을까?’ 보다는 ‘무슨 짓을 꾸미는 걸까?’ 쪽이었다. 회사 로비에서는 코노하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쿠토 씨의 차를 끌고 온 코노하 선배는 같이 갈 데가 있다며 조수석에 나를 태웠다.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너네는 꼭 나 결혼할 때 축의금 많이 내라?

  보쿠토 씨가 저 데려오래요?

  네, 당신 애인 하는 짓이 그렇죠. 가시죠, 후배님.

 

 

  코노하 선배가 아직도 뻔한 길을 따라 운전해 나를 내린 곳은 후쿠로다니의 운동장이었다. 졸업 후 오랜만에 들른 학교는 새 화단도 생기고 색도 새로 칠해 몰라볼 것처럼 변해있었다. 하지만 부활동과 자율연습까지 모두 마치고 돌아가던 그 시절의 온도와 기분 만큼은 그대로였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진 아시겠죠, 후배님?

  돌아가시는 거예요? 선배 차도 안 가지고 오셨잖아요. 같이 타고 가요. 식사도 하시고.

  내가 너네 사이에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지겨운 놈들아. 됐고, 꼭 제 결혼식에 축의금 많이 내세요, 후배님? 적금 지금부터 들어라?

 

 

  코노하 선배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로, 늘 함께 자율연습을 하던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에 새로 깐 듯한 길에서 독한 아스팔트 냄새가 올라왔다. 흙바닥을 밟던 고등학생 아카아시의 심정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꾹꾹 디뎠다.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불이 전부 켜진 체육관의 무거운 문을 열면, 날이 갈수록 어깨가 넓어지고, 근육이 붙어 영 불편하다며 비싼 돈 주고 맞춰놓곤 몇 번 꺼내 입지도 않던 정장까지 갖춰 입은 보쿠토 씨가 그 어떤 날처럼 떨고 있었다.

 

 

  뭐예요, 보쿠토 씨?

  아카아시, 할 말 있는데 들어줄래?

 

 

  체육관 구석,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선 보쿠토 씨가 나를 부른다. 나는 기꺼이 그의 앞으로 간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후배들이 누볐을 체육관은, 이제 몇 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 그 순간이 된다.


 

    아카아시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알고 있어. 결혼해줘!

 

 

  내가 그의 앞에 가까이 서자, 그 사람은 여전히 그때처럼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뻔하게 무릎을 꿇고, 뻔하게 비싼 반지를 내게 끼워주며 나에게 청혼했다.

 

 

  누가 결혼하자는 말을 이렇게 뻔뻔하게 해요?

 

 

  눈물이 났다. 결혼 날짜까지 뻔하게 다 잡아놓은 사이에 저런 뻔뻔한 청혼을 받는 게 기뻐서, 눈물이 났다. 또 여기저기 부탁을 해 체육관을 빌렸을 보쿠토 씨의 성의도, 다른 곳이 아니고 여기여야만 한다고 말했을 것도 다 기뻤다. 보쿠토 씨가 그때 했던 고백처럼, 나의 대답도 그때와 같지만, 내가 그때보다 보쿠토 씨를 더 사랑해서, 그리고 보쿠토 씨가 그때보다 나를 더 사랑해서 눈물이 났다. 유행이 다 지난 진부한 드라마를 보듯 뻔한 전개에 눈물이 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나는 역시 저 사람의 그런 진부한 점을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뻔뻔해도 결혼은 해주는 거지?

 

 

  우느라 앞도 제대로 못 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내가 그때처럼 ‘그럼요’ 한마디를 할 때까지, 보쿠토 씨는 나와 같은 속도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보쿠토 케이지가 되시는 아카아시 씨, 지금 심정은 어떠신가요?”

  “빨리 유부남 되고 싶어요.”

  “지금 그 말 조금 야한 것 같아.”

  “변태.”

  “변태 남편은 별로인가요?”

  “아뇨, 담백한 쪽이 오히려 별로죠.”

 

 

  내일이 결혼식이니 일찍 자자며 누웠지만, 우리 둘 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평소보다 길어지는 침대 위 대화를 끊기 싫었다. 종일 피부 관리며 최종 점검이며 정신없이 보냈지만, 오히려 꿈같았다.

 

 

  “역시 내가 아카아시 코타로가 되는 쪽이 좋았을 것 같아.”

  “왜요?”

  “그럼 등에 아카아시라고 쓰고 배구를 할 수 있잖아. 그러면 그걸로 코트에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보쿠토 씨가 만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었으면 인기 없었을 거예요”

  “왜? 비현실적으로 잘생겨서?”

  “사람이 너무 뻔해서요.”

 

 

  보쿠토 씨는 참 뻔하고, 진부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자극적이라기보다는 진부함에 가까웠다. 누구나 보쿠토 씨에 대해서 유별나다고 말하지만, 보쿠토 씨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유별나다기보다는 차라리 진부한 편이었다. 그 사람은 연애에 있어서는 너무 뻔했다.

 

 

  “뻔해?”

  “뻔하잖아요, 사람이. 뻔하게 로맨틱해. 보고 싶다고 말하기 전에 눈앞에 있지, 고등학생 때 했던 고백 그대로 청혼하지, 내가 못되게 굴어도 화 한 번을 안 내지.”

  “그럼 내가 만화나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주인공 말고 아카아시의 남편이라서 다행이야. 독자나 시청자 평 때문에 자극적인 결말 찾아가느라 아카아시한테 상처 안 줘도 되잖아.”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의 그런 뻔한 점을, 만약 만화나 드라마였으면 ‘잘 팔리지 않았을’ 그 사람의 연애 방식을 사랑한다.

 

 

  “그럼 다음 생에는 알고 보니 배다른 형제라서 세상의 질타를 받는 사랑이라도 할까?”

  “됐거든요?”

  “둘 중 뭐가 됐다는 거야? 나 지금 아카아시한테 다음 생에도 결혼하자고 말하는 건데?”

  “자꾸 진부한 말 할래요?”

  “진부한 게 어때서? 나는 아카아시랑 진부한 거 많이 하고 살래. 진부하게 고등학생 때 했던 고백 몇 년 후에 청혼으로 똑같이 하고, 진부하게 잡던 손 오늘도 잡고, 내일도 잡을래. 이미 지겹게 많이 한 사랑한다는 말도, 매일 할래. 매일 똑같이 감사하면서, 똑같이 네가 내 애인이고 남편임에 감사하면서, 뻔하게 살래.”

  “정말로, 많이, 좋아해요.”

  “알고 있어. 그래도 앞으로도 많이 말해줘야 해?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응. 알았어요.”

 

 

  지금 울어버리면, 내일 식장에서 제일 못생긴 신랑이 될 것 같아서 꾸역꾸역 울음을 참는다. 보쿠토 씨의 넓은 품에 기대어서. 너무 단단해서 내가 밀어내도 밀리지 않을, 그 품에 기대어서. 내가 울컥한 걸 또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천천히 내 등을 쓸어 내린다.

 

 

  “아카아시는 내가 아카아시를 더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닌 것 같아. 바보야. 네가 나보다 내 경기 실적을 더 잘 알고, 내가 자고 있으면 깰까 봐 머리도 안 말리고 기다리면서도, 맨날 뻔하다 하면서도 뻔한 거 해오면 그렇게 예쁘게 웃으면서.”

  “울리지 말아요. 나 내일 제일 잘생긴 신랑 할 거란 말야.”

  “아카아시가 그러면 나 또 뻔한 소리 해야 되잖아. 속상해서 울 일 없게 만들게. 너무 좋아서 우는 것만 하게 만들게.”

 

 

 

  만약 우리의 사랑이 만화나 드라마였다면, 아마 경쟁사보다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릴 수도, 악플 없이 호평을 받으며 최종화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이별 한번 없이, 제대로 된 싸움 한번 없이 결혼에 도착한 우리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는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현대인은 우리의 뻔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약점을 잡힌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떼어내고 흑막과 결혼을 했다가 살인을 저지르고 돌아와 다시 다른 주인공과 결혼하는 쪽을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러면 어떠려고. 보쿠토 씨 말 대로 우리는 만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다. 매워서 눈물 나는 음식 말고, 샐러드처럼 뻔하고 진부한 사랑을 이대로 이어가는 쪽이 우리의 행복이다. 언제나 내 뒤에서, 또 내 앞에서 나를 받쳐주는 등을 가진, 언제나 내 눈을 보며 내 속도에 맞춰서 걸어주는 저 사람과 그저 고민 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밤이었다.

 

 

  내일이면 내 애인이 아닌 남편이 될, 진부한, 그래서 나의 전부인 저 사람과 함께.

 

-fin-




즐거운 봌앜절 KIN거운 월요일 되십쇼,,

보쿠아카는 위기 없는 뻔한 사랑과 결혼을 해라,,,


@HQ_challe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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