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하늘령


* 괴물 원작기반

* 한주원(29)X이동식(42)


2022. 1. 31. (D-5)


" 동식아, 이번 소장님 기일때 말야. "


바글바글 끓는 찌개를 그릇에 푸짐하게 건더기를 뜨며 무심히 제 이름을 부른 오지화의 말에 동식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본다. 많이 먹어라하고 제 앞에 그릇을 놓아주고도 답지않게 머뭇, 시간을 끄는 지화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한참 가만히 있자 뒤에서 물주전자를 들고 나타난 재이가 툭 등을 친다. 아저씨 숟가락 들어요. 언니도 참 뭐 그리 어렵다고 말을 못해. 어린아이 손에 쥐어주듯 제 손에 은색 수저를 꽉 쥐어준 재이에게 이번에 시선을 맞춘 동식이다. 아저씨 이번에 모이기로 한 날. 한 사람 더 부르면 어떨까해서. 내가 지화언니에게 먼저 말했어. 그제야 두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동식이 알거 같아 손에 쥔 수저로 빨갛게 고인 국물을 사악 긁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불러. "


어? 뭐라고 동식아? 제 대답에 의외라는 듯 크게 눈을 뜬 지화와 제 안색을 찬찬히 살피는 재이의 시선을 느끼며 후릅, 국물을 마신다. 짭짤하니 좋네. 소주 생각나고. 우리 그날엔 부대찌개 같은 거라도 포장해와서 먹을까. 재이 너 손도 덜 가게, 괜히 낮부터 고기 굽는다고 불 피우지말고 간단하게 먹자.  씨익 웃으며 중얼중얼 거리는 동식의 말에 두사람은 답이 없다. 거 왜 자꾸 눈치들을 보고 그러실까. 가게도 넓은데 한 사람 더 자리 채우면 좋지. 뭐. 그러니까.


" 부르자고. 한주원. "




...


실은 제가 먼저 주원에게 연락을 해볼까 싶기도 했다. 제 두 손에 차가운 수갑을 채우고 움켜 쥔 뒤 뚝, 뚝, 젖어 손 안으로 고이던 한주원의 뜨거운 눈물이 때로 떠오르면 괜히 두 손을 주억거려보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선뜻 그럴 수가 없는 이유는. 재이네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쇼파에 몸을 뉘이고 저릿한 손바닥을 다시 쥐어보는 동식이다. 아저씨..., 아직도 상배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시큰한 일이다. 


' 동식아. 내가 또 뭐해줄까... ? '



바보 같은 양반.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까. 동식은 스물에 만난 저를 범인으로 몰아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을때 상배가 아버지의 빈소에 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숨 좀 쉬고 살고 싶다며. 제가 여동생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믿어주려면 대체 뭘 해야 좋겠냐며. 꺽꺽이며 숨이 넘어가라 우는 저를 붙잡은 상배가 다짐하듯 한 말들이 무너지던 제 삶을 다시 다질 수 있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줬는지. 넌 내가 해줄거야. 내가 내 인생 걸고 다, 다 내가 해줄거야. 제 어깨를 감싸고 하는 상배아저씨의 다짐에 겨우 무너지는 발을 딛었다.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란 제 부탁에도 기어이 저를 위해 나서다 죽음에 이르러. 남은 인생까지 걸어버린 남상배의 첫번째 기일은 설명절 연휴를 갖 지난 주말, 토요일이다. 백색소음처럼 틀어놓은 티비에서 설연휴를 맞아 고운 한복을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 오늘 지화랑 재이가 기어코 저를 밖으로 불러낸 것도 그 이유가 있었을 거다. 내일이 벌써 설이구나. 끔벅,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화면에 고정하던 동식은 어느새 옛 기억에 잠긴다


' 어이구 우리 동식이. 자자 한 그릇 혀. 올해 네가 그러니까 .. '

' 아저씨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무슨 제 나이를 물어요 '

' 이놈아. 내가 첫사랑만 성공했으면 네가 내 아들 나이여. 늙긴 네 놈이 뭐가 늙어! '


필요 없대도 기어이 제 집까지 쫓아와 한우를 넣어 국물맛이 끝내준다며 한 그릇 가득 퍼주던 상배의 떡국. 설이나 추석이나, 혼자인 저를 찾아와 밥을 먹이고 살피는마음을 모르지 않아 뽀얀 국물을 입에 넣고 후릅소리를 내는 동식이다. 꼭꼭 하얀 떡을 씹어 무는 제 얼굴을 보고야 그제야 제 수저도 움직이는 상배다. 아저씨 이제 고만하셔. 매번 이렇게 찾아오셔서 먹이고, 살피고. 제가 아직도 이십도 초반 애새끼 같습니까. 나 올해 29이고. 곧 앞자리 바뀌는 30이거든요. 


' 알면 늙은 나 대신 네 놈이 예쁜 색시 얻어다 울 집 와서 밥 같이 먹든가. '


푸핫,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동식의 얼굴을 상배가 마뜩잖게 본다. 아 아저씨도 못간 장가를 나더러 가라고? 순서가 있지. 그리고 무슨 소리야. 세상 어떤 여자가 나한테 ... 시집을 오나. 말도 안되는. 제 말에 또 상배가 와락 얼굴을 구긴다. 동식이 네가 어뗘서! 내가 딴 건 몰라도 네 놈이 장가만 가면 다 해줄텐디! 파다닥, 국물까지 튀게 수저를 휘두르는 상배의 말에 웃음을 지우고 이번엔 동식이 삐죽 입을 그어올린다. 뭘 다 해주실건데. 뭐 집이라도 한채 해주시게? 하는 농에 상배가 암만,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여 정말로 떡이 입 밖으로 다시 튀어나올뻔한 동식이다. 와, 아저씨 나한테 왜 그래? 나 좋아해? 하는 동식의 말에 딱, 이마에 불이 난다. 아 먹던 걸로 때려.., 이 놈이 쉰소리 말고. 잘 들어. 집한채 딱 줄테니께. 이번엔 몰러도 다음에 좋은 사람 나타나면 그게 누구라도 꼭 붙들고 내 앞에 오는겨. 그리고 밥 잘먹고, 잠 잘자고, 똥 잘싸고. 그렇게 설이나 추석때 한번은 나한테 뵈줘야 하는겨. 내가 네 놈 이렇게 거둬먹인 만큼. 알긋어?, 꽤 오래 사귀던 동식의 연인과 헤어진 것을, 그리고 그 이유를 상배가 또 기어이 알아버린 모양이다. 이번엔 몰라도 다음엔 꼭. 이라는 상배의 말에 동식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떡을 꼭꼭 씹는다. 아 임마 대답!! 하는 상배의 호령에 또 한대 얻어맞기 전에 동식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동식은 재이가 굶지말고 꼭 끓여먹으라고 챙겨준 한우거리를 떠올린다. 냉동실에 저번에 지훈이가 가져다 준 가래떡도 있고. 내일은 처음으로 상배없이 혼자서 떡국을 끓여먹어봐야겠다. 뉘었던 몸을 일으켜 촤아아, 바가지에 물을 받고 냉동실 문을 열어 꽝꽝 언 가래떡을 풍덩 물에 담근다. 일단 불려야겠지. 그런데 이렇게.. 끓이는 거 맞나?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설인데, 한주원은 ... 떡국이나 먹으려나. 가까이 살면 내가 좀 끓여다 줬을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동식은 대충 물에 풍덩 담궜던 긴 가래떡 덩이를 다시 건져 올린다. 이번엔 몰라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주원에게 떡국 한그릇 정도 끓여줄 기회가 생길까. 그럼 대충 말고 좀 제대로 된 걸 끓여주고 싶다. 꾹꾹 검색창에 동식이 오랜만에 글자를 넣는다 

[ 맛있는 떡국 끓이는 방법 ] 



***


2022. 2. 1. (D-4)


" 왠일이야 "

[ 왠일은, 우리 주원이. 설인데 새해복 많이 받으라고 덕담 전화했지. 야 그러고보면 이런 날엔 동생이 형한테 먼저 해야하는 거 아니냐 ]

" ... 나 바빠. "

[ 주원아! ... 그, 그래도 명절인데 한번.. 가봐야되지 않겠니? ]

" 권검사님, .. 아니 형 "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주원의 목소리에 수화기 건녀편 권혁이 작게 한숨을 쉰다. 그래. 알았어. 그냥 해본 말이야. 뭐 어차피 아버님이 면회 거부 중이신것도 들었고. 그래도 모처럼 명절이니까. 가족이니까. 혁의 말에 주원이 신경질적으로 꽉, 핸들을 쥔다. 내가 가족이 있었던가? 되묻는 주원의 말에 수화기 너머 혁이 또 말이 없다. 새삼스럽게 친아들도 외면하는 사람을, 명절이라고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을 권혁은 피한방울 안섞인 그저 10여년전 과외교사와 학생으로 주원과 만난 사이이지만. 시간으로 따지고 보면 곁에서 주원과 그 아버지를 가장 오래 본 사람일 것이다. 그래 주원이.. 화 아직 안풀렸구나. 그래 형이 좀 빨랐나보다. 그 아버님 항소 소식 전했을때 네가 별 말 없길래 난 좀 괜찮아졌나 해서. 뭐 여튼.. 잘 지내고 있는거지? 거기 강원도는 눈 많이 온다던데. 한주원 평생 볼 눈 거기서 다 봤겠네- 눈치 빠르게 말을 돌리는 혁의 목소리에 주원도 굳히고 있던 입술끝을 조금 내린다. 


" 어. 잘지내. 형은... ? "


주원이 되물을거라 생각을 못했는지 턱, 숨이 막힌 듯 혁이 헛헛 웃는다. 살다보니 한주원이 이 형의 안부를 궁금해 할때가 다 있구나. 시골 살더니 사람냄새가 좀 묻었구나. 세상 반듯, 까칠하게 살아갈 도련님인줄 알았는데. 길어지는 혁의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주원이다. 톡, 톡- 핸들 위에 손가락을 튕기며 신호를 기다리던 주원은 평소보다 천천히 오른쪽으로 핸들을 꺽는다. 혁의 말처럼,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눈들이 제법 굵어지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주원아.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던 권혁의 말에 끽,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고 덜컹 멈춰서버린 주원이다. 


[ 이동식 그 사람.. 지금 만양에 있다던데 들었어? ]



그럴거라고 짐작은 했다. 집행유예와 함께 이동식이 선고받은 사회봉사 활동을 만양부처에서 담당했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으니. 둘이서 한기환, 그러니까 주원의 아버지를 체포하던 밤. 당신의 삶을 무너뜨리고도 후회의 낯조차 없는 아버지 대신 아들인 제가 경찰복을 벗고 속죄하겠다던 주원의 말에. 이동식 그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제 두 손을 내밀었지 않은가. 죗값은 죄지은 사람이 받는거야..,그러니까 한주원 경위님 체포 부탁드립니다. 덤덤한 말투와 달리 그의 옅은 눈동자는 푹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당신이 한 일은 무결하지 않으니 죄를 고백하고, 자수하라고 그에게 윽박지르던 제 스스로의 말이 주원은 이미 까마득했는데. 이동식 그는 마치 한번도 잊은 적 없다는 듯이. 그가 덜덜떨리던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아올리던 때가 생각난다. 주원아...,  많은 것들을 생략한 그의 한마디에 그 때까지 꾹꾹 밀어 삼키던 제가 차마 키우지 못했던 마음들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순서대로 찰칵이며 그의 두 손에 차가운 수갑을 채우며 형편없이 목소리가 떨리고, 울먹임이 멎지 않았던 것은. 결국 그의 두 손에 고개를 묻고 쉽게 내쉬어지지 않는 숨을 고르며 온 몸을 떨 수 밖에 없었던 것은. 



...


' 주원이 너 .. 혹시 요즘 좋아하는 사람 있니? '


고1. 다시 한국에 돌아와 시작한 생활에 빨리 적응하라며 주원에게 아버지가 붙여줬던 3살 위의 과외교사 권혁. 너 바나나 좋아하니? 그럼 사과는? 처럼 평범한 취향은 묻는 듯한 말투였지만. 작게 속삭이듯 묻는 목소리가 떨려와 제법 고민하고 묻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외를 시작한지 일년째. 그가 그 질문을 하는 이유가 짐작은 간다. 제 귀가에 관심없는 아버지 대신 항상 시간에 맞춰 꼬박 집에 들어오는 혁은 보았을테니까.  매번 집 앞에서 다른 차를 가진 남자들의 옆에서 내리를 저를. 묘하게 평소보다 저와 거리를 두고 불안한 눈빛으로 제 낯을 살피는 권혁의 밑바닥에 깔린 저에 대한 은은한 거부감이 공기 중에 전해져온다.


' 왜, 아버지한테 말하려고? '

' 뭐? 아니 그런거 아니고 난 그냥.. 조심하라고 '


조심? 무표정한 저를 보며 오히려 권혁이 더 당황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나 학교다닐때도 그런 애들 몇 있긴 했지. 여자보다 더 좋다던..., 아니 그게 아니고 그래 뭐 요즘세상에 그런 사람들 있는 거 알긴 하는데. 그래도 넌 다르잖냐. 그 아버님이 아무래도 고위공무원이시기도 하고. 한국사회에서도 그. 그게 좀 약점으로 될 수 있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치? 당황해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는 혁의 얼굴을 무심히 보며 주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마. 그런거 아니니까. 라는 주원의 대답에 혁이 크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치? 내가 오해한거지? 아이고 주원아 형이 미안하다. 괜히 그런 오해를... , 다시 참고서를 펴며 그제야 제게 몸을 가까이는 하는 혁을 보며 옆으로 하던 시선을 내린 주원이다. 권혁...,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편이네. 그치만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확인정도 였을뿐이니. 한주원이 가진 성적 취향에 대해. 여자보다 남성, 연하보다 연상, 키스와 애무는 싫고 삽입섹스는 오케이. 그 외에 사람을 좋아한 적은 단 한번도 없으니까.


...


[ 이동식 그 사람.. 보러 갈거니? 주원아? ]


한참을 말이 없는 저에게 묻는 혁의 목소리는 10여년 전만큼 거부감이 없다. 권혁은 참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한번도 이야기한 적 없는, 아버지의 면회 대신 한주원이 어디로 향하고 싶은 지 이미 알고 묻는 질문이었다. 만양파출소의 또라이 파트너였어도. 그토록 많은 일을 함께 겪었어도. 가족의 목숨을 빼앗은 가해자의 아들인 제가 피해자의 오빠로 생을 송두리째 뿌리뽑혔던 이동식을 보러 갈 수 있을까. 사죄가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그러나 그 마지막 밤 이동식이 저에게 한주원 네 죄는 없다 했으므로. 이제는 그 이유마저 흐릿해졌는데. 그런데도 오랜만에 타인의 육성으로 들은 이동식이라는 세 글자 이름에. 그의 두 손에 흐릿하게 뱉던 숨 대신 토해내고 싶던 제 마음이. 도로를 하얗게 덮어버린 눈 처럼 덮이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


2022. 2. 2.( D-3)


설익은 떡국을 먹고 체한 이동식이 식은땀을 흘리며 앓았고,

하얀 눈이 쌓인 도로에서 한참 머물던 한주원이 열감기로 앓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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