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호 선배와 하던 '연애 비슷한 것'은 두세 번의 만남으로 끝났다.

동기들 붙잡고 그 난리를 친 게 허무하게도. 그래도 손은 잡아봤는데 문제는 선배가 그 이상의 진도를 원했고 나는 남자랑 손잡아 본 적이 아빠와 남동생 이후로 처음이라 어버버하다가 선배의 속도를 못 맞춰준 거.

근데 사귀자는 말도 없이 손부터 덥석 잡고, 갑자기 뽀뽀하자고 얼굴을 들이밀면 그쪽이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밀레니엄 새천년 시대라 세상이 바뀌어서 순서 절차는 무시해도 되는 거야? 어쨌든 학교 정문 분수대 근처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슬며시 내 손을 가져가 잡은 임선호 선배 때문에 심장이 터질 뻔했다가, 곧장 턱을 잡고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선배의 가슴팍을 힘껏 밀어버렸고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에 다시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후로 연락이 없던 임선호 선배는 어느 날부터 C반 문지혜를 무릎에 앉히고 과방에서, 강의실에서, 온 학교 어디에서나 쪽쪽거리느라 바쁘더라고.

 

다행인지 그딴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2002년 6월, 온 대한민국을 뒤흔든 엄청난 초대박 흥행 이벤트가 있었으니까.

한일 월드컵, 그런데 거기에 기말고사를 곁들인.

 

"와, 교수님들 너무한다. 월드컵도 안 보시나? 눈치껏 시합 일정을 피해서 시험을 짜주셔야지."

"전설의 저주받은 이해찬 1세대 어디 가겠냐. 수능도 엽기적으로 어렵고, 월드컵에 실컷 놀아야 하는데 기말고사까지."

 

과방에서 축구광 김재우와 불만을 주고받으며 재무관리 전공 책을 파라락 넘겨보았다. 시험범위가 뭔 책 한 권 다야. 오픈북 시험일 수록 더 어렵다니까.

 

"그래도 재무관리만 치면 방학이다이가. 16강전은 편하게 볼 수 있겠다."

"이탈리아랑 붙나? 김재우 캐스터 전력 분석 좀."

"이탈리아 선수진 중에는 팔다리 여덟 개 달렸다는 설이 있는 골키퍼 부폰이 있고요, 토티, 말디니, 비에리, 델 피에로-"

"델 피에로가 잘생겼다."

"맞다, 등 번호 7번. 번호도 외웠다."

 

니들은 축구도 얼굴 따지면서 보냐? 징하다 진짜. 몰랐나? 우리 외모지상주의자다. 남슬기와 주고받으며 툴툴거리던 김재우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날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재무관리의 신 구승효가 안 보이네. 오픈북 때 어디 중심으로 봐야 하는지 재무신에게 물어보면 되는데."

"그러게..."

"너랑 친하잖아. 연락 한번 해봐. 설마 말없이 군대 간거 아냐?"

"시험 기간에 군대를 왜 가노. 도서관 근로 하던데? 저번 주에 마케팅 원론 시험도 같이 쳤잖아. 그래도 대화를 못 했더니 뭐 하고 사나 궁금하기는 하다."

"응... 연락 해보지 뭐."

 

구승효와는 동해 바다를 다녀온 후부터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걔가 워낙 바쁘기도 했고, 나는 임선호 선배한테만 정신이 팔려있었고.

그 충동적인 무박 여행을 알았다면 남슬기는 호들갑 떨면서 의미부여 했겠지. 너희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알아봤다고. ...꼭 그게 싫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해돋이 낭만 타령은 어쩌다 보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우리 둘만의 이야기가 되었다. 구승효한테는 다른 애들이랑은 확연히 다른 진중하고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애와 함께하는 일들은 어쩐지 가볍게 취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불편하다면 불편할 수 있겠지. 보통의 스무 살에게 맞지 않은 감성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 애를 밀어낸 건 아니었는데, 뜬금없이 시험 때문에 도와달라고 대뜸 말을 꺼내기엔 내가 너무 필요할 때만 승효를 이용하나 싶은 자책도 들었다. 그래서 그냥 고민하다가 재무관리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최대한 무난한 내용으로 고르고 골라 문자를 보냈다.

 

[16강전 같이 볼래?]

 




  

"여기! 이쪽이야!"

"얼른 와. 이제 진짜 시작해."

 

학교 대운동장에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대형 스크린 화면을 향해 앉아있어서 맘 놓고 양반다리 하는 것조차 좁고 불편했다. 다들 빨갛게 차려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속에서,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검은 볼캡 모자와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구승효 혼자 튀었다. 운동장 입구에서부터 돗자리 깔고 자리 잡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서 오느라 지친 표정의 승효를 잡아끌어 앉히고 모자부터 낼름 벗겼다.

 

"왜, 뭐야."

"너 혼자만 붉은 악마 아니거든? 이거라도 써."

"말을 좀 먼저 해주지? 난 네가 내 모자 가져가는 거에 트라우마 있거든."

"야아! 야. 그건 비밀로 해줘."

 

하는 거 봐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던 구승효는 벗겨낸 모자 대신 내가 손에 쥐여준 'Be the reds' 빨간 모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뚱하게 말했다.

하여튼 기억력이 너무 좋다니까. 얄미워서 흘겨주었더니 미묘하게 핏 웃는 구승효는 2주, 아니지 거의 3주 만에 만났어도 어제 보고 헤어진 사람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이런 것도 다 추억이라고 우기는 김재우가 가져온 디지털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월드컵 분위기 제대로 내게 꾸며주려 했더니 질겁을 하는 구승효 빼고 우리 셋은 저마다 악마 머리띠와 페이스페인팅을 하며 서로를 향해 낄낄거렸다.

 

"국민 여러분, 이제 주심이 휘슬을 불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대 이탈리아 16강전. 대한민국 축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엽니다!"

 

와아아! 시작부터 사람들의 열기와 함성이 기세 좋게 대운동장을 덮었다.

 

"16강은 처음인데 이겼으면 좋겠어."

"오늘 이기면 내 울거다."

 

떠들썩하게 저마다 소감을 한마디씩 하는 자리에도 조용히 화면에만 집중하던 구승효는 유독 말이 없었다. 왜 이렇게 가라앉았어. 맥주도 건넬 겸 톡톡 그 애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실래?"

"...어."

"승효야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니야."

 

그냥 이런 분위기. 좋아서. 재밌어. 친구들이랑 다 같이 응원하는 거.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건넨 맥주캔을 받아든 구승효는 눈매를 한껏 접으며 소년처럼 웃었다.

 

 

 

 

어쩜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개최국 버퍼와 압도적 응원단 수에도 이탈리아는 정말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숨 쉬듯이 반칙을 하는데 팔꿈치로 찍고 서로 옷 붙잡고 뜯고 위험하게 다리 걸고, 심판은 제대로 판정도 못하고 뭐 아주 그냥 볼만했다. 이탈리아가 전반전에 일찌감치 1골을 넣은 뒤로 후반전 끝나갈 때까지 감감무소식이니 응원하던 사람들도 과격해지면서 여기저기서 험한 말과 맥주캔 오징어 따위가 날아다니고. 응원 매너도 볼만했다.

 

"우짜노. 우리 지겠다..."

"야 끝날 때까지 끝난 거 아니거든? 축구공은 둥글어서 어디로 구를지 모르거든?!"

"심판이 미쳤네. 엉망진창이네."

"피지컬도 우위고 자꾸 경고받는데도 이탈리아 멘탈이 꿋꿋하네. 엄청 잘한다."

"뭐? 구승효 넌 누구 편이야."

"객관적으로 사실을 말한,"

 

어, 어어? 어!

 

"골! 들어갔습니다! 후반 43분 설기현 선수의 기적적인 동점 골!"

 

갑작스러운 동점골에 나와 구승효는 대화하던 그대로 굳었다. 질게 뻔하니 종료 전에 일찌감치 짐 싸서 나가려던 사람들까지 잠시 멈춘 정적.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귀가 터질듯한 함성. 우아아! 아악! 으아악! ...운동장이 뒤집힐 듯한 엄청난 광란과 제정신 아닌 포효에 다들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물론 나도.

 

"미쳤다! 진짜 미쳤다!"

"어떡해! 어떡해! 연장전 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한 소름이 쭉 관통했다. 온몸으로 아드레날린이 훅 퍼졌다. 와락 껴안고 얼굴 부비던 남슬기가 우는 바람에 페이스페인팅이 번졌는데도 마냥 웃었다. 너무 기쁘면 웃으면서 운다는 게 진짜 가능하구나. 방방 뛰던 우리 위로 김재우가 덮쳐오고, 구승효까지 끌고 와서 어깨동무 걸고 빙글빙글 끝도 없이 돌았던 기억. 나중에는 하도 돌아서 토할 것 같았는데도 마냥 좋아서 멈출 수 없었다.

 

"와, 우리 진짜 이기는 거 아이가? 8강 가나? 우승도 하나?"

"아 이깟 공놀이가 뭐라고 떨리지?!"

 

쉬는 시간 후 시작된 연장전.

대-한민국! 살면서 그렇게 대한민국을 목 터지게 외친 적이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아닐까. 대운동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했다. 이제 한 골만 더 넣는 팀이 이기는 상황.

나도 모르게 연장전 동안 옆에 선 구승효의 손을 꽉 쥐었다. 공이 선수들의 발끝에 닿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내내 점점 그 손을 얼굴 가까이 끌어당기며 간절히 빌었던 것 같아.

 

"아, 안정환 아까 페널티킥 말아먹어서 불안한데."

"우리 선수 잘못 아니거든? 부폰이 잘해서 그런 거지!"

"또 잘생긴 사람 무조건 편드냐."

"안선수 컨디션 좋아 보이는데. 이탈리아가 1명 퇴장당해서 해볼 만해."

"거봐 승효도 좋아 보인다고,"

 

어, 어어!

 

"이영표, 문전으로 올립니다. 안정환 헤딩! 골! 골이에요! 한국이, 8강에 진출했습니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물리쳤습니다!"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구승효의 말대로 컨디션 좋아 펄펄 날아다니던 안정환이 헤딩으로 골든골을 넣었다. 반지에 키스하는 선수를 보면서 내가 나라를 구한 것처럼 미쳐 날뛰었던 건 말해 뭐 하겠어. 그날 전 국민이 동시에 펄쩍 뛰는 바람에 우리나라가 1cm는 가라앉았을지도.

이겼어! 와, 이겼어! 여기저기서 불꽃과 축포가 펑펑 터지고. 북소리와 함성소리에 모두 하나가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든 옆에만 있으면 하이파이브하고 얼싸안고. 문자 그대로 어마어마한 난리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대단하다! 너무 감동적, ...엄마야!"

 

두리번거리면서 벅찬 감상을 쏟아내다가 김재우와 남슬기가 뜬금없이 키스하는 걸 봐버렸다. 갑자기 굳은 내 시선을 따라가던 승효도 그대로 얼어버렸다. 환호와 함성의 열기 한복판에서 뜻밖의 장면에 할 말을 잃은 우리 둘만 아무것도 못 하고 서로 쳐다만 볼 뿐.

 

"......"

"...우리도 저런 거 해야 되는 거 아니지...?"

 

허. 기가 차서 웃음을 흘리던 구승효가 손을 들었다. 하이파이브 자세. 최선을 다해 내 손바닥을 붙여내며 찰싹 경쾌하게 맞부딪혔다.

그리고 구승효는 그걸 놔주지 않고 그대로 당겨, 날 꼭 끌어안아 버렸다.

 

"......!"

 

이마에 닿는 그 애 쇄골이 단단했다.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는 누구 것일까. 꽉차게 안은 팔에 다시 한번 더 힘이 들어갔다가 한 손이 내 머리로 붙어와 부드럽게 쓸었다. 분명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포옹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우리만 결이 달랐다. 그러니까 기쁨에 미쳐 방방 뛰면서 껴안고 즐기는 게 아니라...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분위기에 휩쓸려 격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하나로 단정 지어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거.

그렇게 계속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게 싫어서 나도 용기를 내서 구승효 허리 쪽 옷깃을 꼭 쥐었다. 너무 잘 됐다, 그치. 얼굴도 못 쳐다보고 조잘거렸다. 응. 시끄러운 주변 소음에도 용케 알아듣고 끄덕이는 그 애 몸이 천천히 흔들렸다.

 




16강 경기를 이긴 축구대표팀은 8강, 4강까지 쭉쭉 승승장구했고 우린 그렇게 남은 6월 내내 월드컵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들처럼 매일매일을 축제로 보냈다. 길거리 단체 응원은 그 뒤 경기들도 계속 있었는데 이후로는 타이밍이 안 맞아서 아쉽게도 다 같이 모여서 응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구승효는 4강 경기 시작 전 군대를 갔다. 

짤막한 전화 한 통만 남기고. 송별회도 없이.





 

2016년 9월. 청담동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박성욱이 올 때만큼이나 요란하게 퇴장하고 나서 02학번 동기 모임은 다시 소소한 재미를 찾아 이어졌다.

스크린 화면에 나오는 축구 경기가 잘 안 풀리는지 경기를 보던 몇몇 애들은 앓는 소리를 냈다.

 

"중국한테 골을 먹힌다고? 말세다 진짜."

"공한증 다 옛날이야기 아니냐."

"한국 축구는 02년이 전성기였지. 지금은 일단 수비가 답이 없어."

 

축구 과몰입자 김재우가 현재 대표팀의 전술과 상황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안 솔직히 나머지는... 지루했다. 미안한데 자기야, 눈치 챙기고 이제 그만 다물까? 여기 테이블에 너 말고 축구 잘 아는 사람 없거든? 남슬기의 부드러운 짜증에 멋대로 감독 경질까지 운운하던 김재우는 불만을 약하게 표시하면서 축구 이야기를 접어줬다.

 

"그래도 우리나라 대표로 뛰는데 관심 좀 가져주지?"

"근데 요샌 축구에 통 관심이 없어서."

"잘생긴 사람이 있었으면 관심 가졌을 텐데. 아냐?"

 

차분하게 정곡을 찌르는 승효. 그 보기 드문 구승효의 유머가 오늘은 자꾸 등장하네.

 

"그렇지, 한유정은 경기가 아니라 선수들 얼굴 보던 애잖아."

"아니 뭐, 맞긴 맞는데. 그게 잘못된 거야? 아름다움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야."

 

그리고 남슬기도 똑같았거든? 유정이 뻔뻔하게 발끈했다.

 

"한유정 눈 높은 거 봐라. 요즘 연애는 하냐?"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해. 울 엄마도 안 하는걸. 유부남 되니까 오지랖 막 넓어지네."

"소개팅이라도 시켜주려고 그랬지. 아까 박성욱 선배 너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죽고 싶니."

"아아. 맞다! 유정이는 임선호 선배가 있었지! 나 선배가 아직도 너무 좋앙 흑흑흑 오또카지? 흑흑흑 그래서 그 친구였던 박성욱 선배는 안 되겠구나. 상도덕이 아니지."

"내가 언제!"

 

쌍욕 나올 뻔. 원래 동기 모임이 서로의 흑역사를 꺼내서 놀려먹는 재미라고 하지만 하필 오늘따라 그 얘기를, 임선호 때문에 했던 삽질 중에서 제일 큰 해돋이 어쩌고를 생생하게 목격한 구승효도 있는데.

괜히 찔려 곁눈질로 슬쩍 본 구승효는 기본값인 무표정으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10년도 넘은 일이니까 제대로 기억 못 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한유정 진짜 소개팅 생각 있어? 근데 나보다는 승효 주변에 더 잘나가는 사람이 많을 거 같은데. 야 승효야 불쌍한 한유정 구제해 줄 누구 없냐?"

"...글쎄. 한유정은 본인 스타일이 확고하잖아. 자기 스타일 아니면 싫다고 버럭 소리 지르고."

"그래? 그랬었나? 하긴 쟤 성격 은근 더러워."

 

헙. 그때 다 들었구나 구승효... 오리엔테이션 마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도 삽질을 했었네, 내가.

어째 저 애와의 추억은 죄다 삽질 아니면 흑역사일까. 구승효의 기억력이 엄청나게 쌩쌩한 걸 확인했으니 유정은 제발 이제부터라도 민망한 이야기 없이 이 자리가 무사히 끝나길 빌어야 했다.

 

"어? 어어? 아니 미친! 이런 등신들이! 또 한 골 먹었어!"

"3 대 0이었는데 두 골이나 먹어?! 수비 미쳤네. 중국한테 뚫리냐."

 

다행히 적절한 타이밍에 중국이 골을 넣어줘서 유정의 소개팅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성질부리면서 먹던 치즈 조각을 던지는 김재우 너는 정말 축구에 진심이구나.

 

"중국 응원단 오늘 기분 째지겠네."

"그래도 예전에 우리만 하겠어? 16강 볼 때 기억나니."

"나 그때 너무 방방 뛰느라 정신없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뛰면서 가방을 밟았는지 안에 둔 CD플레이어가 박살 났더라고."

"그때가 재밌었지. 사진도 싸이월드 뒤지면 있을걸. 우리 다 같이 봤나? 어디서 봤더라? 호프집?"

"학교 정문 옆 대운동장. 왼쪽 농구 골대 근처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 마시면서. 그리고 그때 재우 너 가방 제대로 밟았어. 동점골 넣었을 때."

 

구승효 기억력 쩐다. 화정그룹 임원은 다르구만. 김재우의 감탄에도 유정은 마냥 동조할 수는 없었다. ...다 기억하는구나 넌.

그럼 그날 우리 사이의 조금은 특별했던 일도 전부 기억하겠네.

그리고 유정은 저를 빤히 쳐다보던 승효와 시선이 마주쳤다.

 

 

 

 

잘 가고, 다음에 재우랑 슬기 청첩장 모임에서 보자! 조심히 들어가!

와인바에서의 모임이 파하고. 방향 맞는 친구들끼리 흩어지면서 유정은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려고 자연스럽게 남슬기 옆에 섰다.

 

"야. 너 이쪽으로 오지 말고 저리 가."

"응? 왜?"

 

으이구 이 둔한 기집애. 이유 모를 타박을 하던 남슬기가 저쪽에 모여 담배 피는 애들을 향해 대뜸 큰 소리를 냈다. 승효야! 구승효! 너가 유정이 태워주면 되겠다.

 

"야, 미쳤, 왜?! 나 지하철 타고 가면 되는데."

"너 진짜 몰라서 물어?"

"아 뭐가."

"구승효 눈이 와인바에 왔을 때부터 너만 따라다니잖아."

 

그걸 모르냐. 너 정말 연애 세포 다 죽었나 봐. 아무튼, 내 촉 믿고 잘해봐. 알았지? 당황해서 입이 떡 벌어진 유정의 어깨를 다시 한번 구승효 쪽으로 슬쩍 떠밀던 남슬기는 정말 혼자 지하철역으로 다다다 뛰어갔다.

뭐래는 거야. 그 애가 나를...?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다 다시 미묘한 웃음기 묻은 입꼬리로 고개를 까딱하는 구승효와 마주쳤을 때 멍청하게 벌리고 있던 입을 의식하고 가까스로 닫으며 입술을 꾹 물었다.

 

 

 

 

고급 세단의 뒷좌석은 넓고 아늑하고 쓸데없이 조용해서 긴장으로 마른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차 안 공기에는 승효의 향수 잔향 위에 약한 담배향의 씁쓰름함이 덧입혀졌다. 유정은 옆에서 시트에 깊이 몸을 묻고 다리를 꼰 편한 자세로 일에 몰두한 승효를 흘끗거렸다. 능숙하게 태블릿PC를 훑는 손가락을 보다, 날카롭게 벼뤄진 그 애 옆모습과 포마드로 단정히 넘긴 머리까지.

 

"미안. 급한 메일이 와서 확인 좀 하느라."

"아, 아냐. 괜찮아. 천천히 해."

"이제 다 했어."

 

관자놀이를 약하게 문지르며 태블릿PC를 끈 승효가 유정을 향해 몸을 고쳐 앉는다. 바쁘겠다, 하긴 대기업 사장이니까... 동기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던 공간을 벗어났더니 다분히 사무적인 위치의 차이가 여실히 느껴졌다.

맞아. 나는 화정로지스 구승효 사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처지였지.

같은 테이블에서 웃고 떠들면서 잠깐이나마 좁게 느껴졌던 거리감이 확 살아났다.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인 유정의 손이 꼼지락거렸다.

 

"잘됐다. 나도 너한테 할 얘기가 있었거든."

"어... 그래?"

"......"

 

템포를 늦추는 승효의 눈이 나른히 움직이며 유정의 안색을 살핀다. 못 쳐다보겠어, 먼저 시선을 떨군 유정이 빈주먹을 꾹 말아 쥐는 제 손끝만 바라보았다. 구승효 눈이 너만 따라다니잖아. 자꾸만 맴도는 한 문장. 걔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사람 신경쓰이게...! 

 

"너무 갑작스러울지 모르겠지만-"

"......"

 

갑자기 떨어지는 단단한 저음. 유정은 차라리 숨을 참아버렸다.

 

"-솔직히 좀 실망했어. 한유정."

"응?"

"M백화점에서 제안한 내용이 제일 형편없어서."

 

참았던 숨이 어이없는 탄식으로 밀려나왔다.

뭐? 형편없다구? 아직 식품팀으로 발령 난 지 1년도 안 된 내 부족함을 너무 잘 알아서, 화정로지스에 제출한 그 프로젝트를 짜내느라 두 달 정도를 야근에 주말 특근까지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은 건데.

게다가 내심 고백이라도 기대했는지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니 눈에 띄게 실망한 내가 제일 쪽팔려! 아랫입술을 말아물며 같이 있지도 않은 남슬기 기집애를 흘겨주었다. 촉을 믿으라고? 한참 잘못 짚었어. 참나.

 

"어떤 부분이,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편없는데...?"

"무모해. 사업의 영속성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고. 해산물과 축산품을 산지 직송으로 전국 거점 도시까지 새벽 배송, 게다가 풀 콜드 체인으로? 글쎄. 그렇게 되면 배송 담당자들의 주 52시간 근무 이슈도 분명 발생할 거야. 심야 특근비 때문에 채산성도 떨어져."

"아, 그건 교대 조를 편성해서-"

"그 외에도 아이디어 하나만 믿고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놨어. 뭐랄까. 대학생이 내는 공모전 아이디어 같아."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 유정아.

 

구승효가 발화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조목조목 유정의 마음에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야, 그래 구승효 너 잘났다고, 스무 살 그때처럼 깔깔 웃으며 타박으로 벗어나기엔 돌이 너무 무거워.

이거 혹시 내 미래 '미리 보기'일까? 입찰 참여 프레젠테이션에서 구승효 사장의 지적으로 신나게 난도질당하는 내 미래. 프로젝트 거하게 말아먹고 혼자 방구석에 앉아 소주 병나발 불면서 울고불고 구겨져 있을 그거.

 

우리 본부장님보다 더하다. 이놈은. 아는 놈이 더 무섭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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