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낮

W. Hathor


♬ 연모지정 – Tido Kang



春雨暗西池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輕寒襲羅幕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

愁倚小屛風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墻頭杏花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며칠 새 내린 비로 황성 곳곳엔 이슬이 맺혔다. 밤사이 젖은 땅이 습기를 꽉 머금고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바라는 것을 부여잡느라 앓는 어떤 이의 마음도 그러 했으리라. 정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한 사내의 초조한 마음이, 연정 앞에 너무도 쉽사리 부서지는 어느 여인의 나약한 마음이, 끝내 닿지 못할 것을 서글피 바라보는 어떤 이의 비수 박힌 마음이, 혹은 자꾸 달아나려는 뜬구름을 잡기 위해 휘청이는 어떤 이의 조급한 마음이.



“깨어나셨네요 아씨-!”



긴 몸살을 앓고 난 후에야, 온몸이 식은땀 범벅인 상태로 여주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좀 어떠셔요? 방금 전에 공녀님께서 다녀가셨어요. 그리고...”


“란영아... 대체 어찌 된, 아...!”


“어어... 그리 바로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눈을 뜬 그녀가 제 방에 란영과 있는 걸 확인하고 상체를 일으키는데 몸이 꼭 물먹은 솜마냥 무거웠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지 제 이마를 부여잡다 그 위에 얹어진 물수건을 건드린다. 눅눅한 수건이 눈앞으로 툭 떨어졌다.



“어지러우셔요...? 여간 그 비를 맞고 기력을 죄 소진하셨으니... 바로 누우세요, 의원 나리께서 아씨 깨어나시고도 며칠은 충분히 더 쉬셔야 한다 말씀하셨어요.”


“나, 어쩌다 이리 된 게야...?”


“그건 쇤네가 여쭙고 싶은 말이어요...! 어쩌면 그리도 무모하십니까? 3황자님 말씀이 그 밤에 장산골 누각 처마 밑에서 발발 떨고 계셨다는데... 정말 다음부터는 그리 마셔요 아씨. 홀로 나가서는 다 죽어가는 모양으로 들려오시질 않나, 쇤네 속이 아주 그냥 두 동강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해애...”


“이제 아씨 안 믿어요. 아무리 절 때 놓으려 사정하셔두 열 보 이상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 헌데, 전하는...?”


“전하요? 태자 전하 말씀이셔요 아씨?”


“응, 나 분명 간밤에 전하를 보았는데...”


“그게, 아마 3황자님과 태자 전하를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아씨를 찾아온 건 3황자님이세요, 태자 전하가 아니라.”


“...”


“비에 흠뻑 젖은 아씨를 그 밤에 황자님께서 찾아오셨어요. 집안 어른들도 행랑 아재도 나서 찾아도 안 찾아지던 걸 황자님께서 여러 곳을 다니시다, 결국에 법복사에서 아씨를 뫼셔오셨다구...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글쎄. 그 늦은 밤에 의원 찾아다니느라 황자님께서 얼마나 욕보셨다구요.”


“란영아 전하께선 정녕,”


“...”



“아니 오셨어...?”



민형의 부재가 차마 믿기지 않는 듯 재차 묻는 여주의 눈가에 물기가 어려왔다. 그녀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래 누워 계시더니 헛것을 보셨나 봅니다. 그날 나서시기 전까지 전하께선 서신 한 통 보내질 않으셨잖아요.”


“...”


“아무래도 두 분은 형제시니 퍽 겹쳐 보이신 걸 테지요?”


“...그랬나 보다.”


“3황자님께서 사흘 밤낮을 환궁도 아니하시고 여길 지키셨어요.”


“사흘? 나, 사흘이나 누워 있었어...?”


“간간이 앓는 소리 내시면서 들썩이긴 하셨지만요.”


“...그러니까, 밤사이 여기 계셨던 게 전하가 아니라 황자님이었다고?”


“그렇다니까요, 한참 사경을 헤매시더니 꿈이라도 꾸신 겝니까?”


“허면 황궁에선 여직 소식이 없는 거지...?”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서신 얘기에 란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계셔요, 쇤네는 외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마님과 태사 어른께 아씨 깨어나신 거 전하고 탕약 내올게요.”


“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란영아, 다신 혼자 안 그럴 게.”


“아유, 이제 아씨 못 믿는데두요. 쇤네는 앞으로 두 눈 똑바로 뜨고 아씨만 볼 겁니다. 그러니 제발 얌전히 누워 계세요. 저 제명에 살고 싶어요 아씨.”



들려온 볼멘소리에 여주가 애써 웃으며 끄덕였다. 제 곁에 있던 수반과 수건을 들고 란영이 문을 여닫고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여주의 상한 얼굴엔 작은 그늘이 졌다.



결국, 오지 않으셨구나. 서신은 보셨을까. 서신 한 통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리 바쁘신가. 혹여 어디 미령하신 건 아닐까. 아님, 내가 그날 그리 모질게 말해서 내가 미우신 걸까.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낼 때 염려했던 연유들에, 그보다 더 많은 연유를 덧붙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무정하실 수는 없어. 내가 그분께 아무것도 아니지 않고서야.



아무래도 연락이 없는 민형 쪽에서 먼저 제 손을 놓은 것만 같았다. 차츰 눈가가 시려오며 여주는 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제가 지금 앓고 있는 것이 그저 몸살인지, 아님 상사병인지 가늠하려 부던히 애쓴다. 마음이 자꾸만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운 민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여주가 상의 앞섶에 감춰두었던 목에 맨 홍실 끈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민형에게 받은 금 쌍 가락지가 딸려 나온다.



“전하, 저... 아파요.”



서글픈 눈으로 애꿎은 가락지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먹먹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닿지 않을 말이 허공에 힘없이 울려 퍼졌다.



“란영이 말이... 사흘이나 앓았대요.”



결국 여주의 옷소매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진다. 참고 또 참아 붙들고 있던 속이 이내 와르르 뭉그러졌다. 그런 그녀의 상처받은 마음을 비집고, 지난날 사흔이 했던 경계의 말이 스멀스멀 다시 피어나는데.



‘섣불리 정주지 말거라. 곧 보위에 오를 분이 아니시냐. 이 나라 정계의 모든 눈이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을 모르니? 태자 전하와 이리 벗처럼 지내는 것만 해도 충분히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이야.’



처음부터 먼 자리에 있었음을,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담았다. 이 마음을 묶고, 또 끊어 놓을 수 있는 건 오직 민형의 의지와 연정에 달려 있는 것이라 믿었으니까. 또 그리 알았으니까. 그래서 선택했고, 내내 기다렸건만 그 선택에 의해 돌아온 결과물은 겨우 이거였다. 침묵과 외면.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여주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관절 제게 주신 마음들은 다 무엇인데요...”



결국 그 단 말씨들은, 전하께서 제게 하신 청혼은 전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던 겁니까? 결코, 정인이라 부를 수도 없는 외사랑이었던 거에요...?



제 손에 가락지 쌍을 꼭 쥐고 입술을 문 채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러다 그 흐린 눈이 방안 한켠에 모셔 둔 황실 대례복을 향하고, 이내 서러운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흘렀다. 어디에 대고 크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끝내 홀로 감당해야 하는 슬픔인 것을.



여주가 제 목에 걸린 홍실을 팍 잡아뗐다. 힘없이 끊어진 실처럼 그녀의 희망도 끊어졌다. 제 품에서 고운 명주천을 꺼내 들어 그 안에 가락지를 묻었다. 그리고 비칠대며 일어나 제방 진열장으로 천천히 걸어가 진열장 안에 넣는다.



명주 천 안에 얼굴을 감춘 쌍 가락지, 이걸 처음 받았을 때는 그걸 끼며 훗날 민형의 손을 잡는 자신을 상상하던 때도 있었는데. 여주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방울져 내렸다. 진열장의 문을 닫으며, 그녀는 제 오랜 연정도 그 안에 깊이 묻어두려 안간힘을 썼다. 힘겹게 문을 밀어 닫은 후, 결국 그 자리에 풀썩 무너져 내리고 만다.



“흑...”



기어이 입 밖으로 울음이 밀려 나오고, 소리가 새는 제 입을 여주가 두 손으로 꾹 눌러 막았다. 물기가 서린 방안의 공기가 먹먹했다.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밖에서 쏴아 하는 물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얹혀, 여주의 입에서 난 울음소리는 규방 안을 맴돌다 문밖으로 간간이 흘렀다. 규방 밖 문고리가 잘각하고 접히는 소리를 냈지만 제 울음소리에 묻혀 여주는 그를 미처 듣지 못했다.



빗물이 조르르 떨어지는 처마 밑, 제노가 규방 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서있다. 여주가 깨어났다는 란영의 말에 인태사와 함께 외실에서 차를 마시다 한달음에 달려온 터인데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안에서부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었다.



제노는 차마 그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이 바르르 떨려왔다. 민형에 대한 분노와 자라나는 증오, 슬퍼하는 정인을 위해 어찌해줄 수 없는 제 무기력함에 그의 온몸이 부들댔다. 쉽사리 멈추지 않는 울음소리가 문을 타고 그의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왔다. 퍼붓는 빗소리에도 외려 가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긴 시간을, 먹먹하게.







달과 낮











“무슨 말들이 이리 많아? 요즘은 기루에서 말 장사도 하는 것이냐? 그걸 설마 나만 모르고 있던 것이야?”



동혁의 벙벙한 물음에 기루 입구에서부터 그를 맞이한 기녀들이 까르르 웃는다. 며칠 새 묵는 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것 같더니, 금세 객실이 가득 차 화정각은 문전성시를 이루는 듯했다.



“곧 있을 즉위식을 구경하려고 각지에서 올라온 객들이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매출도 늘었습니다.”


“그래서 이리들 요란인 것이구나? 당최... 거 뭐 그리 대단한 행사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 동혁이 가져온 패물 보따리들을 시중드는 이에게 건네며 안으로 들어섰다.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는 겐지 대청에서는 거문고 타는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궁 안에 사시는 황자님이야 하루가 멀다 하고 보시겠지만 미천한 백성들은 이런 때라도 나랏님 얼굴 한 번씩 구경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새로이 젊은 황제가 즉위한다니 나라의 경사가 아닙니까?”


“그거야... 헌데 말이야, 귀한 명마들이 정말 많아. 척 보기에도 황성 부근에서 기른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갈기 모양으로 봐선... 남쪽은 아니고, 이를테면 북방 목초지?”


“말이 귀해 봤자 결국 말 아닙니까? 목초지인지 논밭인지는 모르겠으나 북방인 건 맞습니다. 휘향성에서 오셨다는 한 나리가 저 큰 동재 한 채 값을 전부 내셨으니, 모르긴 몰라도 재물을 아주 많이 가진 어른이신가 봐요. 좌우간 동재 출입은 당분간 하지 마셔요. 거기 묵는 이들이 죄 사납기가 아주 그지없습니다.”


“그래애? 허면 아까부터 여즉 동재 창고에 싣던 병장기들도 다 저이들 것이냐?”


“그건 또 언제 보셨어요? 하여간 황자님 모르시는 것도 없습니다.”


“이 능황 안에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야 있나. 헌데, 참으로 이상하구나. 술과 노래만 있어야 할 기루에 북방에서 온 명마들과 병장기라니. 이 태평성대에 전쟁이라도 나려나 보지?”


“원 농담두, 다른 건 아니고 즉위식 날 조공 행렬을 호위할 사병들이라 합니다.”


“묵주국에서 재물이 가장 많은 고관대작이라도 오는 게야? 조공 사신들 호위라면 황군의 수로도 충분할 진데.”


“거야 모르죠. 즉위식이 한 해를 걸러 오는 행사도 아니고... 제법 성대할 것이 아닙니까?”


“하여간 더는 묻지 마셔요 황자님. 병장기 얘기도 밖에선 꺼내지 마시구요. 행수 어르신 경치십니다.”



동혁이 알았다 웃으며 기녀들을 향해 끄덕이는데, 저 멀리서부터 제가 아는 어떤 한 여인이 제 동기 아이와 함께 걸어오는 게 눈에 보였다. 노오란 명주 저고리에 모란이 수 놓인 다홍치마를 입고 사뿐 걷는 모양새가 어찌나 눈이 부신지, 선녀가 이 땅에 내려왔다면 꼭 저런 모양일 거라며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아 버린 그였다.



“내 꽃이 왔구나.”



보고 있으면 참 꿈같은 여인이었다. 저 쌀쌀한 표정 하나, 유려한 손짓 하나, 말씨 하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숨 멎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이.



마음 같아서는 저 여인을 취하여 그대로 황자궁에 데리고 들어가 살고 싶지만, 차마 아니 될 말이었다. 궁은 저를 둘러싼 그 성벽만큼이나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팍팍한 곳이니까. 궁 생활 깨나 했다는 사내 치고, 아끼는 이를 그 안에 가둬 두면서까지 끼고 살 엄두를 내는 이는 아마 몇 없을 거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많이 좋아져 버려서. 내 그럴 바엔 조금 더 많이 걸어야 한대도 꽃을 보러 친히 길을 나서는 것이 배는 낫지. 해서 오늘도 이리 번쩍이는 패물 따위를 들고 화정각에 납신 4황자였다. 고운 선물을 핑계 삼아 저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이리 아침나절부터 부랴부랴.



4황자 동혁의 모친은 정 3품의 첩여 직첩을 받은 황제의 후궁으로, 사실상 귀비 모씨의 승하 이후 그 지위가 승격되어 내명부에서는 황태후, 황후 다음으로 높은 영향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낙흥성의 직계 귀족 출신인 그녀의 부친, 그러니까 동혁의 외조부인 장왕 권충희는 묵주국과 새오국, 아라국 등 주변 약소국들과 능황국 사이의 조공무역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였다.



낙흥성은 *동척제 때부터 나라 안의 굵직한 무역 사업을 독점하면서 제국의 큰 항구 여럿을 보유하고 있는 왕성한 무역 거점으로 성장했다. 예로부터 여느 거지도 낙흥 땅에만 가면 굶어 죽지 않고 넉 달은 너끈히 버틸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난 것만 봐도 여타 다른 성에 비해 꽤나 부유한 형편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동혁이 한 해 동안 걸치고 다니는 귀한 옷감과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장신구와 보석들을 포함해 그 말도 안 되는 씀씀이를 다 감당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러한 모계 가문의 재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제2대 황제 이청.


고급 악기와 이국의 술, 화장수, 신학문과 기술 등 어린 시절부터 주변국에서 다다른 무역선의 진귀한 물건들을 보고 자란 동혁에게 이 같은 것들은 늘 너무도 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해서 동혁의 주변엔 줄곧 여인이 끊이질 않았다. 그의 곁은 항상 반짝이는 물건과 사람들 투성이었으니까. 제아무리 콧대 높은 이라도 그가 가진 진귀한 물건들과 탄탄한 재력, 그리고 타고나기를 호탕한 성정과 유려한 말씨를 보고도 저를 마다하는 여인이 없었는데 유독 저 여인, 그러니까 여기 화정각의 일패 기생이라는 수향만 늘 흥미가 없다는 듯한 눈으로 저를 보는 것이었다.



“나를 보러 직접 이리 온 거야?”



그런 그녀가 친히 저를 보러 예까지 행차하셨다니 오늘은 운이 좋구나 하며 감격하는 동혁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수향이 새초롬한 얼굴로 저를 한번 보더니 다시 슥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지금도 봐, 대청에 앉아있던 기녀들이 전부 나와 제 앞에서 장신구들을 쥐고 까르르 웃는데 저 혼자 저리도 꼿꼿이 서서는 미동도 없는 자태라니. 그래도 어쩌겠어. 늘 아쉬운 것은 이쪽인 것을.



동혁이 패물함에 든 장신구들 중 척 보기에도 가장 값나가 보이는 비단부채를 꺼내 들어 수향에게 내밀었다.



“이건 그대 건데 내가 특별히 귀한 걸로 빼놨어.”



그리 말하며 꼭 주인을 반기는 삽살개 마냥 제 얼굴을 수향 앞에 냉큼 들이대는데,



“화정각 내 처소에도 부채는 차고 넘치니 이런 거 그만 좀 가져오시라 전해드려.”



그런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질 않은 수향이 옆에 있던 다른 기녀에게 쌀쌀히 말한다. 굳이 제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전하는 그녀를 보면서도 그저 좋아 죽겠는지 동혁은 입이 찢어져라 함박웃음을 짓기 바빴다.



“그래도 금일은 기분이 좋은가 보네, 내 앞에서 말도 다하고.”



제 깍듯한 거절에도 시무룩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능글맞게 구는 동혁을 보며 그제야 수향이 기가 찬 듯 그를 본다. 이때다 싶어 동혁이 제가 쥔 부채를 얼른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는 덧붙였다.



“오늘 밤엔 좋은 꿈을 꿀 듯싶어. 이리 그대 얼굴을 보고, 또 목소리도 들었으니.”



간지러운 그 말에 수향이 제 새침한 낯을 찌푸리며 귀찮아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그 옆에 있던 동기 아이 하나가 수향 언니는 좋겠소, 이리 일편단심이신 황자님 애정을 독차지하니 하며 까륵 댄다.



“그리 좋으면 너나 가져.”



수향이 제 손에 쥐었던 부채를 대강 그쪽에 던지듯 주며 톡 쏘아 댔다.



“참 말이오 언니? 황자님, 이 부채 정녕 이 년에게 주셔도 됩니까?”



부채를 받아 든 아이가 수향과 동혁에게 천진하게 묻는데, 동혁이 그건 안되지 하며 얼른 그 부채를 빼앗아 든다.



“이 부채는 수향일 떠올리며 내 직접 골라온 것인데. 대신 너한테는 이 고운 떨잠을 주마, 어떠냐?”



대신 능숙하게 다른 장신구로 달래며 빙그레 웃는 동혁을 보며 수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리도 가벼운 행동거지라니. 사내의 행동이 어쩜 저리도... 한 나라의 황자라는 작자의 성정이 한량만치 가볍기 그지없구나.



원래 주인에게 주려던 부채를 지켰다는 안도감에 동혁이 뿌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자 수향이 그 꼴을 보고도 흥하고 돌아선다. 동혁은 그래도 허허실실 그 돌아서 가는 모습을 눈에서 꿀이 떨어지기라도 할 듯 담는다.



어쩌면 때늦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보고 이리 마음이 간지럽게 일렁이는 것은 또 간만이라. 늘 제 곁에 북적이는 여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깊었고 또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이지만 꽤 진중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도하게 가는 수향의 등 뒤에 대고 동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언제고 마음이 바뀌면 다시 와! 내 그대 부채는 여기 꽁꽁 숨겨 놓고 있을 테니!”



그런 동혁을 보고 우스꽝스럽다며 옆에 있던 기녀들이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달과 낮







먹구름이 갠 지 또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또다시 보슬비였다. 이제 막 작은 봉우리를 터뜨리려던 살구꽃들이 비에 씻기듯 바스스 떨어져 내렸다. 규방 마루에 앉아 비가 내리는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여주의 손에 지는 꽃잎이 한 겹 내려앉았다.



민형의 부재로 애 닳았던 마음들을 내리는 비에 게워 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가 처마 밑으로 손을 뻗었다. 톡톡하고 소리를 내며 손위에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비의 온도가 그대로 전해져 와서는 목 끝까지 싸늘했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마음 한켠은 어딘가 뜨거운 불구덩이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내내 잠 못 이루고 방안에 틀어 앉아 있던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거다.



제 손안에 맺히는 빗방울들을 가만 들여다보던 여주의 시야에 그런 제 손위로 쓰이는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



그녀가 놀라 고개를 들어 위를 보자 제노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의 손에 우산을 씌운 탓에 그의 어깻죽지 위 소매는 조금씩 비에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찌 나와있어.”



여주의 몸이 회복된 후로도 제노는 계속해서 그녀의 집에 들었다. 외실에서 인의겸과 차를 들며 강론과 서책에 대한 담소를 나누다가 가곤 했지만, 실은 여주의 상태가 어떠한 지 잘 회복하고 있는지 수시로 살피려는 게 그의 주된 본심인 것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이제 여긴 그만 드세요.”


“...”


“규방에, 아니 내실에 이리 불쑥불쑥 찾아오시는 것도 그만하시구요.”



제노가 지금보다 더 어리숙하고 더 작았던 시절부터 제집 드나들 듯 다니던 곳이었다. 사내가 대갓집 규수의 규방에 드는 것만 해도 남들 눈에는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망측한 일일 진데, 게다가 황자의 거동이 이렇듯 경거망동이라니. 누구든 이를 보고 남사스럽다며 손가락질을 해댈지 모를 일이었다.



허나 글쎄, 그런 것들이 언제는 내게 한 번이라도 중한 적이 있던가. 팔 년 전 모친의 외전각에서 나를 안았던 그 작은 품이, 내 마음을 어루만졌던 그 고운 노랫소리가, 그날 이후부터는 온전히 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자의 품위나 지위, 체통 같은 것들은 고사하고 제 목숨보다도 아끼는 여인의 집에 드는 것인데 마다할 일이 있겠느냐고.



“대관절 어느 사내가 이리 여인의 규방에 함부로 든답니까. 금일 이후로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마셔요.”



부르면 열 일을 제쳐 두고서라도 와야 했고, 평생을 살아온 황궁만큼이나 또 익숙한 곳이 이곳 여주의 규방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는 갑작스레 더는 제 규방에 걸음 하지 말라 한다. 속상한 얼굴을 숨기려 부러 시선을 피하면서.



“나 봐.”


“돌아가세요.”


“어찌 피해.”


“...”


“내 얼굴 한 번만 봐줘.”



말하는 제노의 말에 물기가 어렸다. 어쩌면 목소리가 비에 섞인 탓이겠지. 여주가 마음을 모질게 먹고는 제노를 쏘아보며 성을 냈다.



“잘 알아듣게 타일렀는데도 황자님 정녕...!”


“...”



그런 그녀의 눈앞에 웬 목검을 건네는 제노였다. 검을 내미는 제노의 낯이 영 울적했다. 눈물만 안 맺혔지, 요전 날 제 품에 안겨 서럽게 울던 천무제 날 밤의 그 모습이 겹쳐 보여 그만 여주의 말이 훅 멎었다.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참 상처가 많은 벗이었다. 언제고 이 상처를 내가 다 끌어안아 줘야지. 가족보다 더 살뜰히 챙겨 줘야지. 다시 웃게 만들어 줘야지 하고 다짐도 했었는데. 돌아보니 저 좋다고 말하는 제노의 마음을 밀어내고, 또 그 앞에서 민형 때문에 아파하는 것을 보여주던 제 이기진 행동뿐이었다.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는커녕 찢겨 나간 자리에 소금을 뿌린 격이었으니. 그럼에도 밀어내야 했다. 마음에 다른 사내를 품었으니 더더욱 안될 일이었다. 헛된 바람을 불어 넣어 더 많은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혼인하자 말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러니 옆에만 있게 해줘.”



슬픈 눈을 하고 입은 덤덤히 말하는 제노에 여주의 표정이 차츰 누그러뜨려졌다. 그래도 여전히 성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려 그녀가 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건... 뭡니까?”


“생일 선물.”


“아직 며칠 남았는데요?”


“알아, 오늘부터 그대에게 검술을 좀 가르쳐 보려고.”


“...”


“전에 그랬잖아, 제 몸 하나 못 지키는 온실 속 화초로 살긴 싫다고.”


“매번 위험한 건 아니 된다 선을 그으시더니...”


“근래 세상이 좀 험해야 말이지.”


“전에 검술 가르쳐 달라고 청했을 때도 위험하다, 다친다, 꽃 같은 것만 들어라 그렇게 호들갑을 떠셨잖아요.”



뜬금없이 제게 그동안 안된다 했던 검술을 가르치겠다는 제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주가 툴툴댔다. 그런 그녀를 보고 제노가 한 발자국 다가와 여주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마루 위에 앉았던 그녀가 일어서자 제노와 시선의 높이가 같아졌다.



“그대가 위험에 처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구할 테지만, 혹여 그러지 못하는 순간이 와서 그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간지러운 말 마시구요.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검술을 가르치시려는 건데요.”



끈질기게 캐묻는 여주의 말에 제노가 씁쓸히 웃었다. 아무리 덤덤히 말해도 나를 다 아는 듯 이미 간파한 저 얼굴을 어찌 속여.



내 저 물음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머지않아 내가 아주 나쁜 마음을 먹을 거야. 곧 황성에 사는 태자의 사람들과 부의성의 귀족들 수백이 죽어 나갈지도 몰라. 태자가 나라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 곧 젊은 황제로서 태동하려는 그 경사의 날, 나는 그를 낭떠러지로 밀어 트릴 거야. 그의 수족들을 베고, 살 동아줄이라고는 하나 없이 목숨을 옥죄며 그가 그동안 가졌던 모든 것들을 빼앗아 오겠지.



고요했던 황궁엔 비명소리가 난무할 거고,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가장 끔찍한 곳에 서있을 내 칼은 태자를 패배자라며 조롱할 거다. 제국은 금세 불안에 요동치고,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 국경을 포함해 나라 안팎이 시끄럽고 흉흉해지겠지. 혹여나 그때 있을 그 혼란 속에서 그대가 누군가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 태자에게나 나에게나 그대는 너무도 치명적인 약점일 수밖에 없잖아, 그 큰 거사를 앞두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이리 할 수밖에.



목구멍까지 들이닥친 말들을 애써 삼키며 제노는 여주에게 호신술을 가르쳐보겠다 따위의 말로 제 속의 시커먼 마음을 억눌렀다. 그가 가져온 목검을 여주의 손에 쥐여 주며 나직이 덧붙였다.



“일전에 태자 전하를 노린 그 흑살 말이야, 그대와 함께 낙마하셨던 날 날아들었던. 황성에까지 오랑캐의 세력이 미친다는 생각이 드니 우려되는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더욱이 스승님께서는 가택을 호위하는 무사들을 따로 두지 않으시니 더 걱정스럽기도 하고... 겸사겸사?”


“...”


“혹자는 지금이 태평성대라고 말하지만, 영천 변방의 사정은 조금 달라. 만약 이대로 오랑캐의 규모가 커진다면 혹여나 나라 안에 크고 작은 변이 날 수도 있으니. 그게 꼭 변방이라는 법은 없지. 지난번 화살도 갑작스러웠잖아.”


“...”


“무슨 일이든 간에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어. 혹시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나라가 뒤집어지기라도 할지.”



나라가 뒤집어지기라도 할지 모른다고 말하는 제노의 말끝이 흐려진다. 제 눈을 피하며 변명하듯 말하는 벗의 모습에, 분명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여기는지 여주가 영 탐탁지 않아 한다. 좌우간 전부터 검술은 배우고 싶었던 것이니 조금 찜찜해도 그녀가 일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헌데요 황자님.”


“응.”


“이 손은 언제 놓으실 거에요?”



제 손에 목검을 쥐여 준 그대로 안 떼고 잡고 있는 제노의 손을 여주가 내려다본다. 그 모습에 제노가 멋쩍게 웃으며 바로 손을 뗐다.



“오해 마셔요. 제가 황자님께 검술을 배운 대도 제 마음이 크게 달라지거나 하는 건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이리 번번이 손도 잡지 마세요.”



구태여 모질게 말하는 여주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제노는 여전히 속이 쓰라렸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기 시작한 순간부터, 거절의 말들과, 저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정인의 행동들은 수백 번을 보고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열 번을 겪어도 그 열 번이 온전히 다 속을 후벼 파는 듯 아팠다.



“응.”



그럼에도 익숙한 듯 굴어야 했다. 나 때문에 그대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건 죽기보다 싫으니. 지금도 내게 저리 모진 말을 해놓고도 영 미안한지 고개까지 돌려서 마음을 숨기려는 여인인데, 그런 그대를 내가 어찌 상처 줘.



“자책하지 마.”


“...”


“그대가 할퀴는 이가 나이든, 형님이든, 그 어느 누구가 되었든 간에 자책하지 말라고.”



제 상처가 더 아플지 언정 아랑곳 않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제노였다. 마음이 자꾸만 약해지는지 여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는 그래도 돼.”



세상엔 참 다양한 종류의 연정이 있다고 하지. 즐겁고 따스한 온정이 드는 우애와 같은 연정, 불처럼 뜨겁고 번쩍이나 곧 꺼져 없어지는 연정, 누군가를 베고 찌를 수도 있을 만큼 강렬한 광기 같은 연정, 열정과 탐닉은 없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젖어 드는 봄비 같은 연정. 그중에 우리가 품은 이 마음은 각각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대가 마음에 오래 담아왔던 그 사내는 여전히 그 속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없어 뵈는 그 견고한 마음에 내 이름 세 글자쯤, 아니 두 글자쯤, 잠시 발붙일 한 뼘이라고는 없는 걸까. 내 인생이 늘 멀쩡한 배경을 두고도 그 안에 담기지 못한 채 겉돌았듯, 이렇게 그대의 마음 바깥에서 난 영원히 겉돌아야 하는 걸까.



있잖아. 만약 거사의 날에, 내가 그대의 마음 안에 있는 그를 벤다면 말야.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로 만들어도, 그날 이후로 그대와 내가 조금 다른 위치에서 낯을 마주한다 해도, 그대가 나를 보는 눈빛이 지금과 같을까. 마치 아픈 손가락인 벗을 보는 그 연민의 눈빛이, 그때도 지금과 똑같을까.



“...”



제노의 눈빛이 절절했다. 여주가 끈질기게 참아가며 그 눈으로부터 마음을 힘껏 닫았다. 단 한 번도 사내로 생각한 적이 없는 그에게 모른 척 약한 마음을 뉘여 위로받는다는 건 최악이었다. 민형에게서 서서히 마음을 끊어내는 중이었고, 이 아픔은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었으니까. 제노와 오래 벗이었던 시간만큼, 그녀는 그를 함부로 이용하기 싫다는 생각이 완고했다. 그녀에게 있어 제노 또한 민형만큼이나 너무도 소중한 이였기에.



결국 그녀는 그에게 더 넘어오지 못하게끔 긴 선을 그었고,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나 서로 앞에 그어진 선 바깥에서 지독히도 불행한 서로의 모습을 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처마 밑으로 들이치는 비에 제노의 어깨가 점점 더 젖어갔다. 쏴아 내리는 밤비를 타고, 지는 살구꽃의 향이 뭉근하게 풍겨오는 듯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따스한 봉오리 향이 주위를 감싸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앞에 남겨진 것들이 너무도 차가웠다. 돌아갈 수 없는 희미한 벗으로서의 기억, 외면당한 마음, 결코 끊을 수도, 넘어질 수도 없는 선 따위의 것들.







바빠 죽겠는데 입덕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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