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하나에 젖은 몸을 잔뜩 밀착 해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꽤 길게 느껴졌다. 다 젖었는데도 우산 밑으로 내 어깨 즈음에 닿은 김정우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나 역시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걸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잔뜩 젖은 옷 덕에 그의 가슴팍의 온기와 모든 호흡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김정우 역시 걸을 때마다 제 허벅지에 닿는 내 하체가 버거웠던 건지 힐끗 본 그의 하체 역시 단단히 버거워 보였다. 살짝 닿은 묵직함에 나 역시 허리에 긴장감이 가득한 채 걷는 것에만 집중하려 애를 썼다.

아무 말 없이 걸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김정우는 끈적하게 붙어있던 몸을 떼고 멈춰 섰다. 그의 온기가 사라지자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그를 돌아보았다. 김정우는 고개를 숙이고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어내며 말했다.



"들어가."



딱 입구까지만 온 김정우는 선을 지키는 듯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냥 보낼 수가 있는지.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옷이 다 젖은 김정우를 본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발 끝을 바닥에 톡톡 치며 중얼거렸다.



"...옷 갈아입고가."

"어?"

"그대로 가면 감기 걸려."



내 말에 약간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김정우는 올라가는 내내 나를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내 머리 위로 수건을 걸치고는 새 수건을 김정우에게 건넸다.



"거기 서 있게?"

"아... 젖어서."

"괜찮으니까 들어와."



현관에 서 있던 김정우는 내 말에 그제야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젖은 머리를 털어가며 옷장 속에 아직 남아있던 김정우의 스투시 반팔과 그의 트레이닝 복까지 꺼냈다. 아직 남아있다니 다행이었다. 현관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그에게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이게 아직 있네."

"...내 옷이구나?"

"그럼."

"난 또 정... 아냐."

"나 먼저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김정우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았다. 그런 그를 뒤로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이미 다 젖어 벗기도 버거운 옷을 억지로 벗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김정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김정우를 안았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따뜻한 물에 씻겨 내려져 갔다. 그래,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비를 맞았고 잠깐 이성을 잃었을 뿐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 내가 뽀송뽀송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고 여전히 서 있던 김정우는 나를 바라보았다.



"난 안 씻어도 되는데."

"감기 걸리니까 씻고 옷 입고 가."

"...그러니까."



됐어. 고집 부리지 마. 김정우는 망설였지만 나는 그의 등을 떠밀어 화장실로 이끌었다. 이내 화장실의 문이 닫히자 커피포트에 물을 데웠다. 샤워기의 물 소리가 이렇게도 야했던가. 괜스레 열이 오르는 얼굴을 손 부채질로 식혔다. 그런데 비를 맞아서 그런가, 열이 자꾸 올랐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옛날처럼 김정우가 머리를 말려주던 것이 왜 생각이 나는지. 커피포트의 딸깍 하는 소리에 나는 상상에서 깨어났다. 유자청을 담은 컵에 물을 붓고 휘휘 젔고 있는데 샤워를 마쳤는지 수증기가 가득한 화장실 문이 열리고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이 긴 김정우가 나타났다. 김정우 역시 볼이 붉었다.



"마셔."

"어 땡큐."



막 타둔 유자차 한 잔을 그에게 건네며 말하며 소파에 앉았다. 유자차를 받아 소파 밑에 앉은 김정우는 말 없이 뜨거운 유자차를 마셨다. 어느새 다 마신 유자차를 탁자에 내려두자 김정우는 빈 컵을 손에 쥐었다. 김정우는 시선을 컵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여주야, 너 진짜 나한테 다시 안 올래?"

"어."

"올 생각 진짜 없어?"

"미안해."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내 얼굴을 김정우가 보지 않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억지로는 안 할래."

"......"

"나 갈게."



옷도, 유자차도, 고마웠어. 김정우는 그렇게 말하며 빈 컵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난 김정우가 나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어쩐지 이번에 가면 영영 끝일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렇게 떠나가는 김정우의 뒷모습을 보니 심장에 칼이라도 맞은 듯 저릿함이 느껴졌다. 



"정우야."



나 역시 급하게 일어나 그의 이름을 부르자 김정우의 발이 멈췄다. 그런데도 김정우는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그의 뒤에 섰다.



"가지 말라고 하면."

"...어."

"안 갈래?"



김정우의 옷 끝을 살짝 붙잡고 그를 올려다보자 김정우의 눈빛이 마치 바다처럼 일렁였다.

















내가

왜 

다시


(兩者擇一)

Phrase











"그런 눈빛으로 말하면 어떻게 안 가."


김정우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내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냈다. 그 뜨겁지만 다정한 손길에 나는 차츰 뒷걸음질을 쳤고 김정우는 내 어깨를 살짝 잡고 다시 걸음을 소파로 옮겼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가 지속되었다. 뒷 발에 소파에 닿자마자 소파에 살짝 주저 앉자마자 내 허벅지 옆으로 무릎을 덴 김정우는 나의 뒷 목을 감싸고 천천히 소파에 눕혔다. 나를 위에서 바라보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나 미친 것 같아."

"미쳤지 그럼. 이게 제정신이야?" 



중얼거리는 내 말에 김정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내 볼을 제 엄지로 부드럽게 쓸었다. 너도 미친 것 같아?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정우는 나에게 재차 물었다.



"나한테?"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냥 미친 것처럼 김정우를 안고 싶었다. 그 입에 입을 맞추고 싶었고 몸을 섞고 싶었고 나를 아직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난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야."

"잘 아네?"

"너한테도, 그 사람한테도 못 할 짓을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나랑 할 거야?"



김정우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당했다 싶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비켜. 내 위에 있는 김정우의 어깨를 밀어내며 일어나려자 김정우는 내 얼굴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소파에 고정했다.



"뭐야, 안 하려고?"

"이거 놔."

"가지 말라며."

"...응."

"나 안 가고 여기서 뭐 할까 그럼."



말 없이 김정우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키스해줘. 네가 안 하면 내가 할거니까. 뒷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정우는 그대로 내 입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낯설지 않아 익숙한 입맞춤에 더 몸이 찌릿한 느낌이었다. 입을 벌리지도 않았고 단지 입술만 닿았을 뿐인데. 비를 맞고 추운 거리를 뛰어와서일까 우리 둘은 약하게 열이 나고 있었다. 김정우는 부드럽게 입술을 떼고는 내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여주야. 응. 그를 바라보자 김정우는 내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주며 내 시선을 피했다. 김정우는 시선을 못 맞추다 꽤나 긴장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후회. 그 말에 김정우의 눈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후회. 하겠지? 눈을 감은 내 귓가에 김정우가 작게 입을 맞추었다. 나 뿐만 아니라 김정우의 호흡 역시 불안정했다. 귓가에 들리는 김정우의 숨소리가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그럼 그만할까?"

"...너 자꾸."

"네가 싫으면."

"너 지금 힘들잖아."



참을 수 있어. 김정우의 다정한 말에 심장이 요동쳤다.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과 대조적으로 내 허벅지에 닿는 그의 것이 거대했다. 그런데도 내가 그만하자고 하면 당연하다는 듯 떨어질 김정우가 아쉬운 건 내 쪽이었다.



"...너는. 어떤데?"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김정우는. 난 좋아. 나 안 미워? 아니 원망도 안 했어? 나 밉잖아. 그런데도 나랑 하고 싶어? 대답 대신 감은 내 눈꺼풀 위로 김정우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그는 곧 내 눈, 그리고 코, 다시 입술 위로 입을 맞추며 그는 내 차가운 손에 깍지를 꼈다. 내가 다시 눈을 뜨자 김정우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후회 할 거냐고 물었잖아."

"응."

"아니, 넌 후회 안 할 거야."

"...응?"

"내가, 후회 안 하게 해줄게."

"..."

"후회는 내가 계속했으니까 넌 행복만 해."



김정우의 말에 나는 머리를 댕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후회를 계속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맑게 웃는 김정우의 따뜻하고 말캉한 입술을 내가 먼저 탐했다. 좋아하던 딸기를 먹듯 입술로 부드럽게 빨자 김정우는 기분 좋은듯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김정우는 차가운 내 손을 제 온기로 데우기를 마치고는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나 역시 그의 체온으로 따뜻해진 손으로 김정우의 얼굴을 감쌌다.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몸을 감싸는 것들에 몇 년 만에 부끄러움이 들었다. 김정우는 내 입천장을 혀로 쓸어냈고 나는 그대로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하, 미치겠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참을 붙어있던 입술이 겨우 떨어지자마자 김정우는 곧바로 뜨끈한 내 목에 입을 맞추었다가 곧 고개를 들었다.



"씨발."

"응?"

"너 그 새끼가 얕봤어."



그게 무슨. 김정우가 고개를 돌려 작게 욕을 뱉었다. 아 설마. 정재현의 자국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회 생활 하는 여자 목에 이런 자국을 내? 개새끼. 내 목 언저리를 제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김정우의 눈치를 보며 그의 목을 잡아 끌었다. 



"예상 못 한 거 아니잖아?"

"후... 넌 진짜 못됐어."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야."



김정우는 한숨을 쉬고는 그 자국을 지나쳐 내 쇄골께를 깊게 빨았다. 김정우와 사귈 때에는 늘 생기던 위치였다. 



"넌 네가 미친 것 같다고 말했지. 아니. 미친 건 나야."





(생략)





"여주야."

"응."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김정우는 잔뜩 달아오른 채로 참을 수 있는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마지막까지 나의 동의를 구하는 김정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는 듯한 김정우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정우야."

"응."

"복수든 뭐든."

"..."

"괜찮으니까 해도 돼."


그게 뭐든 내가 다 감당해볼게. 나 후회 안 하게 해줘.





(생략)






"그 개, 새끼랑."



낮은 목소리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김정우가 물었다. 정재현의 얼굴이 상기되자 죄책감이 몰려왔다. 김정우는 숨이 찬 목소리로 집요하게 물어왔다. 



"나 버리고 갈 만큼 행복했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저을 수도 없었다. 말이 없는 나를 본 김정우는 내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아! 살짝 피가 스며 나오는 듯해 인상을 찌푸리자 김정우의 따뜻한 혀가 그 상처를 핥았다. 그 모습마저 섹시해 보여 온 몸이 뜨거워졌다. 상처를 준 건 나였는데 후회를 한 건 김정우였다.



"미안해, 흡."





(생략)





"정우야."

"사랑해."



사랑해, 미치도록 사랑해. 내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는 김정우의 몸을 껴안자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곧 김정우의 젖은 몸이 내 위로 쓰러졌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자 김정우는 지친 기색 없이 나의 손목을 잡아챘다.



"여주야."

"어."

"너 이제 못 가."



김정우는 피식 웃으며 내 손목에 수갑이라도 채우듯 꽉 잡았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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