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중, 책 내용의 출처 (@Temisnchirstd)




 날이 좋지 않았다. 수녀들은 모두 돌아간지 오래였고, 고아인 자신만이 이 대성당에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성당의 안쪽으로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시선을 옆으로 틀면 보이는 문을 여는 순간, 스산한 바람이 불어 베일을 휘날리게 만들었다. 대성당의 뒤편에는 수녀들을 재울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가진 이유는 아마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일 테지. 수녀들이 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1년 전에 악마의 탓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터무니없는 헛소리. 그것이 신부(사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겠지. 악마를 직접 본 사람이 있냐는 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그 말을 믿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물론 나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믿게 되었다. 분명 이 기숙사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옆 방에서 수다떠는 소리가 들리거나 난데없이 컵이 깨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처음 한두번은 그러려니 했지만, 최근에 수다나 컵 보다 더 심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몇 주전만 해도 커튼이 찢어지거나 자고 일어나면 성수가 담긴 병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있었고, 흥건하게 젖은 바닥에는 새까만 덩어리가 몇점 놓여있었다. 

 이런 이상현상이 발생 할 때마다 내 행동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악의를 품은 악마던 아니던, 내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수녀라지만 아무런 힘없는 인간일 뿐. 악마(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에게 적수가 되진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못하는 자신을 장난 정도로만 놔둔다니 이상하기도 하지.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책장에 손을 뻗어 한 권을 꺼내었다.「비밀」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두께는 상당히 보통에 속할 정도로, 페이지는 약 320페이지 정도 였다. 자신은 220페이지 까지만 보았다는 책갈피를 치우고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분명 잘 닫아뒀다고 생각한 창문이 덜컹이다 열리면서 바람이 크게 불어왔다. 눈을 질끈 감고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팔로 눈 앞을 가리자, 바람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한숨을 내쉬면서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려 눈을 뜨자 떨어진 것도, 흐트러진 흔적도 없었다. 왜? 심지어 책상에 올려둔 펜 조차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하는 사이에 무릎에 올려둔 책을 바라보자, 본 적 없는 페이지가 펼쳐져있었다. 종이에 적혀있는 글자는 정갈했고, 바르게 써져있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손가락으로 글자를 쓸며 읽어내려가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림자를 눈동자에 숨긴다. 우리는 그 그림자를 비밀이라고 부른다. 진실은 그 자체로 고귀하지만 숨길수록 진가가 드러날 때도 있다. 마음의 광장 속에서 비밀이 피어날 때, 우리는 은밀한 죄책감을 종종 마주한다.
그러나 드물게도, 일반적인 사람이 비밀로 숨기는 것들을 몇몇 괴짜들은 기꺼이 자신의 코트를 열고 공개하기도 한다.』 - D.Z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이었다. 앞과 뒷 페이지를 펼쳤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없었다. 비밀? 죄책감? 그림자? 대체 무슨 말인지 의심도 하기 전에 페이지에 적힌 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잠깐..!'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글은 완전히 사라져있었고, 페이지를 앞으로 몇 장 넘긴 후에 그 페이지로 다시 넘어갔지만, 페이지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머리는 어찌할 줄 몰랐으며, 손을 쓰기도 어려웠다. 짧은 탄식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아. 식은땀이 흘렀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부터 비상 사이렌이 울리 듯, 머리속을 앵앵 거리면서 헤짚어놓기 시작했다. D.Z 라는 사람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상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맞아,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지. ”

 흠칫 놀라서 돌아보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왜? 악마에겐 그런 능력조차 있는건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모르는 척 하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침착하게 방을 빠져나가려 문고리를 잡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큰 힘으로 누군가 문을 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포심이 몸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 같았다. 아, 이대로 있다간 죽을지도. 주저 앉아서 목에 걸고있던 십자가를 손에 쥐고 기도문을 읊었지만 스산한 기운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죽는다. 그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있었을까, 십자가를 쥐고 있던 손에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악마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움이 생겨났다. 전부터 신부(사제)가 말하기를, 악마와 눈이 마주치면 네 기억과 네가 간직한 비밀이 전부 들켜서 죽게 될 것이라고. 무섭지않다면 거짓말이다. 당연히 무서웠고, 당연하게도 악마의 앞에 자신은 좋은 먹잇감 일 뿐이었다.

 손에 닿아오는 차가운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차가운 것이 내 손에 닿았다. 놀라서 눈을 번쩍 뜨자 신부(사제)께서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나를 보고 계셨다.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급하게 나를 일으켜세워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신부(사제)께서는 내게 진정하고 오라며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셨다. 큰 거울 앞에 서있는 내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손이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손을 씻으려하자 갑자기 새빨간 핏물 같은 것이 나왔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내면서 소리를 지르자 신부(사제)께서 화장실 안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길래 손가락으로 핏물 같은 것이 바닥으로 흘러내려 타일을 적시고있는 세면대를 가리키자, 가까이 다가가시더니 한참을 바라보시다 이제 괜찮다며 웃어주셨다. 경계를 풀지 못하고 조심하며 신부께 다가가자 물은 맑은 색을 띄면서 괜찮아졌다. 천천히 진정하면서 나오라는 신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바깥으로 급히 나간 신부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손을 씻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신부를 찾으려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자 스산한 기운은 그대로였다.

“ ... 신부님? ”

 고개를 돌리면서 신부를 찾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혹여나 제 방으로 돌아가셔서 정화를 하고 계시는가 싶어서 급히 방으로 돌아가자,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들리는 대화가 심상찮아 문 가까이에 귀를 대자 조금 더 선명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
“ 당신의 빈자리 탓에 다른 악마들이 곤란해 합니다. ”

“ 어쩌라는건가, 내게는 이곳이 집이야. ”
“ 당신의 감도 무뎌졌군요. ”

“ ... 뭐라고? ”

 아까 전에 당신이 구해 준 수녀가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도 모르시다니, 많이 무뎌지셨습니다. 몸이 저절로 떨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빈자리? 악마? 감이 무뎌져? 왜? 평소에 잘 돌아가던 머리는 급박한 상황이 닥치면 느려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문에서 떨어져 바닥에 주저앉자 문이 열리고 신부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아. 순간적으로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어깨를 잡아오는 힘에 놀라서 숨을 멈추고 눈을 더 꽉 감았다.“ 괜찮네. ”그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좀 전의 신부는 없어진지 오래였고, 악마의 형상을 한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신부, 님..? ”목소리가 떨리면서 묻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라고 믿고 지냈던 사람은 사실 악마였다는건가? 하지만 안심되는 마음에 신부의 손을 잡으면 차가웠다. 무섭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슬쩍 뒤를 보면 제 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새까만 형상이 있었다. 해칠 생각은 없어보인다. 그렇다면 왜 계속 저를 바라보는지 모르겠다. 악마의 형상을 띈 신부에게 고개를 돌리면 웃는 얼굴로 안심하라는 듯이 저를 토닥여주었다. 놀람의 연속이 이어지는 바람에 안심되자 눈이 감기면서 그대로 기절한 것 같다.

**

 잠들었군. 신부의 형상으로 되돌아간 악마가 한숨을 쉬면서 수녀를 안아들었다. 그러자 베일이 떨어지면서 가려져있던 수녀의 푸른 하늘과도 같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이마에 입맞추면 미간을 찌푸리다가 꼼지락거리는 그 행동이 귀여워서 수녀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애틋하게 수녀를 바라보던 신부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렇게 아름답다던 서큐버스, 인큐버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수녀의 수려한 외모 뒤에 담백하고 냉정한 성격에 끌려 신부가 되어 잠입한 것이다. 소녀는 딱히 신의 사랑을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마인 자신이 쫓아다니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아마 1년 전만 하더라도 수녀가 많던 기숙사는, 내가 나타난 이후로 한명씩 줄어들고 있었다. 이유는 뻔하다. 외모와 악마의 본질 탓에 인기를 얻은 나를 유혹하려는 수녀가 넘쳐났고, 그 수녀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모두 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지만 물론 거짓말이었다. 순진한 그녀는 내 말을 믿었다. 최후에는 그녀 혼자 남았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었다.

 침대 옆에 있던 책을 꺼내들어 페이지를 넘기자, 익숙한 구절이 보이는 듯 했다. 글은 보이지 않지만 기운은 남아있었다. 뒤를 돌아 우두커니 서있는 악마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다른 악마가 다자이 씨의 수첩에 있던 구절을 인용하여 이 수녀가 읽던 책에 새겨넣은 것이라고. 그 대답이 돌아오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얼마나 놀랐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좋지않은 꿈을 꾸는 것인지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다. 이런 모습도 마냥 귀여워 쿡쿡 웃으면서 억지로 미간을 펴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더한 악몽을 꾸는 것인지 끙끙거리는 표정마저도 귀여워서 웃었더니 뒤에있던 악마가 드디어 미쳤냐는 말을 해왔다.

“ 이 소녀에게 단단히 미쳤지. 정말 귀엽지 않은가? ”

 아, 보지말게나. 나 혼자서 볼테니까. 나이먹고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창백한 얼굴을 쓸어주면 차가운 기운에 그녀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소녀였다. 기억을 지울거냐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궁금했다. 두려움? 공포? 아니면 침착하게 바라봐줄까? 둘 만의 비밀로 해도 괜찮겠지. 죄책감은 없다. 애초에 악마에게 죄책감 따위 있을리가. 사랑스러운 얼굴을 쓰다듬다가 볼에 입맞췄다.

 아아, 부디 빨리 눈을 떠주게. 그 눈으로 나를 바라봐줬으면. 그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나를 보면서 비밀을 털어놓지 않겠는가. 아리따운 아가씨. 그녀를 바라보는 악마의 눈은, 그녀의 안위 따위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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