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마리아, 구해준 나에게 할 말은?"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아니야 아니야. 내가 이곳에 불려 온 건 순전히 우연이 겹쳐서 인연이 생긴 거니까."


뭐야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그런데 내가 그에게 이름을 말했던가?  하품을 늘어지게 한 그는 잔뜩 풀어진 눈으로 잠들어있는 라프레티를 본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손가락을 허공에서 휘휘 젓자 뭉게뭉게 피어올랐던 향이 공처럼 뭉치더니 사라졌다. 엉망이 된 휴게실을 둘러보던 그가 말했다.


"상성이 안 좋았어. 마력이 강할수록 세게 먹히는 향이거든. 이런 걸 어떻게 구한 건지."
"저기, 아니 저기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여쭤도 될까요?"
"에류아느 카렌. 류카라고 불러 줘."


정석대로 카렌이라 하면 여자 이름 같고 좀 억지인 애칭으로 류카라 하면 남자 이름 같다. 그는 기절해있는 루이를 보고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손을 휘둘러 휴게실을 원래대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뭐라도 봤나 싶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루이를 봤지만 차라리 눈을 감고 있으니 얼굴만은 잘생겨 보였다.


"저기 류카씨, 라피를 깨울 방법이 있을까요?"
"간단해, 마력에 흡착되는 향이니 신력으로 향의 기운을 몰아내면 돼. 평소의 운용과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류카는 오른손과 왼손을 각자 중지와 약지를 엄지와 붙이고 검지와 소지를 쭉 펴 여우 모양으로 만들더니 서로의 주둥이를 맞대었다. 그러니까 잠자는 공주님에게 키스를 하란 소리다. 내가 처음 보는 향을 해제하는 방법과 신력의 운용법까지 알다니,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애초에 사람이 맞긴 한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류카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경계 안 해도 돼. 난 어찌 보면 관찰자 같은 거지만. 배드 엔딩이 지겨워서 조금 난입했던 거니까."
"배드 엔딩?"
"그래, 사실 가슴 큰 언니 어쩌고는 농담이고 난 널 알고 있어 마리아."


농담치고는 조금 진심이 들어간 것 같던데. 쓰러진 기사들을 한군데에 대충 뭉쳐 놓은 그는 그 난리통에도 멀쩡한 머리핀을 바닥에서 주워 내게 돌려주었다. 머리핀을 건네 받을 때 살짝 닿은 류카의 손은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서늘했다. 그렇다고 시체의 손 같지는 않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너도 어떻게 보면 이방인이잖아? 마리아가 싫으면 ---라고 불러 줄까?"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노이즈가 잔뜩 낀 소리로 들리긴 했지만 방금 류카가 부른 이름은 내 전생의 이름이었다. 류카는 아직도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작위적으로 검지 손가락을 세워 턱에 대고 고민하듯이 말했다. 앗, 저렇게 보니 좀 귀여울지도.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창작물에서 흔하잖아? 원래 있어야 할 영혼이 다른 세계로 떨어지는 패턴이라고 할까. 그래서 수많은 세계선이 생겨난 것이 네가 전생에서 본 이 세계야. 일종의 예습이지."
"네...?"
"천생연분이란 말 알지? 하늘에서 내려 준 인연인 네가 사라졌으니 그 아가씨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야 하잖아? 그런 부분에선 운이 없거든 저 아가씨는."


류카가 손을 뻗어 마치 트럼프 카드를 늘어놓는 마술사처럼 손을 훑었다. 그러자 전생에서 본 화면들이 쭉 늘어졌다. 전생에서 본, 수 십 가지의 게임 엔딩들이었다. 하지만 곧 모든 화면에 붉은 경고창이 뜨기 시작했다. 화면들의 그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가 본 이 세계는 항상 중간에서 엔딩이 났지. 그 아이의 진정한 엔딩은 어땠을까. 응?"
"설마 루이가 저런 성격인 게..."
"쟤는 원래부터 저랬어. 귀족 이상쯤 되면 모두 대외 이미지를 따로 만들기 마련이지. 황제가 되자마자 동생을 죽이고, 다음 방해꾼인 그 아가씨를 암살하려 하지. 흔하잖아? 정상에 자리에 오르자마자 방해물들을 없애는 거."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의 진실' 같은 걸 읽는 기분이었다. 라프레티의 진짜 엔딩은 모두 비참해서, 오히려 숲 속에서 혼자 사는 엔딩이 가장 나아 보일 정도였다. 류카는 그 많은 그림들 중에서 전생에서 보았던 '마리아'의 스탠딩 일러스트를 집었다. 그것은 내 모습이었지만 내가 아닌 마리아였다.


"그녀의 해피엔딩엔 언제나 당신이 필요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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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이 다른 글의 조회수가 두 배쯤 되는 거 보고 아 사람들 욕망은 다 같구나 생각했습니다.
저도 라프레티와 마리아의 야스 글을 2만자 쯤 쓰고 싶네요 근데 한 3천자쯤 쓰면 기력 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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