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김도영 https://tsunami.postype.com/post/10019101 과 같은 세계관<3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간다지만 이건 너무한 게 아닌가?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발현하던 그 순간, 흔들리던 아빠의 동공과 헛구역질 하던 엄마를. 그래요, 제 페로몬은 고수에요. 꼴에 박하랍니다. 평탄치 않은 어린 시절이었지. 베트남 쌀국수 집에나 가야 환영 받을 수 있었다니까? 아니 나는 꽃도 아니고 박하인데, 왜 이렇게 호불호가 심하지? 그냥 고수여서 그런가? 뭐 상관 없었다. 머리가 크면서 페로몬 조절이 능숙해졌으니까. 난 억제제를 먹는 오메가처럼 내 페로몬을 꽁꽁 숨겼다. 그 탓에 감정 동요도 적어졌다. 감정이 동요할 수록 페로몬을 억제하기 힘들어지니까. 난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보살처럼 살았다. 

내 친구 황인준? 얘는 민들레였다. 살면서 민들레 향기 맡아보신 분? 아마 거의 없을 걸.  꽃이면서 씁쓸한 냄새나 나는 게, 황인준이랑 퍽 잘 어울렸다. 행복과 감사, 꽃말도 기가 막히지. 난 황인준이 너무 부러웠다니까? 그래도 꽃이잖아! 여튼 황인준은 민들레처럼 굳세게 살았다. 감정 조절이 능한 나와 어디가서 절대 안 지는 황인준. 멀더와 스컬리 저리가라 할 만큼 최고의 2인 1조였고.

여튼 나와 황인준 둘 다 본인의 페로몬이 조금은 부끄러웠지만 별 상관 없었다. 열아홉의 겨울에 우린 같이 대학도 합격했고, 같이 알바도 구했으니까. 나는 배스킨 라빈스에서, 황인준은 그 옆에 있는 뚜레쥬르에서. 같이 퇴근하면서 아이스크림 하나 빨거나 아님 남은 빵 주워먹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근데 문제가 뭐였냐면. 갓 사회에 나온 나에게 알바는 너무 끔찍한 곳이라는거지. 나 나름 감정 동요 없는 사람인데. 난 자꾸만 슬금슬금 삐져나오는 내 고수 페로몬을 틀어막느라 죽을 뻔 했다고. 가끔 황인준은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김여주 너 오늘 화나는 일 있었지. 나는 고수 냄새 풀풀 나는 손으로 내 이마를 탁탁 쳤다. 

그 날도 그랬다. 써리원 데이네 뭐네 사람이 존나 많았던 날. 웬 진상 하나한테 잘못 걸려서 탈탈 털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너무 녹았다나. 당연하죠, 아이스크림 사들고 바깥에서 드시다 오셨으니까. 나는 환불이나 교환 안 된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다. 물론 진상 손님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시고. 스멀스멀, 페로몬이 삐져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냥 확 한번 뿜고 쫓아내? 근데 저 손님이 고수 좋아하는 사람이면? 난 손님의 개소리를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선생님, 선생님이 아이스크림 들고 바깥에 나가신거잖아요. 


갑자기 웬 분홍 머리 남자가 끼어들었다. 헙, 숨이 막힌다. 눅진한 체리향. 나재민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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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민은 베라 알바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점장님은 왜 굳이 써리원 데이에 면접을 잡으신거지? 지금 몸이 두 개여도 부족한데. 여튼, 나재민의 저 싸가지 없는 대응을 본 점장님은 나재민을 단박에 캐스팅했다. 기가 세서 좋다나. 난 나재민을 흘긋흘긋 쳐다본다. 

나재민은 다음 날부터 곧장 출근했다. 그 탓에 나만 성가셨다. 점장님이 재민씨 잘 교육하라고 나한테 난리였으니까. 재민씨는 점장님과 아이스크림 동그랗게 굴리는 법이나 연습하고 있었다. 난 하루 종일 드라이 아이스 깨고 앉았는데. 하루 종일 우유 스팀 빼고 있었는데!

점장님이 일이 생겼다며 퇴근하고, 난 다음 타임 언니가 올 때까지 나재민과 단둘이 가게를 봤다. 나재민이 넉살 좋게 말을 건다. 자기 페로몬은 체리네, 그래서 체리 쥬빌레를 좋아하네, 이번에 그래서 머리도 분홍색으로 염색했네. 나재민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줄줄한다. 내 페로몬도 얘기해야하나? 눈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 여주야, 난 고수 진짜 좋아해! 


나는 가만히 벙쪘다. 아까 고수 냄새 맡았나보지. 질 수 없었다. 황인준이 알려준 개 눈깔 뜨기를 시전했다. 나도 아까 너 체리 향 맡았어. 나재민이 시원하게 웃으며 박수를 짝짝 친다. 다행이다. 너 맡으라고 풀었거든. 대가리에 총 맞은 것 같았다. 나재민은 여전히 히히 웃고 있다.

황인준이 폐기가 났다며 소세지 빵을 들고 왔다. 난 베라 앞 벤치에 앉아 소세지 빵을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야 체하겠다! 황인준이 내 등을 툭툭 두드린다. 이렇게라도 해야했다고. 체리네 고수네 이런 생각 그만 하고 싶었으니까. 난 메어오는 목 때문에 켁켁거린다. 으이그. 황인준이 제 노란 가방에서 물을 까 건넨다. 

새로 온 알바생 맘에 안 들어. 찹쌀 꽈배기를 먹던 황인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날 본다. 너가 누구 싫어하는 거 처음 봐! 사실 나도 처음이었다. 곱씹을 수록 기분이 나빴다. 나 맡으라고 지 체리향을 풀어? 체리는 호불호 없다 이거냐? 아, 우쭐댄건가? 그렇다기엔 꼴에 체리가? 뭐 튤립 이런 애들도 아니고? 난 소세지를 입 안에서 도로록 굴리며 상념에 빠진다. 황인준은 유리창을 열심히 닦고 있는 나재민을 보고 있고. 황인준이 내 어깨를 툭툭 친다. 야 쟤 그래도 일 잘하는데? 난 황인준을 흘긴다.

이렇게 출근하기 싫었던 적이 있나. 황인준 없었으면 나 진짜 빵꾸 냈을지도 몰라. 난 느적느적 황인준의 손에 끌려 버스에 탄다. 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이성적으로. 난 황인준의 말에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게 힘든거니까! 


점장님

여주씨, 내가 일이 생겨서.

오늘 재민씨랑 둘만 있을 수 있지?

평일이라 사람 많이 없을거야

미안해!


이 말 취소. 난 아직 한참 애새끼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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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텁을 정리하고, 스쿱을 탕탕 내리치면서 기도했다. 제발 나재민이, 이 극악무도한 작업 강도에 놀라서 도망쳤게 해주세요 제발요. 드라이아이스를 내려치는 망치 소리를 목탁 삼아. 난 간절히 기도한다. 이 이상하고 찝찝한 기분을 누가 도려내갔으면 좋겠으니까. 물론 무교인 내 소원을 어떤 신이 들어줬겠냐고. 나재민이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가게로 들어선다. 안녕 여주! 옷 갈아입으러 가면서 기분 참 좋아보인다. 

진짜 손님 없었다. 차라리 손님 많으면 덜 어색할 텐데. 나재민은 내 옆에 앉아 종알종알 지 얘기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질문도 한다. 여주 그럼 쌀국수 좋아해? 나 쌀국수 진짜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오늘 같이 갈래? 반짝거리는 나재민의 눈. 난 그래서 황인준을 팔기로 했다. 아, 나 친구랑 오늘 엽떡 먹기로 해서. 순식간에 나재민의 눈썹이 바닥을 향한다. 아, 어제 그 소세지 빵 같이 먹던 친구랑? 나재민이 제 손을 앞치마에 탁탁 턴다.

소세지빵 먹는 걸 또 언제 봤대. 난 속으론 개 씨발 씨발 욕하면서도 밖으론 생긋거리며 빵을 팔고 있을 황인준을 상상해본다. 나재민은 아직도 상처받은 표정이다. 마음이 존나 불편했다. 이 와중에도 손님 하나 없고. 맨날 울려대던 배달의 민족 주문! 도 잠잠하다. 하 나 이런 분위기 진짜 싫은데. 충동적이었다. 오늘 쌀국수 먹자. 나재민이 다시 방긋 웃는다.

황인준은 처음 보는 애랑 밥 먹기 싫단다. 나는 좋겠냐? 세 번 본 애랑 밥 먹는 거?  내가 황인준이랑 지 뒷담화하는 거 모르니까. 나재민은 콧노래 부르며 아이스크림 콘을 정리하고 있다. 여주야, 파인트 컵 창고에서 꺼내올까? 시키지도 않은 일도 척척하고 있고. 나는 에어컨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재민의 분홍 앞머리를 본다. 솜사탕 같은 앞머리. 한 입 와앙 먹으면 체리 맛이 나겠지.


-  내가 너 고수라고 부르면 기분 나빠? 


내 컵에 물을 따라주며 나재민이 묻는다. 날 고수라고 부르겠다고? 난 곰곰히 생각해본다. 기분 나쁠 게 뭐 있어. 내가 고수 맞는데. 그럼 나 너 체리라고 불러도 돼? 나재민은 박수를 또 짝짝 친다. 나 체리 맞아!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긴. 니가 하루종일 떠들어댔잖아. 나는 그냥 허허 웃기나 한다. 

근데 나 진짜 이런 사람 처음 봤어. 나재민은 진짜 고수에 미친 놈.. 그러니까 고친놈이었다. 나재민이 먹는 게 쌀국수인지, 아님 고수 샤브샤브인지 난 알 수가 없었다고. 얘 진짜 고수 좋아하는구나. 난 끊임없이 나재민의 입으로 들어가는 고수를 본다. 여주 넌 고수 싫어해? 그런 말을 하는 나재민의 입에서 나와 똑같은 향이 난다. 기분이 묘했다.

나재민은 고수가 진하게 우러난 쌀국수 국물을 수저로 홀짝홀짝 떠먹으며 고수가 좋은 이유를 줄줄 말한다. 코리앤더라는 영어 이름도 예쁘고, 색깔도 마음에 들고, 식감도 좋고, 향도 좋고.. 어쩌고 저쩌고.. 근데 듣다보니까 기분이 진짜 더 묘했다. 김여주 = 고수이다보니,,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니까? 난 오물오물 고수 예찬을 늘어놓는 나재민을 본다. 


- 근데 처음 봤을 때 니 페로몬은 왜 풀었어?


이런.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나와버렸다. 종알종알 얘기하던 나재민이 뚝 멈춘다. 고수 향이 가득한 우리 테이블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나재민이 쿨럭거린다. 얘 뭐지? 난 고수 하나 없는 내 쌀국수 국물을 떠먹는다. 물론 고수 향은 진하게 났고. 대답하기 싫은가보지. 별 생각 안 했다. 체리야 얼른 물 마셔. 난 고개를 들었다. 


- 왜 풀었을 것 같은데?


또, 그 때처럼 체리향이 난다. 이번엔 체리 쥬빌레처럼,

 끈적하고 달콤한.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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