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현시점 

2년 째 해마다 돌아오는 날이었다. 중3 3월 말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1년 뒤 처음 돌아온 3월 31일은 운 좋게도 주말이었다. 그래서 주말에 폭풍같이 쏟아져 내리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올해는 화요일이어서 전 날부터 엄청난 감정 컨트롤이 필요했다. 2년 정도 됐으면 이제 괜찮을 때도 됐어. 난 분명히 내일 별 일 없이 등교를 할 것이고 평소처럼 수업을 듣다가 잘 마무리하고 집에 오겠지. 점심...은 먹지 말자. 학교에서는 토하기 싫으니까. 점심시간 때는 스터디 과제를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분명 평소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날짜가 3월 31일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이었으니까. 교복을 입고 밖으로 한발자국을 내딛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 거라는 것은 내 예상범주 밖이었다.

숨을 한번 쉬는 것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주저앉고 다시 일어나 몇 발자국을 걷고 다시 주저앉고를 반복했다. 힐끔거리는 시선들은 많았지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그 날 4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을 때 이 불규칙한 호흡을 참지 못 하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어디로든 가야했다. 하염없이 달리다가 멈춰선 곳은 출입금지 문구가 붙어 있는 옥상 문 앞이었다.

작년에 왔을 때는 잠겨 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기대하지 않고 슬쩍 열어봤는데 의외로 쉽게 열렸다. 출입을 금지하는 곳 치고는 잠겨 있지 않아서 의아했지만 아무하고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결론적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옥상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현실과 다른 세계에 몸을 맡긴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아, 또다. 또 이런 느낌. 이 흘러넘치는 감정의 요동을 아무하고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 옥상 문을 잠그고 햇볕이 내리쬐는 옥상의 정중앙으로 달려갔다. 

차갑지 않은 바람이 불어와서 나는 오랜만에 3월 31일의 날씨를 만끽했다.

 

작년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못 하고 내 작은 방 하나가 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보냈었다, 이 날을. 지금까지는 상관없었다. 그 세계 안에는 그도 함께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없다. 감정에 잠겨 숨이 가빠질 때 함께 호흡해주던 그가 없다. 쏟아져 내리는 감정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대도 건져 올려 줄 그가 없다. 그가 없는데도 나는 이 세계 안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감정을 밖으로 흘려 내보내며 점점 텅 비어갔다.

 

그 간의 일이 떠오르자 반사작용처럼 멈춰선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걷잡을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닦아낼 생각조차 못 했다. 

1년 만에 다시 맞는 이 날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각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여전히 그 날에 머물러 있었다.

 

이대로 수업이 전부 끝날 때까지 있을 생각이었다. 몸이 안 좋아 보건실에 간다는 메시지도 같은 반 애한테 보내놓은 상태였다. 

선생님한테 알아서 잘 말해주겠지. 성적순으로 얻은 회장직이지만 어쨌든 회장이니까 별 의심도 안 할 테고. 스터디 선배들에게는 어제 미리 연락해놔서 방해받지 않고 오늘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밖에서 쾅쾅거리며 옥상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가 나기 전까진.

 

분명히 발로 차는 소리였다. 조금은 잦아들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시끄러운 소리의 등장과 함께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 소리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로 바뀌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바닥에 쏟은 물을 손으로 그릇에 담고 있는 것처럼 내 감정이 제대로 추슬러지지 못 하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안 돼. 감정이 새어나갈수록 나는 비어간다. 나는 흐르는 감정을 어떻게든 모아 담으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문 건너편 사람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

 

그러나 엉망진창인 얼굴을 하고서 문을 열고 나가 모르는 사람을 대면할 수는 없었다. 잠잠해지면 나가서 이번에야말로 보건실을 가야지.

너무 울어댄 탓인지 온 몸에 열이 올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지러운 게 정말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른 나가고 싶은 마음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기만을 기다렸고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조금은 성급하게 문을 열어버렸다.

 

옥상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자 밖과는 달리 서늘한 기온에 약간의 오한이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나는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 하고 열기와 어지러움이 지나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어야했다. 시야를 차단하는 눈물 때문에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에 닿을 때까지 나는 내 세계에 홀로 갇혀 있었다.

 

 

정우진에 대해서는 같은 반이고 수업시간에는 그다지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다른 반 애가 찾아오긴 하는데 항상 같은 얼굴인 걸 보면 친구는 그 애 말곤 없는 것 같았다. 그 친구가 오지 않을 때는 항상 엎드려 자고 있어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정우진의 얼굴을 마주보는 건 처음이었다.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 정우진이 옥상 문 앞에서 내 어깨에 손을 올렸고 나는 그만 내 세계에서 잠시 빠져나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다. 나랑은 상관없는 애잖아. 왜 내가 벗어나는 게 아니라 정우진이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지. 

나는 이 비현실적인 감각을 떨쳐내고 싶지 않아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이라도 깜짝하면 다시 내 세계 안에 혼자 남겨질까봐.


정말로 정신이 든 것은 같은 반인 정우진보다 더 낯익은 얼굴이 계단을 올라오면서였다. 내가 계속 울고 있었다는 걸 인지한 것도 그 때였다. 들키기 싫어.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가누며 재빨리 계단을 내려왔다.

그 뒤로는 수업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 보건실에 있었다. 보건실에 누워 있으니 정우진이 울어서 따끔거리는 내 눈 언저리에 머무르며 어딘가로 가지 않고 내 세계 안에 있어줬다는 것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든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