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 타닥... 성우의 검지 두 개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는 발군의 독수리타법으로 한 자, 한 자 마음에도 없는 화상회의 제안을 승낙하겠다고 쓰고 있었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해야겠지, 일이니까. 무슨 일에 미친놈도 아니고 킥오프 다음 날에 회의라니. 좋게 말하자면 ‘워커홀릭’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황민현’ 이었다. 그렇다. 황민현. 그 세 글자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설명은 충분했다.


“오늘 바빠?”

“흐악!”


머릿속에 온통 ‘황민현’ 세 글자만 떠올리던 성우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항상 말없이 일만 하던 랩장이 난데없이 ‘오늘 바빠?’라니, 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성우는 습관처럼 바짝 긴장해서 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교수님이 우리 연구실 학생 충원하란다. 아마 네 쪽으로 한 명 보내주실 거야. 혹시 학부생 중에 지원할만한 애 알고 있어?”

“음, 학부생 중이라면....”


성우가 기억을 되짚었다. 학부생, 그중에서도 연구 경험을 희망하는 학생이면서 함께 일하기 편하고 좋을 것 같은 상대. 감은 눈 위로 몇 명의 얼굴들이 휙휙 떠올랐다. 그들의 이름까지 전부 떠올린 성우가 대답했다.


“네, 몇 명 있어요.”

“그래? 그럼 먼저 연락해봐. 일단 학과에도 전체메일 쏘라고 해볼게.”

“넵!”


잘됐다. 마침 메일 쓰기를 회피하고 싶었던 성우는 즐겁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일터에서 허락받고 하는 카톡은 무척 즐겁지. 성우가 신나게 리스트를 오르내리며 누구한테 말을 걸까 고민했다. 그는 곧 익숙한 이름을 찾아 대화창을 열었다.



[ 오랜만이다. 요새 뭐 하고 지내? (결혼식 X, 장례식 X, 옥장판 X) ]

[ 옹선배~! 오랜만이에요!!!!!!!!! 저 아직 학교예요. 요새 취업준비 하느라공... ]

[ 많이 바빠? ]

[ 안 바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선배님 만나러 갈 시간은 있죠옹 ]

[ 예전에 연구실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던 거 아직 유효해? ]

[ 헐 ]

[ 헐 ]

[ 대박 ] 

[ 당근빳다죠~! ]

[ 그래? 그럼 이번 주나 다음 주에 학교 올 수 있을까? ]

[ 후후. 선배. ]

[ ? ]

[ 저 지금도 학교지용!!!!!!!!!!!! 지금 갈게요 지금!!!!!!!!!!!! ]



어우, 답변 봐라. 파이팅이 넘친다. 성우가 조용히 웃고는 랩장에게 말했다. 


“... 해서, 지금 당장 오겠다고 합니다. 와도 괜찮을까요?”

“시간 절약하게 잘됐네. 오라고 해.”

“넵.”



[ 지금 와도 된대. 참,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

[ 그럼요~ ]



성우가 방긋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모든 일이 이렇게 잘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전송하지 못한 이메일 한 통이 남아 있었다. 에잇, 이까짓 거 빨리 보내버리자. 회의가 뭐라고. 적당히 하고 꺼버리면 그만인걸. 성우가 재빨리 메일을 마무리했다. 전송 버튼까지 클릭하고 나자,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시원해졌다. 





똑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성우가 ‘들어오세요’ 라고 하자 매끄럽게 문이 열리고 방문객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애당초 연락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이 찾아왔다. 성우가 직접 연락했던 인재는 송민정으로, 성우보다 네 학번 아래 후배였다. 그녀는 성우만큼이나 키가 크고 사시사철 스타일을 중시하는 멋쟁이였다. 항상 활기차고 어떤 활동이나 모임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라 어딜 가든 인기가 많았다. 인간관계에서 뒤끝이 없는 깔끔한 성격인 것도 인기에 한몫했다. 학번 차이가 꽤 있다 보니 성우와 민정이 직접 마주칠 일은 드물었지만, 일 년 전 성우가 학부 수업조교를 맡았을 때 당시 과대표였던 민정과 합을 맞춰 일했던 경험이 있었다. 같이 일하기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어서 이번에도 민정에게 먼저 연락한 것이었다. 


반면 민정 옆에 선 문짝만 한 크기의 남학생은 오며 가며 얼굴만 튼 사이였다. 민정과 같은 학번 동기인 황현우. 성우는 그가 그냥 조용하고 성실한 성격의 학생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민정과 함께 여길 왔다는 것은....


설마 둘이 사귀나?


성우는 가장 그럴듯한 가정을 떠올렸다. 음, 열정과 힘이 넘치는 청춘남녀 둘이 만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어쩐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성우는 마치 귀여운 아이들을 본 사람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학생들을 회의공간으로 이끌었다. 


회의공간이라고 해봤자 연구실 한쪽에 대충 강의실 책상 두어 개 붙여놓고 의자를 욱여넣은 곳이었다. 장소는 몹시 협소하고 볼품없었지만, 학생들은 불만 없이 냉큼 앉았다. 민정이 살갑게 웃으며 커피와 쿠키를 내밀었다. 학생이 왜 이런 걸 사온 거냐는 타박에 민정은 방긋 웃으며 어서 드시라고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시작된 다과회. 웬일로 랩장도 편안한 얼굴로 동석하여 학생들과 학부연구생 관련하여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해서, 민정이는 옹 선생이 불렀으니 옹 선생네 프로젝트 들어가면 되겠고 현우는 새로 들어온 권 선생 쪽 프로젝트 들어가면 딱 맞겠네. 잘 됐다.”

“정말요? 와아, 다행이다! 사실 오면서 걱정했거든요. 옹 선배님께 연락받은 건 저였지만, 현우도 엄청 하고 싶어해서 같이 온 거거든요. 청소만 해도 좋으니 뽑아달라고 부탁하려던 참이었는데 둘 다 일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그렇구나. 그럼 다음다음 주 월요일부터 두 사람 다 여기로 출근하면 돼.”


구두계약이 끝났다. 요새 이런 비유를 써도 될지 모르겠다만, 민정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었다. 이렇게나 연구실에서 일하고 싶어 하다니. 고생 안 하고 단번에 맞는 사람 찾아서 다행이긴 한데... 민정이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다음 학기나 다다음 학기쯤에 대학원 원서 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삐리릭 삐릭 삑-


이제 가라고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성우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어? 무슨 소리죠?”

“아, 이거 내 핸드폰 알람이야. 회의가 있어서.”

“바쁘세요? 저희 나갈게요.”

“아냐, 아냐. 그냥 회의인데....”


민정과 현우가 급히 나갈 채비를 했다. 성우는 그들을 말리지 않으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성우가 씩 웃으며 후배들을 돌아보았다. 


“송민정. 조만간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 될 거라면 너도 회의에 들어오는 게 좋지 않겠어?”





황현우를 먼저 보낸 다음, 성우와 민정은 회의 준비를 시작했다. 길쭉한 강의용 책상 한가운데에 노트북을 두고, 맞은편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민정은 친절하게도 화상회의 설정까지 도와주었다. 크로마키 기능을 이용해 지저분한 랩실 풍경을 지우고 빈방 사진으로 배경을 꾸몄다. 비록 굉장히 휑하고 어색한 빈방 사진이었지만, 여기저기 책과 서류를 산처럼 쌓아둔 모습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이제 회의만 잘하면 될 텐데. 성우의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그래도 민현과 단둘이 1:1의 상황이 아니므로 이상해지지 않겠지? 신이시여 제발. 성우가 민정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 Minhyun Hwang 님이 회의에 참여합니다! ]



노트북 화면 가득히 무표정한 민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역시 웹캠 및 기타 설정을 손보던 중이었는지 화면이 흔들리며 딸각, 딸각 하는 소리가 났다. 


“옹성우?”


습관처럼 성우를 부르던 민현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성우의 곁에 바짝 다가앉은 낯선 사람 때문이었다. 메일 답장에도 옹성우 1인만 참석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저 사람은 누구지. 민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성우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성우가 마이크를 켜고 태연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 안녕하세요. 옹 선생님.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앗, 안녕하세요! 저는 학생 연구원 송민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민정이 속사포로 자기소개와 첫인사를 마쳤다. ‘학생 연구원’이라는 단어를 듣고 얼음처럼 굳어있던 민현의 얼굴이 눈 녹듯 부드러워졌다. 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민정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어쭈, 이놈 봐라.’ 성우가 생각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에....”


각설하고, 민현은 아침부터 준비한 PPT 화면을 공유하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성우와 민정은 마이크를 끈 채로 회의 내용을 부지런히 필기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민정이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두며 말했다.


“선배. 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정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 이 회의 장면 캡처해도 돼요?”

“너.... 어쩐지 사심이 들어간 것 같은 질문인데.”

“대박 잘생겨서요. 진짜 대박. 태어나서 이렇게 잘생긴 사람 두 번째로 봤어요.”

“이봐, 그거 범죄다.”

“아니, 얼굴만 캡처한다는 게 아니라 회의 내용을 캡처하는데 제가 전체화면 캡처하는 것밖에 방법을 몰라서 그래요.”

“됐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 얼굴 아니야....”


성우는 솔직히 민정이 그러든가 말든가 관심 없었다. 민현의 사진 한 장을 구하려고 피를 튀기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면 지난 십 년간 몇백 명은 봤다. 그보다 성우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민현의 표정에 더 집중했다. 음소거를 해놓고 나란히 붙어 앉아 대화를 나누는 성우와 민정의 모습이 못내 신경 쓰이는지 민현의 미간이 점점 좁혀지는 것이 아주 재미있었다. 


회의는 생각보다 길어져서 한 시간을 꽉 채웠다. 길었던 민현의 브리핑이 끝나고 성우가 몇 가지 질문에 답한 다음 회의는 마무리 수순에 들어갔다. 몇 가지 사항을 결론지은 민현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옹 선생님께 관련 자료를 메일로 보내드리고 메모해둘 내용은 카톡으로 남기겠습니다. 추후 확인 바랍니다.”

“네, 그러시죠.”


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실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저 교활한 자식. 카톡 차단 못 하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 갑자기 일할 의욕이 뚝 떨어졌다. 두고 보자. 내가 내년에는 기필코 연구 같은 건 때려치우고 대학원 뜬다.


그렇게 회의는 종료되었고 남은 건 마음속 찝찝함과 민정의 황민현 찬양이었다. 


“어떡해, 너무 좋아요. 여기 들어온 건 어쩌면 운명일지도....”

“하하.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아름다운 남자가 얼마나 희귀한데요.”


민정이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지자 랩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파티션 너머에 앉아있던 랩장이 빼꼼 고개를 빼들어 민정에게 보여달라 말했다. 민정이 신이 나서 달려가 민현의 모습을 랩장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기대하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완전 기생오라비네. 딱 봐도 놀게 생겼구만. 조심해라.”

“에이 원래 잘생긴 얼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댔어요.”

“검은 머리 짐승은 믿는 거 아니다.”

“히잉.”


매서운 말이 폭격처럼 날아들자 민정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금 전까지 붕붕 떠다니던 아이가 한순간에 축 처졌다. 성우는 민정을 달래주며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저분은 원래 저래.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감사해요.”

“같이 일하겠다고 해줘서 고마워. 다다음주에 봐!”

“네!!!”


성우의 배려에 민정이 다시 살아났다. 민정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민정의 모습이 사라졌다. 혼자가 된 성우는 괜히 싱숭생숭해진 마음으로 연구실로 돌아갔다. 날카롭게 말을 내뱉던 랩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딸깍딸깍. 자리에 풀썩 앉은 성우가 습관적으로 마우스부터 흔들어 대기 상태에 있던 컴퓨터를 켰다. 아까 화상회의의 여파인지 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는 괜히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띄워놓고 멍청히 있었다. 랩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떠다녔다. 


‘딱 봐도 놀게 생긴 기생오라비.’


울컥. 성우는 랩장의 말에 반박하고 싶어졌다. 반반하게 잘 생긴 얼굴이면 다 기생오라비야? 얼굴만으로 사람 판단하는 거 선입견이고, 편견이다. 부디 다른 곳에서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흥. 황민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헉. 성우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생각한 거지? 미친 거 아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랩장이 막말했어도 그렇지 내가 누구 편을 든 거야.... 성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는 찬물을 세게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나 자신!!!


찬물을 맞으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휴.... 성우는 우아한 손짓으로 핸드타월을 뽑아들고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자. 나는 내 할 일만 잘하면 돼.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성우가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화장실을 나섰다. 남은 오후 시간 내내 전달받은 연구 자료를 완독하고 퇴근할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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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성우는 멀쩡히 인천 본가로 퇴근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집에 가야 할텐데... (아련)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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