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피할 수 없어. 그냥 일어나는 거야.」

「뭐가 일어나?」

「어른이 되면, 심장은 죽어.」

「누가 신경이나 쓴대?」

「내가.」


바야흐로 폭염이 내리쬐고 쉴 새 없이 매미가 울어대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아마, 그때가 중학교 3학년 때 쯤이었을 거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임창균은 대충 점심을 때우고, 제일 먼저 시청각실로 향했다. 시청각실에는 옛날 영화들이 참 많았다. 창균은 그런 점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창균이 다니는 중학교는 점심시간 때 잠시 에어컨의 전원을 내려버린다. 왜냐?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해서라고 했었나. 때문에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히 컸지만, 그것은 임창균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시청각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거든. 게다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어서 학생들이 잘 찾아오지도 않았다. 창균은 평소와 같이 에어컨을 틀어둔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복도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그리고 이내 시청각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웬 땀에 흠뻑 젖은 남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와, 진짜네. 존나 시원해. 진짜라니까. 교무실 갔을 때 몰래 들었어. 두 남학생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스크린 앞에 홀로 앉아 있던 창균을 발견하고는 슬쩍 문을 닫고 돌아갔다. 아, 이거 불안한데. 임창균은 불안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다음 날, 창균은 늘 익숙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저 멀리서부터 시청각실이 상당히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뒷문을 확 열어제꼈다. 그곳에는 체육복 바지만 입은 채 윗도리는 훌렁 벗어던진 열댓명 남짓의 남학생들이 있었다. 창문은 살짝 열려있었고, 담배냄새는 덤이었다. 어, 저거 임창균 아니냐. 누워있던 애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야, 창균아. 이런 좋은 곳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니까. 임창균 혼자서 존나게 꿀 빨았네.”


그들은 질이 나쁜 아이들이었다. 임창균과의 친분? 전혀 없었다. 그들은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창균에게 친한 척을 하고 있었다. 임창균은 그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는 시청각실에 두고 다니던 자신의 짐을 찾으러 성큼성큼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자신들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창균을 아니꼽게 째려보기 시작했다. 맨 앞 캐비닛에 넣어두었던 여러 가지 노트들을 품에 안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려던 찰나, 영화 dvd가 꽂혀있던 책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빨간딱지 영화는 없냐, 창균아? 웬 빡빡머리를 한 남학생이 dvd 케이스들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던지며 창균에게 말을 걸었다. 미친 새끼. 모여있던 남학생들이 그를 보고는 낄낄대며 웃는다. 그러니까, 임창균은 그 날이 유독 덥다고 느껴졌다. 절대 여태까지 자신과 시간을 보낸 dvd들이 입을 벌린 채 바닥에 흩어져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들이 한명씩 번갈아 가며 좁은 창문 틈 사이로 담배를 펴대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낄낄 대며 본인을 비웃어서 그런 것도 아닌. 그냥, 더워서.


악! 외마디의 짧은 비명이 시청각실을 에워쌌다. 순식간에 날아오는 철제 연필꽂이를 얼굴에 그대로 받아들인 남학생이 얼굴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임창균의 돌발 행동에 거기에 있던 모두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임창균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 없이 평온해 보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렇게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남학생은 씨발! 욕을 하며 임창균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임창균은 얻어 터졌다. 이길 거란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나한테 달려든 새끼 별명이 고릴라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덩치가 존나 고릴라만 하거든. 다음엔 무기를 더 챙겨가야겠어. 맞은 곳은 아팠지만, 그 새끼도 꽤나 아팠을 거다. 여러 개 중에서 하필이면 철제로 된 걸 골랐기 때문에. 다음 날에도 그 무리는 시청각실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만, 인원수는 어제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 몇몇은 임창균 또라이새끼 같다며 오는 것을 꺼려했다. 코에 밴드를 붙인 고릴라가 창균에게 시비를 건다.


“야, 넌 그렇게 쳐맞고도 또 오냐?”


임창균은 가뿐하게 무시를 했다.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지 dvd가 꽂혀있는 책장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대충 괜찮아 보이는 제목의 영화를 집어 그대로 재생시켰다.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악담보다 무서운 것은 무시라고. 고릴라는 자신의 말이 무시당한 것에 대해 상당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씨발, 저게 봐주니까. 당장 가서 임창균의 어깨를 거세게 쥐어잡았다. 칙. 무언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 씨발!! 창균의 손에 들려있던 빨간 콜라 캔이 거세게 내용물을 뿜어대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릴라는 눈을 닦아내며 악에 받친 비명만 질러댔다. 오, 효과 쩌네. 그 이후로 시청각실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그 새끼 존나 또라이 새끼야. 그 당시 함께 있던 남자애들이 임창균을 생각하며 했던 말이다. 그렇게 임창균은 시청각실의 온전한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임창균의 나이, 16세.






아무튼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결론적으로 임창균은 그런 사람이라는 거다. 채형원의 말대로, 한 성깔 하는 애. 물론 아무때나 지랄발광하는 그런 분조장은 아니고. 대충 셔츠를 걷어 붙이고 자유분방하게 자리 잡고 있는 책걸상들을 한 곳으로 모아놨다. 빗자루로 바닥 한 번 쓸어주고, 빔프로젝터 한번 닦아주고. 이 곳에 비치해놓기 위해 집에서 가져온 dvd들도 한곳에 차곡차곡 쌓아놨다. 저 거슬리는 소파. 채형원이 가장 아끼는 소파인 것 같았다. 하필이면 교실의 한 가운데 쯤에 위치하고 있어 여간 방해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균은 소파를 창가 바로 앞까지 옮겨 놓았다. 내 알 바 아니잖아? 햇빛도 들고 좋네. 소파가 막고 있던 한가운데에 몇몇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을 붙여놓고서야 청소를 끝낼 수 있었다. 이제서야 무언가 정돈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균은 손바닥을 털어내고 잠시 쉬려 소파에 앉았다.


“채형원!”


채형원이라는 이름은 들렸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채형원이 아니었다. 채형원과는 또 다른 느낌대로 잘생긴 사람이었다. 창균과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어어?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앞으로도 채형원의 친구들이 가끔 방문할 것을 대비해서 이마에 ‘신입생 임창균’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써 붙여야 하나, 싶었다. 어느새 창균의 앞으로 훌쩍 다가온 남자는 방긋 웃고 있었다. 뭐랄까, 채형원 친구인 건 확실한데. 이민혁. 남자의 명찰에 적힌 세 글자였다. 아아, 어제 채형원이 통화할 때 언뜻 민혁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너 여기 왜 있어? 신입생? 맞지? 민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며 창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몇 반이야? 혹시 채형원 봤어? 근데 여기 다른 사람 있는 거 처음 봐. 아, 난 이민혁. 뭔가, 채형원이랑 상당히 상극인 것 같은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말들에 창균은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나 옆에 앉아도 돼? 대답을 듣기도 전에 민혁은 창균의 옆에 자리 잡는다.


“아, 그래서 혹시 채형원 봤어?”

“아니요.”

“그래? 항상 여기 있는데 오늘은 없네.”


이 사람은 타고난 친화력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만난 지 이제 겨우 1분 정도 되어가고 있지만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님에도 민혁의 성격이 머릿 속에 충분히 그려졌다. 민혁이 형원에게 전화를 건다. 이민혁은 굳이굳이 스피커 모드로 전화 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남들 눈치 안 보는 스타일이구나. 창균이 코를 긁적였다. 어. 왜?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목소리가 스피커폰을 타고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야, 어디야. / 나 잠깐 옥상. 왜? / 이슬이 누나가 너 존나 찾아. 전화 좀 해봐. 나한테 계속 전화해서 존나 귀찮게 해. / 아, 알았어. / 야 근데 너 창균이라고 알아? 느닷없이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창균은 민혁을 쳐다봤다. 일방적인 소개만 들었지, 딱히 제대로 된 통성명도 하지 않았는데 본인의 이름을 친근감있게 부르는 민혁을 보며 이 사람은 뭔가, 사회생활도 굉장히 잘 할 것 같아. 하고 생각했다. 어어, 1학년 아니야? / 맞아. / 걔는 왜? / 나 너 찾으러 오랜만에 아지트 왔거든. 근데 첨 보는 얼굴이 있길래. / 옥상으로 와 새끼야. 옥상으로 오라는 형원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민혁이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여기 동아리 새로 들어온 애 처음 봤어.”

“아아, 네.”

“채형원이랑 만났겠네?”

“네, 어제 잠깐.”

“그 새끼가 너한테 지랄한 건 없었어? 채형원 성격 조오오온나 지랄 맞거든.”

“아 진짜요?”

“채형원이 지랄하면 나한테 말해. 존나 혼내줄게.”


나 살짝 내 앞의 형이 마음에 들려고 하는데. 어쩌다 둘이 친구가 된 걸까. 여태까지 본 단편적인 모습으로는 둘의 조화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채형원이 물이라면 이민혁은 기름? 한마디로 전혀 섞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민혁은 헤실헤실 웃으며 창균에게 인사를 건넸다. 창균은 떨떠름하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민혁의 인사에 화답한다. 민혁이 떠난 동아리방은 다시 잔잔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텐션 높은 사람과 조금이라도 대화를 나누게 되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때문에 창균은 갑자기 몰려오는 졸음에 정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었다. 어느덧 차가운 기운을 머금었던 날씨가 싱그러움을 품은 채 나타났고, 나른하게 비춰오는 햇빛은 딱 적당히 따뜻했다. 이건 나의 의지가 아니다. 모든 적합한 조건들이 나를 재우는 것이다. 창균은 그렇게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존 휴즈 감독의 영화 조찬 클럽이었다. 처음 본 건 중학교 때. 킬링 타임용으로 보기 딱 좋은 영화였다. 조찬 클럽의 주인공들은 학교 내에서 일으킨 문제 때문에 아무도 등교하지 않는 주말에 따로 모이게 되는데, 그들은 단지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만으로 사람들에게 평가되는 이들이었다. 줄거리를 얘기하자니 갑자기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채형원. 마치 주인공들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기도 하고. 창균은 채형원에게 가서 묻는다. 선배, 저랑 영화 한 편 찍을래요? 사실 지금 카메라 들고 형 따라다니면서 형 일상 찍으면 그것도 영화가 되긴 하거든요. 장르는 범죄 스릴러? 그러면 채형원은 대답한다. 지랄.






꿈을 꿔도 하필 이딴 꿈을. 기지개를 키며 일어난 창균은 마치 일시 정지가 눌린 동영상처럼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일어났어? 방금 전까지 꿈속에서 마주했던 그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채형원은 창균이 한가운데에 모아놓은 책상 위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의자를 발 받침대 삼아 앉아있었다. 창균은 대충 눌린 머리를 슥슥 손으로 빗어 정리했다. 음, 이 소파 쿠션감 좋네. 불편한 자세로 잠든 것 같았는데 어느 곳 하나 뻐근하지 않았다. 형원이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긴다. 


“너 공부 잘 해?”

“네. 못하진 않아요.”

“근데 왜 그럴까?”

“예?”

“왜 말귀를 못 알아듣지?”


또 나왔다. 그 가시박힌 말. 채형원이 나름 웃으면서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건 명백한 경고. 임창균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만약 갑자기 저 형이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 미친 사람 마냥 칼춤을 추지 않는 이상 창균은 두려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을 창균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제의 협박으로 채형원은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게 분명하고, 그걸 무시한 자신이 또 다시 동아리방에 있을 때 나올 채형원의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채형원은 분명히 임창균에게 한 단계 높은 협박을 할 것이다. 창균이 내린 결론이었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웃음기가 훨씬 줄어들었다. 잘생긴 얼굴에 가려져 있던 서늘한 면이 꽤나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저 못 나가요.”

“왜 그렇게 집착해?”

“억울해서요.”

“그렇구나.”

“일주일 전쯤 새로운 이사장이 취임했다던데.”

“뭐?”

“새로 온 이사장은 선배 학교 생활 개판인 거 알고 있어요?”


채형원의 얼굴이 평정심을 잃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임창균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준섭에게서 들은 정보가 어느 정도 일치한 듯싶었다. 야야, 임창균. 때는 어제. 정확히는 청소 시간이었다. 소각장 앞 청소를 맡게 된 창균과 준섭은 초코우유를 입에 물고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었다. 창균아, 내가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거든? 들어볼래? 뭔데. 일주일 전 쯤에, 새로운 이사장이 취임했어. 근데, 그 이사장이 누군지 알아? 글쎄. 채형원 형네 엄마래.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 창균은 정말로 의아했다. 준섭이 얘기해준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니까, 그 악의 2학년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던 때는 바로 전 이사장 때였다는 것이다. 전 이사장은 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돈에 미쳐있던 탓인지, 이집 저집 눈치를 보고 뒷돈을 받아 가며 2학년들을 방치했고. 그리하여 소문 속의 2학년이 완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현 이사장은 다르다고 한다. 취임하던 날, 제일예고의 명성을 더럽히는 소문의 원흉들을 뿌리째 뽑아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학교를 만든다고 했다던가, 그리고 그 타깃이 바로 현 2학년들이랬다. 채형원의 집안은 재력가 집안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이 학교의 그 어떤 집안이 잘나간다 해도 현 이사장네 만큼은 안된다는 거지. 한마디로 앞으로는 학교에서 개짓거리를 했다가 걸리는 순간 예전처럼 봐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 2학년들 되게 사린다더라.”

“재밌는 정보네.”

“근데 이거 아는 사람들 별로 없다? 그러니까 너도 입단속 잘해.”

“그 중 어떤 게 비밀인 건데?”

“현 이사장이 그 형네 엄마인 거. 아, 씁. 이거까진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새엄마래. 재혼한 지 얼마 안 됐다더라.”

“너는 도대체 그런 정보들을 어디서 듣고 다니는 거야.”

“영업 비밀이지. 그래서 채형원 형 요즘 조오온나 조용하대. 이사장이랑 사이 안 좋은 듯.”

“그런 것까지 알아?”

“야, 생각을 해봐. 학교 대빵이 자기 엄마인데, 소문 더러운 그 형이 굳이 조용히 지낸다? 오히려 눈감아줄 거 알고 더 막장이면 막장이었겠지, 안 그래?”



 새로 온 이사장은 맘에 들어요?



동아리방을 감싸고 있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 이사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채형원의 표정이 바뀌었다. 이 순간 채형원은 무언가가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집에서 마주치는 것도 속이 뒤틀릴 것만 같은데, 쌩판 모르는 남에게 마저 새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채형원의 평정심에 잔잔한 균열이 일어나 서서히 조각조각 나기 시작했다.


“진짜 재밌는 애네, 너.”


이사장 얘기를 들은 형원이 한동안 가만히 있길래 창균은 살짝 걱정이 됐다. 형원을 걱정하는 건 아니고, 제대로 먹혔나 하는 걱정 말이다. 형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는 창균에게 말을 건넸다. 재밌네. 그러니까, 본인의 치부를 직접 제 앞에서 들쑤신 사람은 임창균이 처음이었던 거다. 그것도 협박을 빌미로 말이다.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채형원은 일그러지는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즐겁다고 느끼는 감정이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임창균. 아무도 발 들이지 못한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오려한다면, 그는 아마 무조건 임창균일 것만 같았다. 형원은 오랜만에 재밌는 감정을 느꼈다. 우리 친하게 지낼래? 이제 여기 매일 와도 돼. 안 그래도 매일 오려고 했어요. 지금 채형원의 모습은 평소의 채형원과 거리가 멀었지만, 지극히 정상이었다. 살짝 흥분한 것만 빼고는. 그동안 이렇다 할만한 자극이 없었던 것 뿐이지, 사실 채형원은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시덥잖은 인생에 재미마저 없으면 살 이유가 없어지거든. 좆 같으려던 학교생활이 이제 막 재밌어지려고 한다.






“학교는 좀 다닐 만 하고?”


아버지의 말에 형원은 안그래도 거의 남긴 스테이크를 썰던 행동 조차 멈췄다. 밥 맛 다 떨어졌네. 어차피 안 먹을 거였지만.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그대로 접시와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앉아. 하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예. 형원은 일부러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아 보란 듯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채형원. 자세 제대로 고쳐 앉아. 아버지의 말에 형원은 그저 시늉만 해 보일 뿐이었다. 저 자식이.


“됐어요, 애한테 너무 그러지 말아요.”


듣기 싫은 목소리가 형원의 귓가를 맴돌았다. 남들이 듣기에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목소리일지 몰라도, 적어도 형원에게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착한 척 안 해도 돼요, 아줌마. 지금 이 말을 내뱉었다가는 밥상머리에서 싸대기를 맞을 것이 분명하니 물 한모금과 함께 그 말을 삼키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음식 앞에서 싸대기 맞으면 나라도 기분 안 좋을 것 같거든. 형원은 컵을 만지작 거렸다.


“늦었지만 이사장 취임한 거 축하해, 여보.”

“다 당신이 신경 써준 덕분이죠.”

“형원이 놈 조그만 문제라도 일으키면 엄격하게 대해줘.”

“어떻게 그래요, 우리 아들인데.”


아. 토 할 것만 같았다. 저 가식적인 목소리. 형원은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고문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이미 식욕은 곤두박질친 지 오래고, 그저 이 시간만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또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형원은 새엄마를 극도로 싫어했다,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했다. 그녀는 상당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형원의 아버지가 자리에 없을 땐 형원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사실 그 편이 형원에게도 더 편했지만, 이중적인 태도가 역겨웠을 뿐. 차라리 일관성 있게 아버지 앞에서도 무시해보던가. 단지 그 이유만으로 혐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륜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제 남편이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 친엄마는 그 날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부수고 사치에 빠져들어갔다. 그녀가 제 스스로를 자멸로 몰고갈 때까지 그 남자는 묵묵히 그녀를 방관했다. 결국엔 소리소문없이 실종. 아버지는 슬퍼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 날 바로 새엄마를 본가로 데려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형원은 그 둘이 구역질 날 만큼 싫었다.


“다 먹었으면 올라가도 좋다.”


형원의 아버지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한다. 형원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가기 전, 식탁에서 사이 좋게 하하호호 거리며 와인잔을 부딪히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왠지 잠을 청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다.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새로 온 이사장은 맘에 들어요? 분명 그는 나를 떠본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무언가 중의적인 느낌. 그러니까, 임창균은. 어디선가 새어 나온 그 정보를 듣고 나에게 ‘진짜’ 질문을 한 것이었다. 괜히 또 웃음이 나왔다. 진짜 재밌다.






창균은 딱히 사람의 약점을 가지고 이용해먹는 것을 즐겨할 만큼 영악한 성격은 아니었다. 창균의 말을 빌려보자면, 아까 이사장 얘기를 했을 당시, 채형원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봤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영화감독이고, 채형원이 배우였다면. 채형원에게 부탁한 연기는 ‘굉장히 머릿 속이 복잡하지만, 그렇다고 유약해 보이지는 않게. 또 복잡한 마음을 들켜서는 안 돼. 그치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떠한 사연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게 뭔 개소리냐고? 맞다. 존나 개소리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채형원이 해냈다는 것이다. 왜냐, 그건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거든. 처음 이사장 얘기를 했을 때는 협박을 위해 말한 게 맞았다. 그러나 채형원의 묘한 표정을 보고난 뒤는 그저 궁금해져서 물어본 것이었다.


 새로 온 이사장은 맘에 들어요?


채형원의 소문은 확실히 질이 나빴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나마 채형원이라는 인간 자체를 겪어본 결과, 마냥 착하다고는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채형원이라는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이말이 무슨 뜻이냐면, 공허함. 그의 속은 무언가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존나 사연 있어 보이네. 본인이 생각한 채형원은 클리셰 덩어리 그 자체였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드라마나 영화 속 부잣집 주인공들은 꼭 어떠한 사연을 갖고 있는 거. 채형원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클리셰라 해서 진부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임창균에게 만큼은 말이다. 일단 임창균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진부하다는 표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창균은 문득 채형원이 궁금해졌다. 뭐, 그렇다고 당장 경계를 풀어버리는 건 아니고. 어쨌든 임창균은 어제까지만 해도 채형원을 싫어하는 편이었기에. 단지 호기심 딱 그 정도? 자고 일어나면 그 호기심 마저 없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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