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있었던 속마음 토크 이후, 그들은 조금 더 부부다워졌다. 박진혁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가 출근을 하면 임도운은 못다 잔 잠을 자고, 청소를 하고.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도 빠르게 익숙해져 무서울 정도였다. 시간은 ‘속절없다’고 할 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박진혁은 점점 초조해졌다. 몇 번의 저녁과, 몇 번의 동침. 몇 번의 통화가 지나면 우영이가 귀국하는 날이 다가왔다. 아들과 통화하는 임도운의 목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또 애절해졌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우영이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 아들의 귀국에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하나 뿐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해!”

초조함은 불안감이 되어 임도운 옆에 들러붙었다. 가는 곳 마다, 하는 일 마다 ‘어디 가?’, ‘뭐해?’, ‘도와줄까?’가 따라붙으니 으레 하던 일도 시간이 배로 걸렸다. 결국엔 견디지 못한 임도운이 짜증을 냈다.

“난 그냥 궁금해서..”

혼나는 강아지마냥 박진혁이 시무룩해졌다. 서운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시간이 가도 초조한 것이 자신뿐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서운했다.

“뭐가 궁금해. 우영이 방 청소하잖아.”

“도와줄게.”

“네 방이나 제대로 청소 하세요.”

제 어깨 너머로 내민 얼굴을 검지로 밀어내면 버튼이라도 되듯 비쭉하니 입이 나왔다. 박진혁의 그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임도운은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 방 청소 다 했어.”

“검사 해 봐?”

“...이따가 다시 할게.”

살랑살랑 휘젓던 꼬리가 한 순간 축 처지는 것처럼 박진혁이 실망했다. 그가 왜 이리도 호들갑스러워 졌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주말이라는 것. 함께할 수 있는 최후의 시간이라는 것. 그렇다고 해서 거기 장단을 맞춰줘야 하나. 이제 막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진 임도운에게는 진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미련 남기듯 발을 질질 끌며 나가는 것을 보면 결국엔 또 임도운이 지고 넘어갔다.

“아, 뭐하고 싶은데!”

“어?”

“뭐가 하고 싶냐고.”

정말 귀라도 쫑긋 하는 것처럼 어깨가 불쑥 솟았다. 그리고 나오는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나하고 놀아.”

“뭐?”

“놀아줘. 데이트.”

“데이트...”

임도운은 저도 모르게 그의 말끝을 따라했다. 그러다가 굉장히 쑥스러워졌다. 너하고 나하고 뭘 한다고? 그들 사이에 상상도 못했던 단어가 나오니 이유를 알기도 전에 민망해졌다. 정말로 초조하긴 한 모양인지, 그의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박진혁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근데 나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어서 놀 줄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나도.. 모르는데..”

임도운이 얼버무리면 난감해하면서도 기뻐하는 얼굴이 그를 찾았다. 그렇게,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놀 줄을 모른다는 박진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말 도심, 한 시간 가까이를 기다려 겨우 주차를 한 곳은 사람 많은 아울렛이었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영화관이었는데, 붐비는 곳을 싫어하는 임도운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은 곳이었다.

“이거 어때? 액션 영화래.”

“시끄러운 거 싫어.”

“이건 로맨스인데..”

“으.”

“코미디는? 이게 요즘 제일 인기가 많대. 근데 좋은 자리에서 보려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별로지?”

임도운이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렸다. 주말이라 가뜩이나 정신없고 산만한데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니.

“영화 말고 다른 거 하자. 밥, 밥 먹자!”

박진혁이 급하게 그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점심시간을 넘긴 시간대임에도 애초 사람이 많이 몰린 곳이었으니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은 별로 없었다. 한식, 중식, 일식. 연이어 거절당한 박진혁이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은 브런치 메뉴가 있는 작은 카페였다. 그마저도 사람이 많아서는 다닥다닥 정신없이 시끄러워 어떤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다.

“음식 맛은 괜찮아?”

“뭐?”

“맛은 괜찮냐구.”

“먹을 만 해.”

“어?”

“먹을 만 하다고!”

오픈된 공간에, 지나다는 사람에,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다른 손님들 탓에 대화가 매끄럽지 못했다. 연이어 불쾌한 티를 내어 기분이 옮을까, 참으려던 임도운의 인상에 절로 주름이 졌다. 데이트라는 게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따라 나서지 않았다. 굳이 돈 내고 시간 써가며 정신없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뭐, 뭐야?”

“이제 잘 들리지?”

짜증을 내 봐야 싸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으니 그저 시간아 빨리 지나가라 염원하고 있는데, 박진혁이 불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연스러운 척 제 앞으로 접시도 끌어왔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게 되면 임도운은 당황했다.

“어, 으, 응. 잘 들리네.”

“많이 먹어.”

어깨동무를 한 것도, 입을 맞춘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커플처럼 앉았다는 느낌이 기묘했다. 이제야 만족한다는 듯 박진혁이 느긋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나란히 앉아서 표정을 읽히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하나. 임도운도 떨떠름하게 포크질을 했다.

“다 먹은 거야?”

“응.”

“더 먹지. 맛 괜찮다며.”

“충분히 먹었어.”

반의 반이나 먹었을까. 이르게 포크를 내려놓는 임도운에게 박진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임도운이 심드렁하게 말하면 급히 제 몫을 해치우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보란 듯이 커피를 들이키며 임도운이 말했다.

“천천히 먹어. 나 커피는 다 마실 거야.”

“그럴게.”

급했던 손길이 속도를 줄였다. 마주보고 있지 않아 덜 민망한 것 같았다. 임도운은 느긋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요상하게 옷을 입은 어린 커플, 품에 하나씩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가족, 동생의 유모차를 끌고 가는 어린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하게 웃는 부모. 시끄러운 것에도 적응하니 활기차다는 느낌이 있었다. 아마도 치열한 평일을 보내고선 놀러 나온 거겠지. 보고 있으면 우영이 생각이 잔뜩 났다.

“무슨 생각 해?”

어느덧 마지막 남은 샐러드까지 모조리 먹어치운 박진혁이 그에게 물었다. 단순히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거리가 가까우니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임도운이 조금 물러나면 그는 난감하다는 듯 웃었지만 일부러 거리를 좁히려 들진 않았다.

“우영이 생각.”

“이제 곧 오잖아.”

“응. 오지. 엄청 보고 싶다.”

또 하나, 아이를 안은 부부가 지나가면 임도운의 눈길이 자연스레 그를 따랐다. 아들을 떠올리는 듯 부드러워 진 표정에 박진혁이 넋이 나간 듯 그를 쳐다보았다. 임도운은 예뻤지만, 아들을 떠올릴 때가 가장 예뻤다. 그것도 그와 자신의 아들.

“우영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데려다 줄게.”

“됐어.”

“같이 가고 싶어.”

“내가 운전해서 갈 수 있어.”

“나, 우영이한테도 잘 하기로 했잖아.”

문득 임도운이 돌아보면 그를 살피는 박진혁의 시선이 보였다. 따뜻하고, 애틋하고. 애정어려서는 견디기 힘든 눈빛.

“마음대로 해.”

“두 시간 전에 올게.”

퉁명스럽게 말해도 다정하게 따라붙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보던 것을 보아도, 한 번 의식한 시선은 끈질겼다. 먹을 게 없어 그런가, 임도운이 말했다.

“남은 거 먹을래?”

“그래도 돼?”

시선을 돌리려 아무렇지 않게 한 말이었는데, 박진혁은 조심스럽게 되물어왔다. 아침부터, 아니 러트를 풀어냈던 그 날부터 대답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고 배려 깊었다. 임도운은 괜히 심통이 났다.

“뭘 물어 봐. 어차피 남은 건데, 네가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않으면 괜찮아.”

“더럽다고 생각 안 해!”

“누가 뭐래..”

“잘 먹을게.”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이면 임도운이 더 민망해졌다. 티 내지 않으려 커피를 들이키면 그제야 제 빈 접시와 바꿔드는 손이 보였다. 얘는 화가 없나. 생각해보면 줄곧 퉁명스럽고, 짜증을 내고, 까다롭게 굴어도 되받아치는 모습 하나 본 적이 없었다. 연기라도 이 쯤 되면 한계가 왔어야 정상인데, 임도운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불현듯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도 이랬다는 것이 떠올랐다. 강제로 끌려와 불만 가득한 임도운이 성질을 부려도, 차분하게 접시나 바꿔주고 그랬던. 그 때의 박진혁이 거기 있었다.

“다 먹으면 조용한 곳으로 가자.”

“조용한 곳? 여기 별로지..?”

“아냐, 산책하고 싶어서.”

“좋아, 얼른 먹을게.”

“천! 천천히 먹어 좀. 나 아직 커피 덜 마셨어.”

“알았어.”

급해지는 움직임에 어깨를 살짝 잡으면 박진혁이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유연하고, 차분하고. 어쩌면 박진혁의 진짜 성격은 이런 면모들일지도 몰랐다. 그간 그들이 얽혀있는 상황이 복잡해서, 정상이 아니라서 그에 말려든 그들 사이가 꼬여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단순한 친절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 임도운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조금 남은 커피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마셨다.

 

한 낮, 여전히 나가는 차보다 들어오는 차가 더 많았으니 산책할 만한 곳으로 이동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쩐지 주차장에 서 있었던 시간이 더욱 많았던 느낌이지만 임도운은 굳이 탓하지 않기로 했다. 바쁜 일도 없으면서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손 잡아보고 싶어.”

“엉?”

“손.”

주말이라 강변에 만들어 놓은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손을 잡자는 말에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를 박진혁은 기다렸다. 거절하더라도 밀어붙이거나 원망하는 말이 없으리라는 것은 임도운이 더 잘 알았다. 아쉬운 얼굴이나 한 번 하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민 손을 잡았다. 예상보다 차갑고 축축한 손이 인파를 따라 그를 이끌었다.

“춥진 않아?”

“응.”

맑고 쾌적한 날씨였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약간 차가운 정도. 앞질러가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당기고, 조금 한적해지면 자연스럽게 풀었다. 다른 커플처럼 그들이 손잡고 걷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또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난 네가 이렇게 나하고 하고 싶은 게 많은지 몰랐네.”

“어, 있어.”

짓궂게 말하려고 했는데, 박진혁이 덥썩 물었다.

“뭔데.”

“애칭이 있는 게 좋대.”

애칭. 임도운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거기다 꼭 누군가에게 들은 것을 전하는 말꼬리.

“누가 그래?”

“...비서들이.”

어쩐지, 최근엔 박진혁이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닌 것들이 잔뜩 있었다. 카드를 준다던지, 동침을 요구한다던지 하는 것들. 임도운은 심드렁하게 납득했다.

“최근에 이상하게 구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의 말에 박진혁은 침묵했다.

“해 보던가.”

“도운아.”

“윽. 그건 그냥 이름이잖아.”

“자기야.”

“으으..!”

당장이라도 떨쳐내고 도망칠 것 같은 손을 박진혁이 꽉 붙들었다. 애정이 담긴 호칭은 귓가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잡힌 손은 포기하고 반대 손으로 얼른 귀를 부여잡았다. 좋은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건지. 몰려드는 민망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싫어?”

“몰라.”

“싫진.. 않지?”

“으.. 그래. 마음대로 해.”

푸흐흐, 여전히 한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임도운을 보고 박진혁이 기분 좋게 웃었다. 오전 내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었더니 그러는 내내 바보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도운아.”

“으.”

“도운아.”

“으.. 왜!”

“도운아.”

“으흐.. 싫어! 하지 마! 싫은 거 같아!”

뒤늦게 거부하면 결국엔 소리 내어 웃음이 났다. 박진혁이 굳이 마주잡은 손을 당겨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늦었어, 도운아.”

놀라듯 화들짝, 손을 뿌리친 임도운이 결국 저만치 앞질러 갔다. 참아낼 수 있는 애정이 한계치를 넘었다. 귀도 발갛고 목도 발갛고. 그 예쁜 짓거리가 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기분이 찢어지게 좋았다.

“같이 가.”

“손, 불편해. 높이가 안 맞아서.”

“그래.”

“땀도 나고. 축축해.”

“내 옷에 닦을래?”

“됐어. 그냥 놓고 가.”

“알았어.”

변명하듯 설명하는 임도운에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좋아 미치겠다는 눈으로 박진혁이 그를 쫓았다. 이렇게 좋아서, 그들이 아직 부부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정말로 부부 같아졌는데 실제로도 부부라는 것이 미친 듯이 좋았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임도운이 성큼성큼 나아갔다. 박진혁은 놓치지 않기 위해 얼른 따라 붙었다.

 

두 시간을 걷고도 임도운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고작 빵 몇 입, 커피 한 잔 먹은 게 다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한 바퀴를 돌고난 박진혁이 기진맥진했다. 우영이가 없어지고 많고 많은 취미 중 하필 선택한 것이 운동인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되었다. 1년 365일 자는 시간을 빼고 매일같이 앉아만 있었던 그와는 체력의 질부터 달랐다.

“너는 운동 좀 해야겠다.”

차로 돌아와서도 금방 출발하지 못하고 숨을 돌리던 그에게 임도운이 악의 없이 말했다.

“그러게. 너는 먹은 것도 없으면서 기운이 넘치네.”

“너처럼 내내 앉아있지 않아서 그런가봐.”

“배는 안 고파?”

“응.”

임도운의 대답에 박진혁이 경악했다. 효율도 이정도면 고효율을 넘어 초고효율이었다. 걷는 동안 세 번이나 우렁차게 울려대는 제 뱃고동이 원망스러웠다.

“배고프구나?”

“어. 식당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야 후회가 없을 거 아냐.”

후회가 없다. 임도운의 대수롭지 않은 말이 가슴팍에 부딪히면 따끔했다. 무엇에 대한 후회를 말하는 걸까. 박진혁이 대꾸 없이 기어를 바꿔 엑셀을 밟았다.

복잡한 도심을 뚫고 어느새 예약해 놓은 식당에 도착하면 박진혁이 결심이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벨트를 풀고 있던 임도운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비장해 보이는 숨이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기로 했었나, 착각할 만큼 아닌 척 하던 사람의 허심탄회한 말에 임도운은 당황했다. 우영이가 돌아오기 전 마지막 주말이긴 하지만, 꼭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계속 강조해야 하나.

“아닐 수도.. 있잖아.”

망설이듯 말하면 쓰게 웃는 반응이 돌아왔다. 줄곧 그의 요구를 받아주면서도 슬쩍,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벽을 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체념에 가까운 기분이 들 정도로.

“이런 식당은 또 언제 예약했대.”

“어제. 데이트의 마지막은 시대를 불문하고 근사한 곳에서의 저녁 식사라고 해서.”

“칫, 이런 곳은 모임 있으면 매번 오잖아. 새삼스럽긴.”

“오늘은 모임 때문에 온 건 아니니까.”

박진혁의 가라앉은 상태가 느껴지면 임도운이 애써 화제를 돌려보려 했다. 그럼에도 그의 기분을 다운시키는 주제를 확실히 벗어나진 못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면 될까, 고민하는 임도운에게 박진혁이 물었다.

“하고 싶은 거. 마지막으로 들어줄 수 있어?”

“으.. 그 놈의 마지막 소리 좀 하지 마. 뭔데?”

“사진, 찍어보고 싶어.”

그게 무슨 대수냐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도 말문이 턱하니 막혔다. 그들이 함께 사진을 찍은 게 언제였나. 연극 같은 결혼식. 예식장에 포함된 패키지. 아마도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우영이가 태어난 후 임도운의 사진첩은,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모조리 아들뿐이었다. 박진혁의 것은 업무 중에 찍은 것이 전부겠지. 임도운이 겨우 입을 움직여 대답했다.

“찍어. 그깟 게 뭐 대수라고..”

그러면서도 슬쩍, 차에 달린 거울로 제 얼굴을 살폈다. 꾸미지도 않고, 선크림만 바른 수수한 얼굴. 긴장하기는 박진혁도 마찬가지인지. 떨리는 손으로 제 핸드폰을 조작하는데, 어찌 저찌 카메라를 띄우고도 셀프 촬영 모드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아니, 이걸 눌러.”

“이거?”

결국에 임도운이 알려주면 드디어 화면에 두 사람이 잡혔다. 장소는 식당 건물의 지하주차장, 어두침침해선 빛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곳에 배경은 차 안이었으니 예쁘게 나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찍어본 적 없는 티를 팍팍 내는 어색한 표정. 눈치 없게 떨려서 촬영 버튼도 제대로 못 누르는 엄지손가락까지. 박진혁이 처한 고난이었다. 결국에 찰칵, 소리를 내게 만든 것은 임도운의 검지였다.

“바보냐, 사진도 하나 제대로 못 찍어.”

한 화면에 들어가기 위해 숨소리 들릴 만큼 붙어 있었으니, 타박하려 고개를 돌리면 박진혁이 눈앞에 있었다. 눈이 맞으면, 서서히 코를 지나쳐 입술로 내려가는 시선이 보였다. 고개를 빼거나 거부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느긋하게 입술이 다가왔다. 키스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단순히 접촉만. 숨조차 참고 있는 것 같으면 임도운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 행동에 미친 듯이 긴장이 되는지. 혀는 언제 들어오나 실눈을 떠 본 임도운은 할 말을 잃었다. 저만큼, 아니 저보다 훨씬 긴장한 티가 나는 박진혁이 무서운 영화라도 보듯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설렘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박진혁의 반응도 그렇고, 그렇게 오랜 기간을 함께 했음에도 마음을 나눈 입맞춤이 처음이라는 것도 어쩐지 우스워져서, 결국 짧은 입 맞댐은 임도운의 웃음으로 끝났다.

“큭.”

“......왜, 왜 웃어.”

그의 웃음에 자존심이 상하는지, 박진혁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임도운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큽, 그냥. 우리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키스는 처음이다 싶으니까 우습잖아.”

직접 말하고 보니 그리 웃긴 일도 아닌 것처럼 들리긴 했는데, 박진혁은 쉽게 수긍했다.

“그러네. 미안.”

“왜 또 사과를 해.”

“입술은, 안된다고 했었잖아.”

불쑥 선을 넘어 들어온 것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부끄러움이 한 방에 몰려왔다. 벌컥벌컥 뛰는 것이 자신의 심장인지, 아니면 박진혁이 내는 소리가 전해지는 건지. 임도운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배! 배고프다며! 얼른 올라가자. 네 이름으로 예약한 거 맞지?”

티가 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임도운이 도망치듯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겨진 차 안에는 오메가가 기분 좋을 때 풀어놓는 페로몬이 가득했다. 박진혁은 처음으로 맡아보는 향이었다. 그에 멍하니 취해 있다가, 어느새 저만큼 가버린 임도운을 보고는 박진혁이 놀라서 따라 내렸다.

웨이터는 예약자 박진혁의 이름을 듣고는 같이 들어간 손님들보다 먼저 그들을 가장 좋은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은 술집인 ‘마이어스’에서 흐르는 음악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온전히 저물지 않아 야경을 보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작은 호수를 앞둔 식당의 전경은 훌륭했다.

“해가 지면 더 예쁜데.”

“먹다 보면 저물겠지.”

메뉴도 이미 정해져 있는지, 웨이터는 주문 받는 과정 없이 식기와 에피타이저를 세팅했다.

게살이 들어간 샐러드, 옥수수로 만들었다는 스프, 간단한 식사빵, 바다가재 찜, 스테이크가 차례로 나왔다. 고급 코스요리를 흉내 낸 음식들은 많지 않게 서브되었으니 임도운이 먹기에도 적당했다.

“맛은 괜찮아?”

“응, 좋아. 맛있어.”

“술도 한 잔 할래?”

“차는?”

“대리 부를게.”

“그러던지.”

짧은 입 맞댐 이후 유독 말이 없었으니 어색함을 느끼던 임도운은 그의 말이 반가웠다. 무어라 주문하는가 싶으면 꽤 가격이 나가는 와인이 얼음을 넣은 바스켓에 담겨 나왔다. 규모가 크지 않은 레스토랑임에도 소믈리에까지 있는지, 한껏 차려입은 여자가 병을 오픈해서는 특이하게 생긴 디켄더에 한 번, 각자의 잔에 두 번씩 서브해 주고는 돌아갔다. 어디서 본 것은 있는지, 잔을 살짝 돌리던 박진혁이 먼저 건배를 청했다. 챙하고 경쾌한 소리 후에 둘은 천천히 잔을 기울였다.

“맛있네. 이거 비싼 거 아냐?”

“어. 여기서 제일 비싼 걸로 달라고 했어.”

“뭐? 그게 얼만데?”

“글쎄,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것 보다는 비쌀 거야.”

히익, 놀라면 박진혁이 작게 웃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드는지 임도운이 연신 술을 들이켰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술은 또 잘 마시네. 박진혁에게는 의외의 모습이었다.

“남으면 따로 담아주겠다고 했으니까, 부담 없이 마셔.”

남을 일은 없을 거라고, 임도운은 굳이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금세 한 잔이 비면 박진혁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을 잘 못하는 그는 몇 모금에 취기가 도는 것 같은데, 임도운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네.

“아주 돈 자랑을 하려고 안달이 났냐.”

“여태 못 쓴 거 쓰는 거지.”

“잘 나셨네.”

“가끔 이렇게 벌어서 쓸 데가 없네, 허무할 때가 있었어. 근데 이렇게 너하고 쓸 수 있을 줄 알았으면 열심히 했던 게 그렇게 억울하진 않네.”

“뭐라는... 바보냐.”

홀짝홀짝, 쑥스러워진 임도운이 연신 잔을 들이켰다. 한잔을 비우고, 또 비우고. 빈 잔을 또 채울 때까지 박진혁은 말이 없었다. 그는 슬슬 어두워지고 있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온전히 넘어가기 전 가장 강렬한 햇빛이 호수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이 박진혁의 진지한 얼굴을 붉은 황색으로 물들였다. 임도운이 세 잔을 내리 비우도록 첫 잔 그대로였음에도 술은 약한지, 물들어있는 얼굴의 뺨만 유독 진했다. 사내놈이, 게다가 알파가 볼이 빨개진다니 술 접대 같은데서 고생 깨나 했겠네. 임도운이 가볍게 생각했다.

“네가 한 말, 많이 생각 해 봤어.”

“무슨 말?”

“우리 사이에 관해 생각해 보라는 말.”

박진혁의 사장 자리를 지켜주고 난 후였나, 나뿐만 아니라 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의 갑작스럽게 변화된 태도가 이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일방적으로 좋다고 들러붙어선 칼자루가 꼭 제게만 있는 것처럼 구는 것이 싫어서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이 된 말.

“많이 생각 해 봤어. 네 말대로 내 감정이 갑작스러웠던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무.. 그게 무슨 생각 해 본 거야. 그때랑 다른 게 없잖아.”

“맞아. 다른 게 없어. 나 너 좋아해, 임도운. 내 감정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던 건, 나도 내 마음을 갑작스럽게 알아버려서 그랬어. 계기라고 한다면, 그래. 그거겠지. 이혼.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 그 때도 지금도 너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답은 하나야. 나는 네가 좋아.”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눈이 어느새 임도운을 보고 있었다. 옆얼굴을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강렬한 눈빛 때문인지. 가슴 아래로 잔뜩 긴장된 감각이 느껴졌다.

“왜 좋은지, 생각을 해 봤어. 근데 그냥 네가 좋아. 너 생긴 거, 성격, 보여주는 반응, 행동. 그냥 다 너라서 좋아. 다들 어떻게 연애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물론 우리가 해 왔던 것 같이 복잡하고, 좋지 않은 일들을 겪은 사람들은 없겠지. 그럼에도, 이렇게 되었어도, 너한테 잘 해 줘서 여태 잘못했던 것들 전부 만회 받고 싶고, 그래서 너한테 사랑받고 싶어. 너만.. 괜찮으면. 이게 내 결론이야.”

어쩌면, 언제부터 그를 좋아했는지 진지하게 대답했던 그 때부터였을지 몰랐다.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는 걸 예상한 것이. ‘확인 작업’이라는 명목으로, ‘해 보고 싶었던 것’이라는 포장된 말로 확인해야 했던 것은 애초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임도운은 입술을 꽉 물었다. 올 것이 온 기분이었다. 박진혁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 역시 이제 답을 내어놔야 했다. 그의 말대로 이것이 그들이 약속한 시간의 마지막이었으니까. 임도운이 말없이 잔을 쭉 들이켰다. 와인이 담긴 병은 이미 반 넘게 비었다. 어째서 취기조차 오르지 않는지 자신의 몸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박진혁을 보고 임도운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였다.

“나는... 너를 그런 식으로 보지는 못 하겠어.”

화가 나는 것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짝 눈웃음 짓는 박진혁의 반응이었다. 예상이라도 한 듯 의연한 모습에 임도운의 마음이 따끔했다. 어째서 거절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의연할 수 있냐고. 자존심도 없냐고.

“애초에 좋아서 만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쉽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을 수도 없을 것 같고. 이제는 뭔가 남들이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순서대로 살아보고 싶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그러다 정이 깊어지면 결혼하는 것처럼.”

비단 연애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의 시간 전부를 써서 아들을 돌봐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 하고 싶은 것도 차분히 생각해 보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좋아하는 것도. 그냥 인생을 제 선택으로 살아간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 호강을 누릴 정도의 충분한 조건이 되지 않았냐는 변명은 할 필요도 없었다.

“네가 있으면 왠지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새 출발의 기분이 나지 않을 것 같기도 해서..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지 마.”

“그치만.”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서 내 잘못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니야. 여전히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다 괜찮다고, 이미 짐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임도운의 사과를 들으니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고, 슬프고, 비참하고. 뭐 그런 기분. 박진혁은 애써 웃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잔에 남은 와인을 마셨다.

“갑자기 다른 집으로 가면 우영이가 혼란스러울 테니까 있고 싶은 만큼 지금 집에 있어도 괜찮아. 전처럼 각자 할 일을 하다보면 자주 마주치지 않을 테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야.”

“응, 고마워. 되는대로 다른 곳을 알아볼게.”

“혹시나 미국으로 따라 갈 생각이 있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는 것도 애매하니까, 계속 지내도 괜찮아.”

“아냐, 구할 거야. 걱정 마. 언젠가는 우영이도 우리 일을 알아야 하잖아.”

“그래, 맞아. 고마웠어. 임도운.”

웃고 있는데, 꼭 잔뜩 얻어터진 것 같아서. 임도운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을 하면 가시방석 같은 불편함이 심해졌다. 꼭 미리 다 돌려보고 정해놓기라도 한 듯 박진혁은 덤덤한 척 했다. 임도운의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어색한 흉내. 그래서 미안해하는 것도, 모르는 척 철판 깔고 계속 함께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한참의 침묵이 있었다. 그만큼의 각기 다른 괴로움도 있었다. 마지막을 말 한 것은 박진혁이었다.

“이제 대리 부를까?”

“....응.”

그들은 와인도, 디저트도 마저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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