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영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아주 어릴 적, 그는 창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 있다.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엷은 모란향을 풍기는 사내는 똑 닮은 아이 둘을 어르며 뇌까린 적 있었다. 창귀倀鬼 라는 귀신이 있지. 

과거엔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자가 창귀가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 관념만이 남아 귀신을 만든다. 호랑이 없는 땅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창귀는 남아 있지. 그런 것을 주객전도라고 하던가. 뭐, 차차웅에게야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지만...... . 이런저런 전승이 뒤섞인 지금은 장산범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 산 자를 꾀어낸다는 거야.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의 머리를 받쳐주며 귀신을 부리는 사내는 노랫가락에 얹어 흘러가듯 흥얼였다. 일종의 자장가였다. 그러나 그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사내조차 태어나기 전, 이미 존재했던 이야기였으므로. 


그러니 산어귀에 저녁이 드리울 때. 해가 저물고 달이 뜨기까지의 그 찰나에. 빛 없는 순간에.

그림자에 숨겨져 누군가 너희를 부르면 따라가지 말아라, 아이들아. 그건 내가 아니니까.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의 회사 건물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은 언제나 조금은 이상했다. 살아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자신만이 남은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과 속삭임, 외침, 대화소리와 사각이는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탁탁 두들기는 자판 소리는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그 혼자만이 남아 빈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인지.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 어느 여인은 빈 방을 촛불 하나로 전부 메웠다고 했으나, 신무영은 타고나기를 빛과는 멀리 있는 자였다. 그의 이름부터 꼭 그러했다. 그러니 그는 그저 빈 건물의 그림자에 가만히 잠겨 복도를 걸었다.

뚜벅, 뚜벅. 복도에 울려퍼지는 소리는 오직 그의 발소리 뿐이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회사 건물은 돈을 그렇게 처발라도 왜 을씨년하게 보이는 건지. 그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리 없이 입매를 비틀었다. 호 녀석이라도 데려왔어야 했는데-아니, 다 큰 사내놈이 무엇하러 둘씩이나 다녀야겠어. 어린애도 아니고. 


그는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갈 셈이었다. 


형. 툭 수면에 번지는 먹처럼 작은 목소리가 빈 건물의 어둠에 잠겨 속삭였다. 


그러니까 비록 신무영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에 그는 창귀에 대해 들었던 적 있다. 붉은 사내는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을 붙잡고 충고했다. 기억은 남지 않았지만 흔적은 스며 신무영의 깊은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그 작은 속삭임을 들었을 때, 신무영은 돌아서 뛰어가거나,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서늘한 감각에 젖어 잠시 멈추어 설 수 있었다. 


형. 다시 한 번.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신무영은 급격히 담배가 피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네놈이냐. 그 목소리로 장난하는 건 관두지 그래. 재미없으니까.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그는 차차웅들의 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자신의 왕이면서 왕이 아니기도 한 자였다. 오직 그에게만은 목을 내어 주는 자. 그러나 결국 이기적인 자. 말아쥔 주먹에서 마찰음이 비틀렸다. 


형, 나야. 꽤 또렷한 목소리지. 장난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 모양이고.


신무영은 문고리에서 손을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그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그 사람은 내가 될 수 없어. 형은 그걸 알고 있었어. 그렇지? 


그는 요새 종종 꿈을 꾸었다. 잠에 들면 저무는 노을을 닮은 그의 소년이 서 있다. 그저 가만히 서 있다가, 우수수 몸을 흔드는 바람에 휘청이다가, 그를 보면 입을 벙긋이며 웃었다. 

목소리는 잊었다. 가장 먼저 잊는 것은 언제나 그리운 자의 목소리였다. 언젠가는 소년의 웃음, 소년의 둥근 눈매, 소년의 말투마저 모두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이 돌아왔다. 뒤돌면 당장이라도 소년이 서 있을 것 같았다. 너무나 선명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신무영을 호명했다. 무영이 형. 


그러나 오늘은 그리운 사람이 돌아오는 날이 아니었고, 신무영에게 선물을 주는 자 또한 이젠 없었다. 그러므로 저것은 지독한 불행이리라. 신무영은 잠시 생각한다.


"진아. 너니?"


싸늘해진 목소리가 온기를 품었다. 단단하게 벼려진 혀 끝이 굽어진다. 그는 언제나 이 소년 앞에서 물러졌다. 그래서 그의 소년이 사라진 후에, 그는 더 이상 무른 채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응. 나야, 형. ......미리내는 어떻게 지내? 인사도 못 했잖아. 기억나?


"조만간 약혼을 한다던데. 어린 애들은 참 빨리 자라잖아. 네게도 이 소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진아."


맞아. 그런데 키는 안 자란다고 백정이 날 놀렸었지.


"......그래."


형, 나 미리내가 보고 싶어.


"그 애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해."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주 잠시만, 아주 잠시만 걔를 보고 오면 안 될까? 형은 데려다줄 수 있잖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그건...... ."


숨이 턱 막혔다. 그 애의 마지막 인사라는데, 기꺼이 해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편 신무영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식는 것이다. 차차웅의 직감이었을까? 


영이 형, 부탁야. ......일단 나 좀 봐 주면 안 돼?굴이 기억이 안 나. 


신무영은 숨을 짓씹었다. 그래, 진아. 나도 마찬가지야. 네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났다니까.

그런데 신기하지, 어떻게 네 목소릴 알아듣는 걸까...... 마치 꿈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두워서였을까? 유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늘진 회사의 복도, 그는 더없이 익숙한 운동화와 교복 밑단을 볼 수 있었다. 그림자에 살랑 발끝이 흔들렸다. 그 이상은 볼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웃었다.


"진아."


형. 정말 고마워. 이제 우리, 미리내한테 가자.


"랑아, 안 돼!"


미리내한테


신무영은 순간 강한 통증을 느꼈다. 누군가 그의 팔을 억세게 쥐어당기고 있었다. 


리내

미리내를

내에

미리내

 목소리는 속삭이고, 지껄이고, 다시 속닥이다 끝끝내는 또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가

신무영.

다시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졌다. 


신무영은 숨을 들이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숨을 살라먹으며 죽을 듯 헐떡이고 있었다. 손아귀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그의 형제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그가 정신을 차리자 재빠르게 신무영을 부축했다. 


"랑아, 괜찮아? 노트북만 가지고 온다고 해 놓고서 너무 늦어서 걱정했잖아."

"너......아니, 너도 봤어? 그거."

"랑아...... 내가 본 건 아주 희고 가는 머리카락 덩어리였어."


호는 다만 그렇게 말했다. 희고, 가는,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고 긴 털이 사악 사악 복도 한구석에서 끌리고 있었다고. 그의 눈에는 언뜻 언뜻 비치는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 네 개만이, 그의 귀에는 흐느끼는 듯한 짐승 울음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고.


"예전에 처용한테 들었던 적 있어. 으음, 랑이는 기억 못 하겠지만...... 그리운 목소리가 어두운 곳에서 나를 부르면 돌아보지 말라고 했었지."

"...... ."

"돌아보게 되면 홀린다고 했어. 그러고 나면 끌려들어간다고. 그런데 차차웅한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한 것 같았는데."

"그 애는 차차웅이 아니었으니까."


신무영은 잠긴 목소리로 그저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유진은 차차웅이 아닌 인간 소년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죽었겠지. 그 애의 목소리는 그토록 훔치기 쉬웠겠지. 

잊었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러나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정작 돌아오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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