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릴리님 리퀘로 작성된 글입니다




유동인구도 적은 작디 서울 구석의 작은 달동네. 웬만한 체력으로는 오르내리기조차 버거운 그곳에 집을 둔 해영은 집으로 향하는 계단 밑에 앉아있는 일이 잦았다. 밤이면 집에서 나와 거기 앉아 아주 오래, 발 올리고 두 무릎 당기고 있는 시간이 길었다.


회색 추리닝, 하늘 후드티에 달랑 조끼 점퍼 입고 나와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울지도 않고 길잃은 강아지처럼 한참을 앉아있는 해영을 곁눈질하는 이가 있었다. 몇 뼘 떨어진 담벼락에 몸 숨기고서 해영만큼이나 울 것 같은 얼굴로 서있는 키가 아주 큰 남자. 그러다 갑작스레 해영이 몸을 일으키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숨기 바쁜 남자가.


골똘하게 앉아있던 해영이 몸 일으키고서 터덜터덜 가로등빛만 만연한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그러면 회벽에 몸 숨기고 해영을 곁눈질하던 이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발걸음이 바삐 두세 걸음 밟으면 다섯 뼘 만큼의 거리를 벌려놓고 걸음 하나가 좇아왔다.


뭐에라도 홀린 듯, 걸음짓이 잦다가도 잠깐씩 멈추고 뒤를 돌아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뒤를 좇던 이는 모습을 숨기기 바빴다. 생각해보면 왜 숨어야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게 해야할 것 같았다. 그래야, 지금의 자신과 무전하는 그 너머의 사람이 당황스럽지 않을 테니까. 열두 살 해영의 뒤에는, 해영이 모르는 재한이 있었다.


붉은 등 비치는 외벽. 벽을 타는 그림자는 두 개였다. 어린 아이와 그 어린 아이의 뒤를 밟아나가는 어른 하나.


정신없이 걷던 열두 살 해영은 골목길 끝에 다다르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숨 크게 들이마시고 담뱃내 자욱한 껍데기 식당에 들어갔다.



"아니, 쟤가 지금 저길 어디라고 들어가."



열두 살 아이가 혼자 갈 법한 곳이 아니었기에 뒤좇던 재한은 멍하게 식당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허름한 간판이 깜빡이는 돼지 껍데기 식당. 해영은 왜 이 곳으로 들어갔을까. 잠시 망설이다 재한도 뒤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해영이 보이지 않게 자리 잡아 앉으면서도 재한은 옆에 앉은 밤톨만한 뒷머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저 돈 있어요! 오므라이스 해주세요.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천원짜리 지폐 두어 개를 꺼내며 울던 밤톨머리 아이의 뒷모습이 안타깝고 짠해서, 재한은 가게 주인을 부르며 돈을 되는대로 막 꺼내기 시작했다.



"저 꼬마애, 오므라이스 좀 해주세요. 재료 값 드릴게."



애 아빠요? 하고 묻는 질문에는 머리 흔들면서도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손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아이, 애가 배고파하잖아. 부탁 좀 드릴게 응? 여기 수고비. 그래도 의심쩍은 눈길이 떨쳐지지 않길래 소주 하나를 주문했다. 찌개도 작은 걸로 하나만. 결국 주문 받은 가게 사장은 주방으로 들어가고 재한은 혼자 거울보고 앉아서 생각했다. 그러게. 애 아빠도 아니고. 뭐도 아니면서 왜 이러고 있을까.


'이재한 형사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별안간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무전기 속 목소리가 대신했다. 이재한 형사님. 형사님 들리세요?


박해영 경위. 저 아이가 박해영 경위니까. 저를 부르는 무전기 속 목소리 떠올리며, 재한은 테이블 앞 벽에 걸린 거울로 뒤에 앉은 해영을 살폈다.


곧이어 달걀프라이 덮어두르고 나온 오므라이스에 쇠숟갈 얹어가며 와구와구 먹는 해영을 쳐다보다 제가 죄인 같아서, 재한은 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인주 사건 그렇게 그냥 놓아버려서, 그래서 해영의 형이 죽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게 다 제 잘못만 같아서. 재한은 차마 해영이 밥숟갈 뜨는 모습조차 맘놓고 보질 못했다.



"얼마나 굶은 거야…"



가게 사장 말 들으며 밤톨머리 뒷통수를 곁눈질한다. 천천히 먹지. 저러다 체할까 싶어 물이라도 한 잔 떠다 주고싶은데. 먼훗날 당신 기억에는 내가 없으니까. 끝까지 없어야만 될 거 같아서. 체념하며 재한은 소주잔을 집어들었다.


음식 나온 지 채 5분도 되지않아, 한 그릇 깨끗하게 싹 비워버린 해영이 다 먹자마자 가게를 부리나케 나가고 재한은 가게 사장을 불러 지갑에 있는 돈 죄다 빼내 손에 쥐어주며 당부했다.



"앞으로 저 꼬마애 오면은, 밥 좀 계속 해 줘요 응? 내가 계속 연락 드릴게."



행여 놓칠 새라 급하게 해영 따라 가게 문 닫고 나가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는다. 내가 계속 연락 드릴게. 꼭 좀 해줘요. 가게 사장의 손에 오므라이스 값이라기에는 상당한 거금을 쥐어줬던 건, 아마 내내 가슴을 붙잡던 죄책감 때문이었으리라.





-





드르륵─ 예전 그대로의 가게 미닫이문을 밀어열며 해영이 가게에 몸을 디밀었다.



"왔어? 경찰관 나리되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오므라이스 해줄까?"


"밥 먹었어요."



답하면서 옛 기억에 서로 씨익 웃었다. 해영은 손에 든 빛바랜 명함 내밀며 물었다. 이거 이 가게 명함 맞죠? 응 우리 거 맞네. 옛날 거. 해영은 이걸 어떻게 재한이 가지고 있을까 궁금했던 것을, 이제와 겨우 찾았다. 가게 사장이 그 사람, 이라고 재한을 지칭하는 얘기를 들으며.



"그 사람이네? 자기 애도 아닌데 이상한 사람이다 싶었지. 너한텐 절대 비밀로 해달랬는데. 언제부턴가 연락도 안 와서… 나도 까먹고 있었네."



너를 한참 쳐다보더라. 자기 시켜놓은 건 입에도 거의 안 대고. 한참 쳐다보는데, 눈빛이 짠하드라. 그래서 무슨 사인가 했지.


'저도 경위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한 지붕 아래서 따뜻한 밥상에 함께 모여 같이 먹고… 자고… 외롭지 않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전기 속에서 울리던 말이 귓가에 뱅뱅 맴돈다. 그의 낮은 음성만큼이나 더 크고 깊이.



"혼자라고… 혼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제일 견디기 힘들었었는데……."



뒤에 당신이 있었던 걸 알았다면… 그랬다면……. 한 번쯤 뒤라도 돌아볼 걸…….


나는 살아움직이는 당신을 본 적이 없잖아요 형사님.


무전으로 바뀐 과거 때문에 경기남부 살인사건의 새 희생자가 되었던 그 여자를 떠나보내며 무전기 속 재한이 울부짖던 말을 떠올려본다.


'그냥 사진 몇 장만으로 희생자 이름, 직업, 발견 장소, 시각… 그게 당신이 아는 전부겠지만 나는 아냐!'


식당을 나서면서 해영은 그 옛날, 식당 오므라이스로 배 채우고 혼자 걷는다는 무서움에 뒤도 안 돌아보고 걷던 그때의 가로등길을 걸으며 해영은 제 발걸음 뒤로 따라붙는 메아리 같은 발소리를 들었다. 종종이는 잰걸음 뒤로 우직하게 따라붙는 한 두걸음.


형사님, 나는요.



"그런데 나한테는 왜 그러셨어요. 왜 그냥 사진 몇 장만으로 남는 사람이 되셨어요? 세상에 발 딛고 숨 붙이고, 웃으면서, 달리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었는데……."



형사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살아…계시면, 좋겠어요.




연성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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