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제요?"

- 그래. 이번에 내가 들어가는데 따라오지 않을래?

"어...."

- 많이 바쁘진 않을 거야. 뭐 종강 이후지 않아?

"네. 좀 갑작스러워서."

- 인마. 전세금 갚으려면 열심히 일해야지.


오랜만에 온 선배 진영의 전화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오죽 급했으면 자신에게 전화까지 했으려나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런다고 답하고 싶었다. 자신이 알기에도 시험 출제는 단기간에 목돈을 벌 수 있는, 나름 괜찮은 단기 노동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걸렸다.


"2주 동안 못 나오는 거죠? 그, 연락도 못하고."

- 응. 그야. 너 석사과정 때 선생님이랑 수시 출제 들어갔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허어. 그렇군요."

- 좀 갑작스러웠지? 생각해 보고 연락 줘. 아, 그래도 너무 늦으면 좀 곤란하고.

"네. 알겠어요. 좋은 기회 알아 봐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

- 민경이한테 너한테 일거리 줬다고 자랑 좀 하려고 그랬지. 아무튼 연락 줘.


아기 분유값을 번다며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하고 있는 영진이었다. 바빠 보이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시원은 핸드폰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어떡하지...."

"뭐를?"

"으악! 깜짝이야!!"

"무슨 생각 하길래 온 줄도 모르고 서 있어요?"


코트에 차가운 냉기를 묻힌 채 들어온 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원은 지영이 집에 들어와 외투도 벗지 않고 저를 찾아 왔는데 몰라 준 게 미안해 가볍게 포옹을 하고선 코트를 받아 들었다. 바로 옷걸이에 정리하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지영은 고맙다며 엉덩이를 톡톡 때렸다.


"아이참. 엉덩이를...."

"예뻐서 그래."

"코트 좀 걸었다고... 코트 입고 오늘 안 추웠어? 쌀쌀하던데."

"응. 오히려 학교 안은 더워. 건조하고."

"에고. 괜찮아? 미니 가습기 꺼내야겠네."

"응.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시원은 11월 말의 찬 냉기가 머물고 있는 지영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따뜻한 온기가 맘에 드는지 지영은 고개에 힘을 덜고선 살짝 손바닥에 기대었다. 


"따뜻하다."

"나는 시원해요. 얼굴이 얼었는데. 데리러 오라고 하지."

"오바야. 나 손 씻고 세수하고 올게."

"응. 저녁 다 해 놨으니까 차릴게."

"고마워. 오늘 저녁 뭐야?"

"뜨끈하고 자작한 거."

"음? 아까 맛있는 냄새 나던데 김치찜...?"

"비슷한가? 아니긴 해."

"아, 김치찜은 저번 주말에 해 줬지.... 뭐지? 코다리조림?"

"아 아깝다!"

"왜- 뭔데?"

"고등어조림. 무가 싸고 맛있다기에."

"진짜? 맛있겠다!"

"그죠. 빨리 씻고 와. 밥 먹자."


알겠다며 화장실로 향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게 마치 어린아이 같아 귀여웠다. 감정의 진폭이 그리 크지 않은 지영의 드문 신나하는 모습에 시원은 만족스러운 듯 잘게 웃으며 부엌으로 향하였다. 

'저 모습을 2주를 못 본다고....'

시원은 다시금 거절 쪽에 마음이 더 기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거절한다. 쉽지 않을 이야기에 휴 하고 한숨을 뱉었다.




- 미친 거 아니야?!


시원이 씻으러 간 사이, 민경에게서 몇 통이나 전화가 걸려왔고 지영은 전화가 어렵단 말이라도 하려고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받자마자 꽥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지영은 눈을 질끈 감고서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떼어놓았다. 


"왜 그러시는데요. 또."

- 그게 얼마나 꿀 자리인데. 다 일도 안 해. 막판엔 검수만 하지.

"그니까 뭐가요."

- 너한테 말도 안 하고 거절했구나. 그 멍청이.

"뭐를요. 무슨 자리인데요?"

"이크."

"정시원."

- 자세한 건 정시원한테 들어. 딱 봐도 너랑 떨어지기 싫다고 안 간다는 거 같으니까. 

"아, 언니. 그걸 말하시면."

"시원아."

"아니 그게...."


끊어진 전화. 화면에 깜박이는 민경의 이름을 시원은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를 카톡으로 물어 봤던 터였다. 바쁜지 안 읽다가 대뜸 전화를 걸어올 줄이야. 타이밍도 참. 시원은 골치 아프다는 듯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은 이마를 짚었다. 지영은 해명하라는 듯 눈을 부릅뜨고 시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랑 떨어지기 싫어서?"

"아니. 그게."

"...너 어디 멀리 가야 해?"

"아니야. 에고. 내가 얘기할게."


어디 지방에서 무슨 일자리라도 생긴 건가. 지영은 놓치면 안 되는 좋은 자리라는 민경의 말에 덜컥 걱정이 들었다. 울상이 되어선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시원은 후다닥 달려가 지영을 품에 안으며 달랬다. 어찌나 서둘렀는지 머리 위에 있던 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P시와 서울이라는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도 두 사람에게 큰 불안이 되었다. 그걸 알기에 시원은 지영이 일년 전 생각에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원은 품에 안은 지영을 도닥이며 천천히 말했다. 


"뭐? 2주...?"

"...네."

"정시원...! 너 정말."

"그치만.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애야? 우리가 나이가 몇인데."


자초지종을 들은 지영은 깜짝 놀랐던 게 억울해서 시원의 어깨를 때리며 나무랐다. 고작 2주 출장 가는 걸로 무슨, 민경 언니께 그런 걸로 못 간다고 연락을. 


"그래도 연락도 못 한단 말이야."

"아."


그냥 출장 비슷한 걸 거라 생각해서 연락두절일 거라는 건 몰랐는지 지영 역시 외마디 탄식을 했다. 


"연락도 못 해....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어."

"무슨 소리야. 정말. 팔불출이야."

"맞아. 팔불출. 근데 보고 싶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야 보고 싶겠지."

"나도 고민 많이 했어요. 그게 진짜 쎄거든."

"페이가?"

"응. 하루에 15 정도 줘요. 다 하면 200쯤."

"많네."


고개를 끄덕이는 시원에 지영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손을 꼭 잡았다. 200이면 세금 뗀 자신의 월급과 큰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사실상 열흘만 일하고 마지막 사나흘은 검수 작업이라고 하니, 일이 많이 고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녀와. 괜찮아."

"내가 안 괜찮으니까...."

"시원아. 좋은 기회라며."

"그야, 이런 게 다 인맥이라...."

"그럼 가야지."

"나 좀 서운하려고 그래요."

"그건 아니고...."


지영은 아까 걱정에 눈동자에 지진이 났던 걸 떠올리곤 솔직히 할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며 시원의 손을 잡고 이야기했다


"나 때문에 네가 뭘 포기하는 게 싫어서 그래."

"뭐 대단한 거라고. 이게."

"그니까. 2주 정도니까 괜찮아. 나도 어차피 학교 가는데."

"그런가...."

"응. 나 연말 수당 받으면, 그거랑 해서 연말연시 풍요롭게 보내자."

"아...! 좋죠. 그리고 우리 어디 놀러 갈까?"

"그것도 좋지. 근데 또 비싼 곳 예약하진 마."

"알았어요."


영 못 미더운 얼굴로 웃는 시원이었지만, 지영은 그냥 마주 웃어 주었다.



2.


"어언니-!"

"수아야."

"오늘 모 먹지?! 추우니까 감자탕?!"

"그럴까?"


팔짱을 낀 채 애교를 부리는 제 동생을 보고 지영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시원이 출제에 들어간 지 사흘, 수아는 수업이 끝나고 꼭 기다렸다가 저와 함께 식사를 해 주곤 했다. 마음 써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다 컸나 기특하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으론 몇 년을 함께 산 동생이 곁에 있어도 느껴지는 빈자리가 낯설었다. 같이 산 게 1년도 안 된, 사귄 지도 채 2년이 안 된 사이였다. 그리 길지 않은 사이 정시원이라는 사람이 제 일상에 얼마나 파고들었는지, 부재한 지금에서야 도리어 실감이 났다. 


"어디 가지~! 새로 생긴 곳 가볼까."

"그래. 가 보자. 사거리 쪽?"

"응! 재인이가 그러는데 맛있대. 근데 생긴 지 얼마 안 됐는데 30년 전통이라더라."

"그런 곳이 있지."


감자탕에 볶음밥은 혼자 절대 못 먹는 메뉴라며 자주 먹던 메뉴라 또 시원이 생각났다. 그래도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지영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잰 걸음으로 수아를 쫓았다. 




1주일.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지영은 조금 쓸쓸했지만 괜찮았다. 비록 조금 심심했어도. 주말에 일어나서 조금 추웠어도, 어느 날 짜게 먹었는지 얼굴이 부었을 때도. 

물론 까맣게 불이 꺼진 집이 싫어서 환하게 불을 켜두고 다녔고, 밤에는 주인의 온기 없는 베개를 끌어안고 추위를 달랬다. 누가 만들어 주진 못했지만 구독해 주고 간 샐러드를 먹으면서 헛헛한 마음을 달랬다. 

달랠 만했었다. 

대전에서 올라온 주연을 만나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왔다. 그리곤 거실을 지나쳐 바로 안방으로, 그리고 작은방으로 향했다. 


"아."


빈집임을, 시원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지영은 말 없이 소파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리곤 털썩 소파 아래에 앉았다. 그리곤 소파에 기대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웬일로 술을 마셨어요. 소화제나 숙취해소제 줄까'

더 외로울 텐데도 열심히 일하고 있을 시원을 상상하면, 제가 보냈는데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귓가에 선명한 목소리에 왈칵 그리움이 몰려왔다. 잘 있을까 걱정 돼. 목소리라도 들으면 좋을 텐데, 하다못해 메시지라도. 너무하잖아. 아예 연락도 못 한다니. 

 

"...보고 싶네."


지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보고 싶고 많이 그립다는 것을. 고작 2주라며 안심을 시킨 것과 달리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지영은 미간을 모으곤 눈을 꾹 감았다. 왠지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책이다. 진짜. 그 나이 먹고 그러고 싶니?"

"언니가 저한테 나이로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

"작작 하라고 작작! 애 오라가라 하고 말이야."

"언니 애인이기 전에 제 동생이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수아가 먼저 와 준다고 했어요."

"애 착한 걸 이용해 가지고. 어? 언니가 돼서 말이야."

"막내시라더니...."


민경은 찌릿하고 지영을 째려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수아가 자기 언니(지영)가 티가 덜 나서 그렇지 은근 외로움쟁이라며 달래 줘야 한다고 콧김을 뿜어댔다. 결국 두 손을 들고 외로운 걸 인정한 지영 덕에 수아와 민경이 집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며칠이나 된다고 그러니."

"보고 싶은데 어떡해요. 언니도 외로우실걸요."

"흥이다. 무슨 20대 애들 고무신 신는 것도 아니고."

"...."

"너도 좀 창피하긴 하구나."

"알면서 굳이 말씀하지 마세요."

"이번 금요일에 나온댔나?"

"네. 금요일 3시요. 4일 20시간 남았어요."


질린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민경에도 지영은 애틋한 듯 창밖을 내다 보았다. 



"시원 언니가 대단한 사람이긴 한 것 같아! 늘 느끼는 거지만 말이야."


수아는 고기를 상추 위에 올려 쌈을 싸서 민경에게 넣어 주고는 헤헤 웃었다. 지영은 조용히 하라는 듯 한 번 쏘아보고선 고기를 뒤집었다. 


"왜-! 맞잖아. 나 언니가 집에 있으면서 힘들어하는 거 처음 보는데. 슈퍼집순이가."

"보니까 집에 오래 있지도 않았더만."

"오랜만에 친구들 만났을 뿐이에요."

"나오면 머 할 거야? 아 밝은 곳이니깜 쫌 얘기하기 그런가?!"

"이수아."

"왜 뭐라고 그러니? 맞을 거면서."

"아니거든요.... 나오면?"

"와 지금 생각한 것만으로 입꼬리 올라갔어."

"히익.... 질린다. 너란 애."


욕을 하건 말건 지영은 턱에 손을 얹고 고심했다. 수아는 그럴 일이냐며 깔깔 비웃어 댔다. 



3. 


'닭이랑, 삼계탕 재료, 찹쌀... 오케이.'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수십 번도 더 읽었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요리책을 빌려서 해 보려다가도 뭉근한 불, 적당한 크기에 절망한 지영은 인터넷에서 10살도 할 수 있다는 밥솥 백숙 레시피를 찾은 참이었다. 태어나 처음 생닭도 사보고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한 조화였다. 

이 모든 게 오늘을 위해서였다. 오늘이 지나면 이제 시원의 베개를 꼭 끌어안고 잘 일도 없었다. 시원 또한 자신을 그리워했을 것이 분명했기에, 시원이 풀려나는 오늘, 지영은 오후 반차를 내고 시원을 마중하러 나가고 있었다.


"우와. 졍. 진짜 지독한 사랑이다."

"그러게요. 대-박."


민희와 소라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지영은 시내버스를 타고 해제장소로 안내된 곳으로 향했다.




"아."


교정 한 켠에 주차된 시원의 차를 발견한 지영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2주간 방치된 차의 사이드미러를 쓱쓱 닦고선 살짝 기대었다. 

'확인 안 하네....'

분명 해제 되었을 시간인데, 아직 카톡을 읽지 않은 시원을 지영은 잠자코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반가운 맘에 한걸음에 달려가려던 지영은 움찔 하며 굳었다. 시원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죄송해서... 역까지만 부탁드려요."

"가는 길인걸요. 계속 신세도 많이 입었는걸요."

"진짜 고마워요. 시원 샘."

"아니에요. 정은 새... 아?!"


여교수라기에는 젊은, 아마도 시원과 비슷한 박사과정생일 것 같은 여자와 함께 걸어오던 시원은 지영을 보고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러나 지영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굳은 상태로 돌아오질 못하고 있었다.


"지영, 아니. 여기는 어떻게."

"오, 아는 분이세요?"

"네. 그 제"

"안녕하세요? 친구인데 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었어서."

"아-! 타이밍이 좋네요"

"지영아...."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애인이라고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애인이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하는 상황은 늘 그렇듯 속이 아렸다. 시원은 미간을 좁힌 채 지영을 바라보았고 지영은 언제 굳었냐는 듯 특유의 사무용 웃음을 띤 채 가자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정, 정은 샘. 정말 죄송한데요. 친구가 와서 그...."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택시 잡음 돼요!"

"난 괜찮아. 시원아."

"지영아."


시원은 이미 약간 상황이 썩 좋지 않다고 느꼈다. 당연히 시원 역시 오랜만에 보는 지영이 눈물나게 그리웠음에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해 치대지도 못했다. 합숙 중에 체하고 아팠던 시원을 잘 챙겨 줬던 정은이었기에 흔쾌히 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선생님들이며 선배들께 인사를 드리고 헤어지느라 핸드폰을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핸드폰을 뒤늦게 확인하니 마중을 온다는 카톡과 보고 싶다는 다정한 말들이 연이어 도착해 있었다. 시원은 죽고 싶었다. 


"난 여기서 볼일 보고 있을 테니까. 데려다 드리고 와."

"지영아."

"괜찮으니까. 저 가볼게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

"선생님. 저 진짜 가도 되는데...? 왠지 죄송해요."

"아, 그...."


지영은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바로 인근 건물로 걸어갔다. 




'악. 그럼 안 됐는데...!'

지영은 뒤돌자마자 후회했다. 시원을 보고 싶던 마음이 그대로 욱하는 마음으로 전환된 까닭에 답지 않게 행동했다. 사실 시원도 곤란했을 텐데. 어떤 성격인지 잘 아는데, 아마 정말 별 뜻 없이 순수한 호의로 태워다 주겠다 한 게 뻔했다. 

'질투할 게 따로 있지. 2주만에 본 애인을...'

그래도 자신 때문에 시원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싫었다. 하지만 셋이 함께 있고 싶진 않았다. 오늘만은 친구인 척 가만히 있기가 버거웠다. 그리움과 애정이 지나치게 무거운 날이었으니까. 


"...."


아니. 사실은 머리와 감정을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서운했기에. 자신은 오늘 이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건만 시원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핸드폰도 확인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사람좋게 친절이나 베풀고 있는 게, 사실은 무척이나 서운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함께 있을 수 있는 걸 괜히 고집을 부려서 멀어진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영은 속상해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땅 꺼지겠어요."

"어?"

"미안해요. 확인을 못 했어. 막판에 막 정신이 없어서... 인사드리고. 계좌 확인하고 막."

"아니. 어떻게 왔어?"

"양해 구하고 택시 잡아드렸어. 미안."

"...."

"자기랑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같이 있고 싶어서 맘대로 좀 굴었어. 네가 마음써서 배려해 줬는데, 미안해."


인적이 드문 복도임을 확인한 시원은 지영의 볼을 살포시 쓸며 자신을 바라보게 하곤 미간을 모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이 약간 야윈 것 같아 지영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보고 싶었어."

"어?"

"진짜 보고 싶었어. 가라고 하지 말걸. 후회했어."

"지영아."

"주말은 심심하고, 샐러드는 아삭하기는커녕 맛없기만 해. 너랑 같이 보던 미드도 혼자 보면 하나도 재미가 없어."


평소에 자신보다 말수가 많지 않고 덜 솔직한 지영이었기에 시원은 지금 꽤 놀란 상태였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지영의 옆머리를 넘겨주며 나도 보고 싶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없는 밤은 너무 길어."

"응. 나도 그랬어."

"보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데. 내가 가라고 한 거니까. 누구한테 말도 못하니까."

"응. 응."

"...몰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야. 아까 너무 서운했는데."

"응. 내가 미안해요."

"네 얼굴 보니까. 모르겠어. 아까 하려던 말이랑, 지금 하고 싶은 말이랑."

"일단 차로 갈까? 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여기선 좀... 그래서."

"응."



4.


차에 타자마자 시원은 지영을 꼬옥 끌어안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마치 물속에 오래 잠수한 이가 뭍에 나와 숨을 쉬듯 깊은 숨이었다. 


"미안. 많이 서운했지."

"으으응. 아니야."

"진짜 아니야?"

"...."

"솔직해지기로 했잖아요. 자기야."

"...서운했어. 조금. 아주 조금."

"응. 미안해. 나도 너만 생각하면서 나왔는데, 진짜 막판에 정신이 너무 없었어."

"응...."

"아까 그 선생님은 남편이 오늘 생일이래. 그래서 빨리 가셔야 한대서 데려다 주려고 했어. 나 안에서 좀 아팠거든 그 선생님이 내 일 좀 도와주셨어."

"?!? 괜찮아? 왜? 어디...?"

"그냥 좀 소화문제. 지금은 괜찮아."


시원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입을 맞추고선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좀 창피한데."

"왜.... 건강검진 결과 또 속였어?"

"아이. 그건 잊어 버리라니까. 그건 아니고."

"그럼?"

"누가 맘에 걸려서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

"...뭐?"

"진짜야. 밥 먹을 때마다, 자기 밥은 잘 먹고 있을지 걱정돼서. 정신팔고 먹었더니 체하더라."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아무튼. 보고 싶었다고.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응. 나도 보고 싶었어."


시원은 손을 꼭 잡고 깍지를 꼈다. 


"죽는 줄 알았네 아까. 만지고 싶어서."

"정말...."

"2주간 못한 얘기 집에 가서 해요. 나 하고 싶은 얘기 많아. 안에 꽤 재밌어."

"정말? 나도 친구들도 만나고 수아랑 민경 언니랑 맛있는 것도 먹었어."

"그랬구나. 얼굴은 좀 야윈 것 같은데."

"저녁에 샐러드 먹어서 살 빠졌나."

"잘 챙겨 먹지. 그래도 맛있게 잘 먹었다니 구독한 보람이 있네요."

"응. 고마워. 아, 나 오늘 너 백숙 해 주려고 재료도 다 사놨어."

"...오. 정말?"


지영은 시원의 품에 안겨 있어서 미세하게 떨리는 시원의 속눈썹과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능숙한 화제 전환 덕도 있었다.


"...난 그거보다 먹고 싶은 거 있는데."

"뭐? 지금 사러... 아."


목도리 안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손가락에 지영을 살짝 몸을 떨었다. 명백히 의도가 보이는 스킨쉽이었다. 시원은 이마를 맞대곤 응시하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반은 농담, 반은 진담이었지만.


"금요일에 풀어 주는 이유 알 것 같아."

"...저질."

"응. 내일은 주말이고, 반차 아깝지 않으려면."

"피곤하지도 않아?"

"이 주를 참았어. 네가 눈 앞에 있는데 더 못 참아. 맘 같아선 바로 모텔 잡았어요."

"변태... 보고 싶던 게 아니라 하고 싶던 거야?"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리를."

"아니란 말은 못하네."

"분위기 깨고 싶지 않지만, 거짓말은 하기 싫어서. 그리고 둘 다야."


지영은 작게 웃으며 시동 빨리 거시라며 시원의 뺨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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