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구겨진 흰 침대시트에서 백현은 언 몸을 뒤척인다. 백현의 시선은 두꺼운 커튼 사이로 비치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하늘로 닿는다. 백현은 자신의 불안을 잠시 그 색에 의탁한다. 자포자기의 쉼이었다. 
 하지만 결국 푸르스름한 기운은 곧 휘장처럼 흘러내려와 경수를 단단히 포박한다. 지금쯤 경수는 박찬열에게 모든 사건의 전말을 듣고 두려움과 그리고 자신의 사랑은 변치 않았다는 안도감에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잠 못 이루고 있을 것이다. …… 그가 한순간이라도 나를 가여워하고 있진 않을까……? 백현은 자신이 우습고 어리석었다. 하긴, 우습고 어리석었기에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백현은 자조하면서 굳건하지만, 끝끝내 씁쓸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백현은 담배를 문다. 

 경수는 그리 생각할 것이다. 자신의 생명과 같은 사랑을 위협한 악한. 이 광란에 휩싸인 사랑은 그저 과대망상으로 인한 집착. …… 하지만 후회 없었다. 어차피 스스로에게도 외면 받은 사랑이었다. 의지에 반한 사랑. 어쩔텐가. 

 박찬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수를 철저히 숨겼다. 그로 인해 나는 경수에게 닿기 위해 나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지금쯤 박찬열은 반쯤 미쳐 자신을 찾으려 날뛰고 있을 것이다. 박찬열의 귀족적인 손엔 귀품 없는 칼이 들려 있을지도 모른다. 내 끝이 참혹할지라도 내 사랑이 경수에게 받아드려질 가망이 없다 하더라도, 우습고 어리석은 자신은 경수가 제 존재를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 어쩔텐가.

 새벽의 미세한 빛이 낡은 나무 바닥을 비춘다. 백현은 담배를 비벼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두꺼운 커튼을 걷었다. 삼 개월 전 백현은 이 은신처로 피신했고, 위협적인 시나리오는 김종인의 손으로 옮겨갔다. 백현은 이 시나리오를 짜기 전, 시적인 죽음을 상상하는 소년처럼 희열에 찼었다. 가뜩이나 상대는 경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으로 자신의 외사랑을 경수에게 보상받고 싶었다. 허나 이것은 현실이었다. 백현은 돌연 차분해져 김종인에게 부탁했다. 경멸해 마지않았던 비열하고 조잡한 김종인의 방식에 동조한 것이다. 김종인은 그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의 시간이었고 백현은 수백 번은 읊조렸다. 그래, 경수가 자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바라봐 준다면…….


 백현이 처음 경수를 보았을 때, 백현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를 느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억지로 삶을 이어가던 자인 아버지에게 백현은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연민과 증오로 뒤섞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고 그렇게 자신의 상처가 덧나지 않을 말들을 함구했다. 고요한 저택의 복도 끝 방에서 백현의 시간은 자신의 어머니를 그려보는 것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그려보려 하면 어떤 힘이 가물가물 거리는 형체의 어머니를 채갔다. 그렇게 마침내 무의 공간인 텅 빈 암흑에 맞닥뜨리면 백현은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결핍에 시달라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늑골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환통을 견딜 수 없어서 이불을 둥글게 말아 몸통에 꼭꼭 처박았지만 허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현은 수음을 하듯, 그 은밀한 만큼 미칠듯한 쾌감과 함께 경수를 조심스럽게 그 암흑에 놓아두었다. 그 날 이후, 백현은 내내 경수와 함께 살았다.



* * *
 어느 날 밤, 백현은 샤워를 하고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박찬열은 자신의 책상 의자에 등을 기대곤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사진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경수의 사진이었다. 사진을 낚아채도 박찬열은 경수에게 취해 있는 듯 한동안 경수의 사진이 있었던 그 지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마돈나네?"

 경수의 별명이었다. 백현의 숨이 멈췄다. 타인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던 박찬열이, 경수의 별명을 알고 있다. 백현은 박찬열의 심중을 헤아려보기 위해 그 찰나에도 박찬열과 도경수의 접점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접점이 어떠했든 박찬열은 도경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아마 앞으로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날 일로 나아가는 생각을 억제시키기 위함이었다. 박찬열이 도경수를 알게 된 순간, 그 둘의 관계는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다. 무엇보다 박찬열은 도경수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알아채고 있지 않는가.

 "뭉크의 마돈나……."

 박찬열의 시선이 꿈꾸듯 몽롱하게 백현의 손에 구겨져 있는 경수의 사진으로 향했다. 그 사진 속 경수는 축구를 하다가 교체되어 쉬고 있던 중이었다. 경수가 물을 들이키기 위해 긴 목을 젖혔을 때 백현은 서둘러 자신의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다시 교실 창가로 돌아왔을 때 경수는 눈을 감고 긴 목을 젖힌 채였다. ……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 사이로 가을의 바람 한 자락이 스친다. 백현은 사진기의 셔터를 눌렀다.

 "표정이 같아……. 이 마돈나하고, 뭉크의 마돈나하고."

 백현은 점멸하는 시야를,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숨을 느리게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박찬열은 어느 때처럼 무감각했다. 박찬열은 짧게 자신의 부탁을 말하고 뒤돌아 문고리를 잡았다. 그 뒷모습.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뒷모습……. 백현은 그 때 박찬열이 불쌍해보였다. 어느 것 하나도 간절히 원하지 않았을 박찬열. 그 희열의 쾌감을 고통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할 저…… 불쌍한 새끼. 그렇게 백현이 머릿속으로 박찬열에 대해 마침표를 찍었을 때. 백현은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박찬열이 이런 자신의 기미를 알아차린걸까? 박찬열은 자신의 발치에 시선을 두곤 문을 열었다.

 그 날 이후부터 박찬열의 세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박찬열의 책상 위에는 항상 뭉크의 화집이 펼쳐져 있었다. 기고만장하고 제 멋에 취해 사는 나르시시스트인 박찬열의 촉수가 바깥세상으로 꿈틀거리며 뻗어가고, 무심한 가면과 같은 표정에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그 균열 사이에서 빛이 있었다. 그건 도경수의 빛이었다. 박찬열과 가장 가까운 내가 그 기미를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나는 박찬열의 그림자이다. 나의 아버지는 박찬열의 아버지, 박 회장의 그림자였다. 나는 그 집에 속한 채 태어났고 박찬열을 위해 태어났다. 처음부터 그런 내 처지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세계의 질서는 먹이사슬이 아닌가. 나만 유난스럽게 구는 것도 겸언쩍었던 것이다. 내세울 것 없는 아버지의 처지에 대우는 좋았다. 또한 박찬열은 대체적으로 나에게 잘해주었고, 이따금 무시와 경멸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냈지만, 그건 정말 무의식적이었다. 박찬열은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이 주어졌다. 부족함이 없는 게 아니라, 버거울 정도로 주어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어른이 된 채 태어난 아이. 그런 박찬열이 아무런 거부 없이 자신의 세계가 전복될 위기가 될 수 있는 도경수라는 존재를 무람없이 받아드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차원, 결코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없는 것을 그가 스스럼없이…… 나의 경수를. 박찬열을 저주했던 건 아니다. 그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던 웃음의 뜻은 처음으로 느끼는 그에 대한 우월감 그 뿐이었다.


 …… 박찬열이 사랑에 빠지다니.  나는 모든 진실을 알아차려도 묵인해야 하는 나의 처지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때리면 아파서 우는 아이처럼, 백현은 이런 생각을 자주했다. 분명, 박회장이 내 어머니를 꾀어냈을거야. 저 힘없는 아버지는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빼앗겼겠지. 그래, 그랬을 거야.  뭇 사람들은 이번에도 내가 박찬열에게 힘없이 빼앗길 거라고 생각하겠지. 웃기지 마. 난 절대로 그렇게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난 다시 태어날 거야.


 * * *



 겨울이 깊어갈 무렵 경수는 무언가에게 쫓기는 듯 초조했다. 절망의 빛이 제 원 빛이 잠식해가고 있었다. 경수는 말로 상대방과 소통을 하는 편이 아니었다. 눈빛 그리고 손짓 온화하고 풍요로운 몸짓으로 소통했다. 경수의 몸은 뻣뻣이 굳어가고 있었고, 자신의 마비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그 픙요로운 대지가 가뭄에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박찬열도 변하고, 경수도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진실을 회피하고 있는 사람처럼, 이유가 뭘까? 이유가 뭘까? 끝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와중에 경수의 뒤를 쫓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토요일 정오, 그 쨍한 겨울의 거리를  갈 길을 잃은 듯 정처 없이 걷는 경수의 허망한 발걸음……. 나는 그 때 그러한 경수를 잡았어야 했을까? 그럼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까? 온몸으로 아파하는 경수를 안아주고 다독였더라면, 그는 푸른 핏줄이 드러난 그 길고 마른 손으로 도리어 나의 광기를 잠재워 주었을까?

 어느 덧 빛은 사위고 경수의 걸음이 멈춘 건 고급 술집이 연이어 이어져 있는 거리였다. 경수는 한 술집 앞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나는 얼이 빠진 채 그 거릴 둘러보았다. 밤하늘 올려다보며 드문드문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 곧이어 박찬열이 나타났다. 경수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곤 한참동안이나 망설인다. 박찬열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이 그런 경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찬열은 먼저 술집 건물의 틈이라고 불릴 수 밖에 없는 통로로 몸을 숨긴다. 주저하던 경수도 뒤따라간다. 그들은 그 틈에서 키스를 나눈다. 경수는 박찬열의 볼을 감싸고 구원에 겨운 눈물을 흘린다. 입술이 떼어지고 박찬열은 거칠게 경수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채곤 그의 몸을 돌려 벽으로 밀친다. 그 충격으로 경수의 입술은 조금 벌어졌고 그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그 때 예상치도 못하게 나의 페니스가 발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깨달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경수를 원했는가를. 미치게 그를 갖고싶어 했다는 것을…….

 누추한 제게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게 나 같은 놈이 가지기에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저 지켜보고만 싶었다. 나라는 존재를 잊고 농밀하고, 내밀하게 그에게 그저 심취하고 싶었다. 그게 경수를 지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 아니,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날 밤 꿈을 꾸었다. 텅빈 흰 공간뿐이다. 나의 양손은 온갖 색깔이 뒤범벅된 검은 페인트가 묻혀 있었다. 나는 다시금 그 괴괴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 나를 해할 어떤 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새하얀 색의 텅 빔이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나는 광란에 휩싸인 채 그 더러운 손으로 그 공간을 휘저었다.



 * * *



 방문이 열린다. 김종인이다. 김종인은 나와 눈을 맞추고 반쯤 열려져 있는 방문으로 시선을 돌리곤 말한다.


 "도경수 대기 시켜놨어."
 "……"
 "박찬열이 벌써 주위에 사람을 깔아 놓아서 고생 좀 했지. …… 이 와이셔츠 소매 보여?"

 김종인의 와이셔츠 소매에는 핏물이 배어있었다. 김종인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눈썹을 들어올린다. 겉옷 안주머니에서 차 열쇠가 나온다.

 "잘 도망쳐봐."
 "……"
 "얼마나 갈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

 차 열쇠가 침대 위로 떨어진다.


 "이봐, 난 박회장, 그 늙은이한테 당한 게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넌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발 빼려 하니깐 별 게 다 궁금해지는군. 어쨌든 그간 쌓은 정도 있고 해서 일러주는데."
 "……"
 "너 저 차타는 순간."

김종인은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한다.

 "죽어."
 "……"
 "박찬열 그 새끼 날뛰는 거 처음 보았어. 그렇게 고고한 새끼가 망가지니 섬뜩하기까지 하더군. 늙은이한테 개기는 소리가 온 집안을 뒤흔들었어."
 "……"
 "그 새끼 미쳤어."

 밖에, 경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고 있어. 박찬열이 미쳤든, 그로 인해 내가 죽든 무슨 상관이야? 나는 흥분에 차가워지는 손을 두어번 줬다 폈다를 반복하고, 주저 없이 준비해둔 가방을 챙겼다. 문가에서 버티고 서 있는 김종인은 비키라는 나의 날선 시선에, 부하가 내민 서류봉투에 눈짓 한다.

 "사진."
 "……"
 "이 모든 일의 시작인데. 챙겨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네 영정 사진이 이거려나?"

 봉투를 여니 그날 밤의 사진이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경수를 부축하면서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단을 올랐다. 2층, 경수의 침실을 열자 그의 체취가 풍겨졌다. 아득할 정도로 벅찬 느낌. 그래서 커튼을 걷어야 한다는 게 우습게 여겨졌다. 이 방에 들어온 나는 침입자가 아니야. 처음부터 이 문을 열 사람은 나였여. 경수는 내 어깨에 편히 기대고 있다. 나는 경수를 침대에 눕히고 그저 바닥에 앉아, 경수를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또한 나는 보았다. 탁자 위에 놓인 환하게 웃고 있는 박찬열과 경수의 사진을. 나는 액자를 엎고 거칠게 커튼을 걷엇다. 밤 사이로 플래시가 터진다. 나는 잠시 그 플래시를 노려보다가 박찬열을 마주하고 있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플래시가 다시 한 번 터진다. 네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나는 지금 경수와 있어. 

'…… 찬열아.'

후회없어.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야…….








뭉크의 마돈나

됴른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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