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집으로 들어오라니 그게 무슨! 내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레이를 다시 집안에 들이지 않기로 했잖아!"

"저 애가 받아들였어. 나는 제안을 했을 뿐. 선택은 그 아이 본인이 했다"


손님과 이야기가 꽤 길어져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었다. 겨우겨우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손님을 배웅한 뒤, 병원 앞 입구에서 만난 레이의 친구들이 신경 쓰여 서둘러 병동으로 돌아왔다. 복도에서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반가웠지만 병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급히 걸어갔지만, 이미 늦었던건지 문을 뚫고 레이의 절규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짤막하고 여상한 형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문이열렸다.


형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아서 레이의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형을 뒤쫓았다. 그리고 형은 또 억지와 폭력으로 내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힌다.


딱히 형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만큼 형을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 날 있었던 불행을 아이의 책임으로 밀어넣고, 아이를 저가 기다리고 있는 지옥에 밀어 넣으려고 미쳐 날뛰는 저 꼴사나운 모습의 형은 정말이지 증오스러웠다.



"그 날의 불행은 저 애 탓이 아니야! 그렇게 모든 원인을 아이의 탓으로 돌리면 조금은 시원해?! 그러고도 당신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

"나는 한 순간도 그 아이의 아버지였던 적이 없어. 내가 원한건 내 아내지, 아이가 아니거든."

"형!"



형을 상처주고 싶어서 던진 말은 형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고 되돌아와 나를 찔렀다. 옛날에도 무뚝뚝하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형수의 죽음이 형에게, 그러니까 진통제의 죽음이 아키바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실감을 주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애초에 형이 만들었던 불행의 씨앗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형은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뒤를 돌아 복도를 걸었다. 형의 등을 보며 눈 앞이 빨개지는 것 같은 살심이 느껴졌다. 고상하게 걸어가는 형을 붙잡아 죽도록 패주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렇지만 일말의 이성이 나를 놓지 않았다. 여기는 아직 병원이고, 레이의 친구도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꼴사납게 어른들의 나쁜 모습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었다. 콩가루 집안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이냐.


"미안하다. 오늘은 돌아가주겠니?"


나는 병실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는 애들 앞으로 돌아가,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레이의 친구들에게 부탁했다. 방금 본 것은 모른척 해달라고. 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을 보내고 레이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때까지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가지 못했다. 레이를 보면 화부터 낼 것 같아서, 아이를 붙잡고 엉엉 울 것 같아서 벽에 기대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레이만큼은 몰랐으면 했던 형의 무자비함이 또 다시 레이에게 알려졌다. 4년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왜 여전히 무능력한지 모르겠어. 유우.



아키바 타이세이, 그는 아키바가의 당주 계승권 순위 1위였다. 그가 본처의 자식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던 계승권을 떠맡았다. 형이 있었지만 아키바 에이지, 그는 타이세이와는 배다른 형제였다. 


어쩌면 이 불행의 시작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한 오래된 가문의 폐해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비교적 일찍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 아이를 갖지 못했다. 


아버지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지만 가문의 원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뜩이나 아키바가는 성별에 관계없이 아이가 아주 귀했다. 이유야 뭐, 특유의 능력 때문에 아키바가의 사람들은 단명하는 걸로 유명했으니까. 진통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고통속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까. 


그런데 당주의 후계자가 없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원로들은 부부에게 이혼을 권했고 아니면 첩이라도 들이라고 망발을 해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이에 응하지 않으셨다.


좋은 말로 되지 않자 원로들은 다양하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압박했다. 그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공격 속에서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탱하며 꿋꿋하게 버티셨다. 그러나 결국 원로들의 비겁한 수에 다른 여자 사이에서 아이는 생겨버렸고, 그 아이는 아키바 에이지, 형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는 만큼 분노하셨고 원로들과, 아이를 낳고 돈을 받아 사라진 그 여자를 증오했다. 그리고 그 증오는 형에 대한 무시로 이어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진짜 불행이 시작되었다. 형이 11살이 되던 해, 드디어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불임을 근거로 가족을 몰아세웠던 원로들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재기불능으로 만드셨고, 그렇게 가문의 일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개성으로 권력을 지켜오던 원로들을 쳐내면서, 아버지와 남은 원로들 사이의 줄다리기는 심화되었고 아슬아슬한 평화가 이어졌다. 형이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려고 원로들과 손을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소리 없는 전쟁 속에서 결국 형은 원하는 바를 손에 넣었고, 나는 친척들과 피를 보기 싫어서 순순히 계승권을 넘겨 주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져야 할 책임이 싫어서 도망쳤던 걸지도 모른다. 그 전부터 이런 의무도 권리도 누리고 싶지 않았고 자유롭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레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계승 서열 1위는 나였고, 작년에 아키바가에 대한 내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레이의 양육권을 완전히 넘겨 받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아키바가의 권리 따위야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레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다시 그 아이가 지옥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니? 


레이에게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마음을 정리하던 것이 다 소용이 없었다. 형의 말에 따르면 결국 레이 본인이 선택했다는 뜻인데. 분명히 형의 협박 때문일것이다. 그렇다면 형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것보다 대책을 세우는 게 나았다.


타이세이는 병실 문을 벌컥 열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때문에 레이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 보았다. 레이의 얼굴 곳곳에 슬픔의 흔적들이 잔뜩있었다. 


레이의 벌개진 눈가가 피가 베인 입술이, 형의 말끔한 얼굴과 오버랩되었다. 아까 한 대 때렸어야 했다. 나는 조금은 다급하게 그리고 조금은 형에게 향하는 짜증을 담아서 레이에게 물었다.



"레이, 형이 뭐라고 했어? 협박했니?"

"다... 들었어?"

"그래. 다 들었으니까. 얘기해봐. 형이 뭐라고 겁을 줬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가만 안둔데?"

"아니야. 삼촌 내가 집에 간다고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약속했잖아. 다시 안가기로!"

"그냥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야. 삼촌. 난 그냥 긴 휴식을 취한거고"

".....거기가 어떻게 원래야...!"

"나한테는 거기가 원래야. 삼촌하고 산지는 4년 밖에 안됐지만 그 집에서는 3배의 시간을 더 보냈어. 나는... 가야해..."



그래. 대화의 시작부터 글러 먹었지만, 나는 최대한 레이의 불안함을 다독거리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형의 그 말도 안되는 억지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레이의 대답이 너무 아파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내 목소리가 높아질 수록 레이의 목소리는 차분해졌다. 담담하게 사실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모습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그 지옥을 돌아갈 곳이라고 할 수가 있지? 화가 나다 못해 이제는 일말의 슬픔과 함께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내가 그동안 했던 노력이 레이를 힘들게 만들었나? 레이를 지치게 만들었나? 



"왜 이래.... 레이. 삼촌이 미워서 그래? 너무... 오랫동안 몰랐어서? 너를 늦게 찾아와서? 삼촌이 미안해..... 더 노력할게!"

"아니. 삼촌은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친자식도 아니고 싫어하는 형의 딸을 무려 5년 가까이 돌봐줬어. 그 정도면 아무도 삼촌을 비난하지 않을거야. 충분했어."

"그런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너야! 레이."



이제는 레이의 대답이 끔찍해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레이를 보살폈던 시간들을 단지 어른의 의무였을 뿐이었다고 생각하는 레이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시선을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피하는 레이의 어깨를 붙들고 눈을 맞췄다. 내 평판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레이가 외면한다면 하등 소용이 없었다.


레이는 답답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싫고 미워서인지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아이에게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섭섭함이 밀려왔다. 



"삼촌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내가 왜 그럴 필요가 없어! 나는.... 너를 구해 온 그 날 부터 항상 너를 딸처럼 생각해왔어. 왜..도대체 나한테 너의 속마음을 얘기해주지 않아? 왜... 나한테 그렇게 항상 숨기고..... 나는 의지가 되지 않아? 힘들다, 아프다는 소리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안 하고!"

"......"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입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아픈 아이를 붙잡고 내 감정에 못이겨서 투정을 부렸다. 레이는 내 외침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둘의 고함으로 시끄러웠던 병실이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흥분했던 이성이 조금은 가라앉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보다 한참은 더 어리고 약한 조카에게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냐며 투정부린 거와 다름 없었다. 사과를 하기 위해 입을 벙끗거렸지만 레이가 더 빨랐다. 


레이는 본인의 입고리를 잔뜩 비튼채로 비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는 레이의 두 눈이 어둡게 빛났다.



"이 말을 듣고도 그렇게 생각할까? 친아버지도 나를 증오하는데? 삼촌도 아버지처럼 나를 증오할 수밖에 없을걸?"



마음의 바다(心海)에서 헤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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