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킹과 조커에게 납치되어 벌였던 게임 이후, 딕은 그가 제이슨의 허리를 자주 끌어안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벌인 행동이라 몰랐다. 그러다 보니 자각하고 나서 제이슨을 익숙하게 끌어안으려다 멈칫, 몸을 굳히는 일이 늘었다.


“딕?”


딕은 오늘도 제이슨의 허리를 끌어안으려다 몸을 급하게 뒤로 물렸다. 


제이슨이 의아한 얼굴로 왜 그러냐 묻자, 딕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얼버무리곤 급하게 자리를 떴다. 누가 봐도 당황해 도망치는 티가 팍팍 나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딕이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제이슨은 입매를 매만지며 애매하게 웃었다. 자각한 건가. 하긴, 그날 허리를 자주 끌어안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도 좀 아쉬운데.


제이슨은 핸드폰을 꺼내 지금 상황에 이야기를 털어놓기 좋을 인물을 골라냈다. 할리는 흥분하다 못해 웨인가에 쳐들어갈 것 같아서 안 되고, 캐스는 이런 이야기 관심 없고, 코너한테 하는 건 미안하고, 카라도 좀…. 아, 얘가 좋겠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몇 초도 안 되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녕, 로이. 시간 있어?”


{제이를 위한 시간은 언제든 있지!}


혹여 마음이 바뀌어 끊기라도 할까, 다급히 답하는 해맑은 음성에 제이슨이 킥킥 웃었다. 


통화 상대는 로이 하퍼, 제이슨의 가장 친한 친구 겸 동료이자 히어로명 레드에로우. 딕과도 친구 겸 동료 사이였다. 


제이슨에게 로이는 조커와 할리만큼은 아니지만, 그 둘을 제하면 가장 친했다. 참고로 로이의 제이슨 짝사랑은 현재 진행 중이다. 


“고민거리가 있어서… 우리 자주 가는 펍에서 만나자.“


{OK~}


제이슨은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방을 나왔다. 


“알프레드, 저 오늘 늦어요.”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쇼.”


“네, 데미안한테도 전해주세요.”


데미안은 보이지 않아 일단 알프레드에게만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제이슨이 저택을 나가자 그 모습을 지켜본 딕이 다급히 도청기와 연결된 이어폰을 착용했다. 


딕에게 붙잡혀 있는 데미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이 늦은 시간에 로이랑 만난다니, 그 양아치 녀석이 우리 리틀윙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럴 거면 그냥 가지 말라고 해.”


“안돼… 제이슨은 자기한테 간섭하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요즘 대하는 게 어색해서가 아니고?”


데미안이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딕의 친화력 덕에 딕과 꽤 친해진 데미안은 이제 딕이 옆에서 찡얼거려도 귀찮아하며 말 몇 마디 얹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와의 파트너십이 잘 맞아서겠지만 말이다. 데미안에게 제이슨이 가장 좋아하는 형이라면, 딕은 가장 좋아하는 파트너가 되었다.


그렇다고 제이슨에게 달라붙는 건 용납 못 한다. 파트너는 파트너고, 제이슨은 제이슨이었다.


“그, 으럴리가!”


“한심하긴.”


데미안은 매정하다며 칭얼거리는 딕에 혀를 찼다. 물론 데미안 또한 한쪽 귀로는 이어폰을 착용한 상태였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한편 펍에서 만난 제이슨과 로이는 익숙히 안줏거리를 주문하곤, 술을 홀짝였다.


“그러니까 딕 그 자식이 요새 이상하게 군다고?”


“어. 나랑 둘이 있을 때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자리를 피해. 바바라랑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 날 바바라는 나랑 저녁 약속 있었거든.“


”… 걔랑은 왜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여자애들이랑 다 같이 저녁 먹기로 한 거야.“


로이가 ‘혹시!’ 하는 얼굴로 보자 제이슨이 손을 휘저어 부정했다. 여자애들이랑은 진짜 친구일 뿐이었다. 


“그냥 몇 번 그런 거면 넘어갈 텐데 너무 자주 그러니까, 나 어색해 하는게 티 나고… 나랑 있는 게 싫은 건가?”


제이슨이 입을 불만스레 씰룩였다. 싫지 않다는 건 알지만, 자꾸 티가 나게 피하는 건 짜증 났다. 그것 때문에 스킨십도 줄었고. 먼저 손을 잡으면 어색해하다가 슬쩍 빼내고.


제이슨은 짜증스럽게 투덜거리다 술을 급하게 들이켰다. 평소보다 알코올이 독한 술을 벌컥 들이켜자 머리가 띵해졌다.


“그 자식 배가 불렀네!“


로이가 배부른 자식이라며 딕을 욕했다.


“근데 뭔 일이라도 있었어? 딕 녀석이 갑자기 널 피할리는 없는데.”


“… 그 날 키스가 문제였나?


“-뭐?”


제이슨의 말에 술을 들이켜고 있던 로이가 쿨럭, 기침을 뱉었다. 고통스레 기침을 토해내는 로이의 목이 붉었다. 급하게 물을 들이켠 로이가 미간을 구기며 제이슨을 보았다.


“너 딕이랑 키스했어?”


“음, 딱히 자의는 아니었어.”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에 제이슨이 어물거리며 변명을 덧붙였다. 독한 술 탓에 술기운이 빨리 도는지 입에서 더운 숨이 나왔다. 


입을 떡 벌린 로이가 한껏 눈썹을 늘어뜨려 억울한 표정을 했다.


”나는! 나도 해줘!“


딕이랑 했으면서 자기는 왜 안 해주느냐며 로이가 칭얼거렸다. 


”친구랑은 키스 안 할거야.“


예상했던 대로 로이가 징징거리기 시작하자 제이슨은 단호히 거절했다. 친구랑은 애매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다며 제이슨은 술로 입을 축이곤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랑 하는 키스가 싫다는 건 아니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로이가 제이슨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손가락 한 뼘 거리로 가까워진 얼굴에 제이슨이 흠칫, 몸을 뒤로 물렸다. 제이슨의 손 위로 로이의 손이 느릿하게 쓸어올리며 올라왔다. 


“응?”


끈적한 녹색의 눈동자가 제이슨을 빤히 바라보았다. 맞닿은 손이 뜨거웠다. 제이슨이 머뭇거리자, 밀어내지 않을 거란 확신을 얻은 로이가 꾹 닫힌 입술을 혀로 핥았다.


“로이, 잠깐.”


얼굴이 붉어진 제이슨이 로이를 밀어냈다. 하지만 밀어내는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어서 로이는 이게 밀어내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부추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이슨이 정말 싫었다면 강하게 밀어냈을 테니 이 밀어냄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을 것이다.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밀어내려 하는 마음과, 그와의 키스가 싫진 않아 선뜻 받아들이려는 마음의 공존인 거다.


벽이 쳐진 구석 자리라 다행이었다. 제이슨은 스킨십을 좋아하지만, 밖에서 대놓고 하는 건 꺼려 했다. 그러니 여기서 키스를 하는 건 괜찮겠지.


“키스한다고 딱히 변하는 건 없을 거야. 난 여전히 너의 가장 친한 친구일 거고, 멀어지지도 않아.“


로이가 평소답지 않은 진지한 목소리로 제이슨을 달랬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로이는 제이슨이 그를 거부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친한 친구로 남을 거였고, 받아들인다 해도 제이슨이 그어놓은 선을 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딕처럼 자신의 감정도 자각 못 해 멍청하게 구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제이슨을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고, 그렇다고 그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이슨이 그어놓은 선을 잘 지켜왔지.


”제이슨, 내가 널 사랑한다고 그걸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난 네가 원하는 선을 제일 잘 지키는 거 알잖아.“


걱정마, 친구.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어. 난 너의 베스트 프렌드잖아?


제이슨이 걱정하는 것은 관계의 어긋남. 로이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눈만큼은 지금 당장에라도 타오를 듯 열렬했다.


제이슨이 밀어내던 손을 떼자 로이가 입술을 맞붙여 왔다. 모든 숨을 잡아먹을 듯 게걸스레 입안을 탐하는 로이에 제이슨이 숨을 헐떡였다.


”흐…“


맞붙었던 입술이 잠시 떨어지고 제이슨이 숨을 몰아쉬었다. 로이가 다시 입안을 탐하려 고개를 들이밀던 순간, 뒷덜미가 잡아당겨 져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윽! 어떤 새끼야?“


”나다, 새끼야.“


로이를 끌어내 내팽개친 사람은 딕이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듯 살벌한 얼굴의 딕에 로이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 양아치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잠깐, 야. 억!“


딕의 매서운 주먹질과 함께 순식간에 개싸움이 벌어졌다. 로이와 가끔 키스하면 바로 벌어지는 상황인지라 제이슨은 익숙히 술과 안주를 먹으며 개싸움을 구경했다.


”미친, 네가 제이 형이면 다냐? 네가 뭔데!“


”형이면 다지! 미친놈이 순진한 내 동생을 꼬드겨?“


”형이 다면서 뭔 간섭이야. 네가 아빠라도 돼?“


”그럼 브루스한테 말해?”


“아니!”


주위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순식간에 치정 싸움의 한판을 구경하려 사람들이 몰렸다. 누가 이길지 돈 내기를 벌이는 사람도 생겼고, 제이슨은 딕이 이긴다에 5달러를 걸었다.


난투 끝에 로이를 쓰러뜨린 딕이 방긋 웃으며 제이슨을 끌고 펍을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밤거리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딕, 또 도청기 붙여놨어?”


“윽. 미안… 걱정돼서 그만.“


”음, 딱히 상관은 없어. 도청기나 위치추적기야 나도 자주 하는 거고.“


그 말을 끝으로 둘의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밤 공기를 마시자 알딸딸하게 몰려오는 술기운에 제이슨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래서 나 왜 피하는 거야?“


계속 피하면 나 진짜로 속상할 것 같은데.


제이슨의 느릿한 중얼거림에 딕이 걸음을 멈추었다. 딕이 걸음을 멈추자 제이슨도 걸음을 멈추곤 딕을 보았다. 제이슨의 볼은 술기운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볼을 빤히 보던 딕이 시선을 돌려 제이슨의 청록색 눈과 눈을 맞췄다.


”너랑 있으면, 의식돼서 그래. 그때 키스 이후로 네가 의식돼서.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동생한테 이런 감정이나 품고, 형으로서 실격이야.”


딕이 흐릿하게 웃었다. 슬픔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흐린 웃음에 제이슨이 미간을 구겼다. 제이슨은 딕의 밝은 웃음을 좋아했지, 저런 슬픈 웃음은 보고 싶지 않았다.


“너만 그런거 아니야. 그러니까 형으로서 실격은 아니네.”


먼저 간다며 제이슨이 뚜벅뚜벅 앞서 걸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딕이 화들짝 놀라며 제이슨에게 따라붙었다.


“잠깐, 그 말 뭐야? 무슨 뜻인데, 제이!“


”시끄러워, 딕.“


술기운이 아닌 다른 이유로 붉어진 제이슨의 얼굴에 딕이 탄식을 뱉었다. 딕은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제이슨을 보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나만 의식되는 게 아니라니. 그 표정으로 그 말은 반칙 아닐까.



(밑은 소장하시고 싶은 분만 사기. 삭제 대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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