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넬/가이드버스

국제범죄조직의 수장 센티넬 성현제 X 가이드 한유진

오만가지 트리거워닝 주의 


[짧은 공지]

<내가 사랑하는 종말에게> 2권 분량이 이번 15편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2권에 외전을 넣을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외전을 넣게 될 것 같아요. 내용 진행상 중요할 것 같기도 하고...어쨌든 2권 외전 또한 웹에는 올리지 않고 책에만 들어갈 예정이며, 이후 3권까지 마무리를 짓고 난 뒤에 웹 유료공개시 교정+교열+편집이 완성된 버전과 함께 한꺼번에 올리겠습니다! 

다시한번..늘 함께해주시는 분들께 정말 깊이 감사드려요...저는 정말 행복합니다...여러분이 세성이다..ㅠㅠ(여전히 답글은 한분씩 천천히 쓰는 중이예요!)

16편부터는 3권 분량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6개월 뒤, 

송태원은 신분증을 꺼내 경비에게 확인을 받은 뒤 중앙아프리카의 미국 대사관 건물로 들어갔다. 그는 방탄설비가 된 위병소로 다가가, 해병 경비대원이 자세히 살펴보는 가운데 민감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신분을 확인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금속탐지기 검사를 받은 뒤 그는 경비원의 호위를 받아 작은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그는 그 회의실에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채 대사관의 외교사절단 부단장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키아라 그레이 사건 이후로 빠르게 다른 사건에 배치되었다. 인터폴 내부적으로도 그레이 사건을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송태원은 부당함을 느꼈고, 그가 소속된 사건대응팀 팀원들 모두 같은 감정을 느꼈으나 사건을 함께 끝까지 밀고나가줄 것이라 여겼던 국제형사재판소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했다. 마이야 요원은 분개하며 그들의 사건담당관에게 따졌으나 그 일로 징계를 받았다. 마이야와 송태원은 각각 다른 임무가 주어졌고 그들을 서포트했던 팀원도 모조리 해체되었다. 키아라 그레이는 사건의 관할권은 그렇게 연방경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6개월동안 송태원은 중앙아프리카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로 이루어진 게릴라 조직의 캠프들에 대한 상세한 지도를 작성했다. 몇 시간 동안 감시확인 경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몇 차례 차를 세우고 기름을 넣거나 음료수를 고르거나 현지 스포츠 잡지를 구입하며 여러 지역에 있는 정보원들에게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센티넬-가이드 조직의 보급로나 조직의 내적, 외적 관계에 대해서 파악하는 일이었다. 인터폴은 이 게릴라 조직의 배경의 대의명분 보다는 이들이 세성이나 브레이커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기를 바랐다. 송태원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 날 미국 대사관에서 일이 마무리 되고 나가기 전에 그는 부단장에게 자신의 인터폴 선임이었던 최은영이 대사관에서 근무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만나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단장은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아. 얼굴을 어디서 뵈었다고 생각했는데 최팀장 데스크에 인터폴 후배라는 분 사진에서 였군요.”

그리고 그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뒷말을 이었다.

“최팀장은 4년 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송태원은 순간 자신이 잘 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아니…….”

송태원은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최은영이 자살을 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송태원은 우선 모든 감정을 눌렀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왜 아무도 연락을 전하지 않은겁니까?”

“최팀장의 남편이 원했습니다. 저는 대사관 책임자였기 때문에 알 수 밖에 없었지만…이곳 직원들도 대부분 그냥 여길 떠났다고만 생각했습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쏟아지는 질문을 가능한 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으나 그러다 보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이 오고 있어서 버거웠다. 송태원은 간신히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는 대사관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몇 군데 연락을 넣어 최은영의 남편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 확인했다. 곧 중앙아프리카의 다마라 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인 클리닉을 운영하는 의사라는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송태원은 즉시 시동을 걸고 국도를 탔다. 


1시간 뒤에 도착한 다마라는 차가 많이 다니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땅을 넓게 써서 진흙과 벽돌로 만든 납작한 집들이 듬성듬성 있었고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는 종종 가축이 돌아다녀 서행해야만 했다. 40년 전 스와힐리어로 ‘우자마’라 부르는 토착 사회주의의 상륙으로 공동체 규모가 확대된 마을 중 하나였다. 비록 도로가 흙길이어도 학교, 병원, 상수도 등의 기본 시설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송태원은 그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아이를 안고 차례대로 대기 의자에 앉아있는 개인 클리닉 앞에 차를 세웠다. 병원은 칸막이 하나가 대기실과 진료실을 구분했을 뿐이었다. 접수원이 한 명 있었기 때문에 송태원은 그에게 가서 닥터 음코모 마티베를 찾고 있으며 자신이 그의 아내와 한때 함께 일했던 사이라고 말했다. 학교에서 쓸 것 같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있던 접수원은 중앙아프리카의 사투리 없이 본토 프랑스어를 쓰는 송태원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으나 점심시간 때 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송태원은 클리닉 밖 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30분 뒤에는 낡은 흰가운을 입은 늙은 의사가 걸어나왔다. 그는 한 손에 집에서 포장해온듯한 점심을 들고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송태원을 보고 그의 옆에 앉았다. 곧 접수원이 와서 미적지근한 커피를 내밀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친절한 태도였다. 송태원은 이가 나간 컵을 받아들고 그의 옆에서 샌드위치를 꺼내는 의사를 돌아보았다. 

“당신 얼굴을 사진에서 몇 번 봤어요.”

의사는 말했다. 

“아내는 당신이 후배들 중에 가장 미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장 아꼈다고 했습니다.”

주름진 아프리카인의 얼굴은 얼핏 아무 표정도 없는 것 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느릿느릿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말했다. 송태원은 샌드위치를 쥔 의사의 왼손 손가락 중 소지와 약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총에 맞아 날아가버린 것만 같은 흉터였다. 

“우리는 다 늙어서 서로를 만났죠. 둘 다 젊은 시절에 너무 바쁘게만 살았던 사람들인 걸 알았기 때문에, 새로운 만남이 퍽 반가웠답니다.”

의사는 샌드위치를 반쯤 먹고 나서 티슈를 꺼내 입가를 닦았다. 그런 다음에는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는 지갑 안쪽에서 거의 너덜너덜해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 최은영이 있었고, 의사가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일곱 살 남짓 되어보이는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서로 다른 두 인종이 섞인 특징이 명확히 드러나는 외모였다. 송태원은 조금 놀랐다. 인터폴을 나간 최은영이 자기 삶을 살고 있었을거라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삶을 마주하는 것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생길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긴 아이였습니다. 그래도 우린 자신 있었어요. 둘 다 꽤 안정적인 직업이 있었고, 젊었을 때 보다 덜 실수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의사는 웃으면서 사진을 다시 접어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애가 일곱살 때 센티넬로 각성을 했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 사람들은 아내를 협박했죠. 무슨 정보에 대해 입을 다물라는 거였어요. 아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타냐가 납치됐습니다. 아내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다 자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너무 깊이 알았다구요. 타냐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서는 정말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나는 막아보려고 했지만…….”

의사는 그러면서 자신의 세 개 남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느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눈물을 보이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그에게 이 일은 지난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의 일도 아니었다.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신을 매몰시킨 사람의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타냐는 돌아왔지만 그 애도 얼마 가지 못해 죽었습니다. 각성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센티넬이 너무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죽는다고 하더군요.”

의사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서 왔다면 이게 전부입니다.”

송태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수도로 돌아와서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바로 호텔로 돌아갔다. 송태원은 싸구려 호텔 앞 작은 구멍가게에서 오늘자 신문을 샀다. 먹을만한 것들을 사서 호텔 엘리베이터로 갔는데 수리중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송태원은 한숨을 쉬면서 들고 있는 짐을 다시 추스르고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옆구리와 팔 사이에 끼워두었던 신문이 1면과 내지가 분리되는 바람에 바닥에 신문지가 펄럭거리며 떨어졌다. 송태원은 조금 짜증이 치밀어올랐으나 꾹 눌러참고 짐을 한 손으로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신문지를 줏었다. 그러다가 문득 국제란의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센티넬-가이드 수백명의 인신매매를 주도한 키아라 그레이가 미국에서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레이의 변호인단은 그 센티넬-가이드 인신매매가 그레이와 관련이 없는 아주 안타까운 사건임을 증명하려 하며, 다가올 재판에서는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송태원은 잠시 그 기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의 내면에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분노 같았다. 


-


일주일 뒤, 날씨는 추웠다. 밤공기는 뼈에 사무치도록 차가웠다. 송태원은 디트로이트의 역전 광장에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저 멀리 검정색 롤스로이스가 정류장 맞은편의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송태원은 그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가 들어간 골목 끝에는 작고 아담하지만 이탈리아 전통요리를 파는 것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레스토랑 문은 열려 있었고 열 두명의 사람들이 그 앞에 우글우글 서 있었다. 안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가 나온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정장을 입고 권위적이거나 주먹질을 좋아할 것 처럼 생겼다. 모두 키아라 그레이의 마피아 행동대장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에서는 그레이가 웃는 얼굴로 내렸다. 

“대모님!” 

마피아들은 모두 두팔벌려 그들의 보스를 요란하게 맞이했다. 송태원은 어둠 속에 서서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가로등 빛이 있는 곳으로 한걸음 걸어나왔다. 그가 마피아들을 향해 말했다. 

“그레이씨?”

마피아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키아라 그레이도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송태원의 얼굴을 보더니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자네를 알던가?”

송태원은 아무 표정 없이 한걸음 더 다가갔다. 자리에 모인 갱스터들이 모두 자신의 총집에 손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총을 들지는 못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땅이 자신을 잡아당긴다고 생각하거나, 온 몸에 모래주머니를 매달았다고 느꼈다. 키아라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송태원은 길게 끌지 않았다. 키아라 그레이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그를 바라보며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곧 그레이의 눈이 충혈되면서 얼굴이 터졌다. 온 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그레이의 아이리시 마피아를 존속하게 한 근간이 이 자리에 모두 모여있었고, 하나도 빠짐없이 바닥에 엎드린 채로 알 수 없는 중력에 짓눌려 무력하게 죽었다. 송태원은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리고 레스토랑 주인이 신고한 경찰이 올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서 있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송태원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인터폴 요원이 마피아 보스를 죽였다는 내용이 아니었다. 열 몇명을 단번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센티넬이 난동을 부리다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주 소수의 언론만이 이 사건으로 죽은자들이 몇 달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저지의 아이리시계 마피아와 그들의 수장 키아라 그레이라는 사실을 다뤘다. 이 모든 사건은 며칠 뒤 어떤 콜걸이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한 정치인과 자신이 정기적인 매춘 관계였다고 밝히면서 완전히 잊혀졌다. 


송태원은 프랑스인이었으나 프랑스 당국은 미국에 범죄인 인도조차 요청하지 않았다. 인터폴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파트너였던 마이야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지? 송태원은 가끔 그런 것이 궁금했으나 곧 궁금증마저 자기 안에서 죽여버렸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으나 그만큼 반드시 처벌받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키아라 그레이를 법이 처벌해주지 않으니 자신이 처벌했다. 그것은 스스로 한평생 쥐고 흔들리지 않았던 신념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중죄는 없었다. 그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힘을 가진 자는 책임을 가져야만 했다. 센티넬 능력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법을 수호하는 공직자로써의 책임감 또한 거기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앞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송태원 같은 센티넬은 정식 기소절차를 밟지도 않는 것이 관례였다. 강력한 센티넬일수록 그랬다. 미연방국은 그와 같은 센티넬을 네바다주의 사막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에 수감했는데 송태원의 수감 결정은 체포 열흘만에 결정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직업도 국적도 말소된 채 네바다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그는 이 모든 절차가 진행되는동안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열차에 오르면서도 센티넬 억제제만 투여받고 마취제는 맞지 않았다. 열차는 한 칸에 열 여섯명의 수감자를 이동할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양쪽으로 각각 여덟개의 의자가 있었는데 각각 특수재질의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난동을 피우는 센티넬이나 가이드의 경우 지속적으로 마취를 넣을 수 있는 주사와 연결되어 있었다. 송태원은 꼬리칸인 12번 칸에 앉아 있었는데, 그가 있는 칸에 사람이 아주 꽉차있는 건 아니고 네 명 정도가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가운데 복도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종종 철창 안을 들여다보며 별 일이 없는지 감시하고 갔다. 

열차 안은 아주 시끄러웠다. 보통 객석이 있고 방음설비를 마련하는 열차와는 조금 달랐다. 수감자 이동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설비는 최소한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때문에 달릴 때 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이 커서 멀미를 하는 수감자들도 있었다. 그 소리 때문에 그는 밖에서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은 사막을 지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비는 어딘가 좀 이상했다.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작은 창문 틈으로 빛이 번쩍 터지는 것을 보고 보초를 서던 군인 중 한명이 바깥을 내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동네에 원래 비가 오던가? 그리고 그때 12번 칸과 11번 칸을 연결하는 커플러가 박살났다. 

쾅! 

무언가 터지는 소리였다. 12번 칸이 심하게 흔들렸고, 군인은 11번 칸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으로 앞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무전기를 꺼냈다. 

“머리팀! 꼬리팀이 분리됐다! 다시한번 말한다, 12번 열차가 분리됐다!”

[우리도 알아! 젠장, 천장에 뭐가 있어!]

그때 무전기 너머에서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군인이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는데 그때 천천히 속력이 느려지는 12번칸의 천장에서도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12번의 군인들이 모두 총을 들었다. 천장의 스테인리스 스틸에서 금속이 끼기긱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달라붙은 센티넬이 금속을 맨손으로 찢고 있었다. 발포가 시작됐다. 그 틈으로 총을 쏘아대는 동안 12번칸의 문이 열렸다. 군인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짧은 거리를 공간이동 할 수 있는 센티넬이 정신계 센티넬과 손을 잡고 군인들의 틈으로 갑자기 나타났다. 이제 정신계 센티넬의 반경 안에 들어온 모든 군인들이 갑자기 총을 놓고 쓰러졌다. 찢어진 천장에서는 금속을 찢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센티넬이 뚝 떨어졌다. 그는 나머지 군인들을 잡아서 천천히 속력이 줄어드는 12번 칸 밖으로 던져버렸다.

기가막힐 정도로 훈련된 이 센티넬들은 마치 이런 일을 오래 해 봤다는 듯이 태연하게 상황을 제압하더니 마치 그 다음을 기다리듯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송태원도 위를 올려다 보았다. 센티넬이 코끼리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찢어놓은 천장으로 시꺼먼 하늘이 보였다. 천둥이 울었다. 그리고 먹구름의 표면으로 전류가 거미줄을 퍼뜨리듯 번뜩거렸다. 그리고 유성이 떨어졌다. 아니, 유성인 줄로만 알았다. 송태원은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거기 온 몸에 전기를 두르고 하나의 빛 덩어리 처럼 보이는 성현제가 한유진을 안고 서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멀끔한 정장에 구김 하나 없는 코트를 어깨에 걸친 모습은 그가 하늘을 날아온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성현제를 신으로 표현하겠지만 송태원의 눈에 그는 그만큼 끔찍한 괴물처럼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괴물이 두 팔로 안전하게 붇들고 있던 게 바로 한유진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들이 사랑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게 했다. 

성현제가 기차 안으로 떨어지면서 그의 발이 밟은 금속 바닥은 찌그러져 있었다. 한유진은 그의 목을 한 손으로 안은 채 빛에 감겨서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저 고압전류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이제 송태원을 보고 웃었다. 무표정한 성현제가 한유진을 안전하게 내려주었고, 그가 성현제에게서 한걸음 한걸음 떨어질 수록 온 몸에 달라붙어 발광하는 빛도 옅어졌다. 그러나 철창으로 가까이 다가온 한유진의 두 눈은 옅은 빛으로 번뜩거렸다. 송태원은 성현제를 힐끔 보았다. 성현제는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마치 극도의 불쾌함과 질투 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와서 목을 부러트릴 수도 있으나 한유진 때문에 참는 것이다. 대신 한유진을 완전히 놓을 수 없었기에 그의 영향력이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져서도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한유진은 그것을 알까? 그러나 그는 아무 상관 없어 보였다. 그는 다만 송태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와 같이 가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우리’.

송태원은 그 단어에 주목했다. 세성은 성현제가 만들고 성현제가 키웠으며 성현제를 중심으로 그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조직이었다. 성현제는 절대권력의 중심에 있던 술탄이자 카이사르였다. 그런데 한유진이 하는 말은 마치 그와 성현제가 함께, 아니, 한유진이 그 권력 안에서 자유롭다는 의미 같았다. 그는 권력을 가질수도, 버릴수도, 함께 사용할수도, 혹은 거기에 더하여 성현제가 이 모든 권력을 포기하게끔 만들 수도 있는 사람 처럼 보였다. 송태원은 이제 성현제보다 한유진이 더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제 이 모든 일과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송태원은 유진이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전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송태원은 그렇게 말하면서 인상을 찡그린 채 어설프게 웃었다. 

“당신은 이 일로 범죄자가 될 겁니다. 이건 엄연한 범죄니까요. 그게 제 마음을 조금 불편하게 하는군요. 스스로 자수를 하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는 한유진이 이 말을 들으면서 눈을 둥그렇게 뜨는 것을 보았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처음 만났던 날부터 한유진은 누구보다 선량한 사람이었다. 옳은 일을 위하여 어려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그래서 송태원은 한유진에게 만큼은 조금 부드럽게 말하고 싶었다. 

“저는 제가 한 일의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건 그만한 가치가 없어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길을 택합니다. 저는 한평생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일했고, 그 일을 이제와서 그만 둘 생각은 없습니다.”

한유진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마음이 복잡해서 입을 다문 것 처럼 보였다. 송태원은 그에게 웃어주기 위해 애썼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헛수고를 한 게 맞아요.”

한유진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죄책감이 있었다. 그 날,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달려와서 도와달라고 외치던,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차에 태우던 모습, 총에 맞아 쓰러지던 모습, 백미러로 그가 기어가던 그 모습들이 송태원의 마음을 자꾸만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에게는 되갚지 못할 빚이 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아라 그레이를 죽인 건 한유진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인터폴에서 일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흉터를 남기는 잔혹한 범죄를 수없이 마주했다. 그 모든 범죄들을 보면서 밤잠 이루지 못하던 나날들이 있었고, 가끔은 혼자 틀어박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엉엉 울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아라 그레이의 범죄는 그를 행동하게끔 했다. 그레이의 범죄는 그에게 너무 가까웠다. 오직 센티넬과 가이드를 향한 증오에서 비롯된 범죄였기 때문에 센티넬으로서의 송태원을 흔들어놓았다. 그건 개인적인 복수였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서 송태원은 이제 성현제를 보고 말했다.

“가세요.”

성현제는 그때 알겠다는 듯이 송태원을 힐끔 보고 유진의 어깨를 잡았다. 마침 멀리서 군용헬기가 접근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정말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성현제는 한유진을 잡아당겼다. 유진은 미련이 남는 듯이 송태원을 바라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다시 성현제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성현제가 유진의 허리를 잡고 떠나려던 순간, 문득 송태원이 말했다.

“미국 정부는 한유현 때문에 당신을 잡으려 하는 겁니다.”

한유진은 그 이름을 듣는 것 만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천천히 송태원을 돌아보았다. 

“유현이 이름으로 나한테 장난치지 마세요.”

송태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유현은 헬라스 프로젝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게 답니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가라앉아 있었던 그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것 처럼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자 송태원은 차분하게 말했다.

“가십시오.”

“유진아.”

성현제도 한유진을 끌어당겼다. 유진은 자꾸만 미련이 남는 듯이 송태원을 돌아보았다. 머뭇거리는 한유진을 품 안에 꽉 안아든 성현제가 송태원을 다시한번 힐끔 보았다. 그리고 마치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시 빛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은 떠나기 직전 송태원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굉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세성의 센티넬들도 구조할 수 있는 센티넬을 가능한 한 데리고 도주했다. 송태원은 철창 안에 앉아서 뻥 뚫린 천장 위로 멀리 날아오는 군용 헬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까지 한유진이 머뭇거리는 표정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송태원은 그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누구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처입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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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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