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허구적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입니다.

*서양 동양, 뭐할 것 없이 제가 아는 모든 지식을 때려 넣은 이야기입니다.

*억지스러운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애수(哀愁) 가슴에 스며드는 슬픈 근심












눈을 감으니 코를 찔찔 흘리는 정국의 어린 시절이 선연했다. 지민은 부드럽게 정국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염국의 사신들이 돌아가자마자 정국은 저를 안아 들고 침상으로 향했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동인도 당황하고, 다른 시종들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건만, 왜인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지민은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화가 나고 질투가 이는 마음을 가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지만, 정국은 그래도 제가 밉지 않은지 부드럽게 품어주었다. 그의 달콤한 손길 아래서 쾌락에 취해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목이 꺼끌거려 탁자 위에 있던 차를 집어 들었다. 벌컥벌컥 삼키니 갈증이 해소되고 있었다. 조금 쓴 끝 맛에 지민이 결국 옆에 있던 주전부리를 맛봤다. 정국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민이 모를 리 없었다. 김태형이라……. 할 수 있는 기억의 끝 뿌리는 모두 꺼내 봤지만, 흔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마 땅속에 파묻혀 버린 오래된 유물쯤 되려나…. 어차피 상관없을 것이다. 지민은 다시 정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주칠 일 또한 이제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형, 이번에 같이 갈 생각 없어?”

“전씨 혈통만 가는 곳을 내가 어떻게 가.”

“형은 이제 내 정인이잖아.”
“아니 암만 그래도”

 

 

 

편견은 없을지언정, 통용되는 보편적 개념이 있는 법이다. 수국은 동성애에 관대하지만, 보편적인 사랑은 이성애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차별은 던지지 않지만, 동정의 시선이나 호기심의 시선은 던진다. 그게 바로 차별인데. 하물며 국왕인 정국은 뭐가 다를까. 오히려 백성들의 민심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근데 정국아 이제 슬슬 후궁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뭐?”

“네 후사가 필요하잖아….”

“난 누구랑도 혼인할 생각 없어.”

 

 

형이 아니라면. 단호한 정국의 말에 지민이 입을 열 듯하다가 도로 닫았다. 설득의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적인 일은 결코 이성적인 판단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지민이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하지만 수국의 미래는 누가 책임지고?

 

 

“난 혼인할 생각이 없다 하지 않았소!”

“하오나 전하! 수국의 후사는 누가 책임지옵니까!”

 

 

지민이 아침에 꺼낸 말이 무섭게, 후궁간택에 대한 이야기를 관료들이 하나둘씩 꺼내고 있었다. 여태껏 이 말을 하고 싶어 얼마나 참은 건지 누군가가 물꼬를 틀자마자 폭포가 쏟아져 내리듯 간청을 마구 뱉어냈다. 정국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들도 지민의 존재를 아니 차마 왕후의 자리를 요청하지 않고 후궁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실 정국은 수국의 총 7명의 왕 중 유일하게 세자빈 없이 왕위에 오른 사람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답지 않게 분개한 정국은, 어좌에서 큰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정국이 이리 흥분할 줄 알았던 대신들은 일부러 국사의 진행이 끝나갈 때쯤 입을 튼 것이었다. 예상 안의 일에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정국에게 끝까지 예의를 지켰다. 정국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자신에게 눈길이 쏠릴 걸 예상한 지민이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대신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싶지 않았다. 정국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며 중원관을 힐끗 바라봤다. 정국의 옆엔 오직 지민이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정국이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잽싸게 빠져나온 지민이 정국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큰 보폭이 성큼성큼 걸어가니 빠르게 뛰어야 했다. 정국이 향한 곳은, 서천관이었다. 대낮이어도 서천관은 항상 조용하다. 더군다나 지금 유생들은 학문에 열중할 시간이니, 서천관에 드나들 사람은 고작 해 봐야 지민과 정국, 더 샌다면 율뿐이라는 것이다. 문이 닫히자마자 정국은 지민에게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오랜만에 작렬하는 강렬한 움직임에 지민의 호흡이 가빠왔다. 정국의 혀가 지민의 입안에서 세차게 왕복운동을 했다. 마치 정사의 움직임을 재현하기라도 하는 듯 야설스런 움직임에 지민의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쪽 팔로 지민의 허리를 굳세게 감은 정국은 지민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와중에도 정국의 입은 지민의 모든 것을 제 안에 담으려는 의지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숨이 부족해 지민이 정국의 어깨를 치고 나서야 정국은 입을 뗐다. 타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에 가볍게 한 번 더 도장을 찍은 정국은 지민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럴 생각 없어.”

“……….”

“박지민 하나로도 벅찬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한단 거야.”

“……….”

“싫어.”

 

 

지민이 고개를 나지막이 끄덕였다. 사실 좋았다. 빈말이더라도 이렇게 말해주는 그가 너무도 좋았다. 현실의 벽에 그대로 순응하지 않고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정국의 태도가 좋았다. 설령, 정국의 옆에 공식적인 부인이 생긴다 하더라도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지민은 정국의 말이 좋았다. 정국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축축한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주상전하가 잠에 곯아떨어진 한 사내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고 강명전으로 향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궁의 모든 사람은 직감했다. ‘가련한 후궁이여, 그대의 운명이 걱정 되노라.’

 

정국은 제 침상에 지민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형.”
“………….”

“늦었지만 이번엔 아버지께 기필코 말씀 드릴 거야.”

 

어쩌면 죄악일지도 몰라 한 번도 입에 담지 못했던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께 꼭 말씀드릴 거야. 정국이 지민의 손을 맞잡았다.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흰 손이었다.

 

수국은 옛날에 존재했던 화국이나 목국, 심지어 염국도 삼년상을 치르는 것에 반해 10년에 걸쳐 매번 부모의 묘에 찾아가는 독특한 관례가 존재했다. 3일 뒤면 정국은 한연으로 떠나야 했다. 지민은 분명 약하지 않지만,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국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지민의 옆에 몸을 숙였다.

 

 

 

 

 

 

 

 

 

*

 

 

 

 

 

 

 

“그대가 나 없는 동안 궁을 잘 보살펴 주게.”

“존명 받들겠습니다.”

 

 

정국이 율에게 도장 하나를 내밀었다. 옥새를 본떠 만든 것으로 정식은 아니었지만, 국가적인 긴급상황이 아니고서는 어지간한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율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받아들었다. 이런 중대한 위임을 말도 없이 갑자기 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율의 모습에 정국이 웃음을 흘겼다. 최대한 간소화한 복장으로 짙은 남색 띠를 두른 정국은 평소와 다른 차분한 느낌을 발산하고 있었다.

 

 

“가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일찍이부터 자리를 비우는 궁의 주인은 뒷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

 

 

 

 

현실감이 없었다. 너무도 충격적인 일은 뇌가 거부한다고 했나. 지민은 불에 타오르는 궁을 멀거니 바라봤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였다.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는 이들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율이 소리를 지르며 제 팔을 잡아당겼다. 도망가자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했다. 온갖 비명과 욕설과 율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한데 뒤엉켜 괴이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이 와중에 선명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화를 당하게 될 거라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지민이 굳은 몸을 돌렸다. 태형의 오만하고 이 모든 상황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저 눈빛이 무서웠다. 마치 이 일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홀로 형형히 빛나는 이 파렴치한 사람에 압도됐다. 뚜렷하기 그지없는 이목구비가 자꾸만 늘어나는 착각이 일었다.

 

하늘 아래 태양은 둘일 수 없는 법인데. 어찌 또 다른 태양이 내 눈앞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혹, 알고 있었나?”

“……….”

“이 불길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야.”

“……….”

“살려주십시오.”

“내가 진정 그대를 죽일 거라, 생각하는 건가?”

“……….”

“나는 그대를 찾아온 거야.”

 

지민이 땅에 처박힌 고개를 들었다. 수려하고 선이 굵은 외모가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다정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별안간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눈에는, 얼핏 외로움이 서려 있던 것도 같은데……. 지민은 이윽고 제 후두부를 거세게 내리치는 쇠몽둥이에 의식을 잃었다.

 

 

“아프지 않게 보살펴라.”

“알겠습니다!”

“귀한 분이시다.”

 

 

태형이 뒤를 돌았다. 그는 밤을 낮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수원궁을 잡아먹는 불길은 너무도 밝아 흡사 대낮을 방불케 했다. 염국의 기마병들은 거대한 말을 앞에 두고 보잘것없는 나약한 백성들을 말발굽으로 마음껏 밟았다. 그들의 고통은 우리들의 쾌락이요, 그들의 죽음은 우리들의 성과였다. 

어린 남자아이를 제외하고 모두 목을 베었다. 심지어 목이 한 번에 베이지 않아 덜렁거리는 상태로 자신의 아내와 가족들을 마지막까지 바라봤다. 옆에 떨어진 팔이 자신의 팔인 줄 모르고 주워들었다가 피를 철철 흘리며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아낙네 중 마음에 드는 자가 있으면 낚아채어 말에 엎어놓고 다시 달렸다.


태형은 피비린내를 맡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비겁하고 얍삽한 수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지만, 역사에 남는 건 결국 두 줄짜리에 불과한 결과다. 태형이 천천히 말을 움직였다. 새하얀 백마는 아무리 봐도 전쟁과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었다. 시리도록 차분한 그는 꼭 전쟁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야만을 즐기는 그의 병사들은 백성의 귀와 코를 베어냈고, 여자들은 모두 밧줄로 묶어 염국에 데려갈 준비를 했다. 한이 서린 통곡 소리가 연서를 뒤덮었다.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채찍질에 율이 욕을 읊었다. 피차 언어가 달라 서로의 욕설을 알아듣지 못하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기다란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수국의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은 딱딱한 돌덩이로 이뤄진 사막을 견뎌내지 못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매서운 햇빛에 목이 타들어 갔다.

 

 

“혹, 궁에서 일하는 나으리 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얼굴에 상흔이 가득했다. 지난 참상의 결과가 또렷이 드러났다. 율이 입술을 짓이겼다. 해박한 지식은, 잔인한 무력 앞에서 무의미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 손목을 죄는 이 밧줄을 풀 수도 없는데 무엇을 어찌할 수 있을까. 지민의 뒤통수를 내려치고 귀한 말에 고이 모셔간 태형은, 율을 한번 훑더니 미련 없다는 듯 돌아섰다.

 

똑똑한 문인은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려오는 자존심에 율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상한 기분을 어떻게라도 풀고 싶었다. 옆에 있던 이가 눈치를 주며 커다란 몽둥이를 들어 보였다. 율은 지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했다는 듯 쿡쿡 찌르는 손길이 역겨워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저 먼 거리를 또다시 걸어야 했다.

 

지민은 멀쩡할 것이다. 애초에 염국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이유가 지민이었으니까. 율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수국에서조차 제대로 알 수 없고, 기록조차 없는 달의 아이를 왜 굳이 염국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까지 감행하며 얻으려 했냐는 것이었다. 율이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호령왕, 그대의 목을 베는 것은 반드시 내가 될 것이오. 악바리로 가득 찬 다짐에 그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허허…….”

 

 

율은 헛소리를 내뱉었다. 염국은 비밀로 쌓인 나라다. 어떤 국가도 염국과 제대로 된 교류를 한 적이 없으며, 수국과 경계선을 지고 있는 곳은 바로 본인이 걸어온, 거대한 바위밖에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애초에 폐쇄적인 지형이었으니 그곳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니 지금 보이는 이 거대한 자연에 율은 입을 벌리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인 물줄기는 점점 거대해져 거대한 강을 이루고 있었다. 강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산은, 나무로 이뤄져 있다기보단 웅장한 바위가 깎아져 내린 형태였다. 자연이 이루는 경관에 율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을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화려한 장신구들을 착용했다. 대부분 집은 가림막이 없어서 내부가 훤하게 보였다. 후텁지근하고 건조한 공기에 숨이 조금 막혔다. 땀이 흐르는 날씨는 아니었지만, 햇볕이 뜨거웠다. 사람들은 대부분 맨발로 다녔다. 키가 크고 잎이 커다란 나무들이 길거리 곳곳에 즐비해 있었다.

 

호화스럽구나. 염국의 궁은 나무로 지었다기보단 거대한 바위를 깎아내려 조각을 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찌됐던 금과 은을 세공하는 능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한참을 걸으니, 드디어 제대로 된 문이 있는 공간이 나왔다. 문이 존재하는 특별한 곳이라면, 필시 왕이 있는 곳이겠지.

 

문이 열렸다. 넓은 융단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태형은 황금으로 도배된 어좌에 앉아 옆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시녀의 부채 바람을 실컷 즐기고 있었다. 율이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어린아이들이 불쌍해서, 알면서도 태평하게 앉아있는 태형에 대한 원한이 치밀어 오르기 때문이었다.

 

 

“*하람께 인사를 드리거라-!!!!!”

 

 

관리의 호통에 남녀노소할 것 없이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 율은 절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만약, 저 인간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그게 더 한이 돼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 같았다. 뭐가 됐건 죽는다면, 자존심은 챙기고 죽는 것이 더 때깔 곱게 죽는 방법일 것 같았다.

 

목 앞에 칼이 겨누어졌다.

 

 

“반역인가?”

“내버려 두거라.”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묵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가 걸어오는 소리는 저승으로 가는 발걸음과 다를 것 없이 들렸다. 율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국의, 높은 직책을 맡던 이로 알고 있는데.”

“……….”

“수국에서 끌려온 백성들의 운명이 그대에게 달려 있노라.”
“……….”

“자, 선택지는 두 개가 있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무덤을 짓고 있어. 진흙을 빚어 벽돌을 만들고, 그 위에 겹겹이 쌓아 선왕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

“자네가 모든 걸 포기한다면 백성들은 오늘부터 고된 노역에 시달리겠지.”

“무슨 그런………!”

“그대의 백성들에게 조금의 휴식과 안락함을 주고 싶다면, 그리고 그게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라면”

“……….”
“범람하는 강을 바탕으로 달력을 만들게.”

“그게 무슨.”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율은 고개를 떨구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살려달라는 아우성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법으로도 어긋나며 본인의 신념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김태형은, 호령왕은 정말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자신을 옥죄는 방법을 무섭도록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난 그대의 머리가 비상한지 몰라.”

“……….”

“그대에게 기회를 준 건, 내가 아니네.”

“……….”

“이렇건 저렇건, 염국에게 큰 수혜가 될 것이지만.”

 

물러가도록 해라. 태형의 말에 병사들이 거칠게 백성들을 끌어냈다. 율은 다른 시종의 안내를 받아 커다란 방으로 이동했다. 의복을 받은 뒤 씻고 오라는 명에 오랜만에 깨끗한 물에 몸을 담갔다. 말의 어순도 다르고 억양도 강했다. 언어를 알아듣기가 힘들어 여태껏 눈치로 행동했다. 호령왕이 어찌 저렇게 능숙하게 수국의 언어를 사용하나 싶었지만, 머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율이 눈을 감았다.

 

 

 

 

 

 

 

 

 

*

 

 

 

 



 

 

 

 

“수국의 백성들이 도착한 겁니까?”

“그대는 책을 내려놓은 적이 없군.”

“왔냐고 물었습니다.”

“그래 왔어, 율이라는 자도 왔더군.”
“………백성들을 어찌하실 겁니까?”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노역을 시키되 최소한의 휴식과 음식은 제공해 달라고.”

“……….”

“난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아. 뱉은 말은 지켜. 걱정할 필요 없어.”
“왜 제게 잘해주십니까?”

“응?”

“제가 아무리 달의 힘을 갖고 있을지언정, 제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는 일이고…….”

“그대는 생각이 너무 많아.”

 

 

태형이 벽에 몸을 기댔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앙칼진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잔뜩 겁에 먹어 몸을 웅크리는 이 야묘(夜貓) 때문이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

“내 감정도 거짓부렁이로 치부될지 모르지.”

“……운명 같은 거 없습니다.”

“맞아, 그대에겐 운명 같은 거 없어.”

 


그대는 운명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니까. 태형은 항상 진지한 얘기를 장난스럽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지민은 그 점이 정말 꼴 보기 싫었다. 매일 밤 꿈에서 분노에 휩쓸려 화를 이기지 못해 몸에 상흔을 내는 정국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백성들의 오열 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꿈에서 현실을 보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일까.

 

 

“그대는 너무 의심이 많아.”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대가 얼마나 위대한 존잰지를 몰라.”

“이렇게 가둬놓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겁니까?”

“내일부턴 자유롭게 궁을 돌아다녀도 돼.”
“………갑자기…”

“율이라는 이와 함께 일을 시작하게.”

“………….”

“그 자가 알아서 설명해 줄 걸세. 그대가 말했지 않나? 현명한 자이니 예의에 어긋나도 좀 참아 달라고.”

 

 

그래서 준 걸세. 태형의 말에 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대신 그대의 밤은 오롯이 내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겠나.”

“왜 굳이 밤입니까.”
“그대는 낮보다는 저녁이 아름다우니까.”
“화려한 미사여구는 필요 없습니다. 제 능력이 밤에 발현되기 더 쉽나 봅니다.”
“눈치도 빠르지.”


 

태형의 팔이 지민의 허리로 향했다. 얇은 허리는 한 팔에 감기고도 남았다. 사실, 이렇게 쉽게 잡힐 줄 몰라 태형도 속으로는 조금 동한 상태였다. 지민이 놀라 벗어나려 뒤로 발을 뺐지만, 태형이 잡아당긴 것이 먼저였다. 어깨를 내리치는 손길에 태형이 나머지 팔로 지민의 등을 감싸 안았다. 숨소리가 가까이 들릴 정도로 좁혀진 거리에 지민이 움찔 몸을 떨었다.

 

 

“매일 밤 그대에게.”

“……….”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해줄 거야.”

“………필요 없습니다.”

“아니 듣게 될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가 부담스러웠다. 그가 웃음을 살짝 흘겼다. 귓불이 새빨갛게 변한 지민의 솔직한 감정변화가 우스웠다. 태형이 허리를 두르고 있던 힘을 풀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지민이 괜히 옷자락을 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말 치사하게 수려하고 화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본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슴이 떨릴 것이다.

 

짜증 나는 마음에 지민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피곤한 몸이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하람 : 염국에서 왕을 칭하는 말. -호령왕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염국에선 특성상 왕을 하람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역사에 서술될 때만 정확한 왕의 명칭을 사용합니다. 사실 역사에 보면 당대의 왕이 죽고 나서 후손들이 붙이는 게 왕의 이름이지만, 그냥 벌써부터 정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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