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아일렌은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뭐야. 아일렌은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한 후에야 그녀는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아일렌은 침대에 누운 채 손으로 목을 더듬거렸다. 목을 스쳐 지나간 칼날의 감각이 분명 생생한데, 제 목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어째서? 어떻게 살아난 거지? 분명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아있었다.

 

잘린 목을 붙이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불가능했다. 치유 마법이나 신성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이미 끊어진 숨을 다시 잇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어떻게 살아있는가. 아일렌은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아팠다. 아픔이 느껴지니 현실이었다. 자신이 천국에 왔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옥에 가면 갔지, 천국에는 절대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여긴 지옥인가. 지옥이라기에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지옥이라면 좀 더 빨갛고, 용암이 부글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했는데. 이곳은 꼭. 정식 기사가 되기 전에 살던 기사단 숙소처럼 생겼다. 잠깐, 기사단 숙소? 아일렌은 급하게 몸을 일으키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성대하게 박은 이마가 욱신거렸다.

 

“아, 씨….”

 

아일렌은 1년 전에 기사단 숙소에서 나왔다. 1황자의 밑에서 일하면서 돈을 충분히 모았기에, 작은 집을 하나 사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기사단 숙소에 있었다. 왜? 그녀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지 않았다. 만약 누가 자신을 살려냈더라도 굳이 기사단 숙소에 데려다 두진 않을 것이다. 그럼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아일렌은 바닥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옆으로 내려오는 긴 분홍색 머리카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때,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목도 머리카락도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뭐야, 대체…. 뭐냐고.”

 

“아일렌.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녀가 혼란에 빠져 넋을 놓고 중얼거리는 사이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걱정스러운 말을 뱉었다. 아일렌은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룸메이트였던 제이나였다. 짧은 청색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 제이나를 보자마자 아일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이나의 어깨를 붙들고 덜덜 떨었다. 이제 아일렌의 표정은 혼란을 넘어 두려움에 질려있었다.

 

“제이나? 어떻게, 네가. 넌.”

 

죽었잖아. 그녀는 뒷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일렌은 제이나와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제이나와 룸메이트이긴 했으나, 그녀는 자신을 갈고닦는 데만 바빠 친구 따위 거치적거리는 존재라고 여겼으니까. 제이나가 황녀의 암살을 막으려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일렌은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아무도 그녀와 룸메이트를 하고 싶지 않아 혼자서 지내다가, 돈을 모아 집을 산 뒤로는 혼자 살았다. 제이나가 죽은 것이 2년 전이었다. 그런데 제이나는 지금 제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었다.

 

“... 욱.”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아일렌은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목에서는 아직도 서늘한 감각이 잔재처럼 남아있었다. 황녀를 죽였던 기억도, 목이 잘리던 기억도 그토록 생생한데 어째서 자신은 살아있단 말인가. 제이나가 눈앞에 있으니 이곳이 지옥이 아니란 것은 명확했다. 천국도 아닐 것이다. 이건 분명히 현실이었다. 죽은 사람이 둘이나 살아나는 것이 가능한가?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아일렌은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아일렌, 정신 차려!”

 

제이나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아일렌을 보고 놀라 그녀를 불렀다. 언제나 무덤덤하거나 표정을 찌푸리기만 하던 그녀가 이토록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진짜 어디 아픈 건가 싶어 한 대 맞을 것을 각오하고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지만 열은 없었다. 아일렌은 자신의 이마를 짚는 손을 붙들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에 아일렌은 한참을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는 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일렌은 잘못된 인생을 더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열은 없는데…. 곧 정식 기사가 돼서 긴장한 거야?”

 

“... 뭐?”

 

곧, 정식 기사가 된다고? 그 말에 아일렌이 고개를 들어 제이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곧 정식 기사가 된다니. 그녀가 정식 기사가 된 것은 5년 전, 21살 때였다. 설마. 믿을 수 없는 가능성을 마주한 아일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제이나에게 오늘의 날짜를 물었다. 제이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날짜를 답했다. 얘가 정말 왜 이러지.

 

“오늘…. 8월 8일이잖아.”

 

“연도는? 893년이야?”

 

“응, 893년.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괜찮...아. 아마도.”

 

893년. 연도를 듣고 난 뒤에야 아일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5년 전, 정식 기사가 되기 일주일 전으로. 21살의 그녀는 1황자의 개도, 황녀 엘케니스를 살해한 범인도 아니었다. 그냥 수습기사 아일렌이었다. 아일렌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되돌리고 싶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와 버렸다.

 

정식 기사가 되기 일주일 전이라면 아직 자신은 소속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1황자 에스티오가 아닌 1황녀 엘케니스를 선택한다면, 아일렌은 미래를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어진 기회에 아일렌은 기쁨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녀가 새로이 가려는 길은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왔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큰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달리 먹었다고는 하나, 사람이 바뀌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일렌은 바꾸고 싶었다. 자기합리화를 하며 만족하는 삶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만족하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후회하더라도. 떳떳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성조차 없는 이 이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저기, 아일렌? 너 울어?”

 

우냐는 제이나의 물음에 아일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주어진 새 삶. 아일렌은 이번에야말로 기사로써 살아가 보기로 했다. 명예를 드높이고,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의 삶. 가난하고 만족하지 못할지언정 빛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것뿐인데 울 이유가 뭐가 있을까. 아일렌은 고개를 저으며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기에 바빴다.

 

“음….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흐느끼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우는 아일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제이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아일렌은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받아들여 눈물을 닦았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눈물을 그치고 진정할 수 있었다. 아일렌은 눈물로 젖어버린 손수건을 손에 꾹 쥐었다. 제이나가 건넨 친절에 그녀의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돌이켜보면 제이나는 항상 그녀에게 친절했다. 남들이 그녀를 비난해도, 그 비난에 휩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이나의 친절을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매번 거절했었다. 그리고 제이나가 죽고 나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었구나, 아일렌. 한 번 죽음을 겪고 나서야 아일렌은 잘못된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미 늦을 만큼 늦었다. 하지만 아일렌은 더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었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젖은 손수건은 품에 넣으며 얘기했다.

 

“... 고마워.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줄게.”

 

“어? 응, 그래.”

 

제이나는 잠시 당황했다. 아일렌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친절을 건네도 대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무시할 뿐이었으니까. 어쩐지 머쓱한 기분에 제이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일렌은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분명 현실이었다. 아일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심했다면 움직여야 한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아일렌은 일단 살다 보면 새로운 삶도 익숙해지리라 믿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어딜 가려고?”

 

“1황녀 전하께. 소속을 정했거든. 외출 신청도 할 거니까 아마 저녁에 돌아올 거야.”

 

“훈련을 빼먹고 간다고? 네가?”

 

“그래. 하루쯤은 괜찮잖아.”

 

아일렌은 소리 없이 놀라는 제이나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이나가 놀라는 이유는 알만했다. 그녀는 수습기사 시절에 단 하루도 훈련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수습기사들은 황궁에서 지내며 정해진 시간표대로 생활한다. 신청만 한다면 하루 이틀쯤 외출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으나, 아일렌은 그런 식으로 훈련을 빼먹는 이들을 근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매일 훈련을 해도 부족하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왕 바뀌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작은 것부터 바꿔봐야 하지 않겠나. 아일렌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살아보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

 

“어어…. 잘 다녀와.”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제이나는 조금 어색한 투로 아일렌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제이나가 아는 아일렌은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고맙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꼭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싹수없는 것보다는 낫나. 무엇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인지는 몰라도 바뀐 것이 나쁜 것 같진 않았기에 제이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넘겼다.

 

아일렌은 방에서 나와 황궁을 걸었다. 황궁의 풍경은 그녀가 기억하던 5년 전과 똑같았다. 조금 더 어리고 생기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라든가, 조금씩 다른 물건의 배치라든가. 정말 과거로 왔구나. 아일렌은 황녀 궁으로 향하는 내내 반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미처 묶지 않아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머리를 잘라볼까 생각했다. 아일렌은 분홍색 머리카락을 나름 자랑거리로 여겼다. 그래서 자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긴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단두대에서 처참하게 잘려나간 제 목과 머리카락이 생각났다. 머리카락을 자르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현재가 꿈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일렌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그녀는 황녀 궁에 도착해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황녀 궁은 소름이 끼칠 만치 고요했다. 공기에는 피비린내가 감돌았으며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일렌은 황녀 궁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1황녀 엘케니스는 아직 죽지 않았다. 봄을 맞이한 황녀 궁의 공기에는 피비린내가 아닌 희미한 꽃향기가 섞여 있었고,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심호흡을 한번 한 아일렌은 황녀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습기사 아일렌이, 스카우트에 대한 답을 드리기 위해 황녀 전하를 찾아왔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일로 황녀 궁을 찾았냐고 묻는 경비의 말에 그렇게 답하며 아일렌은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이제는 검을 빼 들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황녀를 죽이지 않을 테니까. 아일렌은 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 경비에게 순순히 검을 맡겼다. 맨손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황녀의 적이 아니었다. 상황을 인식했다고는 하나 쉽게 와닿지 않는 현실에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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