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


위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루의 시작을 자동으로 내린 커피 메이커에서 내린 커피로 시작했다. 고소한 원두향이 주방에 은은히 퍼졌다. 정신을 추스르며 위주가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였다. 이 시간이면, 위위는 진작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는 듯 위위의 방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위?”


방학 때도 늦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던 터라 위주는 위위의 방을 빤히 응시했다. 마시던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곤 발소리를 죽인 채 서서히 위위의 방으로 다가갔다.


“위위야? 일어나야지.”


위주가 다시 위위를 불렀다. 문을 두드려도 응답은 없었다. 문은 쉽게 열렸다. 정적이 가득한 공기를 가르며 위주가 방으로 들어섰다.


위주가 제일 먼저 들여다본 곳은 침대였다. 전날 밤 수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놓인 작은 편지였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인식하기도 전에 위주가 입가를 가린 채 다급히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편지를 가져왔다.


고이 뜯을 생각도 없었다. 급한 마음이 위주를 계속 채찍질했다. 읽을 사람을 위해 정성스레 붙였을 봉투가 힘없이 찢겼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접힌 편지를 폈다. 글자 하나하나가 위주의 시야로 들어오자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었다. 그 문장들이 속속 위주의 눈으로 다가갔다. 기어코 손에 쥔 편지가 힘없이 빠져나갔다.


잠시 상해에 다녀오겠습니다.

아침 비행기로 떠났어요.

말없이 떠나서 죄송합니다.

곧 연락하겠습니다.

위위 드림.


“말도 안 돼. 상해를 갔다니…. 아버지랑 어머니에게 간 건가? 아니야. 그런 거라면 나한테 말없이 갈 리가 없는데….”


조부모가 보고 싶다고 해도 이리 말없이 갔을 리는 없었다. 이제 미성년자여도 혼자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는 수준이니 조금씩 해외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할 참이었지만 자식의 예상치 못한 행보에 위주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뒤 그는 가장 먼저 위위에게 연락을 취했다. 정상적으로 신호가 갔으나 끝내 위위가 받는 일은 없었다. 원래 기기에 중국 유심을 사다 끼웠으니 원래 번호로 전화해도 통화가 될 리 만무했다. 그걸 모르는 위주는 신호만 가는 전화를 애써 종료해야 했다.


다음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위위와 달리 그녀는 신호음이 세 번이 울리기도 이전에 빠르게 위주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외동아들을 반가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주주 아니니? 」

“엄마, 위위 거기로 안 갔어요?”


대뜸 위위의 거취를 묻는 위주의 질문에 그녀가 어리둥절했다.


「 위위를 왜 여기서 찾니? 집에 없어? 」

“상해에 간다고 쪽지만 남기고 사라졌어요.”


굳이 그녀에게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위주의 어머니는 꽤 놀란 눈치였지만, 곧 놀란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찌 보면 위주보다도 더 냉정해 보였다.


「 본가로 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기다려 보렴. 상해에 간다고 메모까지 남겼잖니. 」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상해에 갔다고 장담해요.”

「 너는 그게 문제야. 왜 이리 과보호야? 이제 위위도 17살이야. 그 나이면 다 큰 거지. 」

“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말을 쉽게 해요? 걘 아직 17살밖에 안 됐다고요. 아직 어린 나이인 걸요.”

「 어머, 그건 주주 네가 할 소리가 아니지. 네가 몇 살에 내게 손주를 안겨줬는지 생각해보렴. 」

“엄마!”

「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리는 다시는 못 할 거다. 너는 그리 살아도 되고 네 자식은 안 된다고 말할 셈이니? 그거 부모 욕심이야. 네가 그렇게 살았으면, 애도 자유로이 놀 수 있단 걸 왜 모르니. 」

“엄마, ”


위주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한없이 낮아진 목소리에 아주 조금은 제 자식을 놀리고 있던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눈에 띄게 기운이 없어진 목소리에 내심 그녀가 위주를 위로했지만 뒤늦은 일이었다. 잠시 과거에 머문 위주의 콧등이 시큰해졌다. 훌쩍거림을 휴대폰 너머로 들은 그녀가 조심스레 사과와 함께 위로를 건넸다.


「 미안하다. 아들. 엄만 널 상처 주려 한 건 아니었어. 」

“…괜찮아요. 저도 잠시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아요. 엄마,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지금은 끊을게요. 위위가 어디 갔는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 아들, 끊지 말고 엄마랑 좀만 더 이야기- 」


위주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를 종료했다. 그녀는 다 말하기도 이전에 뚝 끊긴 전화를 허망하게 바라봤다. 그러다 남편 허장주는 침울해진 그녀의 안색을 발견하고는 괜히 어깨를 두드리며 슬쩍 물었다.


“여보,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글쎄, 우리 손주가 주주에게 말없이 상해로 온 모양인가 봐요. 아침에 애가 없어졌다고 지금 저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평소에도 위위 보고 싶으면 우리더러 한국으로 오라고 하는 놈이 왜 우리한테서 손주를 찾아요? 하여간 아들 하나라고 있는 게 이기심은 시진핑 전(前) 주석, 저리 가라지. 아니. 잠깐만요. 여보. 상해라니? 그럼 우리 손주가 본가로 오고 있단 의미요?”


위주의 아버지가 눈동자를 빛냈다. 그 이채 속에 담긴 기대감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위주의 어머니는 사실대로 고했다. 확실치 않다는 말에 기대감에 부풀었던 눈동자가 조금씩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거야 모르죠.”

“상해면 연고가 우리밖에 없는데 누굴 만날 리가.”

“그건 모르죠.”


그녀는 그와 동감이 아니라는 듯 조금씩 하얀 머리카락이 많아지는 짧은 웨이브펌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상해에 위위가 있는 연고라고는 조부모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생각하고 싶지만, 그쪽이 더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운명적인 연인을 만나러 가는 거라면 별생각이 없을 텐데, 그마저도 그녀에겐 꽤 낮은 확률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큰 가능성은-


“정말 그런 거라면 주주가 엄청 당황하겠어.”


그녀는 무심코 생각하던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비인 허장주가 그것을 듣고는 호기심이 물어 계속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별것 아니라며 넘길 뿐이었다. 그저, 자신의 예상이 맞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


위주는 여전히 위위가 떠나간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가 가출한 게 아닌가 싶다가도 위주는 다시 메모지를 주워 읽었다. 충동적으로 나간 것은 아니리라. 분명 계기가, 자신이 모르는 계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위주는 위위가 남긴 메모지를 들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를 책상에서 끌어내며 자리에 앉고는 앞으로 쭉 당겼다. 책상 위에 있는 데스크톱에서 조그마한 단서라도 찾길 바라며 그가 전원을 켰다. 다행히 잠금은 되어 있지 않아 위주도 사용할 수 있었다.


바탕화면을 응시하던 위주의 눈에 '조사'라 쓰인 폴더가 눈을 사로잡았다. 왜 눈이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이 위주를 향해 속삭였다. 인터넷 검색 기록을 뒤지기 이전에 여길 한 번 봐봐. 위주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지금은 아이가 사라진 긴급 상황이었다. 지금 심정으로는 잠금 설정이 되어 있다 해도 모조리 풀어낼 기세였다. 손에 쥔 마우스가 기어코 폴더를 눌렀다. 잠기지 않은 폴더는 쉽게 위주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분주히 움직이던 마우스가 뚝 멈췄다.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위주가 입술을 달달 떨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도 평소보다 컸다.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애써 만지며 진정시켰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까지는 제어되지 않았다. 위주는 점점 숨을 쉬는 게 어려운 느낌에 고개를 뒤를 젖히곤 가슴을 편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몇 번을 반복하자 이전보다는 편해진 표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위주가 이마를 짚었다. 인터넷 검색 기록까지 뒤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가 툭 위주의 앞에 무심히 드러난 덕에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폴더 내에 들어 있는 자료를 하나씩 클릭하지 않아도 위주는 jpg 파일에 보이는 인물의 모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위위라고 믿어도 될 정도로 닮았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위의 나이대보다는 훨씬 성숙한 남성의 모습이었다. 위위가 어른이 되어 제대로 정장을 갖춘다면 딱 이런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위위는 아니었다. 위위는 이렇게 눈매가 옆으로 긴 편이 아니었다. 속쌍꺼풀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위위의 눈매는 위주를 닮은 편이었다.


위주는 잠시 사진에 도취했다. 눈동자가 계속 흔들리는 와중에도 사진 속의 사내를 훑는 눈길을 멈출 수 없었다. 아마 이리도 사진에서 눈길을 뗄 수 없는 이유는 사진 한 장도 제대로 간직하지 않은 채 지낸 세월 탓이 크리라 장담했다.


“징위야….”


본인이 인지하고 있었을 땐 이미 위주는 데스크톱 화면에 뜬 사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 행동에 놀랐는지 위주가 화면에서 손을 뗀 뒤 다른 손으로 황급히 감쌌다. 마치 누군가가 이 상황을 보기라도 했을까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위가 없는 이상 이 집에 유일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하, 돌아버리겠군.”


위주는 애써 데스크톱 화면에서 눈을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톱에서 멀어졌다. 보는 게 아니었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어 왔지만, 소용없었다. 깊이 가라앉았던 기억이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


위주가 위위의 방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장 빠른 상해행 항공권을 예매하는 일이었다. 운 좋게도 이틀 뒤의 아침 비행기를 예매했다.


중국이 복수 국적을 금하는 것도 이제는 예전 일이어서 위주는 중국을 거치기 위해 여권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뀜에 따라 위주는 한국과 중국 국적을 동시에 취득한 상태였다. 위주는 간만에 빨간 여권을 책상 서랍에서 꺼냈다. 사용은 안 하더라도 혹여나 중국에 있는 본가에 방문할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위주는 중국에 가지 않더라도 한국에 있는 동안 두 어 번 정도 여권 갱신을 마친 상태였다. 덕분에 이튿날 출국해 중국으로 입국 시에도 그는 당국에서 별 제한을 받지 않았다.


위주는 공항에서 택시에 몸을 실었다. 익숙하게 그는 상해 도심으로 들어가 줄 것을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정확히 어느 장소를 가는 거냐 물었지만, 위주는 일단 상해 도심으로 들어가 달란 말만 반복했다. 기사가 어이없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내 위주가 쥐어준 100위안에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엑셀을 밟았다.


위주는 그제야 휴대폰으로 '황징위'이란 단어를 검색창에 집어넣었다. 수많은 정보가 휴대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중국에서 단연 떠오르는 젊은 기업가. 30대 중반이란 나이로 중국인 최초로 포브스 100인에 선정됨. 우성 알파. 알파들이 가장 손꼽는 닮고 싶은 이. 황징위에게 따라오는 수식은 여러 가지였다. 그러나 위주에게 중요한 건 그런 단어가 아니었다. 그가 지금은 어디서 근무하는지 혹은 거주하는 지가 중요했다. 사실,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하게 정할 수 없어 위주는 택시 기사에게 상해 도심까지만 말을 한 것이었다.


위주는 위위가 상해에서 헛다리를 짚어 그를 만나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다. 어디 먼 출장이라도 가서 그를 볼 수 없었단 전개도 좋았다. 그만큼 위위가 징위를 만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만난다면 그 머리 좋은 아이는 모든 것을 알 테니 말이다. 사실은, 지금도 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게 위주의 짐작이었다.


영리한 아이다.

눈치도 빠르고.


그런 아이가 언제부터 '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계획을 짰던 걸까.

분명 위주는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유치원 시절 때에 위위가 던졌던 단 한 번의 물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 대체 왜.

끊임없는 질문이 위주를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차창에 턱을 괸 채 위주가 한순간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지켜봤다. 어둠에 잠시 휩싸인 채 달리다 마침내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다시 택시 안으로 속속히 들어왔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던 상해의 모습은 아니었다. 위주는 자신의 눈에 사로잡힌 광경을 놀라지 않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떠난 지가 벌써 몇 해인데 아직도 기억 속에 남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는가.


“…하긴 세상도 이리 변했는데, 사람이 안 변했을 리가.”


*


징위는 다리를 꼰 채 위위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뚫어질 듯 쳐다보는 기세에 부담스러웠는지 직원이 내어준 차를 입에 대던 위위가 징위를 흘끗거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보면 제가 많이 민망한데요.”

“네가 어지간히도 흥미를 일으켜야 말이지. 너, 뭐하는 놈이야?”

“차가 맛있네요.”

“말 돌리지 말고. 꼬맹아.”

“아까도 말했잖아요. 전 한국에서 당신을 인터뷰를 하러 온 것뿐이지. 다른 건 없습니다.”

“정말 그것뿐이야?”


의심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다가왔지만, 위위는 무심히 넘길 뿐이었다.


“그럼 제가 당신에게 뭘 바라고 왔어야 하죠?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꼬맹이라니. 실례 아닙니까?”

“그럼 이름을 밝히던가.”

“그냥 학생이라고 부르세요.”

“지금 말장난해?”

“장난 아니고 진심인데요.”


연상 혹은 연하의 개념이 그들에겐 없었다. 위위도 징위만큼이나 태도가 날카로웠다. 징위도 위위와 같았다. 그러나 언성을 높이는 일은 없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전무했다. 어쩌다 보니 내쫓지는 않았지만, 위위가 신경을 긁는 통에 목이 말라 차를 입에 댔다. 뜨거울 만도 하건만, 후루룩 삼킨 징위가 내용물을 비운 잔을 소리가 퍽, 나도록 내려놓았다. 그런 모습에도 위위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 가방에서 항상 소지하는 수첩을 꺼내었다.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빈 페이지를 발견하고는 쓱쓱 페이지를 넘기던 손길이 뚝, 멈췄다. 펜을 들어 받아 적을 준비가 되니 위위가 그를 향해 턱짓했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뭘?”

“당신에 관한 이야기라면 상관없으니 뭐든 들려주세요. 어린 시절을 이야기해도 좋고, 첫사랑도 좋습니다. 아무거나 이야기해주세요.”


위위는 수첩을 꺼낸 김에 가방을 다시 뒤적거렸다. 그가 찾은 건 테가 동그란 안경이었다. 그것을 무심히 쓴 채 다시 징위를 응시했다. 이전과 미미하게 달라진 징위의 표정에 위위가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 징위가 다시 녹아내리듯 처음 보는 미소를 보여주었다. 마치 위위를 통해서 다른 이를 떠올리는 모습에 떠오르는 '이'와 함께한 과거를 알고 싶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걸 제게 이야기해주세요. 제 모습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를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경고하는데, 내가 한마디만 하면 네가 여기서 나가는 건 1분도 안 걸려.”

“그럼 지금이라도 제 발로 걸어서 나갈까요?”

“….”


당황한 듯 징위의 입이 얼어붙었다. 대답이 없는 징위와 내려놓은 찻잔을 번갈아 보던 위위가 한숨을 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첩을 가방에 넣곤 지퍼를 닫았다. 빈틈없이 모든 지퍼를 닫은 것을 확인한 위위가 가방을 움켜쥐었다.


“차는 잘 마셨습니다.”


가벼운 인사치레로 목을 까딱이고는 위위는 징위가 앉아 있는 곳을 지나쳐 뚜벅뚜벅 걸었다. 살가운 태도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전혀 협조해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집념이 꺾인 것은 사실이었다. 굳이 이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까. 위위는 제 마음이 우스워 애써 목울대를 추스르며 속으로 비웃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으면, 진작 한국에서 포기하지. 상해까지 와서 이 고생인 거지. 그래도 짜증나는 일을 굳이 참으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는 상대와 이야기해봤자 벽을 보고 하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나았다. 괜히 상해로 무작정 온 게 후회스러웠다. 위위는 지금이라도 위주의 본가로 갈까, 생각했다. 어차피 투숙할 장소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던 위위는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수긍했다. 문만 열면, 이 공간에서 나갈 수 있었다.


뒤에서 다가온 그림자만 아니었다면.


탁-


언제 일어났는지 위위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로 가만히 있던 징위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다는 점이었다. 남은 건 급히 위위의 소매를 붙잡은 징위의 강한 손길뿐이었다. 소매 부분에 구김이 갈 정도로 꽉 잡은 행동에서 절대로 놓지 않겠단 의지가 엿보였다. 위위가 징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부터 드러난 표정이 그의 감정을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이네요.”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누구길래-”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제 이야기도 들려 드릴게요.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위위가 징위가 붙들어 맨 손길을 조심스럽게 놓도록 유도했다. 위위의 예상대로 꽉 잡혔던 소매는 어김없이 구김이 가 있는 상태였다. 집에 가서 다리미로 다려야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 생각하니 위위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가장 좋아하는 옷인데. 위위가 소리내어 툴툴거리기도 이전에 어깨가 붙잡힌 채 원래 자리로 끌려갔다.


징위는 위위를 먼저 앉히고는 마주 편에 앉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턱을 쓸어내리기만 하던 징위가 처음으로 위위에게 날카로운 투가 섞이지 않은 질문을 건넸다.


“정확히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웬만하면 다 듣고 싶은데…. 아, 오늘 저녁에 상해 국제 환경 포럼에 참석하기로 했었죠. 그럼 시간이 별로 없네요. 나가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고작 30분이니까요.”


위위가 손목에 자리한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위위가 이 시기에 상해를 방문한 게 그 이유였다. 포럼에 참석키로 했다면, 적어도 몇 시간 정도는 국내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1년 중에서 중국보다 해외에 거주하는 일수가 더 많은 징위를 만나기 위해서 위위가 나름 머리를 쓴 터였다.


“그럼 당신의 17살 시절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제가 알기론, 대학에 조기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그때부터의 이야기가 듣고 싶네요.”

“왜 하필 그 나이인 거지?”

“시간이 얼마 없어요. 이제 묻는 건 지치지 않으세요?”


징위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편에 묻어두었던 기억을 조금씩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


“지금 네가 나이가 몇이지?”


자연스레 나이를 묻는 징위의 질문에 위위가 솔직히 답변했다.


“17살이요.”


나이를 들은 징위가 께느른한 시선을 품으며 턱을 어루만졌다.


“젊네. 딱 18년 전 내 나이인가….”


17살. 실로 오랜만에 듣거나 입에 담아보는 나이대였다. 자신을 17살이라고 소개하던 때는 이미 해가 18번이나 지났기에 더는 입 밖으로 꺼낼 일도 없었다. 그리고 더더욱, 그 당시의 일을 돌이켜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최고로 꼽는 기억도 존재했지만, 그와 동시에 최악으로 남은 기억도 동시에 남아 있었다.


- 자. 약속.

- 위주야. 우리 진짜 헤어져야 해?

- 응. 그래야 해.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악몽과도 유사한 기억에 징위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 와중에 위위는 그가 입술을 짓씹는 모습조차도 저와 비슷해 뒷목을 문질렀다. 보면 볼수록 저와 닮은, 아니지. 정확히는 그와 비슷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괜히 머쓱해졌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도 제 얼굴을 본 순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고 굳게 믿는 눈치였는데, 지금 한국에서 자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허둥지둥할 '그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닮았다,란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흡사한 자신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어땠을까. 애써 잊었다고는 해도, 가끔씩 남실거리는 기억을 어떻게 버텼을까.


“내가 17살 땐,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어. 머리가 좋은 편이라서 고등학교는 조기 졸업했고. 그러다 그 ‘친구’를 만났어.”

“….”

“어떻게 만났는지 중요하지 않아. 그때 내가 무슨 수업을 들으러 갔는지 기억조차도 나지 않지만, 그때 홀연히 강의실에 남아 공부하던 그 친구의 모습은 똑똑히 기억해. 그 모습에 첫눈에 반해버렸거든. 사실 지금도 왜 사랑했냐고 물으면 말할 수가 없어. 그를 사랑한 건 본능이었거든.”


징위가 위위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괜한 부담스러운 시선에 위위가 미간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왜 그리 빤히 보세요. 그 질문에 징위가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최대한 등을 기대며 두 손을 깍지 껴 뒤통수에 댔다. 그래도 여전히 그는 위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끼고 있었어. 동그란 안경인데, 보통 안경을 쓰면 못생겼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근데 그게 아니었어. 걍 걘 졸라 예뻤어.”

“'정말' 예뻤단 표현은 안 됩니까? 애 앞에서 '졸라'가 뭡니까.”

“17살이면 다 큰 거야. 이럴 때만 어린 척하기는. 어찌 됐든 걘 '졸라' 예뻤어. '정말'이란 표현은 부족해.”


한사코 비속어를 내세워 말하는 징위는 끝까지 태도를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위위가 몇 번이나 저속한 표현은 쓰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가볍게 묵살당했다. 되레 위위가 걸고넘어질수록, 징위는 더더욱 '졸라', '존나'를 신나게 붙여댔다. 그러자 위위가 이마를 짚으며 흔들어댔다. 오히려 반응할수록 그가 더한다는 걸 깨닫고 나니 더더욱 정정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래요. 그래. 계속 말씀하세요. '졸라' 예뻤다고 칩시다."

“그는 공부하고 있었어. 그러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 때문에 문득 고개를 들었지.”


징위는 첫만남을 회상하며 위위에게 이리 표현했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 않았는데, 그때부터 믿기 시작했다며 조용히 내뱉었다. 위위는 징위의 표정을 살폈다. 아까 전만 해도 아픈 기억에 입술을 짓씹곤 했는데, 지금은 180도 달랐다. 한껏 부드러워진 음색이며, 눈동자에 담은 '첫사랑'의 회상이 여전히 그가 사랑에 흠뻑 빠진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여전히 징위는 얘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위가 자신을 소상히 살핀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목소리에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을 녹여냈다.


“그 친구도 날 봤어. 멍하니 나를 바라봤지. 그때 느꼈어. 우린 운명이란 걸.”


17살의 징위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성큼성큼 자신의 운명이라 느끼는 이에게 다가갔다. 살짝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에 얼굴을 파묻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며 그가 앉은 책상까지 바짝 다가갔다. 여전히 그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눈을 껌뻑였다. 젠장. 가까이서 보니 큰 눈망울과 붉은 입술이 더욱 눈에 띄었다. 진짜 예쁘다. 자제하지 않았다면 이 말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할 정도로 징위는 그의 외모에 감탄했다. 지금까지 징위는 이상형이라는 게 없었다. 이상형이 누구냐 물으면 없다고 대답했던 횟수가 더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상형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질문한 이를 앉혀두고 종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남자가 맞긴 하나. 왜 이리 눈이 예뻐. 징위의 눈엔 마주 보는 이의 짙은 쌍꺼풀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옅은 립글로즈라도 발랐는지 입술도 붉은 주제에 광이나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아까 전 목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던 이유도 징위는 근접하게 다가가고 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기 바쁜 이의 몸에서 은근 퍼지는 향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향수라도 뿌렸나. 그런데 향수만으로 이렇게 매혹적일 수 있을까.


징위는 부정하고 나섰다. 이건 분명 그의 몸에서 자연스레 나는 향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이리 홀릴 수 없었다. 그가 자신만을 위해 내뿜는 향이리라. 자신을 위한 게 분명하다며 징위가 자만심 가득한 확신에 나섰다. 그 자신감이 결국 재앙을 불러일으킨 게 문제였다.


과거를 회상하던 징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놓치지 않은 위위가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그 뒤엔 어떻게 됐는데요. 그 물음에 징위가 여전히 구긴 눈살을 펴지도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들이밀었다가?”

“얻어맞았어. 뺨을.”


징위는 그때의 얼얼한 감각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멋쩍게 맞았던 부위를 조심스레 감샀다.

위위는 얼굴에 표정 변화라고는 없이 징위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운지 징위가 왜 그리 보냐 다그치자, 그제야 시선을 다른 데로 두곤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뺨을 맞을 정도면 얼마나 들이민 거예요? 좀만 더 했으면 입술이라도 훔쳤겠네요.”


징위는 별 부정 없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어. 네 말이 맞아. 조금만 더 하면 키스할 수 있었어.”

“맞을 짓을 알아서 하셨네요.”

“어린 게 하는 말하곤.”

“그 뒤나 말씀해주세요. 우리 22분 남은 것 같은데요.”


위위는 징위 너머로 보이는 큰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징위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됐다.


“후우…. 뺨을 맞아서 정신이 나간 사이에 그는 나갔더라. 명패가 달린 것도 아니라서 이름도 알 수 없었어. 그래도 그 친구를 금방 찾을 순 있었어.”

“어떻게요?”

“뭐긴 뭐야. 들으려던 수업을 다시 들어가면 그가 있을 거 아니겠냐?”


뜻밖의 대답에 위위가 손으로 입을 잠시 가렸다 뗐다.


“와, 생각보다 머리가 좋으시네요.”

“…이젠 네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귀찮아. 아무튼…. 그 친구를 다시 만났는데, 뭐 첫만남이 그랬으니 나를 처음부터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분명 나는 느꼈어. 그도 나를 은연중에는 인식하고 있단 걸.”

“너무 억지 아닙니까? 감만으로 그걸 어떻게 알아냅니까.”

“내가 괜히 우성 알파겠어?”

“…재수 없어. 퉤.”


침을 뱉는 시늉으로 징위를 놀렸지만, 그런 도발은 징위에겐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징위는 더 해보라는 듯 짐짓 여유를 부리며 위위를 되레 놀리기 바빴다.


“네가 17살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길래 들려주는 거잖아.”

“그것 참 아쉽네요. 전국 자만 자랑 있었다면 1등 수상감인데, 이참에 그런 대회라도 열어드릴까요?”

“네 말대로 제대로 이야기해줄 테니까 비꼬지 말아봐. 까불긴.”


ps : 내 마감도 퉤-

1/7,8 디페와 로망스 나가게 되었습니다.^^

Kashire카시레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