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료 / 사나다 겐이치로 x 에치젠 료마

*나이역전 소재, 1학년 사나다와 3학년 에치젠




당신과 나의 시작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우연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갈까. 지금부터 시작이야.




Way to go




릿카이대 부속중 테니스부 1학년 레귤러, 삼강이라고 하면 적어도 릿카이 교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사나다는 그 삼강의 한 사람이었다. 유키무라, 야나기와 함께 릿카이의 주축이 된 실력자 중의 실력자. 릿카이의 차세대 리더. 또래로부터 선배로부터 질투와 선망을 동시에 짊어진 몸.

그러나 사나다는 어린 시절부터 일말의 패배감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도 믿어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온 유키무라로부터, 다른 하나는 소학생 시절 패배를 안겨왔던 테즈카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이뤄질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지만 테즈카가 릿카이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내심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테즈카가 강호교에 입학해 전국에서 다시 겨루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유키무라와는 이미 릿카이에서 전국을 제패하려고 서로 약속했었다. 그래서 사나다의 안에서 유키무라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유키무라에 대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꿉친구임에도 불구하고.

릿카이의 빅3, 삼강 중 하나인 사나다 겐이치로. 황제란 이명을 위명으로 바꾸지 않기 위해 사나다는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딱딱하지만 올곧은 사나다다웠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사나다는 무언가 에게 항상 짓눌려져 있었다.

나는 유키무라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나는 테즈카를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또 지는 걸까. 나는 테니스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테니스에 재능이 있긴 한 걸까.

사나다의 안에서 즐거웠던 아이의 테니스는 지금 어떻게 바뀌고 있을까.



학교 사정으로 테니스부 연습이 취소된 어느 주말의 오후였다. 사나다는 다른 부원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나섰다. 멀리서 유키무라가 쓰게 웃는 것 같았지만 보지 못한 척, 그냥 길을 나섰다.

일단 도착한 전철을 타고 무작정 어디론가 가기로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테니스부원들도 릿카이의 학생들도 사나다의 강인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늘 2인자였다. 유키무라의 그늘에 가린. 테즈카에게 패배한.

누군가는 2인자도 대단한 것이라 칭찬했고, 그래서 사나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것은 무언의 압박이 되었다. 결국 정상에는 설 수 없는 두 번째. 1인자를 넘어설 수 없는 2인자.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자신은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머릿속에서 1인자와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사나다를 태운 전철은 어느새 이름 모를 종점에 다다랐다. 멀리라고 해봤자 도쿄나 카나가와 어디쯤이겠지만 길을 벗어나본 적 없는 사나다에게 이곳은 낯선 곳일 뿐이었다.


“아, 잘못 내렸다.”


그렇게 혼자만 남겨졌다고 생각한 지점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처럼 의도치 않은 낡은 역사의 방문객이었다.

하얀 모자에 자신보다 조금 더 크거나 엇비슷해 보이는 키. 그리고 그 작은 체구로 짊어진 커다란 테니스가방. 사나다에게 그 모습은 무거운 짊을 짊어진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메고 있는 테니스가방도 그와 별 다를 바 없을 텐데.


“혹시 여기 어딘지 알아?”


하얀 모자의 소년이 사나다에게 물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앳됨과 성숙의 경계에 있는 목소리였다.


“여기 종점인데요. 도심 쪽으로 가는 전철은 1시간 뒤에나 있다고 나와 있네요.”


열차시간표를 가리키며 사나다가 몸을 돌렸다. 다음 전철이 올 때까지 역사를 나서 주변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흐음- 테니스, 하는구나?”


소년의 시선이 사나다의 테니스가방에 꽂힌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노란색과 검은색 위로 수놓인 무겁게 짓누르는 릿카이의 이름.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알기나 할까. 명문교의, 천재 팀메이트와 함께하는 테니스가 괴롭다고 하면 누가 이해해줄까. 배부른 투정이라고 웃어 넘겨버리겠지.


“보니까 근처에 코트 비스무리한게 있던데. 어때, 기다리는 동안 한게임?”


소년이 사나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원래대로라면 사나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년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릿카이는 외부 코트에서 외부인과의 무단 경기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사나다는 그 네모난 투명한 유리 상자에서 뛰쳐나온 일탈소년. 게다가 상대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 일탈을 꿈꾸며 낯선 곳 까지 왔건만 다시 테니스라니. 하지만 평소와 다른 자신이라면.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잘 관리되지 않아 잡초가 군데군데 자라있는 길거리 코트였다. 평소에도 없는 것인지 몰라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Which, Smooth?”

“You first.”


상대를 얕잡아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나다는 분명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과 레벨이 다른 사람이다. 자신보다 한걸음, 아니 두세 걸음. 거리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앞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상대의 리턴을 받아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코트의 좌우를 가른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라켓에 분해하다가도 가까스로 쳐낸 한 번의 스트로크에 환희한다.

이기고 지는 것만이 승부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사나다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선수였던 친구의 곁에서, 이겨보지 못한 라이벌을 바라보며. 다음은 반드시 이기겠다며 다시 타오를 수 있었던 열정을.


“테니스를 좋아하는데 테니스 때문에 괴롭네.”


명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상대인데 자신을 알아봐 주었다. 사나다가 휘두르는 라켓에는 괴로움이 있었고 즐거움이 있었다. 그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릴 만큼 힘차게 라켓을 휘둘렀다. 사나다가 날려 보낸 공이 처음으로 소년의 코트에 시원하게 내리꽂혔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소년이 씨익 웃었다.


“역시.”


이어지는 랠리를 멈춘 것은 열차 출발 15분 전을 알리는 휴대전화 알람이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지만 나무 그늘 아래 코트는 서늘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식어가는 땀에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며 테니스가방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했네요. 저는 사나다 겐이치로라고 합니다. 릿카이대 부속중에 다니고 있어요.”


벤치에 개어두었던 릿카이대 부속중의 노란 져지의 소매에 팔을 꿰며 사나다가 말했다. 상대가 묻지 않아도 일일이 설명하는 모습이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소년이 자신의 가방에서 겉옷을 꺼내 걸쳤다. 바람에 푸른 옷자락이 아름답게 펄럭였다. 트리콜로르 위로 수놓은 선명한 문자.


“세이가쿠, 에치젠 료마.”


무덤덤하게 짧은 단어의 조합으로 에치젠이 사나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등에 새겨진 SEIGAKU의 스펠링이, 새파랗게 시야를 채우는 파란색이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사나다에게 각인시킨다.


“세이가쿠라면… 그러니까 테즈카가 올해 입학했다던…?”

“아아, 그 딱딱한 녀석.”


에치젠이 옅게 인상을 찌푸리며 모자를 고쳐 썼다. 일전에 부장인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큰소리치던 그 1학년말이지. 다시 한 번 휴대전화의 액정을 보던 에치젠이 무어라 말을 해오는 사나다의 팔을 낚아챘다. 당황으로 물든 사나다의 얼굴은 아랑곳 않은 채 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5분 남았어, 달려!”


에치젠의 다그침에 정신이 번쩍 든 사나다도 함께 힘껏 달렸다. 가슴이 답답할 만큼 숨이 차올랐지만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일탈을 한 소년이 하나, 뜻하지 않게 끼어든 소년이 또 하나.


두 사람도 모를, 두 사람 사이에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던 어느 봄날.




END.

사나다군과 에치젠상 시리즈, 시작의 시작(기둥조, 테즈카+에치젠 편, 이지샷님 커미션)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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