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요랑&겨울안개








그 날은 여러모로 이상했다.


꿈부터 이상했다. 나는 누군가의 품에 소중하게 안겨있었다. 나는 나를 안고 있는 이의 품에 겨우 차는 작은 아이였고 그런 나를 품에 안아 들고서 한참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말이다. 달리는 이의 품에 깊게 기대어 달리느라 가빠진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을 들으며 나는 괜히 그의 옷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목덜미에 얼굴을 깊게 묻고 있던 터라 어두웠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진 것은 그가 멈추면서였다. 멈춘 그에 따라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호수였다. 그리고 그 공간은 너무 고요해서 숨소리가 거슬리게 느껴질 정도로 무서운 적막감이 담긴 곳이었다.


달빛이 내려와 호수는 오묘한 빛을 담은 채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나는 그의 품에서 스스로 도망치듯 내려와 호수로 달려갔다. 호수를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들이밀었다가 호수에 비친 내 얼굴에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린, 나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은 네다섯 정도 보이는 어린 모습의 내가 호수에 담겨 보였다. 너는 누구니?


단순한 꿈일까 아니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한편이 꿈으로 보이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나를 안고 달린 사람의 얼굴을 뒤늦게 보았다. 여기저기 뜯어보아도 기억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라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숨을 다 고른 것인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가온 그가 참 좋다고 느껴졌다. 큰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볼 젖살 통통하게 오른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내게 말을 뱉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뻐끔거리고만 있는 입술 모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내 눈을 그의 손바닥이 덮었고 어두운 시야를 가짐과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달빛을 받은 호수는 아름다웠고 자신을 쓰다듬었던 어른의 손길은 따스하고 좋았다는 그런 꿈. 온몸이 땀에 젖어 축축한 느낌이 들 정도라서 민석은 그 꿈이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보다는 별 볼 일 없는 꿈이었다.


민석은 빙글빙글 도는 현기증에 이마를 짚었다가 겨우 일어나 일단 땀에 젖은 몸부터 깔끔하게 씻었다.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이르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빠듯해진 시간에 빠릿하게 움직여 등교를 준비하는데, 몸에서 힘이 쑥쑥 빠지는 기분이라서 좋지 못한 상태였다. 며칠이나 과제를 위해서 날을 샌 탓에 체력을 다해 더는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과제도 다 끝났겠다, 강의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몰아 잘 것이라는 나름의 계획을 세운 민석은 무거운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 등교했다.


민석은 이대로라면 강의를 듣다가 꾸벅꾸벅 졸 것 같아서 산 커피를 손에 쥐고서 강의실로 들어갔다. 민석의 친구 영수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였고 민석은 그것을 고개로 대충 끄덕여주고는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민석이 자리에 앉자 바로 현민과 우주도 왔냐며 민석을 반겼다. 죽겠다는 민석의 말에 영수가 웃으며 민석의 등을 아프지 않게 툭 친 순간이었다.





“악!”





갑자기 영수가 몸을 파드득 떨며 악을 질렀다. 영수의 소란에 영수의 책상이 넘어지면서 필기구와 책들이 바닥에 흩어졌고 민석 또한 영수의 악에 놀라 동그란 눈을 하고서 혹여나 커피를 놓칠까 단단히 커피를 쥐고 있었다. 왜 그러냐는 물음에 영수는 몇 번이고 제 손과 민석을 번갈아 보던 영수는 입술을 단단히 물고서 곧장 손을 뻗어 민석의 팔을 만졌다.





“악!”

“야!”





또 악을 지르며 난리 피우는 영수의 행동에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커피를 쏟아버린 민석은 바지를 적신 커피에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영수를 노려보았다. 영수는 손을 털어내며 아픈 얼굴을 하고 있어 그새 걱정으로 물든 표정으로 제 친구에게 다가가는 민석이었다. “괜찮아?” 물음과 함께 다가오는 민석에 영수는 후다닥 민석에게서 멀어졌다.





“어. 어. 괜찮아.”

“뭐야.”





영수의 행동에 불쾌함을 표하는 민석에도 영수는 민석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었다. 현민이 민석의 말에 덧붙이듯이 뭐 하는 행동이냐는 말에 영수가 조금 단호한 투로 말했다.





“진짜진짜 미안한데 민석아 나한테 닿지 마라.”

“뭐?”

“너한테 닿자마자 짜릿한 게 팍 오르는데 엄청 아파. 정전기인가 싶은데 차원이 달라. 아오….”

“정전기겠지.”

“정전기가 이렇게 아파? 야. 네가 만져봐!”





우주의 말에 되레 화내는 영수에 우주는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서 민석의 팔에 손을 올렸다. 시큰둥했던 그 얼굴이 닿자마자 바뀌며 영수와 똑같이 악 소리를 지르며 민석에게서 멀어졌다. 안경을 몇 번이고 고쳐 쓰며 많이 당황한 얼굴을 한 우주에 현민이도 궁금한 얼굴을 하고서 민석을 만져보았다가 악을 질렀다. 악을 지르며 떨어지는 친구들에 울망이는 민석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이게 뭐야?”





민석에게 닿는 사람은 모두 아파하기에 민석은 다른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잔뜩 웅크리고 생활해야만 했다. 강의를 들을 때도 한 칸 떨어져서 앉아야 했고 밥을 먹는 것도 혼자였다. 갑자기 제게 찾아온 이상 현상에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지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닿을까 싶어 버스에 타지도 않고 집으로 걸어서 돌아온 민석은 현관에 서서 한참을 씩씩 거친 숨을 쉬다가 청소기를 들었다. 자신의 분노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은, 복잡한 지금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것은 청소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딱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니 이참에 필요 없는 물건들도 정리해서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민석은 바로 제 생각을 실행했다.


일어나서 치우고 밥 먹고 치우고, 하루에 두어 번 이상은 청소를 하기에 항상 민석의 집은 청결한 상태를 유지했다. 버릴 것이라고 차곡차곡 정리한 분리수거들을 미리 현관 앞에 놓고 책꽂이에 책들을 다시 정리하려고 살펴보고 있던 그때 민석은 생전 처음 보는 책 한 권에 시선을 빼앗겼다. 고갤 갸웃거리며 민석은 책을 빼냈다.





“처음 보는 책인데? 내가 이런 책을 산 적이 있었나?”





화려해 보였지만 낡음이 여실 보이는 책이었다. 책의 디자인을 보고 구매하는 편이 아니었고 절대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화려했기에 자신의 책이 아님이 분명했다. 친구들의 책을 정리하다가 책꽂이에 끼워두고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책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용이라도 보면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싶어 민석은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뭐지. 외국어?”





정말 처음 본 나라의 언어였다. 상형문자라고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낯선 언어. 누군가가 꾹꾹 열심히 눌러 쓴 것은 분명해 보였다. 글자인지 뭔지 모를 것을 한참 들여 보고 있다가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민석은 얼굴을 구겼다. 왜 이러지? 고통을 줄여보고자 작게 머리를 털어낸 민석은 다시 책을 보았다. 눈도 몇 번 진하게 감았다가 뜨자 낯설고 읽히지도 않았던 글들이 번지는가 싶더니 곧 읽을 수 있는 언어들로 자연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제게 다 느껴질 정도였다.



‘신의 사랑을 받는 나라는 늘 평화롭다. 신의 손길이 곳곳에 닿는 나라는 왕 또한 신의 선택과 허락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왕위를 탐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을 반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신의 대리자를 통해 선택받게 되어 이루어진 왕은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며 평생 존경과 칭송을 받게 된다.’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것인지 아니면 판타지 소설인지 모를 내용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덮었을지도 모를 책 내용이었으나 민석은 홀린 것처럼 빠르게 눈을 움직여 글을 읽어내리고 있었다. 신과 왕을 이야기하던 초반의 이야기에서 능력을 지닌 자와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자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연관이 있는 건가? 나름 생각과 추리를 하며 글을 읽어가던 민석은 이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췄다.





“내용이 조금….”





자연스럽게 이어가 지지 않고 동강동강 나누어진 내용이 이상해 민석은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겼다. 다시 천천히 눈에 새기듯이 읽어보았지만, 내용이 뚝뚝 끊기는 것이 더 확실해질 뿐이었다.


왕의 곁에서 보필하며 조력을 해주던 이의 아이가 태어났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고 어여쁘며 귀한 존재라고 아이에 대한 사람이 듬뿍 담겨있는 그 문장이 괜히 간지럽고 부러워 그 부분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쓸어보는 민석이었다. 어릴 적부터 홀로 살고 자라온 민석에게는 한 번도 느껴볼 수 없었던 마음이었다. 다른 이에게 쏟아지는 감정이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질 정도라 민석의 코끝이 찡 아려왔다.


아이를 위해서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며 아이를 위해서 국경의 끝으로 가기까지 했다는 글에는 아이를 향한 애정이 절절하게 담겨있었다.



‘길고 긴 전쟁이 계속해서 다발적으로 일어났지만, 그 끝은 승리였다. 평화로움이 찾아오자 신의 말씀을 전하는 신의 대리자가 신탁의 자리를 마련될 것이라는 말을 전달했다. 계속되는 전쟁에 신이 노한 것일까, 왕의 자리를 이어갈 세자가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났기도 하였으니….’



“어?”





다음 내용이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글자가 날아간 건지 아니면 뜯겨 나간 건지 모를 일이었다. 민석은 빈 부분을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쓸어보다 다음 장에는 내용이 있을까 싶어 급히 책장을 넘겼다. 다음 장이 존재하였으나 앞부분과는 이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나라에 기쁜 소식이 일어났다. 세자가 태어났다.’




앞장과는 필체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책을 낸 출판사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리기 위하여 글자를 다른 서체를 이용했을지도 몰랐다. 다음 장으로 넘기기 위해 책장을 집어 올린 순간 갑자기 핑 도는 현기증에 민석은 무릎을 꺾었다. 왜 이러지? 들고 있던 책이 민석의 손을 벗어나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마를 짚으며 뿌옇게 번지는 시야에 이젠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지경이 된 민석은 휘청거리다 이내 책과 같이 쓰러졌다.


책 위로 쓰러진 민석으로 인하여 민석의 머리카락이 펼쳐진 책 위로 흐트러졌다. 그와 동시에 책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천천히 민석에게서 벗어나 떠오른 책은 느릿하게 다음 장으로 스스로 넘겨졌다. 그렇게 넘어간 빈 페이지에 빠르게 내용이 적혀지고 있었다. 책에서 뿜어내는 빛이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방 안 공간을 모두 하얀 빛으로 가득 채워 민석이를 삼키며 그 무엇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웅장하고 근엄한 목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천하를 손에 쥘 자는 누구인가? 하늘이 정한 자만이 전지전능한 권력을 얻게 되리라.’





-





얼굴에 쏟아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거리게 해 눈을 뜬 민석은 눈을 뜨자마자 다시 기절할 뻔했다. 피로함도 울렁거리게 하던 현기증과 두통도 모두 사라져 가벼워진 몸이었지만, 정신은 혼미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민석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꿈? 아니면 현실? 작게 팔을 버둥거리자마자 더 속도를 내어 뚝 어디론가 퐁당 빠지듯 추락한 민석이었다.





“하늘이 정한 자가 돌아온….”

“악!!”





누군가의 음성에 민석의 비명이 겹쳤다. 다행히도 민석은 커다란 연못에 빠져 다친 곳은 하나 없었으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사방으로 튀고 넘쳐난 물이 연못 주변을 적셨다. 그 연못 옆으로는 한참 신탁에서 신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는 의식이 한창이었다.


관심 없고 지루하단 얼굴을 한 이들도 신의 대리자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도 모두 소란에 놀라 민석이가 빠진 연못을 쳐다보았다. 출렁이는 물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적막함이 내려앉아 있는 그 공간을 깨트린 것은 물에서 막 빠져나온 민석이었다.





“와아, 진짜 죽을 뻔했네!”





꿈이지만 너무 생생해서 무서웠다. 떨어지는 꿈 꾸면 키가 큰다던데, 키가 조금 자라려나? 물에 젖어 무거워진 몸을 낑낑거리며 연못에서 어떻게든 나오려 애를 쓰는 민석이었다. 머리카락을 살랑이던 바람도 온몸을 적신 물도 모두 너무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민석은 애써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겨우 연못에서 나온 민석은 젖어서 떨어지는 체온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젖은 머리칼을 털어내고 옷을 짜내었다.





“별 꿈을 다 꾸네.”

‘여긴 어찌 들어온 것이지?’

“피곤해서 그런가, 왜 계속 이런 꿈들만 꾸는 거지.”

‘아무나 드나들 수가 없는 곳인데.’

“그만 꾸고 싶어. 얼른 꿈에서 깨어나….”

‘혹시 나를 해하려고?’

“아니거든요!”





머리를 통통 때리던 민석은 얼토당토않은 말에 소리를 빽 질렀다. 계속해서 저를 향한 말을 부러 무시하였건만 해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말을 뱉어버린 민석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그제야 살펴보기 시작한 민석은 생각보다 많은 인원수가 모두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이들은 젊은 사람부터 수염 길게 늘어진 늙은 사람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복? 처음 보는 낯선 옷이 아닌 한복을 입고 있었으나 제가 알고 있는 한복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근엄함을 품은 이들이 있었다. 서 있는 이들과는 다르게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는 그들은 장신구도 화려했고 입고 있는 한복도 달라 보였다. 밋밋해 보이는 다른 이들의 의복과는 다르게 반질거리는 패턴이 박힌 의복. 그리고 그 의자에 앉은 이들 중에 저와 가까운 쪽에 있는 의자에 앉은 이에게로 시선이 흘러갔다. 민석은 저를 흘겨보는 묵직하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피하지 못하고서 마주했다.





‘정체가 뭐야 대체.’

“저요?”

‘지금 내 생각에 대답했어?’

“네?”





생각에 대답했다고? 그러고 보니 저를 보고서 말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도 입 벙긋하지 않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말이 들리고 있었다. 누가 하는 말이지?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데 왜 나는 말소리가 들리는 거지? 나 미친 건가? 대체 왜 이런 거야? 민석의 시선이 마구 요동치며 흔들려 자신의 혼란스러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으….”





갑자기 몰아치는 두통에 지끈거리는 머리에 괴롭다 못해 고통스러워 머리를 감싸며 아픔을 뱉으며 머리를 작게 바닥에 박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가 민석에게 다가가려 걸음을 막 떼어냈을 때였다. 막 걸음 하나를 떼어내려고 하자마자 곧장 검을 차고 있는 이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하, 물러나십시오! 위험하옵니다!”

“저하?”





저하라는 소리에 두통이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저하라면 세자? 왕자? 차림도 얼굴도 화려하다 못해 귀티가 좔좔 흐른다 싶었는데 확인을 당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조선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세자라니?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해서 현실인가 싶지만, 상황이 또 현실이 아니라 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누군지도 모를 천한 것에게 마음을 나누지 마시옵소서.”

“해를 가할지도 모릅니다. 어서 자리에 드시지요.”





저를 걱정하는 이들의 음성에도 올곧게 민석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쉬이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민석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그와 민석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진 것은 누군가의 재수 없이 말이 툭 내던져져 그를 공격하면서였다.





“세자 저하께서는 낯선 이가 신탁보다 중요한가 봅니다.”

“무엄하다!”

“저하께서야 말로 지금 신 앞에서 무엄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지금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신을 위해서입니다. 저런 천한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있습니까?”





한 사람의 말을 시작으로 서로 언성을 높인 음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란이 일어났다. 급하게 젖어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 민석은 눈치를 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목을 칠 분위기라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천한 것이라 저를 무시하여도 좋으니 제 목숨만은 살려주었으면 싶었다. 지금 이것이 현실이든 꿈이든 모르니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저자가 누군지 알고 신성한 이 공간에 있게 둡니까. 어서 내쫓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애초에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 수상한 자입니다. 당장 옥에 가두어야 합니다.”





어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젖은 옷을 움켜쥐고서 동동거리던 민석도 그리고 서로 제 말을 들어달라듯 큰소리를 내던 이들의 입도 멈추게 한 것은 아주 큰 파열음이었다.


쨍그랑!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에는 술병이 동그란 입구만 온전하고 온몸이 깨져 사방으로 퍼진 채로 있었다. 안에 담긴 술도 모두 뱉어내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시끄러.”





툭 던지는 그 음성에 싸늘함이 물씬 담겨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민석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뱉었다. 창백하다는 것이 옳을 정도로 하얀 피부와 갸름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눈코입은 꽤 날카로운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게 찌푸려진 눈썹의 앞머리가 그의 짜증을 말했다. 흘기는 시선이 민석에게로 닿았고 민석은 제 헉 소리에 기분이 나쁜가 싶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근데 저 술병은 어디서…. 세훈 대군께서 오실 때부터 쥐고 계시던 것입니다. 저걸 들고 오셨다고요? 이 신성한 곳에요? 예. 아니, 아무리 대군께서 몸이 성치 않다고 하셔도 어찌…. 서로 중얼거리며 주거니 받거니 하던 음성은 곧 뚝 잘렸다.





“내가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나?”

“…….”

“그대들은 너무 말이 많아. 목소리도 크고 말이야. 매번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으니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몇 대가리는 잘라내도 상관없을 듯싶은데….”

“대군마마!”

“어이, 무녀. 신께서 저들이 이 자리에 함께해도 될지, 아니면 쳐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시던가? 말씀이 없으시다면 내 뜻대로 해도 되는 거지?”





느릿하게 허리를 세우며 자세를 바르게 한 그가 금방이라도 일어나 누군가를 해칠 것 같은 분위기를 뿜어내자 장내는 순식간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날이 선 분위기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때였다.





“너무 그리 모나게 굴지 마시게나.”





입꼬리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세훈의 옆자리에 앉은 이가 참으로 보드랍게도 말했다. 날이 선 분위기는 그의 음성 하나로 한풀 꺾였다. 그를 꼭 감싸 지켜내는 듯이 빛이 감싸져 뿜어져 나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아 민석은 작게 눈을 비볐다. 뭐지.





“우선 세훈 대군이 말한 것과 같이 신관의 설명이 필요한 듯싶습니다. 신께서 전한 말씀은 그것이 전부인가요?”

“예. 신께서 전한 말씀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늘에서 정한 자가 돌아온다고.”

“흐음….”





오동통해 보이는 입술을 삐죽이며 짐짓 고민에 빠진 시늉을 하는 그를 시작으로 모두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늘에서 정한 자가 돌아온다고 하였다. 신관이 신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낯선 사람. 모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딱 들어맞는 상황에 민석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신께서 하는 말은 신관 말고도 몰랐으니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없었다. 어찌 보면 그가 신께서 말한 이 일지도 몰랐다.


장내가 다시 엄숙해졌다. 신의 말씀 아래에서 사사로운 일은 뒷 전 인양 저들끼리 신의 말씀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 민석은 눈을 데록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왜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누구인지. 하나같이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민석이 살아온 인생이 전부 그러했다. 이해 가지 않는 상황들의 연속. 민석은 지금 평정심을 찾기 위해 꽤나 노력 중이었다.


그런 민석의 곁으로 조용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얀 의복은 활동성이 좋도록 발목과 소매가 동여 매져있는 형태였고, 기다란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허리춤에 모두 똑같은 모양의 검을 차고 있었으며, 동작이 매우 날랜 것이 마치 잘 훈련된 병사 같았다.





“저…. 혹시 여기가 어디죠?”





민석을 둘러싼 무리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자신을 향해 겨눌 것처럼 보였지만, 어찌됐건 돌파구가 필요했다싶은 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답이 들려온 것은 불쑥 다가온 한 남자의 음성이었다. 초로의 남성은 기골이 장대하여, 민석은 허리를 꼿꼿히 세워도 그의 머리꼭대기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말씀을 삼가시지요.”

“제가 이곳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것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대체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눈을 맞추고 설움을 토로하는 민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민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눈을 감고 고갤 끄덕였다. 마치 혼란스런 마음을 이해하는 행동에, 긴장이 풀렸다. 젖은 몸이 더욱 차가워졌다.





“신탁도 신탁이지만, 이런 신성한 곳에 함부로 침입한 자에 대해선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이야기는 신탁에서 민석으로. 다시 신탁으로. 또다시 민석에게로 옮겨지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신탁이 전해진데다가,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내라니. 모두가 혼란스러운 탓이다. 한 명의 외침이 곧 여러 명의 웅성거림으로 번졌고, 장내는 다시 들썩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이 나라를 책임질 왕자께서 모두 모여 있으니, 이 나라를 시기하는 타국에서 온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나오자, 민석은 모골이 송연해진다. 세자와 신탁.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붙잡힌 자객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까지 이르자, 처음으로 자신을 이해해준 남자의 뒤로 더욱 몸을 숨기게 되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줄곧 화가 난 표정이었던 세훈이 먼저 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버렸고, 이 과정에서 여러 대신들이 비난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갑작스레 침입한 자를 의금부로 넘겨야한다는 주장과 마른하늘에 떨어진 특이한 복색의 사람을 신탁과 연관지으려드는 사람.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한 세훈의 성정을 비난하는 사람. 그 와중에 민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놀란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아수라장 같은 상황이었다.





“신, 김종훈. 세자 저하와 대군께. 그리고 이곳에 계신 대감들께 한 가지 청을 드리고자하나이다.”





남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로질러 좌중을 압도했다. 모두들 숙덕거리며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신성한 신전을 지키는 것이 이 몸에게 주어진 운명. 감히 이 신전을 함부로 침범한 자에게 그에 따른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 판단하옵니다.”

“이거 보세요!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시…!!”

“그러니, 이 자는 저희 신전에서 충분히 조사하여 죄의 유무를 판별함이 옳다고 사료되는 바입니다. 부디 허락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신전의 안전을 도모하겠나이다!”





남자의 말에 민석은 깜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를 뒤따르던 무리가 다가와 민석의 팔을 잡고 결박하기 시작했다. 제법 억센 손아귀에 사지를 붙잡히고 순식간에 입까지 틀어 막힌 민석은 거세게 저항을 했지만,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서로 소곤거리며 민석을 흘겨보는 눈들은 마치 맹수의 눈처럼 두렵게 느껴졌다.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네. 지금 의금부도 전하의 안위를 생각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그 자에 대한 심문은 김대관에게 맞기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안 그렇습니까, 저하?”





시종일관 부드러운 눈빛으로 일관하던 자가 의견을 내자, 그의 시선 끝에 있던 세자는 깊은 눈동자로 민석을 바라보더니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자, 자리가 파한 듯,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민석은 허망한 눈길로 그의 뒤통수를 쫓았으나,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그럼, 김대관만 믿고 이만 가보겠네. 그리고 신관. 신탁과 관련하여 자네에게 몇 가지 질의를 하여도 되겠는가?”

“하오나 대군마마. 소신, 육신이 쇠약하여 더는 말을 할 기운조차 남아있질 않습니다. 따로이 날을 정하여 걸음 하여 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좋네. 내 미리 기별을 넣고 걸음 하겠네.”





모두가 장내를 빠져나갔고, 신관 또한 자리를 벗어났다. 민석은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고, 남자는 그런 민석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혼란스러울 테니, 지금은 잠시 쉬는 것이 좋겠소이다.”





그 말이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양, 민석은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곧장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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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작품은 요랑(@xiu_suming), 겨울안개(@mist0221)가 릴레이로 연재합니다.

연재일은 11월부터 매월 8일과 28일이며, 해당 회자 작성자의 포스타입에 업로드 됩니다.

요랑님

매 회차 상‧하단에 전후편 링크가 첨부됩니다.





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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