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호 유기현 임창균

202호 거주하는 김아무개여주 씨..~! 

203호 이민혁 채형원


나페스와 RPS가 뒤섞인 이상한 이야기

이주헌과 김 아무개 씨가 연애하는 이야기 입니다 .. 

그리고 켠꿍 그리고 민챙 









에피소드 열셋

좋아해 그건 대충 안해









그날




못났다는 거 안다. 비뚤어져도 한참 비뚤어졌다. 내가 이렇게 속알맹이가 작은 여자인지 인생 전반을 치열하게 훑는 중이었다. 여기는 회사. 책상 위에는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높게 올려놓은 모니터와 기계식 키보드가 놓여 있다. 키보드와 모니터 사이에 얌전히 올려진 탁센 이브가 이 분노의 원인이다. 배란이란 건 뭘까, 생리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뒤집어 놓은 건가. 몸이 퉁퉁 부었다.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해서 겨우 빼놓은 살은 월에 한 번씩 울컥 차올랐다. 아오, 분해.


노려봐도 해결해주는 건 아무 것도 없는데 괜히 그 약을 한참 째려보다가 모니터 받침대에 달린 작은 서랍을 연다. 몇 알이 이미 비어있는 이지엔식스를 한 알 꺼내서 아메리카노에 같이 때려 넣었다. 얼굴이 퉁퉁 부은 거 보고 알았나, 아니면 꾸물꾸물해진 기분을 기가 막히게 알아 차린 걸까. 출근길, 문고리에 봉투가 걸려 있었다. 생리통 약을 포함한 주전부리들이었다. 마음이 진짜 귀여운데, 착하고 기특한데.


나는 뭐가 문제인지. 생리가 문제인지.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오는 생리통마다 탁센 이브와 초콜릿을 챙겨 먹었을 그 애 전여친이 생각 끝에 졸졸 따라붙어서 인지. 나는 내가 퉁퉁 부은 걸 알아 차리고 꾸물꾸물한 기분을 잡아 내는 이주헌이 빠끔할 때 밉다. 나 이거 안 먹는데. 나는 이지엔식스 프로만 먹는데. 그런 거 세세하게 이주헌한테 말해준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생리통은 정신력으로 전부 이겨냈으면서 말이다.


지나간 인연 뭐 어쩌겠냐고

그게 있으니까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거 아니겠냐고

쿨하게 넘길 수 있다고 했던 거

그거 누구였냐?


히터 바람에 꽉 막히는 코를 훌쩍이고 탁센 이브는 얌전히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안 먹을 거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애가 준 거라.


아, 너무 찌질해.









3일 전



해뜨는빌에 최근 신경과민인 사람이 둘이 있는데 유기현과 본인이다. 곧 주기가 돌아오는 본인은 월에 한 번 지독한 기간에 걸린다고 치더라도 멀쩡한 남자인 유기현이 예민해진 이유는 바로 오늘 밤 턱 끝까지 다가온 ‘행사’ 때문이었다. 유기현이 이민혁을 죽이네 마네 하는 걸 가만 듣고 있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 말리는 척을 해보다가 말았다. 근데, 야. 우리 진짜 어떡하냐. 개망했다. 걱정은 내 몫이었다.


이민혁이 자기가 운영하던 브랜드에 댕글 돌아버린 게 몇 달 전인데 그 사이에 그게 대박이 났다. 민혁이가 형원이에게 나 너랑 같이 성공하고 싶다는 투명한 욕심을 내비친 순간 둘은 부쩍 진지해졌다. 채형원을 데려다가 본격적인 앰버서더로 써버린 시기와 맞물려 그 애의 브랜드가 무신사에 입점을 하고 나서는 난리가 난 것이다. 속으로 쟤 저렇게 대박 나서 해뜨는빌 나가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잘되면 좋긴 한데, 말이야.


그러다 2주 전, 이민혁의 브랜드 C가 무신사에서 하는 브랜드 컴업 연말 파티에 초대되었다. 최근 힙한 브랜드들의 네트워킹 파티 같은 거였다. 온갖 셀럽은 다 모이는 그 중요한 자리. 이민혁은 자기가 데려갈 셀럽 리스트를 1분도 안되어서 짰다고 자랑을 했다. 동거인이자 절친으로 알려졌으며 사실 애인인 배우 채형원과, 옆옆집에 살고 있는 유명 크루의 멤버인 임창균, 같은 크루의 이주헌이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그 리스트에 멀쩡하고 성실한 직장인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브랜드 별로 딱 열 명 씩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셀럽들의 파티에 말이다. 유기현과 내 인스타의 팔로워를 합쳐도 500명이 안 되는데.


해뜨는빌 단톡에 리스트를 띡 보내놓고는 바빠서 하루종일 사라진 이민혁을 퇴근길에 붙잡아 연행했다. 잠옷에 똥머리 틀어 올린 상태였지만 이젠 부끄럽지도 않았다. 멀쩡하고 성실한 직장인 중 하나인 유기현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야, 이민혁아. 거길 우리가 어떻게 가냐고 한참 한탄을 토로했으나 너네 입힐 옷이야 당연히 어떻게든 맞춰 줄 거라고 했다.


너! 임창균 파트너, 너! 이주헌 파트너. 이렇게 짝지 골라준 거잖어! 난 셀럽 말고 너네 왔으면 좋겠다고. 아는 셀럽도 없어, 나는! 별안간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따박따박 대답하는 탓에 유기현이랑 멍하게 눈빛이나 교환해야 했다. 눈이 다 충혈이 되가지고 피곤해 죽으려고 하는 이민혁한테 차마 우리는 셀럽이 아니니 쪽팔려서 못 가겠다는 이야기를 결국은 못하고 말았다. 이민혁이 해뜨는빌의 의리를 믿고 우리한테 지금 이걸 토스한 것이다.


그렇게 진짜로 행사 당일이 된다. 뭘 했는지 붓기 싹 빠진 직장인들이 별안간 금요일 오후 반차를 쓰고 해뜨는빌 앞에 나와있다. 본인은 아침마다 런닝머신 뛰러 피티샵 가고 유기현은 사흘을 탄수화물을 끊었다고 했다. 야, 우리 연예인도 아닌데 이게 뭐야. 헛웃음 치다가도 거기 들어가서 연예인들과 셀럽들 사이에서 뻘쭘하게 서 있을 생각을 하면 저절로 기가 허해지는 것이었다.


민혁이가 운영하는 브랜드에는 남자 옷만 주로 있어서, 민혁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브랜드에서 떼왔다면서 초록색 원피스와 발목 위까지 오는 부츠를 어디서 얻어왔다. 입고 거울 앞에 섰다가 웃겨가지고 혼자 푸흐흑 웃음이 터진 것이다. 황당함이 80퍼센트는 될 것이다. 눈물 날 것 같은 거 참으면서도 한참을 끅끅거렸다. 나 이 나이 먹고 이렇게 입어도 되는 거냐고.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치마 입어본 것도 대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은데. 멋쩍게 나가서 서 있으니까 유기현이 나왔다. 이민혁 브랜드에서 블루종 재킷이랑 바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얘는 뭔데 또 잘 어울리나 싶은 거였다. 곡기를 끊더니만 턱에 음영이 생겼다. 세상에.


“야, 넌 왜 연예인 같냐?”

“넌 살이 왜 이렇게 많이 보여.”

“어머.. 누구신데 제 살을 보세요.”

“아니, 그걸 본 게 아니고…….”


어, 택시 잡혔다. 입이 틀어막히자 블루종 벗어주려는 유기현한테 손이나 젓고 데리고 택시 탔다. 크루 애들은 무려 헤어 메이크업까지 받고 오는 일정이라 따로 떼어져서 가는데 기분이 묘한 거였다. 유기현도 그렇고 본인도 그렇고 조금 예민해진 이유가 그런 곳에 있다. 주헌이랑 창균이의 크루도 점점 유명해진다. 곡이야 원래 잘 팔렸었는데 프로듀서로 서바이벌 프로그램 같은 곳에 방송 출연 제의도 오고 그러는 것이다. 몇 번 출연도 했다. 방송 한 번 끝날 때마다 인스타 팔로워가 만 명 씩 늘었다. 이제 임창균, 이주헌. 이름 검색하면 네이버에 프로필이 뜬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랑 계약도 얘기가 나오는 중이다. 유기현이 최 과장의 고집에 상반기 마케팅 기획안을 뒤집고 있는 날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나는 어땠더라. 나야 원래 주헌이가 반짝거려서 좋아했던 거니까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원래 직업이 광고 촬영 현장 가서 아티스트 눈치 싹싹 보는 일인 게 문제였다. 마카롱 한 입 먹고 뱉으려는 모델을 보고 허겁지겁 종이컵 가져다드리는 역할을 했던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헌이랑 그 사람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유기현이 왜 예민한 지 쪼끔 알겠는 것이다.


부쩍 생긴 거리감에 애가 탔겠다. 멀어지지 말라고 끌어당기는 일은 힘에 부칠 테니까. 반차까지 써놓고는 어쩐지 진이 다 빠진 직장인 둘이 택시에 실려 가고 있다.







그런데 반전, 파티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새카맣고 숱 많은 머리를 뒤로 넘겨 세팅하고 입술에 도톰한 것을 얹은 주헌이를 보고 왜 이렇게 잘 생긴 거냐며 기가 막혀 어버버했다. 그 와중에 주헌이 어씨 하씨 으이씨만 반복하고 있다. 누나 진짜 안 되겠다, 집으로 가자고 조르는 얼굴이 반쯤은 진심이었다. 예쁘다는 말. 좋아하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진짜 좋고 쑥스러워서 기분이 단번에 쑥대밭이 된다. 나쁜 의미의 쑥대밭이 아니라 진짜 핑크색 펄이 가득한 폭죽이 터졌잖아.


어떻게 이렇게 입혔냐, 민혁이 형 진짜 짜증 난다. 내내 감탄하고 중얼대던 주헌이는 짧은 치마에 함부로 재킷을 두르려고 들지 않았지만 내가 어디 앉을 때마다 안절부절을 못했다. 누나, 다리를. 어? 이렇게 꼬는 게 어때? 하길래 응, 어어. 하고 다리 꼬니까 하늘 보고 오버하며 한숨 쉬는데 그게 또 웃겨서 한참 웃었다.


유기현도 역시 MBTI대로 기죽지 않고 여기저기서 이야기 잘 나누고 돌아다니는 길이었다. 주헌이랑 창균이네 크루에서 곡 받아서 작업한 유명한 래퍼가 왔다는 소식에 장내가 좀 웅성거렸다. 티비에서나 보던 연예인들도 보여서 칵테일 홀짝이면서 몰래몰래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스태프들이 잔 치우러 다닐 때마다 고맙습니다앙... 하고 어깨 굽혀 말아가며 인사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주헌이랑 창균이가 이 행사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그 유명한 래퍼가 이쪽으로 온다. 오면서 한 무더기 사람을 끌고 왔다. 조금 놀라서 유기현 보니까 놀란 눈치로 일어난다. 둘 다 눈치껏 살짝 자리에서 비켰다. 나나 유기현이나 평범한 직장인인데, 거기서 괜히 애인이니 친구니 해서 자의식이 두툼한 사람들에게 소개 되긴 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옆으로 살짝 빠지는 길, 기현이 쫓아가려다가 사람들한테 길이 막혔다. 아이구 실례할게요, 몸 부딪히지 않게 가려가면서 스튜디오 구석으로 피해 있는 중이었다.


행사가 휘황찬란한 거 보니 다들 고생깨나 했겠다. 대관비가 얼마야, 이게. 스태프들이 왔다 갔다 하는 길목에 앉아 있었다. 혹시나 연락 오면 바로 받을 준비를 하고 핸드폰을 꼭 쥐고 나눠주는 공짜 술도 까먹지 않고 받아 들고 마시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너무 익숙한 얼굴이 다가온다. 처음에는, 연예인인가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마주쳤고 걔가 진짜 또 너무 예뻐졌기 때문에.


“언니!”

“…어?”


흰 나시에 블레이저 재킷을 입은 여자가 한아름 웃으며 다가와 손을 꾹 붙잡았다. 구불구불 넘어가는 웨이브에 흰 얼굴에 레드립은 진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고, 통 넓은 팬츠에 굽 있는 구두를 신은 예진이. 반가워서 웃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면서 머리에 진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와, 이거 비상이네.


“잘 지냈어요? 세상에 여기서 마주치네요!”

“…그러니까!”


구예진은 한 학번 후배이다. 본인과 이주헌이 있던 음악 동아리에 잠시 있다가 나갔다. 남자친구 생겼으니 볼 장 다 봤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홀가분하게 나갔으나 학교에서는 꽤 자주 마주쳤다. 과가 같았기 때문이다. 주헌이와는 3년 반을 연애했다고 알고 있다. 헤어졌다가 만났다가 한 기간을 조각조각 합치면 3년 반, 근데 전체 기간이 한 5년 되니까 사실상 5년 만난 거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기간이다.


언니, 저 여기 행사 진행 담당이에요. 아, 명함 드려야지. [M 브랜딩 디자인 PM 구 예 진] 언니 좋은 회사 들어가셨다고 들었어요. 진짜 반갑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맑게 쏟아지는 질문에 못할 대답도 아니었다. 민혁이라고, 친구가 브랜드를 열어서 초대 됐어. 나 그냥 직장인인데도 부르더라고. 덕분에 이런 데 처음 와봤는데 너무 짱이다. 재밌는 것 같애. 그리고 예진아, 너 왜 이렇게 예뻐졌어? 너무 예쁘잖아.


속도 없지. 한톨도 빠짐없이 진심이었다. 예진이가 이 언니 뭐야, 하고 속으로 비웃었을 수도 있다. 전남친의 현여친이 넋 빠져서 하는 소리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진이는 진짜 예뻤다. 나시 위에 툭 떨어지는 크롬 목걸이까지 그냥 완벽했다. 셀럽들이 와글와글한 파티에서 예진이가 제일 셀럽 같았다. 누가 보면 행사 주최자인 것처럼.


“언니야 말로요. 원피스 진짜 잘 어울려요. 아무나 어울리기 힘든 브랜드인데.”

“아. 나 오늘 이거 입고 5분 넘게 웃었잖아.”


직장인이 이런 옷 언제 입어 보겠어, 하는 말에 예진이 맞죠, 저도 오늘 진짜 힘껏 꾸안꾸한 거에요. 하고는 살갑게 웃어주기까지 한 것이다. 눈을 반짝이면서 언니, 근데 저 언니 봐서 진짜 반갑고 기분 이상해요. 하는 말에도 사이렌은 여전히 굉음을 내면서 머릿속에 돌아가고 있다. 예진이가 밉거나 싫거나 하지 않은 게 큰 문제 중의 하나였다. 왜냐면, 도저히 흠이 없잖아. 못난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주헌이랑 만났겠지 싶어서.


“아, 근데 민혁 대표님이 신경을 덜 쓴 곳이 있네.”


그 애가 자기 귀로 손을 가져간다. 블레이저 소매 아래로 떨어지는 손목에 타투부터 시계가 전부 다 예뻐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제 귀에서 귀걸이를 빼낸 예진이가 다가와 언니, 잠깐만요. 하고는 귓가를 만진다. 아이쿠, 하며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빈 귀걸이 자리에 그 애 귀걸이가 와서 끼워지는데 20초도 안 걸렸다. 예진이는 뒤로 한 뼘을 물러나더니 눈을 가늘게 길게 뜨고 한참 본다. 이제, 됐다. 딱 한끗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았거든요. 웃으며 하는 소리에 아, 하고 멍하게 귀걸이를 만졌다. 빼서 돌려주려고 하는 찰나에 언니! 그거 지금 빼지 말고요. 저를 한 번 또 봐요. 하고 뒷걸음질을 한다. 오늘은 바뻐가지고, 정신이 없어서요. 갈게요? 연락할게요. 언니! 하고는 급하게 사라지는 뒷모양을 보고 허얼…. 하는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좆됐다. 사이렌 안 꺼지냐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이주헌이 구예진이 운명처럼 여기서 다시 마주칠까 봐 불안해진다. 큰일이 난 기분이 들었다. 저 착장에 저 비주얼에 성격까지 좋은 구예진이 다시 나타나서 이주헌 보고 웃어줄까 봐. 벌떡 일어나서 인파 속을 헤매는 길, 기가 막히게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어디야?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까, 앉아 있던 곳으로 갈게. 서둘러 가는 길에 이민혁이랑 채형원을 마주쳤다. 친근한 얼굴들을 보자 이상하게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덩치 큰 둘 덕분에 모르는 사람들한테 어깨빵 안 당하고 안전하게 낑겨갔다.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중이었다.


주헌이랑 겨우 다시 만났다. 걔가 진짜 약속한 그 자리에 어디 가지 않고 얌전히 서 있었다. 한참 찾았어, 하고 손을 찾아 꾹 붙잡길래 그제야 사이렌 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그러다 내가 좀 멍했나. 사이렌 켜진 걸 들켰나. 주헌이가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가 괜찮냐고 몇 번 물어왔다. 사실 괜찮지는 않지만 어, 그럼. 하고 어쨌든 괜찮은 척을 한다. 예민하고 불안한 마음이 주헌이 얼굴로 전부 달래지진 않았다. 언제 어디서 예진이가 불쑥 아까처럼 나타날 지 모르는 일이라서. 주헌이와 예진이의 만남은 인생에서 한 번 겪었으면 됐고, 최대한 안 보고 싶기 때문이다.


파티는 준비한 사람들의 노력의 배신 없이 재밌게 끝났다. 이민혁과 채형원이 탈탈 털린 채로 이제 가자고 하는 말을 신호 삼아 해뜨는빌 전원 파티장에서 빠져나왔다. 내향적인 임창균은 아까부터 집에 가고 싶었던 눈치였고 최대한으로 사회성 끌어 쓴 유기현도 마찬가지였다. 호수 별로 찢어져 택시 타고 해뜨는빌 돌아와서 약속한 듯이 다 같이 모여 호프집에서 맥주 마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집 생맥주가 칵테일보다 오천배 더 맛있었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구예진이 이주헌 앞에 등장하는 일이 없었어서 말이다. 한참 술이 돌고 있는데 창균이 가만히 눈을 들어 입모양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구?”

“…오늘 예쁘다. 누나.”

“와, 세상에. 나 녹음해도 되냐?”

“아, 누나!”


어허잇! 이상한 호통을 치는 주헌이 창균을 째려보는데 왜, 뭐. 뭐. 하고 시비 거는 건 유기현이었다. 아니 근데, 창균이가 저런 말 하는 거 처음이라고. 저 고양이 같은 애가 예쁘다잖아 나 첨 들어봐. 한참을 감격하고 있는 와중에 이민혁이 그럼 쟤가 오늘 예쁜 게 당연하지. 내가 브랜드를 몇 개를 뒤졌는데. 꼭 생색내야 하는 이민혁 실컷 그러려니 냅뒀다.


“근데, 맞어. 이거 옷 예쁘긴 해. 내가 입어서 그렇지.”


말을 뱉어 놓고는 흠칫 놀랐다. 왜냐면 평소엔 이런 자존감 낮은 멘트를 의식적으로도 잘 하지 않았으니까. 이게 뱉어 버리면 진짜가 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머릿속으로 아직도 구예진에 대한 생각을 치우지 못했다. 그 말 덕분에 쏟아지는 해뜨는빌 주민들의 시선을 받아낸다. 그 중 가장 뜨거운 이주헌 눈빛에 아뜨거 상태까지 되었다. 민혁이 댕글댕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쁘다는 말이 자꾸 듣고 싶으신가바여?”

“야. 그게 아니고.”


하여튼 꼬옥 꼬집어서 말하는 거봐, 아주.


“이런 옷은 마르고 바스트 없는 애들이 입어야 더 예뻐.”


난, 있어서. 그래서 좀 안 어울렸다고.


그 말에 기 빨린 채 앉아있던 채형원이 프항하고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꽤나 으스대던 이민혁이 어버버한 방 먹었기 때문이다. 채형원을 웃긴 것과 동시에 이민혁 이겨 먹은 게 통쾌해서 기본 안주로 나온 과자 아득아득 씹어 먹고 있다. 어쩔 줄 모르는 주헌이 입에도 과자 가득 넣어주었다. 이런 얘기 해도 괜찮은 이유가, 내가 이런 얘기를 해도 한 마디를 얹지 않는 애들이기 때문이다. 여자 형제 하나 없는 애들이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거나, 능글거리는 것도 타이밍을 알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잔 부딪히고 민혁이한테 진짜 재밌었다고 짧은 소감을 전했다. 부담스러웠을 텐데 와줘서 고맙다, 답지 않게 얌전히 말하는 민혁이가 부쩍 살이 빠졌다. 돈 버는 거 좋은데 일 좀 줄여해. 몸 상하면 돈 버는 게 무슨 소용이야. 잔소리에 이민혁이 고개를 끄덕거리긴 하는데,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다는 거 알았다. 그러다 문득 형원이랑 민혁이가 대화가 많이 줄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둘 사이의 촘촘함 같은 게 없어진 건 아니라 굳이 말은 얹지 않는다. 내가, 뭐라고.


시간은 변덕 없이 꾸준히 흐르는데 나이를 먹는 일은 가끔 한달음에 일어나는 것 같다.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려도, 오지랖 벌릴 일이 있어도 한번은 꾹 눌러 모른 척하고 넘어가는 거 보니 말이다. 내가 요새는 부쩍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는 말이다.








2일 전





이민혁에게 연락이 온 건 바로 그다음 날, 웬만하면 갠톡 안 오는 애가 뜬금이 없는 시간에 연락을 해와서 좀 흠칫한 것도 있다.


[회사 몇시에 끝나?]


[나 오늘 여섯시??]


[그럼 여섯시에 회사앞으로가겠음]


[???님이왜요]


[밥살게]


[그니까 님이왜용?????]


[고민있어 들어줘]


[알겠음..]

[쫌무서운데 우선 알겠음]


정확히 저 ‘쫌무서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회사 앞에 나가 있으니 진짜로 이민혁이 와있었다. 어제보다 더 초췌해진 몰골로 나타나서 뭐 먹을래, 쉰 목소리로 묻는 말에 너 진심 영양 보충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냐? 하고는 장어덮밥집으로 데려갔다. 음식이 정갈하고 괜찮은데 확실히 이민혁이랑 둘이 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집이었다. 너, 술 안 먹어? 걔가 묻는 말에 여기 술 비싸다고 조용히 대답하니까 메뉴판 들어서 화요 한 병을 시키길래 진짜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보기 시작했다.


“뭔데, 왜 그러는데.”

“…너 폴센 알지.”

“알지.”


유명한 의류 브랜드였다. 옷에 별로 관심 없어도 모르기엔 너무 유명한 브랜드다. 톤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고급스러워서 백화점 가서 선물용으로 니트류나 목도리 같은 거 사서 선물하기 딱 좋은 브랜드였다. 장남 이민혁이 그냥 버릇처럼 수저 놓고 젓가락 까는 동안 나는 물 따라 주고 있다. 거기는 왜? 하고 물어보니까 이민혁이 코로 한숨을 푹 쉰다.


“채형원 거기 모델 제안 깠더라.”

“…헐.”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직업병이라서 폴센의 감각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채도가 낮은 느낌의 채형원은 스트릿 스타일의 이민혁의 브랜드보다도 확실히 얌전하고 차분한 그 쪽 브랜드에 찰떡이었다. 폴센 담당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사람 골라볼 줄 안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민혁은 벌써 아는 눈치였다.


“우리 제주도 갔을 때.”

“어.”

“내가 같이 성공하고 싶다고 그러니깐….”


채형원은 그 말에 단번에 진지해졌고, 이민혁은 브랜드 모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형원이가 그 쯤 갑자기 소속사끼리 묶여서 유튜브 예능 같은 곳에 신인배우로 출연했다가 훅 인지도와 인기가 올라가고, 덩달아 이민혁 브랜드도 빛을 보고 그랬었다. 그러다가 어제, 그 정신 없던 파티 와중에 그 얘길 들었던 것이다. 근데, 이 대표님. 채형원 배우님은 어떻게 섭외하신 거예요? 폴센에서 온 제안도 거절했대요. 그런 말을 듣고 이민혁 속이 어땠을 지 사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브랜드가 승승장구하니까 이민혁은 처음에 신이 났던 모양이다. 불어나는 브랜드 사이즈에 맞춰서 일 하다 보니까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직원을 늘려야 하는데 이게 언제든 고꾸라질 수 있다는 불안을 마음 안에 두고 있었다. 책임지지 못할 사람을 고용하는 일은 무서웠는지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알음알음 알았던 사람들이랑 어떻게든 꾸역꾸역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고 있는 동안에, 채형원은 가만히 기다렸다. 형원이도 스케줄이 점점 많아지는 중이라 그 나름대로 바쁘고 정신 없었지만 민혁이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기를 갈아가며 일하는 이민혁이 자기랑 발을 맞추는 중이라고 생각을 고쳐 먹고 말이다.


“근데,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해서 결국 형원이 앞길 막은 거야.”


한때 오타쿠였던 이민혁의 원동력은 채형원을 향한 마음뿐인데,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애써 키운 제 브랜드가 아직은 그렇게까진 크지 못했는데, 불안하고 어두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 와중에, 사랑하는 애인이자 친구가 저 때문에 더 잘 나갈 기회를 놓친 것 같다고. 이민혁은 현타가 제대로 왔다. 잔에 화요 채워서 쪼르륵 마시는 동안에 민혁이는 답지 않게 입을 다물고 있다. 억지로 먹고 있는 애를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확실히…. 좀 닳긴 닳았다.”


민혁이는 투명할 정도로 자기방어도 잘하는 애다. 그러니까 저런 말에 뭔 소리야? 하고 단번에 온도가 식을 것도 대충 알았다. 비싼 술 시켜줬으니까 푹 찔러줘야 하는 법이다. 민혁이도 다 알고 나한테 온 거라고 생각했다. 유기현도 있고, 임창균도 있을 텐데. 걔네 두고 나한테 온 거면 사실 시니컬한 오타쿠가 둘의 현 상황을 짚어내고 캐해 한 번 제대로 해주길 바라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본 거 아니니까, 우리.


“그거 어쨌든 형원이 선택인 거 알잖아.”

“내가 하자고 달겨들었더니 걔가 지금 맞춰주고 있다니까.”

“야. 채형원이 자아가 없냐, 고집이 없냐.”


걔 내가 아는 서른 중에 제일 고집 세던데. 가끔 유기현보다 채형원이 더 해. 너도 인정하지?


잔 기울이면서 물으니까 민혁이가 눈만 들고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린다. 애인인데 왜 모르겠는가. 채형원 고집 센 거. 폴센이고 뭐고 걔한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고 가장 소중한 건 당연히 이민혁이었다는 거. 걔가 아침은 건너 뛰고 애매한 점심을 먹고 늦은 저녁과 맥주를 마시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이민혁을 선택했다는 거.


“그럼 봐봐. 너 지금 다 가지고 있잖아.”


형원이 너 믿고 너 사랑해서 너 선택했고, 너 지금 브랜드 엄청 잘되고 있지. 근데 너 지금 너무 닳아서 그래. 사실은 불안하고 힘든 거잖아. 형원이 잘 되게 버팀목 해주고 싶었는데 생각해보니까 형원이가 지금 너 도와주고 있는 거 조금 자존심도 상할 것 같고. 맞지? 너만 채형원 챙겨주고 끌어주고 멋진 사람 되고 싶었는데 딱 돌아보니까 채형원이 개멋있는 거야. 가오 상할 만 하지.


“…살살 해라, 쫌.”

“너무 바로 때렸어?”

“나 지금 뼈만 남았잖어.”


아, 짜증나. 툴툴대는 이유는 맞는 말이라는 동의이기도 하다. 입이 댓발 나온 이민혁이 진짜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런 데에 있다. 사람이 꼬이지 않았다. 인정도 빠르다. 불안한 동시에 아주 단순하고 경쾌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민혁을 진짜 좋아했다. 말이 좀 서늘할 때가 있어도 보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해서. 민혁이 내내 빈 잔이었던 걸 내민다.


“이걸? 너 이거 한 잔 마시면 내가 너 업고 가야 되는데?”


줘바! 하고 잔 내미는 거 쬐애끔 채워주니까 장난하냐고 뭐라 해서 한 잔 가득 채워주었다. 잔을 든 커다란 손과 남자답게 뼈대 굵은 얼굴은 누가 보면 술을 궤짝으로 마실 것 같이 생겼다. 객기부리는 게 웃겨서 잔 같이 들어주었다.


“사실 나 백수가 체질인데.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나 솔직히 말하면, 너 그냥 해뜨는빌에서 설렁거리면서 그거 한다고 깝죽거릴 때가 더 보기 좋았어.”

“…나도 그때 만든 옷 제일 좋아해.”


이민혁이 잔을 꺾는다. 한 잔이 전부 걔 몸속으로 들어가는 거 보면서 조금 불안해지는 거였다. 한 잔 더 자기 손으로 마시는 거 보고는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나 채형원 부른다? 나 너 못 데리고 간다고 했다? 으름 놓는 말에 네 맘대로 하라고 해서 결국은 채형원한테 카톡 해놨다. 김포에서 촬영 끝나고 집 오고 있다던 채형원이 30분 만에 도착했다. 이미 새빨개진 이민혁 실신 15분 전이었다. 걔가 요새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못 자고 그랬던 게 여실히 티가 났다. 채형원이 이민혁 둘러업는 동안에 장어덮밥과 화요는 내 카드로 계산이 되었다. 어이가 없네. 내가 이거 꼭 언젠가는 다 받아낸다. 그냥, 오늘은 저 비쩍 꼴은 이민혁 밥 먹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밥집 건물 앞에서 택시 잡고 있는데 민혁이를 업고 있는 형원이 표정이 어둡다. 당연히 그러지. 애인이 말도 없이 친구 만나서 만취를 했다. 요새 특히나 상태도 안 좋았을 텐데. 말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찰나에 너도 술 많이 마셨냐고, 형원이가 물었다. 하나도 섭섭하지 않게 잘 감춘 목소리. 괜히 미안하게. 아니라고 대답하며 코훌쩍이고 우티도 켰다가, 타다도 켰다가 카카오택시도 켰다가 중얼중얼 바쁘다. 요새 택시가 잘 안 잡혀, 형원아.


“얼마나 마셨어?”

“…그냥 화요 한 병? 이민혁이 두 잔 반 뺏어 먹은 거 빼고.”

“두 잔 반?”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채형원이 허탈하게 웃는다. 술을 궤짝으로 먹는 채형원과 두 잔 반에 실려 가는 이민혁이 지지고 볶고 연애하고 있다는 건 가끔 굉장히 새삼스럽다. 이민혁이 단순하고 경쾌해서 사랑스럽다면 정반대의 의미로다가 형원이는 좀 애틋한 구석이 있다. 궁금하고 속상해도 우선은 감춰두고 보는 저 새카만 속이. 그러면 나는 또 못 참는다. 어느 날은, 내 오지랖이 진짜 바다를 덮을 것이다. 그 언젠가 신점 보러 갔을 때 무당 아줌마가 그랬듯이.


“너 폴센 거절한 거 민혁이가 알더라. 속상했나 봐.”

“…….”

“자기가 앞길 막네 어쩌고저쩌고 한탄하던데, 그건 다 뻥인 거 같고.”


너한테 존나 멋진 기둥이 되고 싶었는데 네 도움 받으니까 자존심 상했는 지도 몰라. 네가 도와주는 거 잘 해내고 싶으니까 압박감 엄청 심한 가봐. 밥도 잘 못 먹더라, 애가. 좀 쓸데없고 귀여운 가오가 있는 것 같애. 이민혁은.


조용히 말을 하고 있는데 업힌 민혁이 형원의 어깨에 대고 작게 앓았다. 형원아. 이름 세글자 조용히 이름을 부르면서. 민혁이는 형원이의 어깻죽지의 모양을 이마로 만져도 알 것이다. 십년이란 건 그런 세월이니까. 그쯤 너무 늦지 않게 택시가 잡혔다. 따로 타고 가야 하나 머리 굴리고 있는데 형원이 민혁을 태워 놓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뒤에서 형원이한테 부비적거리는 민혁이 뭐라고 중얼대기는 하는데, 형원이 그냥 짧게 조용히 대답을 해준다. 서울 뚫고 가는 택시, 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들었다. 가는 길에 집에 잘 들어가고 있다고 주헌이한테 카톡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형원이 민혁을 업어야 해서 이민혁 가방이랑 겉옷을 들어 주었다. 업힌 민혁이와 업은 형원이를 따라 해뜨는빌 계단을 오른다. 그 계단에 조용한 말이 웅웅 내내 울리는 것이다. 안 듣고 싶은데, 너무 또렷해서 다 들렸다. 발음은 다 뭉개졌지만 마음만큼은 누구처럼 선명한 탓이다.


형원아

나 잘하고 싶은데

잘 안돼

그래도 너 좋아해

나 좀 힘들어서

힘 빼려고

그래도 좋아해

그건 대충 안 해

그리구..

나 오늘 장어 먹었다?

너 오늘 주거써


아, 이 꽉 깨물고 웃음을 참고 있는데 2층에 올라 버렸다. 아, 개소리야. 조용히 짜증 내며 좀 붉어진 형원이 얼굴 마주 보자 마자 웃음이 터졌다. 203호 오늘 큰일나시겠어요. 놀리는 동안에 손 없는 형원이가 도어락 좀 눌러달라고 중얼거린다. 얘네는 이제 뭐 가리는 것도 없이 외간 여자한테 자기들 도어락 비밀번호도 다 불었다. [140330] 눌러줬더니 부츠 신은 발로 열린 문을 잡아낸다.


그럼 나는 간다? 말하니까, 형원이 얼굴이 할 말이 참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근데 말 안 해도 알 것 같은 거였다. 나도 형원이를 좋아한다. 십년을 쌓아온 이민혁의 발 끝도 못 따라가겠지만 말이다. 작고 소중한 한 뭉치의 우정 같은 거. 구태여 고맙다는 이야기나 오늘 신세 졌다는 말 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다 전해지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낼 출근 잘하고.”

“너도. 잘 자라.”


현관문이 닫힌다. 해뜨는빌 2층 입주민 모두가 뒤늦은 귀가를 마쳤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아직 안 자고 있을 사람에게 전화를 한다. 이민혁 대사를 표절할 것이다. 술김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나도 말해줘야지. 좋아해. 그건 대충 안 해. 오글거리고 귀여워서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주헌이 이름 위로 엄지를 가져가는데, 카톡이 도착했다. 아이폰 화면 상단에, 하나씩. 툭. 툭. 떨어지는 메시지.


[으악 언니]

[답장 늦어서 죄송해요ㅠㅠ 일이 바뻐가지구]

[연락 완전 기다렸어요!!!!]

[우왛ㅎㅎ 아직 번호 안바꿨네요?]

[내일 어떠세요? 점심 먹으러 가도 돼요?]


맞다. 나한테는 돌려줘야 할 물건이 있다. 겁나 비싸 보이던 그 귀걸이의 주인을 찾아주려고 오늘 늦은 오후에 보낸 카톡에 자정이 다 되어서 답장이 온다. 오글거리고 귀엽고 주헌이를 꼭 깨물고 싶던 마음은 푹 식었다. 그래, 내일 보자. 담백한 척 하는 답장을 보내놓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우울이 수용성으로 씻기는 거라면 저의 이 비틀어진 마음도 수용성이게 해주세요. 싹싹 빌면서 씻어야만 했다.








1일 전 




오피스 빌딩 사이에 위치한 1인 샤브샤브 전문점. 귀걸이는 예쁜 메모지에 둘둘 감아 포장했고, 집에 잘 보관해두던 인센스 스틱과 홀더를 같이 작은 쇼핑백에 담아 내밀었다. 아휴, 언니. 뭘 이런 걸 다 주세요. 꺼내 보고 흠뻑 기뻐하고 좋아하는 얼굴에 안 그러려고 하는데 마음이 살금 녹는 거였다. 그러면 동시에 정신 차리라고 누가 심장에 주먹질을 하는 것 같다. 마음은 쑥대밭이 된다. 핑크색 펄 아니라 시커먼 우박이다. 예진이가 맨들맨들 사랑스러울수록, 스멀스멀 기어 오는 나의 어둠.


그래도 주헌이 구여친 만나는 자린데 좀 신경 쓴 나랑은 다르게 예진이는 쌩얼에 립스틱을 하나 바르고 라이더를 툭 걸치고 나왔다. 안에 입은 이너는 시스루였다. 손목과 손등을 덮는 옷이 고혹적인 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저런 과감한 옷은 직장인에게는 꿈도 못 꿀 복장인 걸 문득 알아챈다. 완전 래퍼 여친 그 자체네, 속으로 생각했다가 저도 모르게 혼자 자괴감이 이마를 찍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려고 기를 써야만 한다.


“언니. 저 만나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저라면 안 나왔을 거 같아요. 저 안 좋게 생각하실 것 같았거든요.”

“하나도 안 그렇다고 하면 뻥이구.”

“역시. 저 언니 스무살 때부터 되게 좋아했어요. 솔직하고. 당차 보여서.”


근데, 언니 저 그때는 너무 힘들더라고요. 주헌이랑 워낙 오래 만나기도 했구, 다른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결국엔 그 사람이랑도 오래 못 만났어요. 좋아하긴 했는데 아마 사랑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주헌이 같은 사람은 없더라고요. 걔는 영원히 제 이상형이에요.


그 말에 집게를 들고 있다가 가만히 멈췄다. 둘이 같이 먹으라고 나온 버섯을 걔 냄비에 듬뿍 넣어주고 있던 내가 뭐가 되는 거지, 지금.


“너, 뭐해. 지금?”


악의는 없었고 다만 날카로워진 것은 인정한다. 오늘 아침에 기다린 듯이 생리 터졌다. 결국엔 내 얼굴에 침 뱉는 거라고 생각해서 감춰두던 무른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뭔 망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멍청한 여주인공도 아니고, 못 알아먹어 아방하게 굴 것도 아니었다. 먹을 만큼 먹은 나이였다. 걔를 마주친 후 묘하게 낮아진 내 자존감을, 그 애가 잘근잘근 건드리고 있었다는 것도 그 순간 알아챈다.


아. 나는 내가 문젠 줄 알았는데 보니까 딱히 그것도 아니잖아. 내 얼굴에 내 움푹 팬 마음이 드러났을 텐데 예진은 웃었다.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간다. 도톰한 입술은 부르트지 않았다. 단정한 손톱에 매트한 젤네일, 깔끔하게 정리된 눈썹. 트러블 하나 없는 피부. 손가락마다 끼워진 실반지, 부드러운 머릿결. 전부 다. 잘 사는 티가 나는 애. 그게 단순히 부를 뜻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너무 소중히 아끼는 게 드러나는 애였다.


“저 아직 주헌이 좋아해요. 그거 말하러 왔어요.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래?”

“…네.”

“어디가 그렇게 못 잊겠는데.”


그런데 나는, 굴하지 않고 웃으면서 그 애 냄비에 버섯을 넣는다. 이건 오지랖 아니었다. 타격이 없어 보이는 나를 보고 예진의 눈썹이 살짝 내려간 걸 보았다. 나쁜 애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주헌이랑 5년을 만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얘한테 스쳐 간 시간에 주헌이가 묻어 있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되묻는 거였다. 넌, 뭘 그렇게 못 잊어서 아직도 그 애를 사랑하느냐고.


예진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자기의 삶을 통틀어 그 애만큼 하고 싶은 게 확실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애는 못 봤다고. 잘 웃고, 누군가의 이목을 쉽게 끌고. 언니, 걔요. 지금처럼 곡 쓰기 전에는 예전엔 창균이랑 공연도 가끔 했어요. 그러다 크루 만들어진 거고요. 공연가면 진짜 너무 걔가 자랑스러운 거예요. 잘하는 일들이 너무 많고 재주가 넘쳐서 꼭 무슨 축복이라도 받은 애 같다는 이야기들. 나는 거기에 맞장구도 쳐준다. 맞아, 주헌이가 진짜 확실히 그렇긴 해.


우리 앞으로 나온 음식들을 모조리 다 먹고, 계산을 깔끔하게 하고 나왔다. 언니 제가 커피 살게요, 하는 말에 걔가 찬 디올 시계 대신 애플워치를 보면서 코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지, 나 두 시 반에 회의가 있어. 그랬더니 걔가 손에 스타벅스 커피를 쥐여주었다. 마시멜로우 눈사람이 올라간 라떼였다. 고마워, 예진아. 잘 마실게. 인사 하고 들어가던 길에 편의점에서 베아제를 하나 사서 까먹고 들어갔다. 네 시쯤엔 먹은 거 다 토했다. 눈사람까지 전부다 뱉어내고 나서 회사 세면대에 멍하니 서서 퀭해진 얼굴을 마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댓가인가봐.

반짝거리는 걸 꿀꺽 삼켰으니 그 빛에 찔려 죽는 것이다.

이게 무슨 성경도 아닌데, 씨발.








[누나 오늘 퇴근 언제해???]


[나 아직ㅠㅠ 못했는데 아이고]


[얼굴 잠깐 봐도돼???]

[보고싶은데]


[오늘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ㅠㅠ 일이 바쁘넹]


[회사진짜나쁘다]

[기다릴수있어!!! 작업실에 있을게]

[역 앞에 데리러갈게]

[안괴롭히구 딱 보내줄게]


[나 오늘]

[택시 탈 것 같으니까]

[택시타면 카톡할게!]


[응!!!!!]

[늦어도 되니까 꼭 연락해]


[세상에 아직도? 내가 송과장 엉덩이 차주까???????]


[페이스톡] 3:29

[오늘 못만나서 미안해]


[누나]

[오늘 푹 자]

[많이좋아해]


[응 나도]










그날




나도 내가 못났다는 거 안다. 비뚤어져도 한참 비뚤어졌다. 내가 이렇게 속알맹이가 작은 여자인지 인생 전반을 치열하게 훑은 후였다. 어제는 못한 일을 다 싹싹 긁어모아 야근을 자처했다. 늦은 저녁 택시를 타면서 페이스톡을 걸던 마음이 생생하다. 근데 그 화면에 잠깐 얼굴이 퉁퉁 부었었는지, 아니면 진짜 티 안 내려고 했는데 꾸물거리는 마음이 다 들켜버린 건지. 아침 댓바람에 문고리에 걸려 있던 생리통 약에 풀썩 고꾸라져버린 기분은 전혀 극복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생리 둘째 날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개패버릴 수 있는 날.


해뜨는빌 계모임 단톡에 술 먹을 사람 외치려다가 그 방에 주헌이가 있다는 사실도 금세 깨닫는다. 한참 모니터를 끔뻑거리며 바라보다가 연락한 건 창균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가만히 이야기를 좀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기도 했다. 창균이야 말로 주헌이를 제일 잘 알고 구예진도 알고 있을 사람이니까.


[창균아, 누나가 술 한바가지 살테니까 오늘 한 잔 해줄텐가?] 이상한 오타쿠처럼 묻는 말에 걔는 두어 시간 있다가 응. 좋아. 하고 담백한 답장을 보내주었다. 퇴근하고 전화하니까 늦지 않게 호프집으로 왔다. 좀 신기한 조합이었다. 둘이 만난 일이 없던 건 아닌데, 그때는 둘 사이에 이주헌이라는 존재가 없을 때였다. 그다음부터는 늘 셋이었다.


“누나. 주헌이 형한테는 뭐라고 했어?”

“그냥, 야근한다고.”

“…아.”

“모르는 척 해주라.”

“…응. 그거야, 뭐.”


창균이가 소주나 맥주 같은 술 안 좋아하는 거 아는데 오늘은 비겁하게 내 맘대로 술집을 골랐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 집인 호프집이다. 해뜨는빌 사람들과 다 같이 모여있다가 이주헌이랑 다시 재회한 그 호프집. 나중에는 누나가 꼭 위스키랑 와인 사줄게? 하는 소리에 창균은 그냥 웃는다. 누나, 나 이것도 좋아해. 하면서 자기 얼굴보다 큰 생맥주잔 드는데 맞춰주는 게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힘 빠지는 웃음이라도 작게 돋는다.


“무슨 일 있구나?”

“…아니?”

“없어?”

“응. 없어. 아직은 없어. 나 아직 안 취했어. 너는 쪼끔만 마셔라. 나 유기현한테 잔소리 듣기 시러.”


두 세 모금 쭉 마셔서 삼분의일쯤 빈 생맥주잔에다가 참이슬을 부었다. 꼴이 예쁘지 않을 테지만 창균이는 별로 말리지 않는다. 왜냐면 창균이는 내가 이러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술 못 마시는 이민혁과 주종을 좀 가리는 창균이를 빼고는 채형원 유기현 이주헌과 있다면 늘 이런 식의 술자리만 한 트럭이었다. 걔들은 주량이 소주 세 병이니까 내가 거기까진 아니어도 꽤 먹으니까. 술 좀 먹으니까 괜히 기현이한테 좀 찔려서 입을 열었다.


“너.. 기현이랑은 잘 얘기했어?”

“…뭘?”

“아. 그. 너 막 소속사 들어가는 거. 막 유명해지고 그러는 거 말야.”

“웅.”

“일반인 남친이 신경 쓰면 어쩌나 해서.”

“잘, 얘기했어.”


형은 괜찮았어. 내가 더, 괜히 생각 많아져서 계약 두고 한참 망설이니까 왜 망설이냐고 그러더라고. 난 막 유명해지고 싶거나 그런 건 아니었거든. 하고 싶은 음악이 있고, 계속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내가 안 그래도 너무 안정적으로 잘 사는 형이랑 좀 다르게 생겨먹었는데. 내가 불안해하니까 오히려 형이 단단해지더라. 계약 했으면 좋겠다고 형이 먼저 그랬어. 그 형이 진짜…. 또렷한 사람이잖아. 그치, 누나.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 해뜨는빌 사람들은 안 또렷한 사람이 없지. 나는 아주 조금은 몰래 불안해하던 유기현이 자기를 파고들지 않고 더더욱이나 단단해졌다는 점에서 난데없이 위로를 받는 중이다. 그렇지, 멀쩡한 대기업 종사자는 구태여 작아지지 않는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는 걸 기현이는 안다. 그러니까 흔들려도 중심이 확실한 것이다. 불안해하는 창균이에게 확신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아. 짜증 난다. 너 이거 유기현한텐 절대 말하지 마.”

“?”

“유기현 멋있는 거. 걔 그거 알면 좀 재수 없을 거 같애.”

“…어우, 유기현은 이미 재수 없지.”


아. 그 말에 뒤로 넘어가면서 웃었다. 창균이 시덥지 않게 굵고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들이 가끔 타격감이 진짜 좋았다. 웃겨 놓고는 뿌듯한 지 따라 웃던 창균이가 보기 좋아서 괜히 가만히 몇 개의 이야기를 보탰다. 일반인 직장인 입장에서 그 파티를 가는 게 어떤 작은 곤혹이 있었는지. 유기현이 며칠을 곡기를 끊었는지. 아? 그래서 형이 밥 안 먹은 거야? 하는 소리에 어이가 없는 거였다. 유기현이 그 와중에 자기 애인 앞에서는 가오 세운 게 귀여운 편이다. 어이가 없다. 진짜로.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가 해뜨는빌로 돌아온다. 개중에는 추억팔이도 있었다. 우리 제주도 진짜 재밌었지, 다음엔 동남아 가자. 한 달에 5만원씩 모임 통장에 모을까 봐. 창균아, 너 근데 예전에 그거 상처는 안 남았어? 그 이상한 스토커 새끼 뚜까패던 날에 있잖아. 요거? 보여주는 손등에 아주아주 희미하게 어린 상처 빤히 들여다보다가 메뉴판 두드리면서 너 여기서 제일 비싼 거 시키라고 하는 동안에, 삼킨 술이 생맥주 네 잔. 그 위로 소주 한 병 반을 섞었다. 화장실을 두 번째 다녀오는 길, 창균이가 주문 안 한 거 타박할 각오로 테이블로 가는 길에 저도 알았다. 몸의 축이 휘청이는 거. 창균이가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일어난다. 어잇! 나 괜찮아! 손바닥 들어 보여주고 얌전히 자리에 앉는다. 내가 원래, 술 취해도 얼굴색이 안 변한다. 다들 그렇게까지 만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더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원래는 이쯤에 그만둔다.


“누나…. 괜찮아?”

“어. 더 마실 거야. 낼 토요일인데.”

“그건 그렇긴 한데….”

“너 왜 안주 안 시켰어?!”

“배불러.”

“너 진짜 요새 뼉다구만 남은 거 누나가 다 알어. 더 먹어.”

“…누나.”

“응.”

“무슨 일인데?”

“…….”

“말 안 해줄 거야?”

“창균아.”

“응.”

“나, 좀 구린 것 같애.”

“어?”

“예진이 알지? 걔를 우연히 만났거든.”

“…….”

“와. 너무 예쁘구 사랑스럽구.”

“…….”

“심지어 솔직해. 주헌이 다시 만나고 싶대.”

“……아.”

“기분이 구렸어. 아니 뭐 이미 나랑 사귀는 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넘겨야 하는데. 걔가 예쁘더라. 예진이랑 주헌이 사이 시간이 5년이잖아. 난 모르는 시간 같은 거 생각하면 내가…. 속이 꼬여.”

“….누나 나는.”

“응.”

“누나 편이야.”

“…머?”

“누나가 무조건 이겨.”

“역시. 너는 내 편일 줄 알았다.”


잔 들고 짠하니까 잔을 들어주는 창균이 표정이 어땠더라. 너는 임마, 당연히 누나 편이어야지. 누나가 너를 진짜 좋아하거든. 아고, 그 좋아한다는 말이 창균아, 이상한 의미는 아니고, 우정이라는 거야. 나는 요새 우리 우정에 대해 가끔 생각을 해. 창균이 너랑 나랑 우리 우정에 대해서. 그 씨바. 미친 스토커 새끼 뚜까패던 너의 마음 같은 거 있잖아? 나는 그런 거 생각하면 가끔 내가, 너무. 내 팔자에, 내 그릇에 비해. 아주 아주 과한 걸 가진 것 같애. 그래서 꼭 언제든 뺏길 것 같애. 괴도 루팡이 예고장 날린 것 같아. 내가 이걸 지킬 수 있나? 근데 상대가 괴도 루팡이잖아. 어떻게 지켜. 나 같은 게. 근데 나 구리긴 해도 그렇게 거지 같진 않은데, 창균아. 아 미안, 나 쬐끔 취하긴 했나보다. 너 이거 진짜 안 먹을 거야? 누나가 다 먹는다? 너 진짜 연예인 될라구 그러는 거야? 살 좀 쪘으면 좋겠어. 너 밥 먹는 거 보고 싶어.


“…나도.”

“엉?”

“누나 나한테 좋은 친구야.”

“…와.”


있잖아, 누나는 아는 것도 많고, 감도 좋아. 예쁜 걸 잘 찾아내고 사람을 대할 때 친절하잖어. 기현이 형이 누나 본 지 며칠 안 됐을 때부터 누나 진짜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그랬어. 나는 우리가 가끔 힘든 일이 있어도 누나가 불행 배틀하지 않아서 좋아. 가끔 짜증은 내도 진짜 힘든 일 잘 얘기 안 하잖아. 근데 누나. 티 안 내고 잘 참는 것도 누나 장점인데, 이제 나 친구니까. 그러니까 얘기해도 괜찮아.


“…있잖아. 그럼, 혹시 창균아.”

“응.”

“주헌이가.”

“응.”

“예진이를 못 잊었을까?”


이 호프집이 양념 순살 치킨이 진짜 맛있는 집이었다. 나는 왜 만취하면 못 참고 입에 뭘 집어 넣는지 모르겠다. 사실 저걸 물어보는 마음은 진작에 울고 있는 마음이었는데 꾸역꾸역 뭘 씹으면서 겨우 삼켰던 것 같기도 하고. 속 안 좋은데 왜 이러냐. 점점 정신이 어룽어룽해진다. 누나,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만, 하고 말하는 동안에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린다. [주허니] 핸드폰에 커다랗게 뜨는 이름에 창균이 가만히 입을 다문다. 티슈 뽑아 내밀어 주는 거 잡아 들고 입가를 닦아내며 전화를 받았다.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어, 주헌아.”


(나 멀쩡해 보이지?)

창균이한테 눈썹 꿈틀거렸는데 걔가 그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한다.


-누나?

“어, 응.”

-어디야?

“어... 그. 회사 동료랑 저녁 먹어.”

-지금 열신데?

“…늦은 저녁을? 먹고 있나 본데.”

-누나, 술… 마셨어?

“…….”

-어디야?

“걸리버... 호프집.”

-금방 갈게. 나 해뜨는빌 가는 길이었어.


전화 뚝 끊긴다. 나는 주헌이가 뛸 거라는 걸 잔뜩 취해도 안다. 어뜩해? 주헌이 온다는데. 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린다. 나 꼬라지가. 오늘은 진짜, 진짜로 최악일 것이다. 아, 쿠션을 회사에 두고 온 것 같애. 엉성하게 거울도 없이 립스틱을 슥슥 발랐는데 창균이가 웃으면서 누나, 나 봐봐. 하고는 티슈 가져다가 삐져나간 곳을 닦아내준다. 엄지로 닦아주다가 안돼서 티슈가 동원되었다. 그 와중에 또 잔을 드는 걸 창균이 말렸는데, 결국엔 주헌이 오는 동안에 남은 맥주가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속으로 사라졌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동시에 창균이 눈을 맞췄던 걸 가까스로 기억한다. 고양이의 눈짓 같은 것. 꼭대기까지 취해서 내일은 가물가물해질 기억에도 그건 확실하다. 왜냐면 창균이 답지 않게 빠르고, 정확하게. 래퍼처럼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만큼은 구예진이 못 봤을 거라고 확신한다.


“누나.”

“응.”

“…죽지마.”

“나 안 죽었다구? 아직….”

“기죽지 말라고.”

“응.”

“누나는 누나니까.”

“너 이 새끼….”


너 진짜 나 좋아하는 구나. 우리 우정 말이야. 그런 건 너무 고맙긴 해. 뛰어 들어온 주헌을 보고 창균이 뜨거운 불똥을 피하듯 일어난다. 짱균이 어디가? 묻는 말에 집 가야지, 하는 당연한 대답을 해서 취한 탓에 고개를 절로 끄덕거렸다. 창균이 사라진 자리를 파고들어 마주 앉은 주헌이를 본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웃지 않고 있는 이주헌. 아이고. 쿡쿡. 심장과 아랫배가 동시에 아프다. 늦은 오후에 먹은 이지엔식스의 약효가 바닥을 치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온다. 내가 야근한다고 구라를 쳤는데 화도 안 내고, 삐지지도 않고. 답지 않게 말없이 얌전한 주헌이 얼굴에 대고 갸웃하다가 말았다. 화가 나는 걸 참는 건가 싶었지만 만취한 정신은 차마 그걸 해석할 생각도 없다.


“주헌아.”

“응.”

“나 있잖아.”

“어.”

“그거… 뭐더라?”

“응?”

“탁센 이브.”

“…….”

“그거 안 먹어.”

“…….”

“나는 이지엔식스만 먹어. 배 아프면.”

“…….”

“그러니까 주헌아.”

“응.”

“딴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

“부탁이야.”


주헌이 얼굴이 너무 어룽어룽해서 어지럽고 힘들다. 꾸역꾸역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다가 답지 않게 울어버렸을 것이다. 내가 애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일 안 풀린다고 우는 게 맞나. 스스로 황당한 마음으로 자책하는 동안에 서러움은 왜 끝도 없이 차오르는 지. 마주 앉은 사람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아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울어? 하고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자, 주헌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내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나가, 울지.


“그래? 미안.”

“…뭐가 미안해.”

“우는 거. 주책이라서. 이거 주정인가부다.”


아휴, 서러워 죽겠네. 새빨갛게 벗겨지는 내 마음이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울었나. 좀 예쁘게 울지. 그것도 아니라 주먹으로,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울었다. 구예진이었으면 달랐을까. 그 와중에도 그 얼굴을 떠올리다가 서러움이 복받쳐서 이젠 손바닥으로 눈을 부비면서 울었다. 와, 나 진짜 가오 없다. 이민혁한테 뭐라고 할 인간이 아니었다. 근데 주헌아, 나 진짜 인생을 되짚어도.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 네가 그거 하나는 진짜 알아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겨우 물 먹는 숨을 들이키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앞에 아무도 없다. 이주헌은 옆에 와있었다. 그 애가 가만히 어깨를 쥐고 뒤통수까지 손바닥에 꾹 감아 안아준다. 이쯤 되니 취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금니를 깨물었어야 하는데 송곳니끼리 부딪혀 울음이 새었을 것이다.


나는 뭐 하나 잘 맞아떨어지는 예쁜 구석이 없다.

쪽팔리게 말이다.









에피소드 열넷

그날엔










다시, 3일 전




창균이 보기엔 예쁘고 괜찮았는데, 누나가 입은 조금 짧은 옷 때문에 주헌이 형이 자꾸 신경을 쓰는 중이다. 근데 신경 쓰면서도 함부로 옷으로도 못 가리고 절절 맸다. 자신의 질투보다도 누나 기분 하나는 진짜 열심히 신경 쓰고 있다. 내내 형이 신경 쓰는 걸 보면서 속으로 사람도 변할 수 있구나 생각한다. 형이 진짜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특정한 부분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말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르고 있는 시간 때문인지, 새로 시작한 연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형은 좀 더 형이 되었다. 더 이주헌답고 더 어른스러워지고.


복잡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정신이 한참 없던 동안에 창균은 주헌과 함께 있는 예진을 발견했다. 둘은 짧은 대화를 했고 곧 예진이 사라진다. 남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창균도 좀 뜨끔하긴 했다. 창균은 주헌과 예진이 어떻게 헤어졌는 지 제일 잘 아는 최측근이었고, 형이 대체로 행복했으면 하는 이주헌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누나를 살폈다. 기현과 나란히 앉아 칵테일 속의 크랜베리를 호기심에 먹고 뱉을 기세로 인상을 찌푸린다. 예진과 주헌이 마주친 건 전혀 모르는 눈치이다.


주헌이 형한테 슬쩍 가서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 주헌이 형은 이마나 매만졌다. 술 한잔하자고 그러지, 생각 없어. 짧고 무심한 대답에 괜히 다행인 기분이 들었다. 사실 창균은 예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주헌이 형이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겠지만, 그 누나는 너무나 필요할 때만 형을 찾았다. 형이 가장 반짝반짝 빛나던 때에는 옆에 꼭 두고, 형이 좀 낮아질 때는 가차 없이 버렸다. 금수저에 좋은 학벌에 외모까지 갖춰 부족한 게 없던 그 누나한테 형은 보석 같은 존재였을 거라고 창균은 그다지 많은 만남을 가지지 않고서도 알았다. 주헌과 창균이 게스트로 나오던 공연에 한 번을 오지 않은 이유도 있다. 크루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이름을 걸고 작은 홀에서 단독 공연을 하던 날에야 얼굴을 한번 비췄다.


그런데 주헌이 형이 왜 그 누나를 만났는 지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응원이 필요하고 지지가 필요할 때 맑고 밝은 예진은 적재적소에 주헌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존재였다. 다들 한 구석 아픈 곳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살아갈 때 예진이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쉽게 가벼운 수다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오빠가 유학하다가 갑자기 눈이 맞은 여자를 데리고 와서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만, 엄마가 하는 수 없이 신혼집이고 호텔이고 벌써 보러 다니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 누나의 걱정은 그런 것 뿐이었다. 호텔 결혼식 싫은데, 어두컴컴해서. 사는 데에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사로이 부딪히는 현실의 턱 같은 건 전혀 고려 하지 않는다. 한때 낮엔 알바하고 밤에 비트 찍던 주헌이 형에게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부채질을 해주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맞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주기적으로 사람에게 아픈 흔적을 남겼다. 형이 그만하자고, 몇 번이나 헤어짐을 고하는 걸 봤다. 그러다가는 또 만나는 거였다. 구예진의 멘트는 한결 같았다. 내 이상형은 너 밖에 없다고. 세상 모든 남자들을 둘러봐도 너 같은 애는 없다는 말. 형은 이상하게 이상형이라는 말에 저항을 못했다. 누가 그런 말을 형한테 눌러놨는지는 몰라도 이상형이라는 말만 나오면 슬슬 녹아 다시 얽히는 거 창균만 알았다. 또 헤어지겠지. 그런데, 알았어도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어쨌든 남의 연애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형이 구예진을 다시 마주치고는 평온해서 놀랐다. 이제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창균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주헌이 입술을 꽉 깨물면서 그 자리에 있던 칵테일들을 한 잔 씩 소리 없이 삼키기 시작한 건 지금의 애인이 살짝 사라졌다가 다시금 나타난 순간부터였다.


주헌이 형이 자기 크루와 지인들한테 누나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할 때마다 살살 웃으며 잘 피해 다니던 그 누나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그 순간. 창균의 눈에도 보였다. 누나 귀에 걸린 그 귀걸이 말이다. 주헌이 형이 아주 오래전, 예진이 누나를 사랑하던 시절에 무리해서 선물한 귀걸이였다는 거. 우리 모두가 각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 누나가 귓가에 반짝이는 그것을 달고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맑고 밝은 탓에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걸 창균은 안다. 그래서 굳이 입을 열어 누나한테 거짓 없이 용기 내서 얘기한 거였다. 누나, 오늘 참 예쁘다. 남 일에 신경 쓰고 싶지도, 신경 쓰지도 않지만 이상하게 그런 말 한 마디쯤은 그 누나 귓가에 걸어두고 싶었다. 다른 흔적을 덮을 수 있게.









1일 전



자정이 넘은 시간, 한밤중에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입고 해뜨는빌 2층을 서성거리던 사람을 발견한 것은 형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새카맣게 입은 형원은 아이고 깜짝이야, 하고 높지 않은 목소리로 놀랐다. 그리고는 후드를 뒤집어쓴 주헌의 얼굴을 확인하고 오르던 계단을 멈추어 섰다.


“너 뭐해?”

“누나가 잠들어서.”

“전화 안하구?”

“…아플까 봐. 아파서 잘까 봐.”

“아프대?”


그냥, 느낌이 그래. 주헌의 말을 듣고는 어제 늦은 밤에 취한 민혁을 데리러 갔을 때는 그 애가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던 것 같아서 갸우뚱한다. 그러다 이주헌 손에 주전부리와 약이 한가득 들린 걸 보고는 그냥 은연중에 대충 눈치채는 것이다. 한참을 알고 지내도 형원은 아무런 눈치를 못 느꼈는데, 역시 애인은 다른가 싶기도 하고.


그러자 형원은 기분 좋은 작은 이질감도 들었다. 맨날 크항항 웃고 다니고 사람 웃기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는 202호 커플이 도대체 친구인지, 선후배 사이인지, 개그맨인지 가끔 생각했던 것이다. 근데 사실 203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바깥에서 보기엔 툭툭 정 없는 말이나 하는 친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연인 사이는 다르기 마련이구나. 카톡을 몇 개 보내놓고는 혹시라도 연락이 되길 기다렸던 건지, 주헌은 머쓱한 얼굴로 그냥 그걸 문고리에 가만히 걸어둔다. 지나 봐, 중얼거리면서.


“그냥 가?”

“가야지.”

“무슨 그런 얼굴을 하고 가려고.”

“왱?”

“뭔 일 있는 얼굴이구먼. 맥주 한잔할래?”

“…시른데.”

“아 왜.”

“민혁이 형 요새 피곤하잖아.”

“아냐, 순한 맛이야.”


그 형이 언제부터? 어제까지도 독기 가득 이민혁 아니었어? 그 말을 하면서 주헌이는 벌써 따라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형원은 그냥 웃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민혁은 어제 잔뜩 취해 들어와 아침에 술이 깨자 마자 급하게 나갔다. 야, 해장이라도 하고 가. 걱정하는 말에. 응, 나 밥 꼭 챙겨무글게. 하고는 사라져버려서 형원은 의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민혁과 절친하다는 이유로 그 브랜드의 모델을 했다는 거 다들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관계자가 좀 놀란 눈치였다. 그 브랜드가 패션 플랫폼에서 싹 철수한다고 했다네요? 그 소리에 형원은 그러냐고, 담담히 대답하고 말았다. 아까 전화 하는 거 보니까 모든 판매 플랫폼에서 철수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하루에 일정 시간만 프리오더로 주문을 받을 거라고 했다.


담담한 척 했는데 괜히 걱정이 조금 돼서 전화를 했더니 민혁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만 하고 싶다고 말했고, 그날 바로 사이트가 터졌다. 이민혁의 행보는 늘 이런 식이었다. 되도 않게 사람이 몰리자 민혁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만, 터진 채로 사이트를 냅뒀다. 최소한의 C/S만 하고는 그마저도 업무 시간 종료 되자 형원에게 얼른 집으로 들어오라고 카톡 중이었다. 채형원은, 제멋대로 대충 살아도 그게 가오가 되고 줏대가 되어버리는 이민혁을 사랑한 지가 벌써 아주 오래되었다.


그리고 오늘부로 다시 대충 살기 시작해서 마음이 다림질 된 이민혁과 이민혁을 돌려 받아 후련해진 채형원의 집. 좀 구겨지고 가슴팍이 지저분한 이주헌이 입장을 한 것이다. 민혁이 ‘형원이 전용 야채 없는 야채칸’에서 맥주를 꺼내주었고, 안주로는 어린이용 서울우유 칼슘 치즈와 짱구가 나왔다. 민혁은 헤집어진 주헌의 앞머리를 묶어주었다. 귀엽다고 난리를 피우며 사진을 찍던 민혁이 그래서, 뭔데. 하고는 들어주려고 각을 좀 잡아주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되지?”

“…길어?”

“아, 안 해.”

“아. 해봐. 들어줄게. 내가 202호한테 어제 빚진 게 있어서 들어준다.”

“…….”

“…형들 만약에. 예전 애인이랑 지금 애인이랑 만났으면 어떨 것 같아?”

“미친..”

“어휴….”


민혁은 그 질문 하나에 어제 잔뜩 빚진 202호의 그 애랑 이주헌의 전 여친이 마주쳤음을 알아챈다. 어디서? 묻는 말에 엊그제 그 행사장에서. 하는 주헌의 대답에는 말을 잃었다. 헐, 미친. 내가 원인 제공자네? 하는 표정이 드러나자 주헌은 누가 알았겠냐고, 한숨 쉬며 대답을 했다. 나도 걔가 패션 쪽 업계로 이직했다는 얘기만 알고 있었어. 마주쳐서 놀랐어. 나야 뭐 그냥 지나가면 되는데, 근데 누나가 마주친 것 같아. 내가 걔한테 선물한 귀걸이가 누나한테 있더라. 그거 걔가 가지고 싶어 하던 거였는데.


“뭐?”

“뭐?”

“야, 202호 깨워봐. 걔 바보 아냐? 그걸 왜 해?”


주헌은 복잡한 표정으로 앞머리를 쥐어 뜯는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머리로는 여자들의 세계가 이해가 안돼서 셋이서 한참 말이 없다가 민혁이 그 여자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이름이 거론된 순간에 민혁은 혼자 뜨끔해서 맨들한 코를 부빈다. 행사 전까지 연락 제일 많이 나눈 M브랜드 행사 담당자였다. 자기 손으로 셀럽 리스트에 이주헌과 202호 그 애 이름 적어 명단을 넘겼다. 이주헌 구 여친 손에 둘의 이름을 나란히 붙여 넘겼으니, 주헌이한테 미련 남아 있었으면 독이 아마 바짝 올랐을 것이다. 민혁은 괜히 제 심장이 벌렁거린다. 주헌은 민혁의 표정이나 생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벽 너머 어딘가에서 기절하듯 잠들어 있을 사람이나 생각하고 있지. 맥주가 벌써 한 캔이 텅 비었다. 채형원과 십 년이라 텅 빈 캔은 바닥에 닿는 소리만 들어도 안다. 죄지은 구석이 있어서 민혁이 벌떡 일어나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 구예진이라는 애. 바람 폈다는 그 애?”

“…어.”

“많이 좋아했었냐?”


그 때 했던 거랑 지금 했던 거랑은 좀 다르고. 걔는 좀, 내가 다른 의미로 인정 받고 싶어 했었지. 되게 날 불안하게 만들어서, 덕분에 이 바득바득 갈면서 성공하긴 했어. 걔한테 인정 받으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막상 성공할 때쯤 되니까 걔가 다른 사람 만나고 있더라. 근데 형, 내가 그게. 이상하게 별로 화가 안 났어. 이상하지 않어? 내 성격에 화가 별로 안 났다는 게? 근데 그런 얘기 굳이 내가 바깥에다가 뭐 하려 했겠어. 병신 같잖아. 여친이 바람 펴서 헤어졌는데 화도 안 내고 잡지도 않은 게 뭐 자랑이라고. 사랑 못하는 사람 같잖어. 특히 형들이랑 누나 앞에서는 제대로 얘기 안 했어. 쪽팔려서. 내가, 누나 고백 거절하고 만난 애랑 이런 식으로 헤어져 놓고 뭘 잘했다고 말을 해.


“그땐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은, 누나가 미안하다 주헌아, 하면서 다른 남자랑 만난다고 하면 나 울면서 무릎 꿇고 붙잡아야 돼. 화내고 타이르고 미안하다고 빌고 잘 한다고 다 고칠 거라고 말할 거야. 나 오늘 하루 종일 작업 아무것도 못 했어. 누나랑 걔랑 만난 거 생각하면 체할 것 같고 속이 이상해서. 형들도 똑같이 생각하잖아. 그 누나가 뭐 머리끄덩이를 잡았겠어, 아니면 소리를 질렀겠어. 그냥 오랜만이네 인사하고 웃고 말았겠지. 근데 그 귀걸이 하고 있으면서 도대체 누나가 뭔 생각을 했는지, 나는….


“진짜.. 좆같은 기분이지, 뭐.”

“…어쩌냐.”

“누나는 티 안 내더라. 쪼끔 재수 없어. 어른처럼 굴어.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민혁도 형원도 조용해졌다. 한동안 말은 없다. 좀 진지해진 이유는 어쨌든 같은 건물 안에 살며 수 십 번의 술자리와 식사를 거쳤고 동갑내기로서 마음이 쌓였기 때문이다. 거지 같은 기분을 삼켜내고 모른 척하고 있었을 그 얼굴이 달갑지가 않은 탓이다. 잘 예측이 되지 않고, 동시에 너무나 뻔하기도 한 사람이다. 오늘 무슨 옷 입을 것 같다, 어떤 메뉴를 먹고 싶다고 말할 것 같다는 건 투명하게 다 드러나도, 한 뼘의 마음을 숨기면 절대 못 읽게 하는 것 말이다. 이주헌의 말처럼 쪼끔 재수는 없고 다만 많이 애틋한 편이다.


“너 요새 곡 좀 쓰고 있냐?”

“어?”


주헌을 보고 씩 웃는 민혁은 몇 가지의 생각이 금세 정리가 된다. 1년을 훌쩍 넘게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친구로 지낸 사람이다. 어느 정도 캐해는 완료가 되었다. 하루 이틀 본 거 아니니까, 우리. 걔한테 어두운 이주헌은 진짜 안 어울려. 너는, 주허나. 무조건 귀여워야 돼.


“나 귀엽고 싶지 않어. 멋지구 싶어.”

“조용히 하고. 형 말 들어.”

“아, 형원이 형. 쫌.”

“한번... 듣기는 해줘. 얘 말 못 하면 죽는 병이 있어.”


엉덩이가 가벼운 이민혁이 또 일어난다. 솥뚜껑만한 손바닥 하나에 채형원의 두 번째 캔, 이주헌의 세 번째 캔과 이민혁의 제로 코크가 다 들려있다. 이민혁 웃는 얼굴에 이주헌은 무서워 죽겠다고 대답했으나, 저도 모르게 저절로 고쳐 앉았다.







다시, 그날





“…나 간다?”

“어. 이따 전화하는 거다?”

“알겠다고.”


이주헌은 사실 당연히 마음이 뻑적지근하고 조금 삐진 상태이다. 누나가, 창균이한테 이상한 톡을 보냈기 때문이다. [누나가 술 한바가지 살테니까 오늘 한잔 해줄텐가?] 창균은 가만히 고민을 하다가 주헌에게 그걸 이실직고를 했다. 왜냐면, 누나를 삐지게 하는 것보다 이주헌이 삐지는 게 더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구태여 비밀로 만나는 것도 창균의 입장에서는 좀 찝찝한 일이다. 기현이 형이 비밀 함부로 만들면 안된다고 참으로 반성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주헌은 누나가 요 며칠 마음이 심란하다는 거 아니까 그냥 별 말 없이 창균을 보내주었다. 당연히 작업은 하나도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 두 어 시간 흘렀을 때 창균과 누나에게 동시에 카톡이 왔다. [누나 오늘 좀 취하는 것 같은데] [주헌아 작업중이야? 나 일하다가 잠ㄴ깐 짬잉나서 카톡했거든?] 둘 중 하나가 화장실 간 타이밍인 걸 알아챘고, 취한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웬만해서는 밖에서 잘 취하지 않는다. 또래 여자 사람들에 비해서 술이 셌고, 토하는 거 무섭다고 꼭대기까지 취할 때 되면 으억 이제 진짜 못 먹겠다고 입 꾹 다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사람이다. 스무살 때부터 누나가 다니는 술자리 쫓아다니면서 내가 다 봤는데.


그리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형 여기 오는 게 좋겠다] 카톡이 온다. 갈 준비 금방 마치고 모르는 척 전화를 한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 괜찮은 척 하는 발음에 깜빡 속을 뻔했다. 나중에 누나가 작정하고 연기하면 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와중에 불안해 죽겠는 거다. 나 이렇게 연락에 집착하고 그런 남자 아닌데. 나를 도대체 왜 이렇게 만드는 건데. 정신 없이 뛰어서 호프집에 도착했을 때 창균이 가만히 일어났다. 오늘은 말려도 자꾸 마시더라, 미안. 지나가면서 하는 소리에 어깨나 두드리고 창균이 스쳐 정신 없이 자리로 간다.


마주 앉았다. 술이 잔뜩 올라서 푸후, 하고 한숨을 쉬고 올려다본다. 가만히 마주 보는 얼굴에 붉게 홍조가 올라있다. 거짓말 했으니까, 내가 화가 난 얼굴인지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별로 화 안 난 것 같으니까 갸웃한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 긴 정적이 잘 없는데. 그러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술 마신 건 누난데, 내가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주헌아, 나 있잖아.

그거… 뭐더라?

탁센 이브, 그거 안 먹어.

나는 이지엔식스만 먹어. 배 아프면.


그 말에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진다. 생리통 심해서 매번 앓아눕고 수업도 다 빠지던 누군가는 꼭 그거 먹고 괜찮아져서, 저도 모르게 약국 문 열자마자 찾았던 게 맞기 때문이다. 그게 유일하게 아는 약 이름이었다. 누나는 그거 안 먹는 줄도 모르고. 그거면 생리통 다 되는 줄 알고. 그런 걸 사다 줘놓고 안 아프길 바랐던 게 너무 멍청하고 빈틈 투성이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고작 한 살 많으면서 누나 앞에선 내가 왜 자꾸 이렇게 어리숙하지. 미안하다고 싹싹 빌까, 틈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용히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주헌아.”

“응.”

“딴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나만 생각해.”

“…….”

“부탁이야.”


고개 숙이고 있더니 눈이 마주친다. 마주 보는 눈에 눈물빛이 가득 차오르는 게 보인다. 추운 날씨에 비해 얇은 아우터 하나가 전부인데, 열이 오른다. 뛰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어떤 화끈거리는 마음이 살 바깥으로 울컥거리는 거였다. 그 기운이 온 몸에 퍼지고 심장은 펌프질을 하고 그러자 온 마음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속상하게 한 점이 곧장 나를 너무 깊게 푹 찔러서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마주 앉은 사람은 취해서 가만히 물었다.


울어?


가슴이 너무 뜨거워도 나는 울면 안 되지. 상처 줘놓고 내가 찔린 거 티 내면 안 되잖아. 고개를 젓고 대답했다. 누나가, 울지. 누나가 아프니까. 내가 누나 아프게 만들었으니까.


“그래? 미안.”

“…뭐가 미안해.”

“우는 거. 주책이라서. 이거 주정인가부다.”


확실한 거 하나. 살면서 이런 마음은 처음이라는 거였다. 지금 이 마음은 아주 강하고 복잡하다. 단순한 목표를 잡고 살았던 사람에게 이런 게 단번에 해석이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너무 슬프고 아픈 와중에도 눈앞에 놓인 이 복합적인 사람에 대한 애틋함과 커다란 사랑과 작은 경외감과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다. 엉긴 감정들은 아플 정도가 된다.


누나는 왜 내가 누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는 꼭 자리를 피해 도망가있는지, 누나는 왜 누나를 가끔 한없이 작게 생각하는지. 그런데 왜 또, 사랑은 크게 하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남의 마음을 찌르지 않는 이유와, 왜 또 내 마음은 다 서걱서걱 썰어서 몰래 해뜨는빌로 가져가 버린 건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자꾸 크게 봐서 날 더 큰 사람이 되게 하는지, 내가 누나한테 큰 사람이 될 틈은 주지 않는지. 아픈 마음은 몰래 삼키고 미안한 마음은 항상 왜 먼저인지.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다가가 꾹 안았을 때, 울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쪽팔렸는지 그 와중에 입술을 꾹 다물어 그걸 삼킨다. 아, 진짜 사람 속상하게. 가슴 터질 것 같아서 등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도톰히 안긴 부피감에 안도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오늘 속이 새까맣게 다 탔다.


“누나.”

“…어?”

“나 좋아해?”

“…나 너 때문에 토했어.”

“어?”

“토했다고.”

“…….”

“그건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잖어, 주헌아.”


내가 술을 그렇게 좋아해도 토할 때까지는 안 먹어.

토하는 거 무서워.

근데 그니까.

내가 너 사랑하는 거잖아.

사랑한다고.

사랑해.

맨날 생각하고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너……. 정말 존나 사랑한다고.


“어. 누나.”

“응.”

“나는 그거 받고, 누나보다 더. 무조건 더 사랑해.”


야, 너 나 못 이길 걸? 누나가 어깨를 밀어내고 싸우려 드는데 눈물로 얼굴이 다 젖어 있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왜 이러는 건데, 진짜. 티슈로 조심조심 얼굴 찍어서 닦아주니까 자기가 얼른 가져가서 닦는데 티슈가 눈물 자국에 찢어져 붙었다. 하얀 티슈 조각이 얼굴에 붙은 채로 비척거리면서 일어나는데 부축해주는 건 또 싫어한다. 넘어지면 그 밑으로 깔릴 각오로 따라가야 한다.


누나가 지갑 찾아 취해서 헤매는 동안에 주헌이 얼른 카드를 내미니까, 주인아저씨가 아까 나간 사람이 계산 다 했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네? 뭐라구요? 누나가 극대노해서 그거 취소 해줘요! 당장요! 제가 하께요! 하는 거 겨우 끌고 나왔다. 아니 임창균이, 싹바가지가 없잖어어어! 어떻게 그걸 계산을 하고 가? 나를 만만하게 보나 본데 가만 안 둬?!!! 해뜨는빌 올라와 201호 문 두드리려는 주먹 감싸 꼭 쥐고 누나, 집에 가자. 응? 하고 달래니까 어, 그럴까? 하고는 순식간에 이성을 찾은 척 말을 또 잘 듣는다.


그 와중에도 난 자꾸 비죽이는 마음 들어서 미치겠다. 아니, 이 누나 술 많이 먹으면 안 되겠어. 술자리 보내면 안 되겠어. 말 너무 잘 들어가지고 하자는 거 다 할 것 같아서. 도어락 번호키는 한 번 틀리고 두 번 만에 열렸다. 침대 옆 소파에 앉더니만 양말도 벗고 외투도 벗더니 그대로 쓰러지는 거 번쩍 침대로 옮겼다. 어흐흑, 들려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침대에 눕히자 마자 그냥 곯아떨어졌다. 소파에 앉아서 한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좀 이상한 새낀가 싶을 정도로. 잠든 사람 너머로 작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배 아픈가 봐. 걱정이 되어 이불 걷어 어깨까지 꼭꼭 덮어 올려주고 온수매트도 켜주었다. 얼굴에 아주 아주 옅은 눈물 자국이 보인다. 휴지 붙은 거 다 떼어주고 나서도 거기서 눈이 안 떨어진다.


나 진짜, 미쳤나보다.

그냥 냅다 달겨들어 꾹 안아 주고 싶어 잠이 안 온다.









눈 떴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 첫 번째. 온수매트에 몸이 불타고 있다. 타죽을 것 같아 흐어억 하고 이불 걷었다. 두 번째, 그러자 시야에 존나 큰 성인 남자가 들어와 흐어억 하고 입을 틀어 막는다. 이주헌이 왜 저기에 있는 건가. 세 번째, 술이 덜 깼다. 숙취가 심하면 늘 새벽녘에 깬다. 머리가 깨지는 중이다. 네 번째. 피의 축제 한 가운데에 아무런 방어 하지 못하고 잠들었다. 옷과 침대에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불은 다시 얌전히 덮었다. 가까스로 손을 저 멀리 뻗어서 온수매트 끄는 소리. 삐, 하는 소리에 소파에 잠들어 있던 애인 눈이 번쩍 떠지는 것이다. 와, 이 꼬라지 어떡하지. 이불 푹 덮고 눈곱은 없는지 황급히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얼굴만 내밀었다. 소파에 멀쩡하게 앉아 있는 주헌이가 누나, 하고 입을 연다. 쟤 무슨 자는 척만 하던 애 같이 왜 저래.


“괜찮아?”

“어...?”


핸드폰을 켜보던 주헌이 조용히 말을 붙인다. 아직 8시두 안됐당, 약국이 문을 안 열었을 거야. 눈만 꿈뻑거리다가 얼굴을 더듬거린다. 눈 뜨는 감각으로도 아는 거였다. 부었다는 거. 왜 부었냐면, 피 나는 것도 피 나는 건데, 내가 어제 엄청 울었기 때문인데, 그와 동시에 정말 많은 기억이 하나도 잊혀지지 않고 다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 개지랄을 떨었구나, 미친아.


“해장국 포장해올까?”

“…….”

“쩌어기에 24시 해장국집 있잖아.”

“…….”

“누나, 괜찮아?”


많이 아파? 걔가 소파에서 일어나서 오는데 어버버 한 거였다. 이마 만져보는데 헉, 엄청 뜨겁잖아. 하는 소리에 안절부절을 못한다. 누나 열 나잖아, 걱정하는 소리에 그... 온수매트 때문에, 뜨거워서 그래.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누나, 내가 아홉 시 딱 되면, 여기 앞에 약국가서 숙취해소제랑, 그거 사올게. 이지엔식스. 주헌이 입에서 약 이름 나오는데 진짜 딱 죽고 싶었다. 이 와중에 이주헌은 누나가 왜 못 일어나나 누워서 혼자 저렇게 당장 뭐 부시고 싶은 얼굴인 건가 싶은 거였다.


이유는 모르고 자꾸 기웃거리는 주헌이한테 뭘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대로 계속 대치 상태일 수는 없다. 나 지금 이불 안 상태가 어떤지 모르겠으니까 너 잠깐 현관문 바깥으로 나가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와중에 주헌이 벌떡 일어나 물 갖다줄게, 하고는 물까지 떠왔다. 그것마저도 누워서 빤히 보기만 하니까 주헌의 얼굴에 물음표 오백개 정도 떴다.


“…그, 있잖아.”

“응.”

“이게 좀. 내가….”

“응?”

“아침이라 좀 곤란한데….”

“……어?!”

“어?”

“누나가 아침에…. 왜 곤란하지? 누나가?”

“……어?”


주헌이 당황해서 이불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길래 어리둥절해서 이불 안에 벌어진 일을 안 건가 생각이 들다가 아, 미친! 하고 소리를 질렀다. 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싶은데 동시에 주헌이도 아침 꿈결에 아무 생각 없이 뱉은 거 알고는 답지 않게 빨개진다. 아침에 이불 속에서 곤란한 일이 남성 성별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걸 알아들어 버린 사람도 당황했다. 황당에 가까운 당황이었다.


“아니, 내가 그게 곤란할 리가 없잖아!”

“…아.”

“내가 그... 하고 있어서, 쪼끔 신경 쓰여서.”

“어, 아. 알겠어. 나 그럼 편의점 갔다 올게? 꿀물 사 올게.”


베드 테이블에 물 얌전히 내려놓은 이주헌 외투 집어 들어 입고 핸드폰 들고 튀어 나갈 준비하는데 두고두고 생각해도 황당하다. 누나가 왜? 이불 안이 왜 곤란하지? 하던 얼굴이 또 생각난다. 저도 모르게 푸하학 웃어서 아, 누나! 웃지마아…. 하고는 앓고는 튀어 나가는 거 귀여워서 진짜 시름시름 앓는 중이다. 벌떡 일어났는데, 다행히 어디 피의 축제가 함부로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재빠르게 화장실 가서 샤워했다. 전날 오열의 흔적으로 진짜 퉁퉁 부어서 한숨만 절로 나왔다. 재빨리 씻고 나오는데 딱 20분 쪼끔 넘게 걸렸다. 옷 갈아입고 집게로 머리 틀어 올리는 순간에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해장국 배달 온 주헌이 가만히 서 있다. 해끔하고 잘생긴 얼굴로.


한 손엔 해장국, 다른 한 손에는 꿀물, 그리고 약봉투였다. 약국 열었어? 거기 안 열어서 네이버 뒤져서 8시에 여는 데 갔다 왔어. 아이고, 고생했겠다. 받아들고는 둘이 나란히 앉아서 밥 먹었다. 해장국 국물 먹고 살 것 같아서 큰 숨을 내쉬었다. 나 사실 술 좀 덜 깬 것 같아. 중얼거리면서 절반 정도 먹고 나서 그만뒀다. 사준 거 다 먹고 싶은데 속이 영 좋지 않아서. 억지로 안 먹어도 된다구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해 주는 거 듣고는 그제야 진짜 수저를 놓았다.


그러다 주헌이가 사 온 약 생각이 나서 약 봉투를 뒤진다. 이지엔식스랑, 숙취해소제 알약이랑 드링크. 그리고 뭐야, 이거? 손바닥만한 케이스. 꺼냈다가 주헌이랑 눈 마주쳤다. 걔가 드링크 까서 기다리고 있다. 약부터 먹자. 하는 소리에 이지엔식스 한 알, 숙취 해소제 한 알. 군소리 없이 꾸울꺽 삼켰다.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던 케이스를 주헌이가 가만히 열어준다. 얌전히 놓인 목걸이 보고 잠깐 멈칫하는 사이에 주헌이 목걸이를 빼서 가만히 걸어주었다. 누나, 잠깐만. 나 손톱 없어서. 있어봐. 한참 헤매더니 겨우 걸어주었다. 더듬더듬 너무 헤매서 가오가 조금 빠지는 얼굴이 된 주헌이가 앞으로 와서 보더니 표정이 맑아진다. 목덜미 한 번, 올라와 얼굴 보고 한 번. 웃는 거 보고 기분이 어땠더라.


“진짜 이쁘다.”

“…….”

“누나 목이 길어가지고. 내가 막 얘기했더니 추천 해준 거거든? 나 근데 보자마자 누나꺼다 했어.”

“야, 너 이게 지금.”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나도 명품 브랜드 볼 줄 안다. 케이스에 까르띠에 써있는데 그걸 못 읽겠냐고. 다만 전부터 명품 살 돈으로 장비병 걸려 맥북 사고 그 돈으로 인테리어 하는 게 더 좋고 별 감상 없어서 그런 거였다. 나는 명품 같은 거랑 거리도 멀고, 그리고 받아버린 이건 너무 비쌀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나이 먹고 좀 바보 같지. 이것도 사실 브랜드만 알고 가격은 상상이 잘 안된다. 비싸서 예물로 까르띠에 주고받는다는 정도만 안다. 어쩌지, 어떡하지. 된 얼굴에 주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로 한숨을 푹 쉬어서 할 말도 못하고 입 꾹 다물렸다.


“맨날, 어? 누나는 나 냅뒀다 어따 써?”

“물건도 아니구, 너를 왜 써?”

“아니, 주변 사람들한테 나 소개도 잘 안 시켜주고 내가 내 주변 사람들한테 소개해주려고 해도 도망가고 없고. 누나 나 자랑스러워한다고 맨날 그러면서. 말로만이지.”

“…….”

“내가 날 증명을 좀 해야겠거든.”

“…아니, 근데 이게 지금 예물도 아니고.”

“예물은 이것보다 더 해줄 수 있어.”

“아니, 예물을 하자는 게 아니구….”

“예물도 나중에 나랑 해.”

“어이고….”

“…해 줘, 누나.”

“…….”

“나랑만 계속 해. 죽을 때까지 나랑만 해.”


대답은 못하고 입술만 죽어라 깨문다. 싫어서 대답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오씨. 얘 진짜, 왜 이러지. 나한테 져주더니만 왜 고집부리지. 머리 깨질 것 같다. 왜 이렇게 귀엽지. 술도 덜 깬 와중에 너무 치인 탓에 할 말을 잃었다. 나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미치겠다. 난 이런 거에 속절이 없다. 나의 고정 서사에서 아등바등하는 귀여운 애인이 나를 이겨 먹은 적은 없다. 나는 매번 진다. 이게 내 캐릭터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알겠으니까.”

“어.”

“밥 먹구. 흥분하지 말구.”

“응. 누나 그거 웬만하면 꼭 차고 다녀야 돼.”

“분신으로 삼을게. 몸에서 떨어지면 죽는 걸로 할게. 이거 내 호크룩스임.”

“머라고? 호크루루?”

“아냐, 암것두.”

“응. 근데, 누나 진짜 이쁘다.”


와, 너무 사랑스러워. 어제 내가 울고 말고, 붓고 말고. 내 몸에서 피가 흐르던 말던. 귀걸이를 그 애에게 돌려주건 말건, 나는 지금 확실하고 선명한 이주헌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뭘 그렇게 나 혼자 삽질을 했던 건지 다 물러지고 한결 가벼워진다. 호크룩스는 몰라도 움푹 넘치는 이주헌 마음을 방금 보았고, 그게 엉겨 고체가 되어서 목덜미에 착 붙었기 때문이다. 선물이 비싼 건, 뭐 내가 직장에 이 한 몸 바쳐 일하고 24개월 할부로, 그게 안 된다면 36개월에 걸쳐서 앙갚음 해주면 되는 일이고.


"참. 그리고, 주헌아."

"어."

"나 진짜 너 자랑스러워. 그건 알아야 돼."

"…응."

"진짜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야."

"……."

"그냥, 나는 내색을 잘 못하겠어."

"……."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엄청 소중해서 그래."


진짜 소중한 거 생기면 나는 원래 그래. 같이 다니다가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맨날 생각해. 세상에 알리고 싶은데 하여튼 소중해서 그런 거야. 써먹기는 내가 널 왜 써먹어. 마음 같아서는…, 확 그냥.


붕 뜬 기분에 뭔 말인지도 모르고 떠들고 있다가 문득 눈이 마주쳤다. 주룩주룩 늘어지는 사랑 고백 들으며 휘어지게 웃고 보조개 뽁 들어간 얼굴을 딱 본 순간에 난 말을 잃었다. 너를 진짜 좋아해서, 나는 어딘가가 좀 못나졌다. 너를 조금 가져가서 불완전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나 채워두고 모른 척하고 싶어. 라면 부스러기로 뭐든 고치는 그 영상처럼. 나는 라면 부스러기이고 너는 절대 망가지지 않는 것이 될 거야. 부서져도 내가 채울 거야. 바보 같고 어딘가 핀트가 나간 또라이 같은 생각은 다 숨겨두고 입을 다문다. 까르띠에를 목에 달고 라면 같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았다. 진짜 오타쿠 같을 테니까.


"확, 그냥. 뭐?"

"비밀이야."

"뭔지 알려줘! 빨랑."

"아이구, 어떡해."

"어? 왜?"

"배 아퍼."

"헉."


따뜻한 거 필요해서 그러는데

너 좀 안고 있어도 돼?

사실 꾀병이야. 약 잘 들어.

근데 그래도

안고 있어도 돼?


따뜻하다 못해 뜨끈한 거 꾹 안고 가만히 뒹굴어도 괜찮았다.

쌀쌀한 토요일이니까.








그 다다음날





원래 월요병 같은 거 없는 스타일이었다. 직장에 취직이라는 것을 하기 전에는. 원래 매사에 잘 설레고 사람도 좋아하고 기분이 잘 극복되는 편이라 방학에는 괜히 개학 전에 교복도 한 번 꺼내 입어 보고 그랬다. 돈이라는 걸 벌기 전까지는. 학교에는 갈구는 사람도 없고, 좋아하는 친구들이 잔뜩인데, 직장은 안 그러니까. 그래도 다녀야지 어떡해. 어른이니까. 나 주헌이한테 24개월 혹은 36개월짜리 선물로 앙갚음도 해줘야 하고. 멍하게 출근해서 커피 한 잔 내려와 오전 업무 막 쳐내고 나니까 옆자리에 앉은 주임이 저기, 대리님. 하고 조용히 부른다. 눈치를 살피니까 아까부터 말 걸려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반차 쓰셨잖아요."

"헉, 네. 무슨 이슈 있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저 인스타로 팔로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행사 사진에 되게, 진짜 대리님 같은 사람이 찍혀서요. 아니실 것 같은데 근데 너무너무 대리님 같으셔서 혹시나 해서요. 무슨 패션 업계 행사 같던데.


"……."

"대..리님 맞으세요?"

"…네."


헉 소리 나더니 난리가 났다. 어떻게요? 우와. 순수하게 신기함으로 가득 찬 얼굴이 귀엽고 머쓱해서 코끝을 긁었다. 같이 점심 먹으러 내려가는 길에, 그냥 주말에 결혼식 다녀온 것마냥 이야기를 했다. 아는 친구가 브랜드를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아는 셀럽 없다고 그냥 제 이름 넣어버려서요. 꼭 와야 한다고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머쓱해서 절절 매는 동안에 부대찌개를 사이에 두고 주임이 자기가 본 인스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팔로우한 사람 아이디 보고 움찔, 한번. @coenffl 그리고 그 뒤에 흐리지만 되게 나 같이 어깨 둥글 말린 사람 보고 흠칫, 한번.


"…대리님 맞으시다니까 진짜 신기하다. 저 요새 맨날 이 분 인스타 보거든요. 사진 진짜 완전 남친 재질이에요. 이분도 실제로 보셨어요?"


사레 들려서 기침할 뻔했다. 뻔뻔한 얼굴로 네, 봤는데. 와. 진짜 잘생기셨더라고요. 하고 대답해줬다. 솔직히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한 다섯 살만 어렸어도 제 친구예요, 하고 들먹거렸을 것 같다. 가끔 내가 이런 마음이 들 때 좀 싫다. 자의식 과잉이야. 나 엄청 자랑하고 싶어 하네, 진짜 으스대고 싶어 하네. 근데 그래도 꾹 참는다. 어쩌면 좀 비슷한 마음이다. 형원이도 소중한 거다. 굳이 손에 쥐어 내 거라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소중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지는 아직도 모르고.


오후 업무 다 마치는 동안에 주헌이한테 신나서, 오늘 있었던 일 얘기하니까 같이 오두방정을 떨어준다. 해뜨는빌 단톡에 형원이 태그해서 [내 옆자리 주임 니 팬임 ㅎㅎ] 하고 남겨두었다. 어쩐지 요새 좀 여유로워 보이는 이민혁이 [헐 대박 ㅋㅋㅋㅋ] 먼저 말하고 한 세 시간 지나서 형원이한테 [우와] 하고 온 게 전부였다. 얘 지금 이런 거 살갗으로 느끼면서 살기에는 많이 바쁘다. 이민혁이 채형원 답장 보고 갠톡와서 [어떻게 아는건데????] 해서 한참 웃으면서 카톡 하다가 정신 차리니 세시였다. 뜨악 하고 밀린 업무 다 처리하고 나선 게 여섯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누나 오늘 저녁 먹을까? 퇴근 시간 맞춰서 역으로 갈게. 하는 소리에 다섯 시 반쯤 [여섯 시 퇴근!!!!] 하고 답장 보내놨는데, 아이고. 쪼끔 늦었다. 다들 월요일이라 비슷한 시간에 업무 마무리하고 엉겨서 내려간다. 칼퇴 잘 못하는데 이 정도면 그래도 일찍이지. 9호선 사람 많겠다, 생각하면서 내려가는 길. 카드키 찍고 로비로 나왔는데 서 있는 사람 보고 움찔했다. 이제는 멀어도 기운과 색감과 테두리만 봐도 안다. 한눈에 알아볼 수 밖에 없다. 그건 어느새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사람이 저 멀리에 서 있는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기운과 색감과 테두리만 보고도.


"누나!!!"


놀라서 입 틀어막고 어깨가 또 동그랗게 말리는 동안에 큰 걸음으로 오던 주헌이 양손으로 얼굴을 꽉 그러잡는다. 아마 내 표정이 가관이지 않았을까. 당황과 황당과 뿌듯함과 약간의 창피함과 반가움에 사랑 많이. 얼굴 쥔 손 잡아 끌어내리려고 하는데 누나, 나 창피해? 쪼끄만 목소리로 묻는다. 창피하냐고? 네가 지금 내 기분 하나도 모르는 거였다.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고. 더듬더듬 말하는데 뭐라구? 하는 귓가에다가 시뻘게졌다. 몰라. 터져 죽을 거 같애. 겨우 대답했다.


"월요일 그지 같았지."

"……."

"우리 한강 갈까?"


가서 닭꼬치랑 라면 먹을까? 묻는다. 그거 안 땡기면 음, 양꼬치 먹으러 갈까? 올려 보는 주헌이 얼굴이 마찬가지로 좀 붉어져 있는 것도 본다. 뭐든 잘하고 스스럼 없을 것 같은 애도 가끔 사랑 받고 싶어 애를 쓴다는 사실이 뾰족하다. 나는 저항 없이 푹 찔린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였다. 너무 소중해서 내색도 못하겠다는 내 말. 이주헌은 그럼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이 내색할 수 있게 온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이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이주헌이 마법소녀 감싸듯이 내려왔다. 그럼 나는, 기꺼이.


"응. 가자. 한강."


있잖아,


나는

가끔 내가

싫다가도.













RPS도.. NPS도 판타지다 보니까 어쨌든, 읽는 분들께 정말로 행복하고 기분 좋은 상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현생이 빡셀 때마다 쪼끔씩 보탠 글이 4..만자가 훌쩍 넘었어요...! 나눠서 올릴까 하다가 그냥 한번에! 올려요, 글이 흐름상 끊어지는 것두 아니고 어렵거나 한 것보다 아니고... 그냥 많이 길어진 것 같아서요.. 매번 이렇게 끝맺음을 못내고 다시 가져와 지겨우실 까봐 걱정이 듭니다..항상.


김아무개여주씨가 해뜨는빌 사이의 우정을 엄청 소중히 느끼고 조금은 나이가 먹는 것도 느끼고, 사랑이 뭔지 질투는 뭔지 알아가는 과정도 좋았고, 꼭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 원동력이 아니더라도 좋은 거 자랑하고 싶은 마음 말고, 소중해서 숨기고 싶어하던 지극히 오타쿠스러운 감정도 꼬옥 사랑 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적었어요. 보시는 분들이 충분히 아셨겠지만, 주헌이가 목걸이를 산 건, 너 곡 열심히 쓰고 있지? 걔는 금융치료(!) ㅠㅠㅋㅋㅋㅋ 좀 받아야겠다 우긴 민혁이의 조언 때문이었는데요. 민혁이의 조언이 다소 과격하긴 해도, 너는 202호 생각 구태여 읽고 해석하고 봐줄 필요 없이 사랑할 땐 걍 애같이 굴어야 돼, 이런 조언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202호 김아무개여주씨한테 아주 잘 먹혔을 테고요. 왜냐면 김아무개여주씨가 민챙에게 그러하듯, 민혁이도 시니컬한 오타쿠로서 캐해가 완벽했을 것 같거든요..ㅎㅎ.ㅎ...


구예진, 씨에 대한 이야기를 작게 덧붙이자면,,, 바람을 피웠다는 예전 설정이 있어서 착한 칭구는 아니었지만서도 확실한 건 맑고 밝다는 것이고요.. 또 지독하게 나쁜 사람은 아니예요.. 가지고 싶은 건 못가져본 적이 없는 칭구라고 생각했고요. 진짜 주헌이가 엄청.. 반짝반짝하니까 욕심 났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설인아 배우님이나 표예진 배우님(제보..받았는데 싱크로율넘좋은..).. 얼굴로 생각을 하면서 적고 그랬습니다


해뜨는빌은.. 자꾸 저한테 너무나 많이,, 애정이 생기고 진짜 소중해졌네요... 그만 해야지 생각하고 완결을 내도 자꾸 이렇게 찔끔.. 찔끔.. 더해버리고 마는데요.. 내색하지 않고 계속 살을 도톰히 붙여서 언젠가 또 꼬옥 보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불쑥.. 조그만(..부디) 이야기를 덧붙여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긴 글 읽어주시는 (김아무개여주씨)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려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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