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은 따뜻하게 대지를 내리쬈지만 바람은 서늘하게 만물을 어루만졌다. 햇빛을 받아 환한 길은 그 위에 이불을 널면 뽀송뽀송하게 말라 햇볕 냄새를 풍기고, 그 위에서 고양이가 몸을 둥글게 말고 고롱고롱 낮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바람에 떨어진 얇은 꽃잎들이 하늘하늘 쌓여 길을 안내했다.

 

이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이곳은 벚나무가 길을 따라 줄지어 선 벚꽃길이었다. 시즌을 맞아 커플과 나들이를 나온 일행들로 바글바글하던 이곳은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다소 한산했다. 오전 11시, 이 길을 걷고 있는 건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와 손을 꼭 잡고 느릿하게 걷고 있는 노부부와 교복을 입고 천천히 걷고 있는 남학생 둘밖에 없었다.

 

벚나무들 사이로 줄기가 축 늘어진 개나리가 오목조목 모여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춘희는 뻐끔 입을 벌린 노란 꽃잎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누군가가 그려서 천막으로 덮어 놓은 것처럼 인위적일 정도로 하늘은 청명했고, 하얀 구름은 풍성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 풍경에 홀리지도 않고 자신의 앞에서 어른거리는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청은 문득 입을 열었다.

 

 

“솜사탕 같아.”

“뭐가? 구름이?”

“아니.”

“벚꽃?”

“네 머리가.”

“왜?”

“한입 베어 먹고 싶어.”

“뭐래.”

 

 

춘희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 청을 쳐다보았다. 청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특유의 얄미우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콧잔등을 찡그리며 청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춘희는 주머니에서 흰 이어폰을 꺼냈다. 마찬가지로 하얀 MP3에 이어폰을 꽂고는 한쪽을 청에게 내밀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놀림을 보던 청이 뭐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풍경이랑 딱 어울리는 노래 알아.”

 

 

춘희가 자신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고 청은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춘희가 손짓하자 귀에 따라 꽂았다. 춘희의 손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작은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선율을 이루는 피아노의 건반음이 귓속을 윙윙 맴돌았다. 차가 오가고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딪히고 두 개의 발소리가 겹쳐 내는 나쁘지 않은 일정한 소음들에 음악이 녹아들었다.

 

 

“나쁘지 않네. 땡땡이.”

 

 

춘희가 한숨을 쉬듯 읊조렸고 청은 그 말에 씩 웃었다. 4교시 수학 선생님이 자습이라는 말을 반장에게 전하고선 교실로 오지 않았고, 청은 그대로 춘희를 꼬셔 밖으로 나왔다. 나오기 싫다며, 걸리면 어떻게 하냐며 내내 뚱했던 춘희의 표정이 야들야들하게 풀어져 있었다.

 

 

“다음에 또 치자. 땡땡이.”

“웃기지 마. 이번 한 번만이야.”

“범생이.”

“양아치.”

 

 

청은 춘희의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킥킥 웃었다.

 

“딸일까, 아들일까.” 유모차 바퀴가 돌돌돌 앙증맞게 굴러가는 걸 보며 춘희가 중얼거렸고, “딸 낳고 싶어, 아들 낳고 싶어.” 청이 영 뚱딴지같은 말로 되받아쳤다.

 

 

“당연히 딸이지.”

“이번 추석에 송편 예쁘게 빚어라.”

“뭐? 왜?”

 

 

뜬금없는 소리에 정말 궁금하다는 듯 얼굴에 물음표를 달고 청을 돌아보던 춘희가 불현듯 표정을 굳히고는 청의 발을 팍 밟았다. 아! 청이 웃으면서 인상을 구겼고 춘희는 혀를 쯧쯧 찼다.

 

 

“학교 가면.”

“응.”

“젖꼭지 빨게 해 줘.”

“진짜 죽고 싶냐, 유청?”

 

 

곧 있으면 앵돌 것 같은 목소리에 청이 숨죽여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한 번만 봐준다.” 크게 선심 쓴다는 듯한 투에 청이 큰 손바닥으로 춘희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점심 먹고 갈까.”

“뭐?”

“뭐 먹을래.”

“토스트 먹자.”

“그걸로 밥이 돼?”

“유청 네가 많이 먹는 거야.”

“난 두 개 먹을래.”

“돼지.”

“네가 그렇게 먹으니까 키가 안 크는 거야.”

“뒤진다, 진짜.”

 

 

빨간 신호에 걸린 차들이 정지했고 유모차가 점점 멀어졌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멎었다. 저벅이는 발소리와 작은 소음들을 제외하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벚꽃길의 중앙에 다다르자 청은 돌연 걸음을 멈추고 춘희의 어깨를 잡아채 뒤통수를 받치고 춘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따뜻한 입술과 물컹한 감각이 갑작스레 닿자 놀란 춘희가 청의 어깨를 밀치고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까운 거리에 노부부가 있었지만 앞서가고 있었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들을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한 번만.”

 

 

청의 입술 새로 애원조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불퉁한 눈을 하던 춘희가 이를 바득 갈더니 느슨하게 매인 청의 자주색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청의 고개가 자연스레 따라 내려왔고, 서로의 입술이 맞부딪쳤다. 물기를 머금은 혀가 얽히고설켜 서로의 타액을 빨아들였다. 둘의 모습을 시기하듯 바람이 한 번 휘몰아쳤고 나뭇가지끼리 부딪쳐 폭포수 같은 소리를 냈다. 가지에 매달린 꽃잎들이 떨어져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쏟아져 내려왔다.

BL 작가 선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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