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7

네 가장 나쁜 버릇은 나의 사철을 뒤죽박죽 섞어 놓는 거야. 봄꽃이 필 자리엔 서리가 내려앉고, 겨울밤이면 하늘에 달 대신 열대야가 걸리더라.


22-10-18

완전하면 그게 사랑이에요? 여기저기 까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상하고 망가진 것들이 사랑이지. 약을 먹어도 안 떨어지는 먼지 알레르기 같은 거 있죠.


22-10-19

기어이 입에서 나무가 자랐습니다. 주신 잔에는 물도 받아 놓았습니다. 암야에는 썩 고운 것들로만 엮어 만든 서표를 남몰래 곁에 두고 오겠습니다.


22-10-20

아즈바이. 가락이가 꺼지무 그기 다 구천서 삮갈리는 거길래 우재라두 아이 하시오. 거 질게 앉어 못 있는 솩 슬증버텀 비밭디 말구.


22-10-21

당신이 부르던 꽃을 꺾어다 편지를 적으려니 반토막 난 손톱 밑이 실컷 농들어 지내기 거북하다. 윗집 딸내미가 떠나기 전 꼭 이런 물이었다지.


22-10-22

천상에서 거룩한 투사들이 내려오네. 그 가운데 가장 영광되고 보람된 지휘자가 나팔을 부네. 곡성마저 빼앗긴 농인들은 우레가 우는 땅의 주인 되었네.


22-10-23

사흘 밤낮을 미루더니 이제 와서 안 된다니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낙원이 추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짓무른 열매들은 또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22-10-24

여덟 뫼를 끌어안은 어리석은 철위산아. 재앙신이 네 모가지에 꼿꼿이도 매다 놓은 가시넝쿨을 좀 보아라. 세상없는 치렛감이라 하더냐. 네 꼴을 쉬이 돌아보매 정녕 우습지가 않더냐.


22-10-25

4분의 4박자로 쓰인 여행. 첫 박에 왼발 그 다음엔 오른발 남은 2박에 아스팔트가 잠투정을 했고 마지막 날에는 여우꽃이 둘이나 피었다


22-10-26

내 죽음을 딱 1년하고 반이 지난 후에 알게 되면 좋겠다 500일이 넘는 날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평생 나 말고 네 탓만 하게


22-10-27

처음엔 이런저런 모양으로 계속 변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거든요. 근데 이제는 애쓰지 않으면 제자리에 서 있지도 못해요. 


22-10-28

새벽 4시에 깨어 있는 건 슬슬 그만둬야 할 것 같아.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감정들이 쓸 방이 모자라서 맨날 내가 쓰러진다니까.


22-10-29

하루 한 번 취침 전 물과 함께 복용하십시오. 다음과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지러움, 메스꺼움, 미열, 환각, 일시적 난독 증세.


22-10-30

15년이란 시간이 짧지는 않았지만 이제라도 형사님과 연락이 닿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몸 건강히 계십시오.


22-10-31

질 좋은 카펫을 구해다 주세요 색은 짙고 어두울 수록 좋아요 서로의 날갯죽지를 꺾어다 새까맣게 장식합시다 샴페인 거품처럼 터져 버리면 되죠


22-11-01

먹구름이 특산품인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내 손에다 한 움큼 쥐여 주고 떠나던 날에도 그렇게만 생각했다.


22-11-02

버리지 못한 밧줄이 아직도 집에 있다 희미해진 색처럼 어느 금요일 밤에는 네 이름도 내 이름도 네 얼굴도 내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22-11-03

네가 몇 달을 내리 먹고 싶다 보채던 복숭아를 구할 데가 없어 그랬나. 태몽이니 태명이니 하는 것들을 죄 첫째랑 섞어 놓아 그랬나. 


22-11-04

옷장 안도 침대 밑도 전부 확인해 봤단다. 그러니 오늘 밤은 안심하고 자도 괜찮아. 꿈에서 만나자꾸나. 네 부모님은 한 번도 그러지 않으셨지? 


22-11-05

두고 가신 책갈피 잘 받았습니다. 허나 더는 표시해 놓을 속이 없습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는 걸음 마십시오.


22-11-06

이 사건은 언론이나 방송을 통해 공표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는 알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죠. 다음 번에는 더 나은 작품을 기대해도 되겠습니다. 


22-11-07

그 후로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던 네 목소리와 목도리를 올해는 치워 놓아야지. 겨울옷들과 함께 꺼내 보았더니 찬 바람에 온통 찢겨져 있었다.


22-11-08

네 손끝을 베낀 글씨들로 전부 고쳐 써 놓았으니 걱정 마라 기울인 병 주둥이에 맺힌 칼날 방울에는 내가 먼저 입을 대겠다


22-11-09

우리는 왜 유리병을 물에 띄워 보내나요? 소식을 들으려고. 우리는 왜 소식을 들으려고 하나요? 살아 있다는 걸 알리려고. 우리는 왜 살아 있나요?


22-11-10

이틀 하고도 열일곱 시간을 태워 빛을 내는 가로등은 빼고 그립시다. 어수룩한 도화지라도 말아 쥐고 다녀야 앞일을 못 배운 핑계가 되지 않겠소.


22-11-11

1년이 22개월로 정해져 있었다면 한 347일 뒤엔 정말 멋진 날이 찾아올 것 같은데. 안 그래? 이런 날이 또 언제 오겠냐고. (11년 전에만 정신 차리고 챙겼어도!)


22-11-12

여기에 넣어 놓은 거 절대로 까먹지 말아야지. 나중에 분명히 쓰일 데가 있을 테니까. 이렇게 잃어 버린 것들만 해도 열 상자는 넘는다.


22-11-13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이 아는 사람 얘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팔리고 있어 너는 그래도 괜찮니 몇 장을 넘겨도 악역은 너 혼자던데


22-11-14

겨울을 왜 좋아하냐면요 내가 죽인 화분을 보고도 남 탓을 할 수 있어서요 평생 사랑밖에 몰랐던 것처럼 엉겨 붙고 얼어 붙은 빨래도 그렇고


22-11-15

슬픈 것도 아니고, 의도한 것도 아니고, 기대한 일도 아니고, 털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습지도 않고, 어른도 아니게 되었다.


22-11-16

공구함을 열어 보니 소모적이고 사소한 부품들이 여럿 들어 있다. 이것들에게 정신적 기능을 부여하려 한다. 이제 이 낡은 보관함은 그들만의 세상이 될 테다. 축복과 저주의 땅이 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노래가 되었다.


22-11-17

삶과 죽음은 별개의 개체들이 아니며 매순간을 한몸처럼 함께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마모되는 지점에서 다시 만납시다.


22-11-18

그 잘난 이야기꾼도 세월 앞에서는 무력했다.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철 지난 구담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남았겠는가? 오늘도 세상이 네모나졌다.


후기: 독감 걸렸을 때 잠깐 쉬어야지 했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즐거운 챌린지였습니다 다신 안 할게요

N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