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네이밍




 

옹성우는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성우는 행복한 아이였다. 외동아들이라 어머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고, 매년 크리스마스엔 갖고 싶은 장난감을 선물 받았다. 남들보다 조금 더 부유한 집안 사정도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요소였다. 그는 따뜻하고 풍족한 배경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요람에 싸여 있던 아기는 어느새 초등학생이 됐고, 고만고만한 다른 아이들과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성장과정을 맞춰가고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했다. 그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교문 앞에 있는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를 사먹거나, 가끔은 학습지를 풀기도 했다.

 

그랬던 성우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어머니의 해외발령이었다. 가끔 TV에서 할리우드를 보거나, LA란 도시가 있단 걸 듣기만 했지 막상 미국에 가서 살게 됐다는 걸 알게 되니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학교를 같이 다니던 친한 친구들과 멀어지는 게 겁이 났다. 친구들 없이 어떻게 살아? 엄마는 말씀하셨다. 가서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면 되지! 그리고 1년 뒤에 돌아올 테니 그 친구들과 영원히 헤어지는 건 아니라고. 그렇긴 해도, 한국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끝날 때쯤 성우의 눈가는 촉촉했다. 헤어지기 싫어. 하지만 떼를 쓸 수도 없어. 이렇게만 놓고 보면 다소 울며 겨자 먹기 같은 느낌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막상 인천공항에 다다랐을 때엔 아니었다. 처음으로 와본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항, 모형장난감으로만 보던 비행기, 멋진 항공사 제복을 입은 사람들까지. 모든 것은 꼬마 성우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만큼 매력이 넘쳤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했을 때, 성우의 가슴도 크게 뛰었다.

 

그로부터 열 몇 시간이 지났을 때는 비몽사몽인 채였지만, 두 발을 LA 공항에 디뎠을 때는 다시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인천공항도 신기했지만 여긴 더 신기해! 사방이 영어로만 되어 있는 낯선 타지에 성우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공항도, 택시도, 사람들도, 처음으로 살게 된 2층집도 너무너무 신기했다. 처음으로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마 오지 않았더라면 이런 걸 못 봤겠지. 나중에 돌아가면 친구들한테 실컷 자랑할 테다, 성우는 이미 봤던 것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LA에 도착한 이후 택시를 타고 엄마 회사가 내어준 관사에 가 짐을 풀고, 며칠간 시차적응을 하며 엄마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도시 속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초록색 공원에서 도시락도 까먹고, 핫도그도 사 먹고 뮤지컬도 봤다. 다양한 경험을 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나가는데, 어느 날 엄마의 가볍지 않은 말 한마디가 귓가에 꽂혀왔다. 엄마는 집 근처에 있는 한 슬럼가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성우야, 저길 봐. 저기는 슬럼가야. 성우 같이 착한 아이는 저런 데 가면 안 돼. 많이 위험하거든. 특히 밤에는 가면 안 돼. 알겠지?


밝고 따뜻한 햇빛이 가득한 도시에서 유일하게 슬럼가만이 무채색으로 무딘 느낌이었다.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아마 저길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성우는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우리 착한 성우- 라고 하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셨다.

 

성우는 이 주의 적응기간을 거쳐 근처의 유명 사립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이미 어느 정도 한국에서 영어를 배워 왔기 때문에 지시를 알아듣는 덴 큰 무리가 없었지만, 친구관계가 문제였다. 동양인이 흔하지 않은 학교에서 성우는 아이들의 구경거리였고, 때론 놀림거리였다. 가끔 성우가 발끈해서 무어라 한국말로 소리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 아이들은 더욱 낄낄거리곤 했다. 그런 와중에 그를 챙겨주는 여자아이들이 몇 명 생겼다. 그럼 그걸 본 남자아이들이 또 성우한테 시비를 걸고, 여자아이들이 도와주는 게 반복됐다. 그야말로 매일 전쟁통 같은 일상이었다.


한 달쯤 지나자 학교 돌아가는 사정도 깨우치고, 애들의 놀림 패턴도 깨우치고, 각종 비속어와 은어도 깨우쳤기(?) 때문에, 점차 원활한 학교생활이 가능했다. 숙제를 같이 할 친구도 생겼다. 누가 봐도 괜찮아 보였지만 사실 딱 한 가지가 부족했다. 성우는 한국이 그리웠다. 한국말을 하며 떠들고 놀고 싶은데 학교에 한국인이 한 명도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여기 애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쳐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한국말로 떠들고 싶었다.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단 말야.


성우는 발 앞에 걸린 돌멩이를 휙 걷어찼다. 돌멩이는 시원한 일직선을 그으며 앞으로 쭉 날아갔고, 이내 검은색의 무언가에 톡, 하고 부딪히곤 바닥으로 추락했다. 검은색이 뭔가 보니 모자부터 상하의까지 온통 검정색으로 맞춰 입은 칙칙한 남자의 오른쪽 다리였다. 딱히 일부러 맞출 생각이 없었기에 성우는 적당히 sorry로 얼버무리며 몸을 틀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엄마가 말한 대로 큰일이 나면 안 되기 때문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성우의 발목을 붙잡는 게 있었으니 바로 블랙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한국말 한마디였다.

 

"아파."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성우는 몸을 틀었다. 남자의 시선은 성우의 눈에 정확히 꽂혀들었고, 확인사살을 하듯이 남자는 다시 읊조렸다.


"아파."

"아저씨 한국 사람이예요?"

"한국..."

 

눈치가 빠른 성우는 어렵지 않게 남자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사람, 한국말을 잘하는 건 아니구나. 딱 봐도 어눌한 발음, 단어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하는 말. 성우는 잠시간 빤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구석구석 관찰하듯 살폈다. 남자는 성우의 시선을 알았지만 부러 그렇게 하게 내버려뒀다. 마치 자신은 무장한 사람이 아니라고 양 손을 들어 내보여주듯이. 그렇게 해서 알아낸 외적인 정보는, 남자는 자신과 같은 황인종이라는 것. 새까만 머리칼에 노란색 피부. 크지 않은 키에 비해 떡 벌어진 넓은 어깨. 어깨만큼이나 손, 발도 커 보였지만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은 몇 개의 붓이었다. 미술시간에 쓰던, 크기가 다양한 붓 몇 개가 그의 손에 움켜져있었다. 화가? 성우가 붓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묻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 본거야?]


남자가 영어로 물었다. 역시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익숙한 형인가보다. 그럼 내가 맞춰줘야지. 성우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영어로 대답했다.


[응]

[네가 본 대로 난 널 공격할 생각이 없어, 난 그저 이 공원에 널리고 깔린 평범한 초상화가지.]

[초상화?]

[그래,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는.]


portrait 이란 단어를 처음 들은 성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가 뒤이어 길게 풀어 설명해줬지만 성우는 이해 못한 눈치였다. 귀여운 꼬마네. 남자는 픽 웃으며 제안했다.


[원한다면 그려줄까? 네 얼굴.]


결국 남자를 따라 쫄래쫄래 공원 안으로 들어온 성우였다. 성우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남자의 보금자리가 있었다. 남자의 짐은 단출했다. 커다란 이젤, 종이를 받쳐주는 나무판때기와 고정시켜주는 큰 집게, 목탄과 빵, 그리고 붓과 물감과 물통. 그리고 그가 앉을 의자와 상대방이 앉을 의자, 이게 다였다. 평범하다 못해 허름했다.


일단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위치이고, 대로변이라 주변에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환한 대낮이었기 때문에 성우는 경계를 풀었다. 무엇보다 남자가 츄리닝 차림으로 가만히 서 있던 첫인상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목탄을 집어 들고 그림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달라진 눈빛에서 어린 성우는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저런 게 진짜 어른인가. 어른들은 일을 할 때 저렇게 되는 건가? 그럼 우리 엄마도? 성우의 가슴이 설렜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여하튼 큰 형태부터 세밀한 디테일까지, 남자가 파고들어가는 과정에 성우는 간간히 질문 몇 개를 던졌다.


[넌 여기 살아?]

[이 근처.]

[한국인이야?]

[원래는.]

[지금은?]

[미국인이야.]

[아까 한국말 했잖아.]

[그건 내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한국말이지. 마침 네가 한국어를 할 기회를 만들어줬고.]

[그건... 미안해.]

[상관없어.]

 

남자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지만 성우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렇게나 어린아이의 질문에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성실하게 답해주는 어른은 드물었다. 성우는 간간히 보이는 그의 새까만 손을, 그의 입을 들어갔다 나오는 담배를, 초점이 잘 안 맞는지 간간히 미간을 찌푸리며 성우를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매는 서늘했지만, 햇빛이 비친 눈동자는 따뜻한 커피 색깔로 빛났다. 성우는 문득, 이 남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남자와 함께 한 시간은 내내 정적이었고,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그동안 LA 도시 탐방을 했던 것보다 이 남자와 같이 있는 게 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원의 안쪽에서 세 살짜리 아이와 공놀이를 하던 엄마가 이제 집에 가자고 했을 즈음, 남자의 손이 멈췄다. 끝인가?


[끝이야.]


남자가 말했다.


[보고 싶다면, 이리로.]


남자의 말에 성우는 쪼르르 달려갔다. 남자의 곁에 서서, 그동안 볼 수 없던 초상화의 앞면을 보자 성우의 웃는 얼굴이 종이 한 가득 그려져 있었다. 와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초상화에 성우의 입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바로 portrait이라는 거야. 알겠어?]

[진짜 대단하다.]


남자를 돌아본 성우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생소한 그림쟁이의 매력에 성우가 빠진 것이었다. 가슴의 두근거림은 쉽게 멎지 않았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때도, 엄마 몰래 침대 옆에 숨겨둔 그림을 꺼내 볼 때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학교를 갈 때에도 계속 그랬다. 그 날의 성우는 하루 종일 흥분된 상태였다. 그리고 하교할 때엔 가슴이 터지듯 쿵쾅거렸다. 혹시라도, 설마, 만에 하나 그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초상화 때문에 남자 이름도 못 물어봤다. 오늘 만나게 된다면 꼭 이름을 물어봐야지! 양 주먹을 꽉 쥔 성우가 콧김을 뿜으며 여느 때와 같이 집으로 향했다.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와 마주쳤던 게 이 모퉁이를 돌아서 몇 미터 이내였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고, 에잇 모르겠다- 하고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순순히 맞아주지 않을 거야.]


땅을 향해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을 때, 남자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똑같이 검은색 옷을 입고 성우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만 어제와 오늘의 남자의 차이를 꼽아보자면 모자였다. 어제 검은색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것과는 달리, 남자는 그의 검고 긴 생머리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서 있었다. 마치 성우와 똑같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결 좋아 보이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이제 애기가 아니니까 성우는 꾹 참았다. 그리고 모르는 척 물었다.


[오늘도 있네?]

[난 항상 여기 있어.]

[여긴 그림 그리는 자리가 아니잖아.]

[하지만 여긴 내가 항상 담배를 피우는 공간이지.]


그의 말을 듣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그의 허름한 운동화 옆에 떨어진 짧은 담배꽁초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그림그릴 때도 담배 폈었지. 아마도 이 사람은 헤비스모커인 모양이었다. 마침 며칠 전 헤비스모커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성우였다. 그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남자에게 말해줬다.

 

[담배는 건강에 안 좋대.]

[상관없어.]

[아플 텐데도?]

[난 항상 아파.]

[어디가?]

[온 몸이.]

 

그러고서 씩 웃곤, 남자는 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그리고선 담배를 만지지 않은 손을 내밀며 묻는 것이었다.

 

[오늘도 내 첫 손님 할래?]

 

성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이후로도 성우와 남자의 만남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주 지속되었다. 그간 성우는 남자와 많이 가까워졌다. 이젠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그의 이름은 민현, 나이는 성우보다 다섯 살 많은 열여덟이었다. 성우에겐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지는 나이차였다. 한국식으로 형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래도 성우는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먼저 민현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다.


민현은 말이 없었다. 성우가 먼저 묻기 전에 민현은 묻거나 스스로 떠벌리거나 하지 않았고, 가끔 돌발적인 상황에 성우가 얼이 빠져 있으면 유머러스하게 한마디 던지곤 끝이었다. 삭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매일 민현이 그려내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느낌이 성우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림만으로 놓고 보면 민현은 완벽했다. 멋진 동경 대상이었고,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가슴 두근거림의 원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모자를 쓰고 나오지 않는 민현의 모습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집중해서 봤을 때, 홀린다는 말처럼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우는 민현의 전속 그림모델이 되어주면서, 그 대가로 민현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줬다. 한국어로 대화하고 싶은데 마침 괜찮은 상대를 찾은 것이었다. 어린 성우가 똘망하게 눈을 빛내며 (나름대로 열심히) 민현에게 아기 가르치듯 한 단어, 한 단어를 가르쳤다. 그 모습이 웃기면서도 민현은 열심히 따라했다. 몇 주 지난 후엔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한국어로 막힘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민현은 그림을, 성우는 한국어를 나누었다.

 

민현은 결코 먼저 성우에게 앞서 다가가는 일은 없었지만 성우가 들어오고 싶어 할 때는 결코 내치지도 않았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갈 때쯤, 성우가 목탄을 잡아보고 싶다고 했을 때 군말 없이 제 자리를 내어주기까지 했다. 빵을 지우개로 쓰는 걸 신기해하는 성우의 동그란 뒤통수를 쓱쓱 쓸어준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남자답게 핏줄이 선 손, 크고 따뜻한 손길에 성우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매일매일 손길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성우는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줄기차게 민현의 옆자리를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조금은 편해진 차림으로 성우는 조금 더 편해진 민현에게 장난도 치고 놀았다. 그림도 배웠다. 꽤 좋은 경험이었다. 민현이 내 친형이었다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누가 봐도 민현은 좋은 형이었다.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어 들어가듯이, 성우가 차츰 민현에게 동경 이상의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을 때, 또다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 처음 왔을 때의 성우가 원하던 바가 이뤄진 것이다.

 

7학년, 그러니까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성우 외의 다른 한국인이, 그것도 같은 학년으로 다니게 된 것이었다. 하필이면 월요일 1교시가 수학이라니, 운도 없다고 하며 들어간 Mr. Gordon의 Room213로 들어간 직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녀는 어색해하는 남자애를 옆에 세워두고, 오늘부터 새로이 함께하게 된 클래스메이트라며 그를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유원이었다. You want? 애들이 킥킥거렸다. 여하튼 새로운 전학생 유원은 쭈뼛거리며 빈자리로 들어갔고, 공교롭게도 그 자리는 성우의 옆자리였다.

 

어어... 성우와 눈을 마주치고 우물쭈물하는 유원의 모습에 성우는 괜히 짓궂게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Hello? 성우는 뭔가 너도 한국인 아니냐고 묻고 싶어 하는 유원의 눈빛을 알아채고 먼저 선수를 쳤다. 예상대로 유원은 당황하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헬로..... 정직한 한국식 발음 그대로라 성우는 풉, 웃음을 터뜨릴 뻔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오늘 하루 동안은 절대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하루 종일 유원이가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며 영혼 없는 상태가 되고 나서야 성우는 깔깔 웃으며 제가 한국인임을 밝혔다. 주변 녀석들도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한국 남자애를 환영했다.


그리고 기분이 째진 성우는 민현을 만나 오늘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했다. 그래서 유원이가- 또 유원이가- 온통 유원이가 주제인 말들을 민현은 용케도 경청하고 있었다. 사실 경청이랄지, 경'견'이었다. 그는 전혀 유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거라곤 쫑알쫑알 얘기하는 즐거운 성우였다. 별것 아닌 일조차도 저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밝은 모습에, 온통 시커먼 어둠뿐인 그가 이끌리는 것이었다. 유원, 그 조무래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별 것 없는 열네 살 꼬맹이 따위야 상관없었다. 문제는 마찬가지로 열네 살 꼬맹이인 성우가 상관이 있다는 점인데, 아주 어릴 적 유기되어 해외입양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길거리에 내몰려진 진창 같은 삶을 살아온 민현이라도 최소한의 개념은 있는 것이었다. 특히나 미국이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를 끔찍하게 한다는 것도 알았고, 무엇보다 그 역시 페도필리아 성애자는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계속 끌리는 이유라면 밝음 때문인가. 아니, 그것도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지독한 외로움에서부터 시작된 정적을 깨부순 게 성우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성우는 그저 귀여운 존재일 것이었다. 아마 친동생이 있었다면 그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땐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렇게만.....

 

단순히 유원에 대한 것 역시 일시적일 것이라 믿은 것도 그 안일함에서 비롯됐다.

 

안타깝게도, 매일 아침 9시부터 약 4시까지, 약 7시간씩 함께 있는 게 사람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단지 처음 만난 그날만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성우는 매일같이 유원 얘기를 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큰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 급속도로 인생 절친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오늘은 유원이랑 뭘 했고, 내일은 뭘 할 예정이고- 그래도 민현은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다. 일종의 책임감처럼.

 

민현의 침묵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는지, 어느 날은 성우가 유원과 함께 민현을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민현은 당황했지만, 유원은 이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던지, 그리고 민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던지 익숙하게 인사해왔다. 성우와 같은 학년이라고 들었는데 고작 해봤자 몇 개월 차이나는 생일도 생일이라고, 성우보다 조금 더 큰 키가 눈에 들어왔다. 더불어 성우와는 다른 타입의 외모도 함께.

 

아무래도 그림쟁이가 주 업이다보니 그러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필연적이었다. 유원은, 성우가 말했던 대로 정말 잘 생겼다. 한참 성장기라고 하더니 골격도 괜찮은 편이었다. 아마 이대로 쭉 큰다면 여느 할리우드 스타나 뉴욕 패션위크의 모델 남부럽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성우는 유원을 어떤 시선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까. 우습게도 이런 걱정이 들었다. 왜지, 좋아할 일도 없는 꼬맹인데 말야. 민현은 픽 웃었다. 어차피 굳이 여타 요소가 없더라도 이어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성우는 반년도 안 되어 곧 이 곳을 떠날 예정인 이방인이었고,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이며 성우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은 예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셋의 첫 만남은 유쾌한 듯, 또는 불편한 듯 끝났다. 이후에도 종종 유원은 성우와 함께 왔다. 둘은 번갈아가며 민현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투박한 목탄 그림을 손에 꼭 쥐고 귀가하는 게 익숙해져갔다. 그렇게 쭉 이어질 줄 알았는데 성우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민현은 그만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유원이가 이어폰 줄을 놓고 갔기에 혹시 찾지 않을까 싶어, 멀리가지 않았겠지 싶어 아이들의 뒤를 쫓아갔던 것이었다. 성우와 유원은 민현의 그림 그리는 곳으로부터 한 블럭을 올라가서 거기서 각각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이 나뉘는데, 이어폰 주인을 알기 때문에 부러 유원의 뒤를 쫓은 게 화근이었다. 민현이 소리높여 유원을 부르려는 순간, 유원이 옆에 찌그러져 놓여있던 쓰레기통에 그림을 아무렇게나 쑤셔 박는걸 보게 되었다. 조금 전에 다 같이 있을 때 보인 반응과 180도 다른 행동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림 좋다고 가져가던 ‘그 유원이’가 맞나? 큰 눈을 다시 뜨고 봐도 유원이가 맞았다.


FUCK. 민현은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유원이가 사라지고 남은 쓰레기통에 유원의 이어폰 줄을 가차 없이 내던졌다. 어쩐지 저 새끼, 처음부터 느낌이 더러웠지. 간간히 쏘아보던 눈빛은 착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현은 알 수 없었다. 유원이가 왜 민현을 적대시하는지를. 아마도 성우때문일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그러기에 성우가 민현 앞에서 보이는 태도가 너무나도 유원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기에 설마 질투심인지는 예상이 안 되는 것이었다. 민현도, 유원도 이땐 모르고 있었다. 성우가 서로에게 상대방 얘기만 하고 있었다는 걸. 민현에겐 유원 얘기를, 반대로 유원에겐 민현 얘기를. 성우는 진심으로 이 둘이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간에 끼인 것이 성우였기에 그 바람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바람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유원은 그걸 알고, 미성숙한 만큼 대놓고 민현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 얕은 노림수와 꾐을 간파하고 있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성숙하지만 똑같이 치기어린 민현은 복잡한 방법으로 유원을 상대했다.


하지만 두 남자가 이유 모르는 질투심에 서로 맞선다고 해봤자 당장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주먹을 날릴 수도 없었고, 총구를 겨눌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둘은 성우 앞에서 계속 이성적인 사회인 노릇을 했다. 물론, 성우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유원은 계속해서 민현의 그림을 버렸고, 가끔가다 눈빛 또는 손짓으로 민현에게 경계심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그나마 어른인 민현은 유원의 행동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넘김으로써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럴수록 유원이가 더 속 터져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민현이 보여주는 무표정에서는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읽혀지지 않았다.


그 위태로움을 모르는 건 중심인 성우뿐이었다. 유원 곁에 팔랑, 민현 곁에 팔랑거리며 뭐가 그리도 좋은지 성우는 항상 조잘대며 둘 사이의 딱딱한 공기를 풀어나갔다. 가을이 되고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성우는 마냥 해맑게 웃었다.

 


 

다시금 추운 겨울이 되었다. 두툼한 패딩 잠바를 입고 엄마 손을 잡고 쫄랑쫄랑 미국으로 따라오게 됐던 그 계절로 한 바퀴 돌아 다시 온 것이다. 그 사이에 성우는 많이 성장했다. 단순히 키가 자라고 체중이 늘은 것 외에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걸 꼽으라면 단연코 민현이 1순위였다. 그의 그림도. 유원은 2순위였다. 어린 성우의 선망과 동경은 오롯이 어른인 민현에게 향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민현, 한국으로 와. 성우는 가끔씩 졸라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민현은 겸연쩍게 웃어 넘겼다. 사실 민현은 한국에 관심이 없었다. 그를 버린 나라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만약 관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자신의 모국이라서가 아니라 성우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옹성우 때문에, 싫었던 곳조차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옹성우 때문에.


[언젠가 갈 수 있게 되면 갈게.]


민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그 언제가 언젠데? 성우가 예리하게 묻자 민현은 글쎄, 하고 말을 아꼈다. 그는 신중했다. 그러나 신중함이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재촉해봤자 나올 것은 없단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약 없는 약속을 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약속을 하는 게 나았다. 그는 민현의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충격적이게도 민현은 되물었다.

 

[그게 뭔데?]

 

민현은 철저한 아날로그형 사람이었다. 한참 구글이며 애플 붐이 일어나고 있던 때에도 꿋꿋하게 아날로그 정신을 지키고 있었다. 사실은 지키고 싶지 않아도 지킬 수밖에 없었지만.

 


 

성우가 봤던 그의 첫인상대로, 민현의 살림은 형편없었다. 낡아빠진 미술도구만큼이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 몇 벌 없는 검정색 옷 따위가 그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돈이 생기면 화구에 쏟아 부어 성우를 그려주는데 썼기 때문에 그의 식사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더러운 슬럼가의 중심에서, 그야말로 냄새나는 바퀴벌레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때가 삶에서 몇 번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고, 그의 존재를 버겁게 여긴 국가는 그를 해외로 입양 보냈고, 무책임한 입양부모는 국가지원금을 받아 챙길 목적으로만 민현을 키우고 방치했다. 그들이 살던 디트로이트는 그다지 안전하지 않은 동네였다. 허구한 날 집 근처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은 놀랍지도 않았다. 학교는 학생들을 통제할 수 없어 포기했고, 아이들은 거리 위의 갱들과 아무렇게 뒤섞여버렸다.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민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몸집 작은 동양인 남자라는 패널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는 더 독해져야 했다. 그는 이미 13살 때 총을 손에 쥐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아이러니 속에서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버텨나갔다. 그나마도 총을 쏘지 않는 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을 했다. 마약만이 삶의 위안이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삶이 바뀌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정말 우연히, 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버스 티켓을 한 장 주운 것이었다. 당장 오늘 밤 출발하는 버스였고, 도착지는 캘리포니아 LA였다. 티켓을 주어든 그의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어쩌면 이건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티켓을 바지 뒷주머니로 슥 집어넣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무리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내일도 만날 것처럼 하고는 그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내일부터는 다른 누군가의 자리가 되겠지. 그게 거리를 떠도는 청소년이든, 이름 모를 노숙자든, 도둑고양이든 중요치 않았다.

 

밤 11시가 넘어 민현은 터미널로 향했다. 혹시 몰라 챙겨온 비상식량 조금과 예비 탄창, 잭나이프 등이 그의 재킷과 바지주머니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다행히 늦은 시간 버스터미널에서는 아무도 검문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버스에 탄 민현은 차의 시동이 꺼질 때까지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새까맣게 물들어있던 하늘이 점차 파랗게 그리고 붉게 변해가는 것을 지켜봤다. 장관이었다. 이런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 운전사는 좋은 직업 같았다. 해가 지는 걸 매일 볼 수 있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러나 그의 감상은 버스에서 내림과 동시에 끝났다. LA는 시골 촌구석인 디트로이트와 차원이 달랐다. 그는 디트로이트에서보다 더 큰 위협을 느꼈다. 갱의 구역에 잘못 들어는 바람에 죽도록 얻어터졌을 땐 다시 돌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돌아가 봤자 똑같은 생활이 반복될게 뻔했다. 그래서 그는 이 악물고 버티기를 선택했다.

 

그나마 디트로이트에서 바닥을 굴렀던 경험이 영 쓸데없는 경험은 아니었는지 그는 타고난 민첩함과 싸움 실력, 눈치로 슬럼가의 한쪽 구석에 둥지를 틀 수 있었다. 물론 당장 이곳에서 발을 붙이고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몇 번 마약거래에 손을 댄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짓도 4번째가 마지막이었다. 쓸 만하다며, 페이는 후하게 쳐주겠다고 같이 일해보자며 꼬드기는 마약거래상과 갱들이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조금은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그래, 여긴 LA니까. 캘리포니아의 심장인 LA니까.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산소처럼 빨고 살던 마약도 버렸고, 총기도 웬만해선 꺼내들지 않았다. 잭나이프는 혹시 몰라 주머니 속에만 넣어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알아본 건지, 한 인심 좋은 아주머니 베티가 그에게 일자리를 내주었다. 피부색은 달라도 마치 자기 아들 같다며,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그 눈빛이 맘에 든다고 했다. 물론 아무 조건 없이 무작정 취업시켜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민현과 약속을 했다. 앞으로 마약을 끊고, 살인도 하지 말 것. 갱에 들어가지 말 것. 그게 조건이었다. 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협적인 도시 뒷골목 양아치에서 순식간에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됐다. 그녀는 민현의 변화를 웃으면서 좋아했다. Good boy. 처음으로 칭찬도 받았다. 부끄럽고 머쓱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다만 엄마 같은 그녀가 앞으로도 자주 웃었으면 했고, 칭찬도 몇 번 더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초반, 민현은 성실하게 움직였다. 별거 아닌 과일가게라고 무시하는 놈들이 있으면 한대씩 몰래 주먹을 날려주기도 했다. 처음으로 월급이란 것도 받아봤고, 천장과 창문이 멀쩡히 붙어있고 형광등도 들어오는 보금자리도 얻었다. 그리고 그 보금자리 한 끝에 쌓여 있던 수많은 캔버스와 미술도구를 보고 민현은 운명처럼 이끌렸다. 소싯적 자신이 쓰던 그림과 화구에 관심을 보이는 민현이 무척이나 순수한 눈을 하고 열정을 보였기에, 그녀는 민현에게 연필과 붓을 쥐여 주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줬다. 맨입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중에 레슨비를 청구하겠다는 농담을 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민현이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랐다. 너라면 여길 탈출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민현은 굉장히 싱숭생숭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자신의 인생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다 싶은 희망도 들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끈질기게 그를 눈여겨보고 있던 마약거래상 하나가 비열하게 베티를 두고 협박을 해왔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괜히 쓰레기새끼가 베티 앞에 나타나 깽판을 치고, 자신과 거래상이 엮이는 그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어렵지 않은 강요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빨리 끝내버리면 되겠지 싶었다. 민현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함정인지도 모르고.

 

그는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 마약을 들고 나갔다. 이 구역의 갱이 아닌 듯, 낯선 얼굴들이 그를 에워쌌다. 물건이 맞나 확인하는데, 그들의 표정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설상가상 그 자들은 낯선 언어를 쓰고 있었다. 스페인어였다. 히스패닉이 많지 않은 동네 출신이라 스페인어는 영 젬병인 민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제스처로 해야 하나, 싶었는데 상대방이 주머니 쪽으로 손을 갖다 대는 게 보였다. 그렇지, 세상에는 말보다 빠른 게 있었다. 끝이 반짝이는 그건 바로 총이었다. 남자가 총을 꺼내기도 전에 민현이 먼저 총을 꺼냈고, 남자의 머리를 향해 한방을 쐈다. 정확하게 맞은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튀고, 남자의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 두 명이 덩달아 총을 꺼내들었다. 민현은 침착하게 원래 자리를 벗어나 다른 남자들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생존을 위해 배운 사격이라 명중률이 높은 게 그의 특징이었다. 순식간에 상대편 세 명을 모조리 처리해버린 셈이 되었다. 애초에 먼저 총을 꺼내드려 했던 건 저쪽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 바닥은 원래 그랬다. 민현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문제는 다음날 벌어졌다. 죽은 놈들의 패거리가 거래상을 잡아 족쳐서 어제의 거래 장소에 나왔던 게 민현이란 걸 알아냈다. 그들은 거래상의 머리에 총을 갈기고, 떨어져 나간 탄피가 식기도 전에 곧장 과일가게로 달려들었다. 여느 때처럼 가게를 오픈하고 정리를 하고 있던 베티와 민현의 눈앞에 총구가 들이대졌다.

 

베티 역시 슬럼가에 살면서 총기사건에 한두 번 휘말린 건 아니었지만, 다짜고짜 갱단원들이 나타나 그녀와 민현에게 총구를 겨누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속수무책으로 구석으로 내몰렸다. 설마 민현,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상황이 대단히 잘못된 상황인 것을 잘 아는 민현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가 대답하고 있지 않자 총구를 겨눈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이 새끼가 어제 우리 조직원들을 죽였어! 셋이나! 우리 형제들을 죽였다고!]

[민현, 그게 사실이야?]

 

민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오, 맙소사! 베티는 얼굴을 감싸 안고 탄식했다. 살인과 마약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니. 질책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현의 표정이 처참히 구겨졌다.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릎 꿇고 사죄할 틈이 없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축이고 빠르게 대답했다.

 

[알아요,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하, 좆만한게 우리 부라더들을 죽였겠다?]


많이 흥분한 남자 하나가 총을 장전했다. 빠져나가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됐긴 하지만, 이대로 머리에 구멍 뚫릴 순 없지. 민현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여기까지 쫓아온 건 세 명밖에 안 되기 때문에 혼자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총상을 입더라도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베티였다. 이런 일과 무관한 사람인데, 어떡하지.

 

베티와 민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벙긋거렸다. 데스크 아래에 있던 패닉버튼을 눌렀다는 뜻이었다. 곧 경찰이 올 거고, 그들은 살아나갈 수도 있다고. 그러나 그걸 읽은 건 눈앞의 갱도 마찬가지였다. 하, 패닉버튼? 경찰이 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내주지. 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현이 그의 옆으로 튀어나가 그를 밀쳤다. 그의 손에서 발사된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베티의 어깨를 관통했고, 나머지 갱원들이 민현을 노릴지 베티를 노릴지 갈팡질팡하며 서있는 동안 민현은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총으로 남자의 머리를 날렸다. 나머지 두 명은 신참인 듯, 놀라 어버버 거리고 있는 사이 민현이 한 명을 처리했고, 다른 한명은 곧바로 가게로 들이닥친 경찰을 보고 놀라 총을 떨어뜨렸다. 중요한 한마디도 잊지 않고 말이다.


[저 녀석이 쐈어요!]


그러나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증언으로 민현의 혐의는 벗겨졌고, 그녀는.... 수술실에 들어갔지만 끝내 살아나오지 못했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녀였기에 유품은 그나마 가까웠던 민현의 차지가 되었다. 차마 이루지 못한 화가의 꿈이 담긴 화구들이 주인을 잃고 쓸쓸하게 바래져 있었다. 그녀가 그렸던 그림 몇 점이,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림이라는 거, 마냥 멋지고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거짓말쟁이. 차마 그림들을 어쩌지 못하고 끌어안은 민현은 홀로 남은 집 안에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미안하다고도, 잘 가라고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그저 조용히, 그에게 남겨진 ‘지켜야 할 것’을 바라봤다.

 

다음날부터 민현은 전보다도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 이번엔 또 다른 도심지의 가게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그가 알바하는 곳은 카페였는데, 카페 주변으로 전부 금연 지역이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 때마다 민현은 멀리까지 나가야했다. 그리고 여기가 성우랑 처음 마주쳤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 길은 민현이 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이자 성우가 귀갓길과 맞닿은 유일한 접점이었다.

 

그의 쉬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날그날 달랐다. 그나마 퇴근시간이 성우의 하교시간과 얼추 비슷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는 성우를 자주 봤었다. 민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만 입었기 때문에 눈에 안 띄어서 성우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민현은 성우를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 돈 많은 부잣집 애기라고 생각했고, 두 번째 봤을 땐 애기의 입에서 나오는 외국어가 한국어라는 걸 알게 됐다. 한국인인가. 그래서 조금 더 끌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LA에도 디트로이트에도 한국인은 많았다. 사실 미국에 있는 도시 어디로 가든 한국인은 바글바글하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현은 막연하게 성우에게 쏠리는 관심을 한국인이니까 그런 거라고 막연하게 여겼다. 가끔 그 애기가 종알거리면서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나름대로 추측해보면서.

 

그러다가 운명처럼 성우가 발로 찬 돌이 민현에게 와 닿았다. 정말이지 운명이 아니었을까, 민현은 생각했다. 조그만 돌멩이가 날아온 거라 아프지 않았고, 그저 누가 그랬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만 슬쩍 돌린 곳에 성우가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성우가 sorry, 하며 어물쩡 몸을 돌렸다. 민현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민현은 이대로 성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기를 붙잡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할 순 없었고, 그렇다면.

 

“아파.”

 

역시 애기는 즉각적으로 뒤돌며 크게 반응했다. 다시 한 번 말해줄까?

 

“아파.”

“아저씨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나가는 한국인 유학생을 납치해서라도 한국어 좀 배워둘 걸 그랬나. 곧장 날아드는 긴 문장으로 된 질문에 민현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나마 주워들어서 뜻을 아는 한국이라는 글자를 어눌하게 되풀이했다. 그 새 성우는 입을 다물고 팔짱을 낀 채 민현을 스캔하고 있었다. 아직 경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민현은 안심하라는 듯 비어있는 양 손에 힘을 빼고 그대로 서 있었다. 애기의 스캔이라면 얼마든지.

 

그 이후는 앞서 본 그대로였다. 민현이 성우를 그렸고, 성우는 민현을 동경했다. 누가 봐도 귀갓길에 만나 그럭저럭 어울리며 친하게 지내는 어른과 아이 정도로, 아무 이상 없었다. 그러나 성우의 존재는 점점 민현에게 더 큰 의미가 되어갔다. 매일매일 첫 손님이었고, 그의 그림이 좋다고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외로움을 빛으로 녹여주기까지 했다. 성우의 존재도, 성우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게 새로웠다.

 

이메일도 그 중 하나였다. 그나마 일을 하며 알게 된 포스 정도는 이해했는데, 개인 노트북과 이메일 계정이라니. 그건 또 어느 세계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민현의 모르겠다는 제스처에 성우는 깜짝 놀랐다. 이 시대에 이메일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마침 그 때는 포털사이트가 연달아 만들어지며 인기를 얻고, 누구나 하나씩 이메일 계정을 만드는 게 유행인 시기였다. 한참 유행에 밝은 성우가 민현을 이대로 놔둘 순 없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다. 결국 하루는 공공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알아내서 민현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이게 이거고 저게 저거고.. 이메일 주소를 이렇게 만들어두면 우리가 계속 연락할 수 있고.... 성우는 쉬지 않고 쫑알거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민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하며 성우의 말에 장단을 맞춰줬다. 그리고 대망의 회원가입이 시작됐다. 아이디라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지는 거고, 메일 주소에 그대로 쓰인다고 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민현은 대충 hwang 이라고 입력했다. 너무 짧아서 안 된다는 경고 메시지가 떴다. 푸핫, 진짜 hwang 으로만 하면 어떡하냐며 성우가 웃었다. 겸연쩍어진 민현이 관자놀이를 한번 긁었다. 그럼 풀네임을 입력하면 되려나. hwangminhyun.


“황 민 현.”

 

그가 타자를 치는 사이, 성우가 소리 내어 천천히 읽었다.

 

“이름 예뻐. 예쁜 이름이야. 황민현.”

 

그때의 기분은 뭐랄까,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리는 게 의미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민현은 성우가 반말로 황민현이라고 부르고 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르는 대로 놔뒀다. 여태껏 제대로 불린 적 없는 이름이었다. 18년 만에 가치 있게 불린 이름은 이제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좋은걸. 누가 이름을 지어줬는지도 모르고, 한때는 수치스러운 비밀 감추듯 외면했었지만 단지 성우가 불러준다는 이유로 민현은 그 이름이 몹시 좋아졌다. 계속해서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그의 편이 아니었는지, 정직하게 흘러가는 시간 흐름 속 성우의 출국일도 가까워졌다. 애초에 이민으로 미국을 오게 된 유원과 달리 성우는 어머니의 일 때문에 딱 일 년 동안만 있기로 처음부터 정하고 왔던 것이기 때문에, 이쯤 돌아갈 거라고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못내 섭섭했다. 아니, 애틋한 사이도 아닌데 섭섭하거나 서운하다고 표현하기는 무리였다.

 

다만... 보내기 아쉬웠다. 이대로 보내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죽도록 일해서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가면 볼 수 있을까? 듣기로는 서울에만 천만 명이 산다던데, 불가능하겠지. 민현은 괜한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한국엘 간다 한들 만날 수 없을 것이며, 설령 성우가 다시 미국으로 오게 된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성우와 민현 사이에 난 사회적인 격차는 더욱 깊은 크레바스처럼 갈라져 있을 것이었다.

 

맞다. 둘은 원래부터 어울리면 안 되는 사이였다. 그는 잠시 마취에 취한 듯 잊고 있던 현실을 자각했다. 받아들이는 건 쉬웠다. 포기하는 것도 쉬웠다. 어떻게 보면 무감정하게 보일 정도로 냉정하게 정리했다.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성우가 꼭 이메일로 연락하고 지내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민현은 담배냄새가 배인 손으로 어린 손을 맞잡고 약속에 응했다.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 미안했지만 모른척했다. 만약 연락을 끊을 거라고 하면 성우는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괜히 애를 울릴 필요는 없지. 그는 마지막까지 성우를 진정시키려는 듯 웃어보였다. 성우가 마지못해 집으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 까지 확인하고, 그는 가차 없이 돌아섰다. 잠시나마 나는 달콤한 꿈을 꿨던 거다 되뇌면서.

 

성우가 탄 비행기는 이 비행기일까 아니면 저 비행기일까. 성우가 말해줬던 출국 날이 되자 민현은 시도 때도 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비가 많이 내렸다. 잘 잡히지 않는 초점을 가다듬고 몇 번을 노려봐야 잔뜩 낀 비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비행기가 겨우 보였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비행기가 뜰 수 있나? 하긴 요샌 별게 다 있으니까 비 오는 날 비행기가 못 뜰 거라는 것도 웃겼다. 고작 비 같은 건 그를 잡아둘 핑계가 될 수 없었다.

 

그 때 꼬리가 반짝이는 비행기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쩌면 저 비행기일지도 모른다. 성우는 항상 반짝였으니까, 성우가 탄 비행기도 반짝일 거란 생각에 기인한 추측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뭐든 간에 너는 하늘을 날고 있겠지. 역시 너에게는 Goodbye보다는 '잘 가'가 좋겠지. 잘 가, 성우야. 미처 못 다 전한 몽글몽글한 감정은 마음으로만 전했다. 그리고 민현은 다시 현실로 눈을 돌렸다. 당장 오늘 벌어 오늘을 사는 입장에서 더 이상의 감성적인 기분은 사치였다.

 


 

그 사이 성우는 열 시간을 날아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정신없이 공항을 나와, 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 전만 해도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사는 건 상상도 못했었는데.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간의 기억들이 꿈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꿈은 아니다. 일 년새 훌쩍 커버린 성우의 몸이 증명했다.

 

이후에도 성우의 키는 무럭무럭 자랐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대나무처럼 쑥쑥 컸다. 그 사이 여자애들에게 고백도 몇 번 받아보고, 변성기와 사춘기도 겪어보고, 별의 별 일을 다 겪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큰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딱 하나, 성우의 마음에 단단히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황민현이었다. 지금까지 성우가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냈지만 민현의 답장은 없었다. 확인하긴 하는 걸까? 답장은 안 해주더라도, 적어도 보내준 메일을 읽어줬으면 하고 바랐다. 맘 같아선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고 싶은데 알 방법도 없으니 애가 탔다. (당시에는 이메일 수신확인 기능이 개발되기 전이다.) 떠나기 직전에 노파심에 한 번 더 설명해주고 왔는데... 설마 방법을 까먹은 건 아니겠지? 확인차 대뜸 물어본 기습질문에 정답만 말했던 그였는데.

 

반면 유원은 착하게도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왔다. 내용은 크게 중요한건 없었다. 그냥 미국에 살 때 하루 종일 나눴던 그 날 그 날의 시시콜콜한 잡담들. 오늘은 타일러가 뭔 사고를 쳤다더라, 수학 퀴즈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런 얘기. 물론 그 내용도 소중하고 좋았지만 하루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성우가 물었다. 혹시 민현 못 봤어? 민현이 이메일 체크를 안 하는 것 같은데 만나면 뭐라고 말 좀 해줘. 글로만 봐도 성우의 표정과 목소리가 자동 재생되었다. 메일을 읽던 유원이가 픽 웃었다. 누구 좋으라고? 애석하게도 유원이가 민현에게 성우의 말을 전해줄 일은 없었다.

 

유원은 민현이 싫었다. 처음 성우가 민현에 대해 얘기해줬을 땐 신기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건 그뿐이었다. 성우가 입에서 민현의 이름이 자주 언급될 때마다 민현에 대한 호감도가 뚝뚝 떨어졌다. 딱히 자기에게 못해주는 사람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싫은 건지. 다행히도 그 싫은 감정이 뭐였는지 오래 걸리지 않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질투였다. 그것도 아주 명백한 질투.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성숙함, 어른의 여유를 갖췄고, 하물며 영어도 잘하고 성우가 좋아하는 그림도 잘 그리는 그에게 유원은 질투심을 느꼈다. 성우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볼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눈을 나에게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성우가 좀 봐준다 싶었을 땐 성우의 출국이 코앞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건가? 싫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는 최선을 다할 예정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민현을 제치고 우위를 점하고 싶었다. 치기어린 마음에 그는 성우가 안 볼 때를 노려 민현에게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곤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소름끼쳐. 유원은 민현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민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둘은 같은 이유로 서로를 미워했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성우가 LA를 떠나면서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게, 성우가 출국하는 날을 기점으로 공원의 올블랙 초상화가 민현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어디로 갔을지는 더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 성우를 볼 수 없으니 어쭙잖은 그림도 집어치운 건가. 중학생 유원이가 봐도 속이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뭐, 그 인간 따위 내가 알게 뭐야. 유원은 괜히 머리카락을 털어냈다.

 


 

그렇게 세 명이 각자 떨어져 사는 채로 세 번의 겨울이 더 지났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성우는 쉴 새 없이 몰아치는 1년을 마쳤다. 때마침 겨울방학을 맞아 한 달간 친척들과 LA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살았던 기간은 짧지만 학교도 다니면서 정 붙였던 곳이라 내심 그리웠는데 다시 갈 수 있다니 기뻤다. 그는 신나서 유원에게 메일을 썼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LA에 가게 됐으니 그 기간 동안 꼭 시간을 비워놓으라는 말을 끝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대로 인터넷 창을 끄려다가 문득 민현이 떠올랐다. 잘 지내고 있을까. 성우는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현은 삼 년 동안 답장 한 번 보내지 않았지만. 이제 그에게 메일을 보내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성우는 갈등했다. 보낼까, 보내지 말까. 결국 보내고 싶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그는 길지 않게 메일을 썼다. 나 LA 가. 10일 뒤에.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적은 뒤, 뭐라고 좀 덧붙이다가 그 내용은 지워버렸다. 내용인 즉슨, 삼 년 동안 어떻게 연락 한 번 안 할 수 있냐는 투정과 원망이었다. 너무 구질구질해 보였다. 차라리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듯이 따져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근데 대놓고 저렇게 말할 수는 없고,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야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 있지. 맘에 드는 질문을 뽑아낼 때까지 성우는 끙끙거렸다. 그렇게 열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성우가 LA에 오는지도 모르고 민현은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성우가 떠난 이후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허망함이 가슴에 몰려들어 초상화가를 때려치운 건 오래였다. 가끔 틈틈이 손에 연필이 집히는 날엔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림 그릴 때마다 베티와 성우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오르니 못할 짓이었다. 결국에 그는 방황하다 슬럼가를 떴다. 디트로이트를 탈출하던 때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어딜 가든 여기보단 낫겠지 싶었다. 그나마 1년 넘게 어딘가에 고용되어있던 기록은 그에게 도움이 되어 어찌저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작은 식당과 카페 등을 거치며 과거의 그라면 많이 놀랄법한 부지런한 일상을 보냈다. 가끔 그를 알아보고 시비를 터는 놈들이 달라붙어 불가피하게 폭력을 행사할 때도 있었지만, 마음 속 한 켠에 털끝만큼 남은 양심으로 살인과 마약은 절대 하지 않았다. 두 번 약속을 깰 순 없었다.

 

딱히 돈 모으는 재미 외에 꿈도 희망도 없는 그에게 있어 마지막 버팀목은 담배였다. 담배 한 모금에 베티, 또 담배 한 모금에 성우를 떠올리며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 다짐하는 게 그나마 그의 인생 중 유의미한 것이었다.

 

담배를 피다보니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다. 언제였는지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유원이가 담배 피는 걸 본 적 있었다. 딱히 건전하지 않은 뒷골목에서 그에게 시비를 거는 무리를 잡아다가 참교육을 실천하고 있던 때였다. 주로 상황에 따라 관절과 뼈를 조지는 스타일이라 손에 피 묻을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날따라 달려든 놈들이 난잡하게 이것저것 들고 있었다. 그나마 총은 없었으니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개중 가까이 서 있는 호리호리한 놈에게 먼저 달려들어 그가 갖고 있던 잭나이프를 뺏은 뒤, 손가락만한 잭나이프 하나로 판을 제압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찌르고, 찔리다보니 온 몸이 피범벅이었다. 그 꼴을 한 채로, 빨리 집에 가서 씻어야지, 하고 모퉁이를 도는데 저 멀리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던 유원과 마주쳤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한참동안 마주봤다. 유원의 눈이 가늘어지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민현도 마찬가지로 응수했다. 어차피 저 놈이 담배를 피든 말든 알 바 아니고, 그와 좋은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원래도 남이지만 그와는 ‘완전한’ 남이었다. 그냥 이대로 서로서로 제 갈 길을 가는 게 나았다. 몇 년 만의 재회는 그렇게 잠깐이었다.

 

담배와 연관되어 유원에 대한 기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반면, 겨울이 되면 성우가 생각이 진하게 났다. 특히나 비가 주륵주륵 내릴 때 더 그랬다. 헤어지기 싫다며 칭얼대다가 결국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몇 번이고 돌아보고, 저와 연락을 계속 해달라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던 애기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지금이면 웬만큼 컸겠지. 더 이상 애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자랐을 테다. 어쩌면 민현보다 키가 더 컸을 수도 있다. 민현은 성우가 얼마나 자랐을지 상상해보곤 그것만으로도 즐거워서 픽 웃음을 흘렸다. 어쩌나, 몇 년이 지나도 이런걸.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리고 만 모양이었다.

 


 

매일 해가 뜰 때쯤이면 그는 출근을 했다. 북적거리고 거리의 인파를 익숙하게 뚫고 정시 출근한 민현은 매장 오픈 준비를 하다가 사장과 매니저에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LA에서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푸드트럭 사업을 지원해주는 모양이던데, 한번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해도 되는 건가. 민현이 망설이자 둘이 입을 모아 외쳤다. 너라면 할 수 있어. Go, Minhyun!

 

둘이 하도 성화라, 민현은 마지못해 매장 컴퓨터를 이용해 LA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신청했다. 그 과정의 대부분은 매니저가 옆에 붙어 도와줬다. 마치 1:1로 컴퓨터 과외를 받는 기분이었다. 필요한 파일을 다운받아 지원서를 쓰고 이메일로 보내기까지. 얼핏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컴퓨터도 핸드폰도 안 쓰는 민현에게는 헷갈리는 일이었다. 그 점이 참 민현답달지. 신청을 끝내고, 잘 됐으면 좋겠다며 매니저는 민현의 어깨를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인터넷 창을 그대로 끌까, 하다가 마치 자석처럼 이끌리듯 민현은 받은 메일함을 클릭했다. 수많은 스팸메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목록을 넘겨보던 그의 눈에 하루 전 성우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바빠졌는지 어느 순간 뚝 끊겼던 메일이었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에 그는 홀린 듯 메일을 클릭했다.

 

LA에 온다고... 옹성우가, 다시 내가 사는 곳으로 온다고.

 

끝까지 다 읽은 민현은 그대로 창을 끄고 돌아섰다. 평소의 무표정과 다르게 그의 큰 눈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일까. 긍정적인 감정을 느껴선 안 될 입장에서 그는 복합적인 심정이었다.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했다. 성우가 LA에 와 있을 거라던 그 기간만큼 그는 굉장히 설레고 떨릴 거라는 거.

 

흥분감이 가시지 않은 채 열흘은 바쁘게 지나갔다. 청년지원사업 담당자 인터뷰도 있었고, 푸드트럭에서 팔 메뉴도 구상해야 했다. 틈틈이 그는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의 그림을 본 매니저와 사장이 푸드트럭이 아니라 아트트럭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며 설레발을 떨었지만 민현은 싱긋 웃어주는 걸로 답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성우효과인가. 본인이 해 놓고도 웃겨서 픽 웃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은 언제나처럼 흘러갔다. 그 사이에 될까 싶었던 지원 사업에 합격했고, 그 뒤의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식당과 카페에서 일했던 경험을 한껏 살려 간편한 식사용 컵누들과 컵밥 등 컵시리즈를 만들어냈다. 핫도그는 덤이었다. 어쩐지 성우를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 손에 귀여운 핫도그를 하나 쥐어주고 싶은 기분이라서.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돌아가는 게 현실이었다. 그는 이제 쉬는 시간도 없이 자신이 혼자 도맡아야 하는 일을 하게 되어 눈코 뜰 새 없었다. 첫날은 실수도 했지만 점차 하면서 노하우가 생겨났다. 그렇게 하루를, 그 다음날을 계속해서 살아갔다. 힘이 났다. 이 도시 어딘가에 성우가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편 성우는 LA에 도착해서 친척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오랜만에 유원을 만나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때마침 크리스마스 연휴였기에 도시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유원은 어렸을 때의 조그맣던 모습과 달리 성우보다 키가 커져 있어 내심 놀랐다. 그는 자꾸만 성우에게 다시 유학 오라고, 학교가 리모델링해서 더 좋아졌다는 등의 바람을 넣었다. 그런 유원의 말을 적당히 받아치며 성우는 유원의 눈치를 봤다. 딱히 민현 얘기 하는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민현이 어디 있는지 혹시 알고 있냐고 물어보면 싫어하려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접었다.

 

그러다 문득, 공원에 가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방문한 공원의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휑한 자리가 믿어지지 않아 십 분을 멍청히 서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호텔로 돌아갔다. 민현이 보고 싶었다. 근데 이 넓은 도시에서 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나마 계속 살아왔던 유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민현에 대해 물어본들 누가 알까. 인터넷에 올려볼까? 그러기엔 민현이 유명인사도 아니었다.

 

어떡하지- 결국 성우는 민현을 다시 만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터덜터덜 시내를 걸으며 하릴없이 시간을 때웠다. 이 골목에도 가보고 저 골목에도 가보고.. 확실히 어렸을 때 봤던 거랑, 좀 커서 다시 찾아온 거랑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땐 마냥 무섭고 신기하기만 했는데 그새 머리가 커졌다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나 좀 멋진데. 기분이 좋아진 성우는 눈앞에 굴러다니는 캔을 발로 시원하게 걷어찼다. 높이 떠오른 캔은 생각보다 멀리 날아갔다. 바닥에 몇 번 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달려가니 한 푸드트럭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트럭에 캔 부딪혔다고 화내는 건 아니겠지, 싶어 소심하게 캔을 주워드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성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Hey boy, do you like a hot dog?"

 

민현의 목소리였다. 잘못 들었나? 재빨리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때보다 조금 상기된 피부에, 성숙해진 인상에, 약간은 피곤해 보이는 민현이 푸드트럭 안에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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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치사량에 준할만큼 갑자기 년옹뽕이 차서.... 옛날 글이라도 가지고 왔읍니다.... 한참 미드 열심히 보던 때에 쓴거라 어색하지만 미국이 배경이네요... 틀린 부분이 많을 텐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그나저나 요며칠 뜬 떡밥들이 다 너무 귀여워서 죽을거 같아요 ㅠㅠ 옹깅이는 언제나처럼 옹깅옹깅인데, 황은 ..... 캡틴코리아라서.... 이젠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죽어서나 볼 수 있을까 싶긴하지만 제 머릿속에서 만나게 해주면 되는 거니까요 (????) <<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차피 얼굴이 개연성이니까요!!!! 


그럼 이만 생존신고를 마치고 사라지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건강 유의하시고 언제나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p.s. 트위터 계정을 하나 살리긴 했는데, 덕질 계정이 아니라 제 본계입니다. 덕질 얘기는 거의 안 하고 사담만 하는데.... (매일 올라오는 것: 오늘 점심 뭐 먹지) ㅋㅋㅋㅋ 혹시 이전 계정에 이어서 교류 원하시는 분 계시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ㅠ.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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