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앞두고, 3학년 선배들을 위해 간식거리를 들고 찾아간 연극 동아리 아이들 앞에서 부장 선배는 보란 듯이 차고운을 무시했다. 공부만 잘한다고 세상이 쉽지 않다는 고작 두 살 많은 아이의 잔소리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연보라는 부장 선배의 잔소리 대신 차고운의 검은 스타킹 끝의 하얀 자국에 집중했다. 누가 발이라도 밟은 건지, 검은 스타킹에는 하얀 자국이 나 있었다. 슬리퍼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온 발가락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이라도 쥐듯 움츠러드는 것을 본 순간, 연보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웃기냐?”

 

 이제야 부장 선배에 집중한 연보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참 웃겨. 야, 1학년 애들 중에 둘이 제일 건방져. 그거 알아?”

 

 죄송하다는 면피용 말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쩐지 연보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야, 연보라. 야, 잘만 나불거리더니?”

 

 어깨를 쿡쿡 찌르는 손길에도 연보라는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다른 생각에 잠겼다. 요즘 들어 복도에서 노골적으로 차고운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던데, 혹시 저 자국도 그런 건가? 차고운 발끝의 하얀 자국은 슬리퍼 자국이 분명해 보였다. 신경 쓰여…. 연보라는 입속에 머금은 말을 삼켰다.

 

 “야, 말 못하냐고.”

 

 말이 없는 연보라를 보며, 부장 선배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까짓 위계질서쯤이야 무시하고 싶었지만, 연보라는 연극부가 좋았다. 그만둘 생각은 없었고, 그렇다고 비위를 맞추고 싶지는 않았다. 실장은 한숨을 쉬고, 연보라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그런 실장을 보던 부장은 딴지를 걸듯 말했다.

 

 “실장, 잘해야지? 응? 언니 졸업하면 동아리 개판 나겠다.”

 

 비스듬히 웃어낸 부장 선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연보라는 차고운의 발가락에서 눈을 뗐다. 

 

 “나 수능 끝나도 학교 나오거든? 너네…. 한 번 해보자. 응? 두 시간씩 발성 가자.”

 

 목이 쉴 때까지 하는 발성 연습은 이 유서 깊은 동아리에서 선배가 후배를 벌주기 위해, ‘기합’을 주기 위해 택하는 묘한 연습이었다. 실제로 훈련이 필요하기는 했다. 육성으로 연기하기 위해서, 생생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연습이었지만, 선배들이 시킬 때는 성격이 조금 달라졌다.


 차고운은 고개를 숙인 동기들과 달리, 조금 먼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연습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울 속, 다른 아이들보다 반 뼘쯤 큰 연보라가 입술을 물고 있었다.


 차고운은 연보라가 늘 거슬렸다. 

 

 “야.”

 “네.”

 “고운아.”

 “네.”

 “수능 끝나면…. 다시 얘기하자.”

 “할 얘기 없어요.”

 

 일렬로 늘어선 동기들을 두고, 부장 선배의 손길에 구석으로 온 차고운은 선배의 어깨너머 거울 속의 연보라를 보며 말했다. 부장 선배는 고개를 돌려 차고운의 시선 끝을 확인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에는 쟤야?”

 “뭐가요?”

 

 다른 3학년 선배들이 부장 선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인제 그만 하라고 만류하는 손길임에도 부장 선배는 가볍게 쳐냈다. 그리고 차고운을 끌어당겨 안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너, 진짜 못된 년이야. 사람 마음 이용해 먹는 나쁜 년. 언젠가는…. 똑같이 당할 거야.”

 

 자신의 저주가 마음에 드는지, 부장 선배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떨어졌다. 거울을 통해 그런 부장 선배와 차고운을 물끄러미 보던 연보라는 거울 속 차고운과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시선을 돌렸다. 거울에 반사되는 상에는 그 어떤 표정도 비치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에 어깨를 가볍게 떤 연보라는 이제 막 연습실을 나가는 3학년 선배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동기들과 2학년 선배들처럼 자연스럽게.

 

 “조심히 가십시오!”

 

 우렁찬 인사 소리를 뒤로 하고, 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허리를 편 실장은 1학년 아이들을 모아두고 말했다. 

 

 “야, 진짜…. 조심 좀 하자. 응? 어차피 곧 졸업하는 선배들인데, 기분 맞추는 게 그렇게 어려워? 선배님들 수능 앞두고 한창 예민하실 시기인데, 꼭 그렇게들 굴어야 해?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이런 걸 두고 내리 갈굼이라 하기는 애매했다. 실장의 표정은 호되게 야단치는 사람의 것이 아닌, 걱정 어린 표정에 가까웠다. 아직 복도에 있는지, 불투명한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에게 들으라는 듯, 목소리마저 높였기 때문이었다.

 

 “안 좋은 소문 돌게 하지 마.”

 

 2학년 선배들은 폭죽과 과자 봉지를 정리하라고 이른 뒤, 연습실을 나갔다. 이제 연습실에 남은 것은 1학년들뿐이었다. 연보라를 포함한 아이들은 서로를 다독였고, 차고운은 조금 떨어져 섰다. 싸늘한 바람이 스며드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차고운은 얼어붙은 창틀에 팔을 올리고, 연습실을 훑어보듯 시선을 옮겼다. 거울 속의 연보라에게 다가간 시선의 끝, 연보라의 눈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기들에게 자신이 정리하고 가겠다며 말을 전한 연보라는 여전히 차고운을 응시하고 있었고, 차고운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길을 지우지 않고, 그저 제 눈으로 따라 걸을 뿐이었다. 한 발씩 가까워지는 두 사람 거리, 점점 선명해지는 동공. 

 

 “너는 왜 안 나가?”

 “왜 너 혼자 정리해?”

 

 연보라는 선뜻 나선 말에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입술을 물고, 곰곰이 고민하던 연보라에게 차고운이 성큼 다가섰다. 연보라를 보아도 못 본 체 해버리던 차고운이었다. 그런 차고운이 요즘 자꾸만 연보라를 찾고, 연보라에게 눈길을 둔다. 연보라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인데,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더욱 뚜렷하다. 

 

 “어? 왜냐니? 그냥 정리하는 거지….”

 “대체 왜?”

 

 ‘왜?’ 한 가지 질문은 연보라뿐만 아니라 차고운에게도 다가왔다. 저 아래 묻혀있던 호기심, 흥미 모든 것들이 단번에 떠올라버린다. ‘왜?’ 한 글자에 두 사람이 그간 가져온 모든 질문이 담겨버렸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특별하지 않은 날, 그저 그런 상황에서 다가와 버린 감정 앞에 둘 다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떠올라 버린 질문 어딘가 희뿌연 진실이 섞여 있을 것이다. 

 

 “혹시….”

 

 차고운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왜?’ 같은 질문에 다시 모든 생각이 잡아먹히는 기분이다. 커다란 배수구라도 된 양, 모든 생각이 물음표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빠른 속도로,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헤어 나올 수 없이 빠르게 소용돌이가 생겼다. 

 

 “나 때문이야?”

 

 소용돌이는 고요했다. 

 

 “뭐?”

 

 창밖에 몰아치는 바람 소리,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덜컹덜컹, 효과음처럼 들렸다. 차고운의 손이 다가와 연보라의 검지를 잡았다. 살포시 감싸 쥐는 손길은 연보라가 느끼기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온풍기 바람 같았다. 뜨거워진 바람이 천장을 타고 흐르다 뚝 떨어져 버린다. 이미 꺼진 온풍기이지만, 이제야 마지막 숨을 토해냈다. 덜덜덜 떨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꾼다. 창밖의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여전히 서로 말이 없다. 

 

 “너, 나 때문에 남았냐고.”

 

 딱히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던 연보라가 손을 뒤집자, 차고운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긴장했는지, 손바닥은 습했다. 들이치는 찬 바람에 코를 훌쩍이던 연보라가 천천히 손을 밀어 넣었다. 손가락 사이 공간은 타인의 살로 차올랐고, 온풍기 바람이 사라진 곳에는 온기가 채워졌다. 깍지 낀 손을 느리게 내리는 연보라의 행동에 반쯤 가려졌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붉게 물든 연보라의 뺨이 차고운을 맞이했다. 

 

 손은 여전히 내려가고 있었다.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조금 빠르게 숨을 몰아쉬는 차고운의 가슴이 안쪽에서부터 바르르 떨려왔다. 거센 바람에 문풍지처럼 흔들리는 저 창문처럼, 차고운의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 

 

 연보라는 바닥이 흔들리는 기분에 차고운의 손을 꼭 잡았다. 손가락을 더욱 단단히 엇갈리고,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이제 겨울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어둑해지는 하늘은 덤이었다. 

 

 수능을 앞두고, 학교는 본 수업만 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저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이들의 하교 소리일 것이다. 요란스럽게 멀어져가는 말소리들은 귀에 들어오지 못하고, 연습실 창문을 통해 바닥에 깔려버렸다.


 연보라는 심호흡하듯, 천천히 숨을 쉬었다. 지금 긴장은 자꾸만 밀려오던 ‘왜?’라는 질문 때문이다. 

 

 “연보라, 혹시 나 좋아해?”

 

 차고운이 꺼낸 질문에 연보라가 한발 물러섰고, 손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이 멋쩍은 상황을 타개하려 연보라가 호들갑스레 말했다.

 

 “내가? 미쳤어? 너를?”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은 일은 연보라가 느끼기에 속을 내보이는 기분이 들게 했다. 썩 대단한 접촉이 아니지만, 그 속에 숨은 마음은 별나게만 느껴졌다.

 

 “미쳤냐니…. 말을 해도….”

 “미안해. 아, 너 오늘 양머랑…선우랑 과외 하는 날 아니야? 선우가 기다리겠다!”

 “과외 시간 아직 남았어.”

 “응? 너희 거의 바로 아닌가?”

 

 이제 한 발 크게 멀어진 연보라와 그 사이의 거리를 보며 차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을 보던 연보라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해하며 연습실을 나섰다. 허둥지둥거리며 도망치듯 나간 연보라가 까맣게 잊은 쓰레기들을 보던 차고운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쓰레기들을 주워들었다. 손에 쥔 쓰레기들을 바닥으로 던진 차고운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열 오른 얼굴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한 차고운은 막을 수 없는 마음을 두고 한숨을 뱉었다. 

 

 인지하지 못하던 마음을 작은 실마리를 통해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늦가을의 식어가는 바람이 몰아치는 오후, 담벼락에 기대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연보라는 차고운의 질문을 다시 곱씹었다. 너무 당황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할 듯, 연보라는 숨을 고르며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보라가 타인에게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사랑이 연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두며 반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순간에도, 연보라는 그 장황한 표현 속에서 정작 제 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스쳐 간다는 수식어가 붙는 ‘첫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해서였을 수도 있다. 연보라는 친구라 여기던 차고운을 향해 달라진 마음의 온도를 느껴버렸다. 아까 마주 잡은 손은 반 친구들과 으레 하던 접촉과 결이 달랐다. 

 

 처음 느끼는 감정에 두려움에 휩싸인 연보라는 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손을 꼭 쥐었다. 학교에는 들을 이 없는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있었고, 왁자지껄하던 소음들이 잦아들어 고요가 찾아왔다. 적막한 하늘을 보던 연보라는 눈물이 가득 찬 것처럼 먹먹한 가슴을 안고, 천천히 교실로 향했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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