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오전에 연락한 한옥 건설 업체 사람은 오후에 바로 방문할 수 있다며 시간을 잡았다. 신우재는 집 주소 대신 산 입구 위치를 알려준 뒤, 도착해서 연락하면 나가겠다고 말해놓았다.

오늘은 내내 집에 있다가 경찰서만 잠깐 들렀다 올 거라는 말에 태오는 마중 대신 잠을 택했다. 낯선 인간의 방문 때문에 미리 잠을 자두려는 듯했다.

아침을 먹고 그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한옥으로 향했다. 창문마다 커튼이 잘 닫혀있나 확인하는 건 이제 일상이었다.

대부분의 물건을 안쪽 창고로 옮기긴 했지만, 손님이 보기에 이상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사겸사 한옥 안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아예 다시 지어야 하는 거 아냐?”

시간이 지날수록 창틀이 점점 찌그러지고 휘어지면서 틈이 눈에 띄게 벌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한옥은 천장이 조금 가라앉았다고 꼭 풀숲에 혼자 버려진 폐허 같았다.

한옥 내부는 더 가관이었다. 폭삭 주저앉은 천장은 이곳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체감하게 만들었다.

“당장 무너지진 않겠지?”

그래도 위태로워 보여서 보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이층집으로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벽지도 그새 더 쭈글쭈글해진 기분이다. 천장뿐만 아니라 한옥 자체가 거의 겨우겨우 버티고 선 꼴이었다. 그나마 그 뒤로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신우재는 바닥에 놓인 그림을 주워들었다. 젖었을 땐 건드리지도 못했던 그림이었다.

도화지는 바짝 말라 있었지만 위에 그려진 그림은 엉망이었다. 그래도 떨어진 종이들을 살살 주워 창고 한쪽에 모아두었다.

사람이 보기에 이상한 건 없나? 아. 흑백 사진. 저거는 치워야겠다.

이미 오래된 사진은 좀만 힘을 줘도 끄트머리가 푸석이며 부서졌다. 사진들도 조심스레 모아다 창고 한 편에 고이 올려두었다. 이제 보니 창고 안에도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이건 원래 있었나?”

저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는 온통 까만색 물감이 덕지덕지 발려 있었다. 이건 없었던 그림 같은데? 이 위에 색을 올리려는 건가?

그 옆으로 이젤 세 개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그림들은 벽을 바라본 채였다. 이것도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신우재는 이젤에 다가가 그림을 뒤집어봤다. 하나는 남성, 하나는 여성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으리.”

익숙한 사내가 밥을 먹고 있다. 일인칭 시점으로 그려진 사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황토집…이네.”

창문은 천장이 아닌 벽면에 달려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한옥과 비슷한 느낌의 황토집이었다. 그림 속 창문 안으로 햇빛이 들이쳤다. 신우재는 부드러운 색채로 뒤덮인 도화지를 매만졌다.

햇빛이라. 이 남자는 인간이었을까? 태오는 그와 매일 아침을 함께 보내고 싶었을까? 설거지도 급히 하더니, 이 그림을 그렇게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소중한 장면을 잊을까 봐?

우웅-.

“깜짝이야!”

상념을 깨듯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이 씨.”

정신 차리고 나니까 도화지 한쪽이 구겨져 있었다. 아니, 놀라서 손에 힘이 들어가서 그렇지…. 다 진동 때문이다.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미리 연락처를 주고받은 건설업자였다. 수화기 건너편으로 남자가 산 아래에 거의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산 아래 도착한 1톤 트럭에는 이런저런 자제가 잔뜩 실려 있었다. 우선 확인만 좀 해보자는 남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나무 사이로 입장하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허허 소리 내 웃었다.

“이런 데에도 집을 짓고 사네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여기서 살면 안 불편해요?”

“이 길 왕복하는 거 말곤 생각보다 안 불편해요.”

말과 동시에 검은 대문이 등장했다. 이건 좀 불편하긴 한데….

차에서 내려 대문을 수동으로 열고 오자, 남자는 대문이 고장 났나보다고, 요즘엔 등록된 차가 오면 알아서 인식하고 열리는 자동문도 있다고, 대문 좀 잠깐 봐줄까요? 물었다가, 대답도 전에 대문을 살피려 드는 덕에 진땀을 뺐다.

“보수를 할 게 아니라 다시 지어야 돼요.”

결합이 문제가 아니고 서까래가 틀어졌네. 한옥 안에 들어오자마자 혼잣말을 읊조린 남자가 결론을 내렸다. 역시나였다.

“저 위에 나무 보이시죠? 저게 서까래라는 건데, 쟤가 지붕 하중을 버텨주거든요. 기왓장 한두 장도 아니고, 한옥 지붕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데요. 그런데 저 중요한 걸 저렇게 중간을 툭 잘라놨으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는 게 전문가의 입장이었다.

“천장만 다시 지으면 되는 거죠?”

“어디 보자. 이거 시멘트가 아니고 흙벽이네. 여기 지은 지 오래됐어요?”

“아마도요?”

“흙벽은 습기에 약한데다, 천장 때문에 어디가 틀어졌을지 몰라서 아예 다시 지어야 돼요. 그리고 천장 수리 안 하면 여기 무너져요.”

“이거 지을 때는 천장을 저렇게 지어놔도 안전하다고 그랬다던데요.”

“그 놈들 사기꾼들이네. 누굴 죽이려고. 거짓말 아니고 이거 한 달 안에 지붕 주저앉아서 무너져요. 안에 사람 있으면 죽어요, 죽어.”

남자는 거듭 위험도를 강조했다. 그래도 집주인이 영 시큰둥한 태도를 보인다 생각했는지 남자가 나무라듯 대놓고 혀를 찼다.

“다른 데도 다 똑같이 말할 거예요. 다른 데서 시공해도 되니까 꼭 연락해 봐요.”

“그게 아니라 집 주인이랑 논의를 해봐야 해서요.”

“이거 그쪽이 지은 거 아니에요?”

“제가 지은 건 아니라서요.”

“아이고. 누가 이렇게 집을 무식하게 짓고 팔았대?”

이렇게 집을 지어놓은 당사자를 모른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남자는 이렇게 날림으로 집을 지어놓은 집주인과 업자들을 욕하며, 새로 지을 여유 없으면 안에 있는 짐을 당장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망했네. 다시 지어줄 돈은 없는데.”

애초에 잘못 설계된 거라지만 태오가 소중히 여기던 공간인데…. 오늘 밤에 짐부터 옮겨야 하나? 이따 저녁에 의논해야겠다.

태오는 오늘도 해가 지기 전에 일어났다. 오늘은 신우재가 있는 걸 미리 알아서 그런지, 평소대로 씻고 검은 셔츠도 멀끔하게 차려입었다.

“일어났어요?”

“응.”

씻었는데도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였다. 드라이는 안 했는지 머리가 젖어있었다.

“태오. 저 한옥에 있는 짐을 일단 빼야 될 것 같아요.”

신우재는 오후에 들은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달했다. 태오는 묵묵히 듣다가 전부 듣고서야 천천히 입을 뗐다.

“짐을 옮기는 게 낫겠다. 한옥은 일단 둬. 그 사람 말대로 한 달은 버티겠지.”

“한 달? 지환 선배 오면 다시 의논하려고요?”

“아니. 이사를 갈지도 몰라서.”

이사 생각이 있었구나. 당연히 태오가 여기서 계속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런가.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디로 이사 가려고요?”

“그건 모르겠어.”

모르는 건지, 알려주기 싫은 건지.

“그러면 여기 다시 와도 태오는 없겠네요.”

“아직 확정은 아니야. 기다리는 게 있어서. 있어 봐. 금방 밥 차려줄게.”

“어어. 같이 해요.”

오늘의 메뉴는 곤드레밥이었다. 미리 물에 불린 곤드레를 삶는 동안 태오는 국물이 자작한 생선찜과 우렁이 쌈장을 뚝딱 만들었다. 양배추 쌈도 함께였다.

“우렁이 쌈장은 꽤 오래 먹을 수 있어.”

태오가 잔소리를 차단했다. 이번에 혼자 마트를 다녀온 태오는 밑반찬으로 오징어 실채 볶음과 멸치볶음도 만들었다. ‘마른반찬은 있어도 된다’는 말만 새겨듣고 ‘밑반찬 잘 안 먹는다’는 말은 일부러 귀 밖으로 흘려보낸 게 틀림없다.

주문한 압력밥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이번에도 밥은 1인분이었다. 신우재는 밥을 덜어 태오의 앞에 둔 뒤 식사를 시작했다. 거절의 말은 흘려들었다. 결국 곤드레밥은 태오의 입 안에도 무사히 안착했다.

밑반찬 안 먹는다 했던 게 무색하게 마른반찬은 모두 짭조름하니 맛있어서 계속 집어먹었다.

식사에 열중하고 있자니 태오가 말랑말랑한 경단을 들고 왔다. 이번엔 만든 게 아니라 마트 표란다. 반찬을 못 늘리니 간식거리를 늘릴 모양이었다. 밥 덜어주기 잘했다.

저녁을 먹은 뒤엔 함께 한옥에 있던 짐을 옮기기로 했다. 태오는 창고에서 묵은 물건을 꺼내는 것도 오랜만이라고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옛날 물건이 있긴 하네요.”

낡은 궤짝 안에는 크고 작은 백자나 도자기, 엽전이 몇 개 든 복주머니, 하늘빛 도포가 곳곳에 끼어있었다. 그 개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다 버린 줄 알았는데 남아있었나 봐. 어차피 있어도 쓰지 않으니까 대부분 정리했거든.”

“이건 커튼 끈이에요?”

“세조대라고 하는 장신구야. 허리에 매는 거.”

“전에 태오가 말했던 전축도 여기 있네요. 생각보다 크네.”

전축에 나팔같이 생긴 게 달려있었다.

“그거 아마 고장 났을걸.”

“틀어 볼까요?”

“응.”

콘센트가 없는 걸 봐선 전기로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고, 손잡이를 돌리는 건가? 그러나 손잡이를 돌려도 전축은 반응이 없었다.

“아, LP가 없네.”

“엘피?”

“노래가 담긴 판이요.”

“이걸 말하는 건가?”

태오가 옆에 있던 원통형 무언가를 집어 전축 어딘가에 넣었다.

“이제 손잡이 돌려봐.”

태오의 말대로 손잡이를 뱅글뱅글 돌리자 전축에서 느릿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낡고 고장 나기 직전의 TV 소리처럼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저음질의 재즈였다.

“다른 노래는 없어요?”

“노래는 그게 다야.”

이름 모를 노래는 곡조가 구슬펐다. 그에 맞춰 여자 가수가 애처롭게 울 듯이 노래를 불렀다.

“꼭 아포칼립스에서 마지막에 살아남은 두 사람 같네요.”

때마침 저기 보이는 천장도 무너져가고 말이다. 전기 없이도 돌아가는 전축이라.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은 환장하겠네.

한다감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