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세상일이 반드시 올바르게 돌아가느라 그렇다기보단 인간의 시야가 좁은 탓이다. 아는 것만 보인다. 관객은 익숙한 요소에 정신이 팔린다. 선거, 권력 다툼, 모성애, 반전... 

5년 전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의 시야는 연홍 역을 맡은 손예진 배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전에 없던 목소리를 쓰며 눈을 번뜩이는 손예진만으로 이미 영화가 가득 차 버렸다. 다른 것들은 좀 과해 보였다.


생각하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자. 되뇌는 연홍처럼,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자. 연홍이 아는 딸 민진은 'minjin'이나 'kmj99' 따위의 ID를 쓸 것 같았지만 틀렸다. 민진을 흉내 내, 민진이 되어 알아낸 진짜 ID는 'whRkwhRk', 조까조까. 그럼 나도 민진이 되어 영화를 다시 보자. 두 번째엔 분노에 찬 비명이 들린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세 번째, 세월호 참사부터 빼곡히 배치된 혐오 문제가 보인다. 누군가에겐 아주 심각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거기까지 알고 나면 진짜 이야기가 보인다. 민진의 멍청한 사랑이다. 


민진 엄마, 미옥 아빠는 성적이 높고, 모부가 교무실로 소환될만한 문제를 일으킨 적 없는 딸이 ‘착한 애’라고 확신한다. 민진과 미옥은 그들의 시야에서 착하게 행동하며 둘만의 아지트를 꾸렸다. 사실 나 왕따야. 여자를 사랑해. 선생님을 협박해서 시험지를 빼돌렸어. 시야 바깥 아지트를 모르는 연홍은 ‘질이 나쁜 애들’과 내 딸은 다르다며 눈에 힘을 준다. 멍청해 보인다.

중학생은 똥, 섹스 따위 단어 하나에 아기처럼 자지러지게 웃으면서도 커터칼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놀이로 삼는 이중성을 가진다. 손소라 선생에게 민진과 미옥은 ‘악마 새끼’다. 착하게 웃으며 차량용 공기청정기로 위장한 몰래카메라를 선물했다. 동영상을 빌미로 돈을 뜯어내고 욕을 퍼부었다. 나는 이경미 감독 작품에서 학생(청소년)이 어색한 억양으로 내뱉는 그런 적나라한 표현이 늘 불편했다. 그런데 이제야 떠오른 게 있다. ‘보지’와 ‘좆’이란 단어를 알게 되고 써먹으려 들었던 열다섯, 열여섯 무렵의 기억이다. 본 적도 없으면서 교과서 표지에 ‘좆 모양’을 그려 넣었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날 때는 그 단어를 마구 넣어 의미도 모를 욕을 뱉었다. 그런 나이였다.


그 나이엔 진지하게 죽음을 고민하면서 어떤 음악에 매달려 꾸역꾸역 버티기도 한다.
그때 나에게 존~ 피에는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가사는커녕 '퀸'이 몇 명인지도 몰랐지만. 나중에 그 노래가 영화로 나왔을 때, 피아노 전주 한마디를 듣자마자 펑펑 울었다. 네댓 번을 보러 갔는데 너무 눈물이 나서 더는 극장에 못 갔다. 이제 한국에 보헤미안 랩소디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에오... 뭐 그런 음악과 그런 시절이 있기도 하다는 얘기다. ‘존 페이’를 듣고, 내 속을 읽어 내가 아는 언어로 말을 거는 미옥을 민진이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을까. 나랑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온 그 애를 말이다.

아빠가 모시는 사람의 딸, 외국물 먹었다고 영어를 섞어 쓰는 재수 없는 애를 사랑하게 되는 건 로맨스의 클리셰다. 사회 계급이 달라서 자존심이 상하는 건 여러 감정 중 하나일 뿐, 미옥은 민진을 사랑했다. 이 사랑의 모양을 아는 아이들은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지니와 오기’를 따랐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에게 절로 비밀이 되었을 뿐이다.


아빠와 담임 선생이 불륜을 했다. 사랑하는 내 엄마를 조롱하면서. 아빠에겐 귀찮아진 일이며 선생에겐 ‘딱 한 달 잘못한’ 거지만 민진에겐 아주 심각한 문제다. 중학생이 아는 가장 심한 욕을 퍼부으며 평생 괴롭히겠다고 저주한다. 막상 평생을 살다 보면 분노가 희미해질지도 모르지만, 지금 민진에게는 살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대고 종찬이 뱉은 “에이, 씨발”과, 민진과 미옥이 토해낸 “씨발 년아”는 무게가 다르다.

장례식장에서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건, 전라도 출신인 건, 집이 가난하고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건 중요한 문제라면서, 연홍과 민진과 미옥의 아주 심각한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그래서 셋은 시종일관 비명을 지른다. 입을 막으면 발을 구르고 드럼을 친다. 과하다, 지겹다, 소리를 들을지언정 화가 풀리지 않으니까.


민진의 죽음에 분노한 미옥은 가해자를 똑같이 죽였다. 미옥이 아는 가장 심한 복수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대통령님께’. 그러나 연홍은 가해자의 ‘갑’으로 드러난 종찬을 죽이지 않았다. 딸을 잃은 이 정치인에게 표심이 기울었듯이 '한낱' 불륜으로 분노한 아내에게 살해당했을 때 동정표가 몰릴 거란 걸 알았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듯이, 권력을 가진 남성은 죽음으로 판도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종찬에게 중요하고 심각한 건 기존 세력을 꺾고 권력을 얻는 일이다. “자식 죽는다고 부모 안 죽습니다. ... 전쟁, 웃으면서 하는 겁니다." 그렇게 말했던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맞고 섹스 동영상이 공개되어도 슬그머니 웃는다. 이까짓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연홍의 복수는 최선이었지만 통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닥이 다른, 회생할 수 없는 종찬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간다. 연홍은 민진이 생각한 만큼 멍청하지 않다.


연홍이 진짜 민진을 알기 전, 영화는 연홍의 멍청한 면을 자꾸 보여 주었다. '아빠가 뒤에 똥을 잔뜩 실은 똥차를 운전한다'는 미옥에게 “그건 분뇨차라고 하는 거야.” 하며, 그 '분뇨'가 자기를 가리키는지도 모르고 잘난 척 한다. 그렇다면 민진은 어떤가. 고작 생각한 큰돈이 1억이다. 가난해서 왕따를 당하는 미옥을 그 돈이면 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빠 옆에서 멍청한 인형처럼 사는 엄마를 지켜야 해서 ‘존 페이’를 들으며 버텼다. 멍청한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민진이 말한 ‘멍청하다’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면 '시야가 좁은' 것이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비밀이 생기고 또 새어나간다. 민진과 미옥의 사랑이 익숙하지 않았던 연홍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들이 노래한 비밀을 본다. 

시체처럼 누운 종찬과 달리 태아처럼 웅크리고 누운 연홍에게 미옥이 온다. 이제 그 사랑은 연홍의 확장된 시야 안에 있다. 미옥은 민진 대신 연홍을 지켜 주러 왔을 테고, 대통령 아닌 연홍이 강한 어른으로서 미옥을 지켜줄 테다.


*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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