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제1황녀는 사생아 신분이다. 

황제는 길고 긴 전쟁을 마친 후 르외나 황후와 성대한 성혼식을 치뤘다. 막대한 금화와 한 나라의 국보로써 감히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물건까지. 선두에 선 황제 뒤로 딸려오는 전리품 사이에는 멸국의 왕녀가 있었다. 멸국에서도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왕녀에게 르외나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한 황제는 마음을 빼앗겼고, 몰래 밤마다 왕녀를 제 침실로 불러 들이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중에 보고 받기로는 르외나 황후와의 잠자리 횟수보다 더욱 많았다고 한다.

모멸감, 수치심. 르외나 황후가 느꼈던 감정은 연소되지도 못하고 허공을 배회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녀는 ‘멸국’의 왕녀 라는 이유로 측실로도 원로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어도 왕녀 보다는 빨리 회임을 하셔야 합니다. 날 마다 제 아비가 찾아와 어서 빨리 황실의 핏줄을 배라 한다. 그게 제 마음 대로 되면, 폐하께서는 이미 저를 사랑 하셨어야해요. 황후는 그 어디에도 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누구 한 명이 죽지 않는 이상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아슬 아슬하기만 했던 나날들 속에서 결국 정실 황후 보다도 왕녀가 황제의 핏줄을 먼저 배고 만다. 그때 참 세상이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황녀님이십니다.”


그건 또 아니더라. 왕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 받지 못할 여자 라는 것을 듣고 얼마나 안심했던가. 또 그 씨를 밴 왕녀는 얼마나 몸이 나약했던가.

자신의 아이를 안지도 못 하고 숨을 거둔 왕녀에게 장례식은 사치였다. 단순히 황실의 아이를 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화장까진 할 수 있었으나 황제도, 황후도, 제국의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진 않았다.


“어머니..!”


시간이 흐르고 에리스는 벌써 6살이 되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에리스를 멀찍이서 발견했지만 못 들은 척, 못 본 척 황후는 황녀에게 등을 졌다. 사생아의 신분으로, 황제의 재목도 되지 못할 황녀를 따스히 맞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야 말로 넓디 넓은 황궁에 황녀는 버려졌다.

황실 원로원 사이에서는 에리스 황녀의 구설수가 하루가 멀다 하고 그들의 입방아에 올라갔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녀를 두둔하기는 커녕 무시로 일관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 나의 자식. 황제에게는 이미 죽어 만질 수도 없는 왕녀가 더 중요했다. 제 아무리 어미의 눈을 빼닮았어도.


“..이런 내가 우습지 않느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의 어미도 모르는 새파란 어린 아이 앞에서…”


황제마저도 그녀를 외면하자 수많은 가십 덩이에 쌓인 에리스를 가엾게 여긴 건 다름 아닌 황후였다. 일말의 죄책감이라면 죄책감이었다. 만일 에리스가 황자였다면 자신이 이런 연민을 가질 수 있었을까. 황후는 온정을 베풀기로한다. 네가 나와 같은 여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동질감과, 일찍이 어미를 여인 아이에 대한 연민. 단지 그뿐인게야.


“그래서. 지금 짐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에리스 황녀의 신분을 확고히 해주시길 간청 드리는 바 입니다..!”


그러나 르외나 황후가 에리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한 달이 다되어갈 무렵, 에리스의 출생을 가지고 황실 원로원은 두 파로 분당되게 되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인 왕당파와 황제의 행보를 질책하며 르외나 황후의 세력을 기반으로 각기 귀족의회가 모인 의회파가 그것이었다. 어쨌거나 황제의 피를 물려 받은 바 에리스 또한 계승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왕당파와 이제까지 그러한 사례-여인이 황제가 된다-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반쪽 짜리 에리스에게 계승권을 쥐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회파.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파에 또다른 변수를 가져온 건 저주 받은 황태자의 탄생이었다.


“폐하,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십니까!”


황실을 둘러싼 의문사와 저주받은 황태자를 치료해달라며 카엘룸을 찾는 제국민이 날이 갈수록 배가 되었다. 드높아지는 카엘룸의 권세. 당시에는 왕당파 보다 의회파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에리스 황녀에 대한 계승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적정자인 황태자가 저주를 안고 태어났다는 것은 큰 폭풍을 가져왔다. 반쪽짜리 사생아와 저주받은 황태자. 원로원은 모두 머리를 싸매던 도중, 왕당파에 소속된 백작이 제안 하나를 조심스레 올렸다.


“황녀에게 배동을 들이는 것은 어떠신지요.”


 정우가 피의 에레무스에서 사라진지 열흘이 되는 날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리스 황녀님.”


배동으로 선택된 자는 에리스와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직책이 높은 공작가를 물려받을, 재현이었다. 처음 뵙겠다며 자신을 찾아온 재현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은 단순한 배동, 나를 모신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어린 소녀는 자신이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이용되고 있다는 걸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배동이라는 명목 하 실상은 황실 원로원이 점찍은 사생아 황녀의 결혼 상대였다.


“배동이 마음에 드시나봐요.”

“...아니야.”

“그러면 왜 눈을 못 마주치시는데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자신의 감정을 시녀 레일라에게 들켜 욕조 아래로 붉어진 제 뺨을 숨기는 행위. 재현이 오는 날 만을 기다리는 것은 명백히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재현이 오기 전 날 밤에는 언제나 향유로 목욕을 하고 고급 원단으로 몇 벌 들어오지도 않은 드레스를 입고, 값 비싼 장신구를 걸친다. 얼굴이 밤 마다 떠올라 잠을 설치더라도 에리스는 그 순간 마저도 품었다. 이제는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을만큼 피폐해진 르외나 황후와의 만남 때도 그러했다.


“절 잡으세요, 황녀님.”


서책을 자주 읽는다는 재현의 취향을 존중하여 이 제국에서 가장 넓고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황실 서고로 재현을 이끌었다. 좋아할 것이라는 예상 대로 재현은 입이 떡 벌어지리만큼 광활한 서고에 눈을 떼지 못 했고 그런 재현과 단둘이 있고 싶다는 에리스의 손짓이 레일라를 비롯해 황실, 공작가 사용인들은 모두 서고를 빠져나갔다. 그러니 높이 있는 책을 꺼내려면 어린 소년과 소녀가 사다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 소녀가 신기에는 꽤나 위태로운 양혜를 신은 게 시발점이었다. 레일라가 다른 것을 권유하긴 했으나 자신의 주인은 꼭 이것을 신어야만 하겠단다. 드레스와도 어울리는 양혜 색. 한 뼘 정도 더 큰 재현을 마주 볼 수 있는 굽높이가 마음에 들었다.


“저 책, 네가 좋아하는거지?”


전 날 밤 레일라에게서 재현이 평소 좋아하는 저자의 책을 알아냈다. 긴급하게 그 자의 모든 서적을 서고에 가져다 놓으라는 명에도 레일라는 군 소리 없이 그 일을 행했고, 다만 서고 자리가 없어 부득이 하게 가장 위쪽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옷을 갈아 입으며 들었다. 수고했어. 이미 응접실에 와 있다는 재현 때문에 그리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것 같다.


“황녀님!”

“...아.”

“괜찮으세요? 다치신데는요?”


재현이 좋아하는 책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 위에서 손을 뻗던 에리스가 별안간 중심을 잃었고, 그녀의 기울어지는 몸을 받들어 완충제 역할을 한 채 뒤로 넘어진 재현은 쓰린 등에 인상을 일그릴 여유도 없이 고개를 들어 제 위로 넘어져 있는 에리스에게 물었다.


“...괜찮아.”


삐끗한 발목이 아리지만 에리스는 재현의 품 속에서 가만히 꾸물댔다. 발목을 다쳤다는 말이 아버지나 다른 가신들에게 들리면 '배동'의 자리에 적합 한지 평가받고 있는 재현에게 흠이 될지도 몰랐다.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러면서도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쿵쿵 뛰는 재현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팠다. 괜찮느냐며, 다친 곳은 없냐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그런 눈빛이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이 삭막하고도 쓸쓸한 황궁에서 이리 온기가 가득한 널 끌어안으면, 그러면 황궁도 괜찮을 것 같아. 에리스는 남몰래 재현의 옷깃을 손아귀 안에서 구긴다.



“..갑자기 소공녀께서 편찮으셔서, 오늘 부득이하게 걸음하지 못 하게 되었다 하십니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드 넓은 황실에서 안 황족 만이 출입이 가능한 유리 온실에서 재현과 단 둘이 가질 티타임이었다. 그 날 재현 몰래 상처를 치료 받고 마차에 오르는 재현을 붙잡아 티타임을 제안했던 건 자신이었다. 무려, 제국의 황녀인 자신이 직접. 

절대 늦는 법이 없었던 재현이 10분, 20분. 정확히 30분 정도 홀로 고급스러운 가제보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 다급히 달려온 레일라의 속삭임에 격분했다. 그리고 비참했다. 배동 같은 것 보다 오빠로 남는 게 더 중요한, 황녀보다 아라벨라를 더 아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에리스에게는, 재현을 사랑하게 된 그녀에게만큼은 다 큰 지금에서도 그때 그 순간 보다 참절했던 순간은 없다고 자부했다.


“..오늘도 못 오신다니?”

“..네.”

“왜 또 그 소공녀 때문에?” 

“.....”

“오늘은 무슨 연유라니.”

“소공녀께서, 워낙 어리셔서,…”


그런 순간은 한번이면 족하다. 그러나 재현은 자신과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보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혹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럴 듯한 변명으로 꾸며낸 편지는 모두 거짓이었다. 불가피한 사정은 아라벨라의 사정이었고 몸이 좋지 않은 것도 재현이 아닌 아라벨라였다. 고상한 위치, 기품 넘치는 외관, 인자하기도 냉철한 성품. 그딴 건 사랑이라는 불길 앞에서는 타 재가 되어 없어질 장작에 불과했다.

재현의 방문이 아라벨라에 의해 점차 뜸해지던 차, 르외나 황후의 배 속에 정우가 자리 잡았고 이내 저주의 신탁이 만연히 퍼져나갔다. 뒤숭숭한 황실 분위기에도 재현은 다소 원망스럽게 배동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잠을 못 이루신다기에 숙면에 좋은 차를 가져왔습니다. 주무실 때 드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고급스러운 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그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오지 않는 재현.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저주. 황실을 둘러싼 의문의 죽음.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터라 통 잠을 못 이루는 날이 잦았다. 재현이 온다기에 애써 웃음을 지어 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제 표정이 다 보이나보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자신을 위한 재현의 선물에 못내 그간의 서러움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제 동생도 그 차를 우려 마신 후에는 편히 숙면을 취하곤 합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됐잖아. 미약하게나마 웃으며 인사를 전하면 재현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자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에리스는 매끄러운 곽의 표면을 만지작 거리던 손길을 거뒀다.


“동생을, 많이 아끼나봐.”

“..네. 아무래도 몸이 약하기도 해서,”

“그동안 안 보인 게 아픈 동생 때문인 것 같은데.”

“…….”

“배동 노릇 보다 더 중요한거잖아.”

“..황녀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보이는 대로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 소공작을 배웅해주렴.”


재현에게 애꿎은 화를 분출한 에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가제보를 빠져나갔다. 애먼 곳에 화풀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배동이라면, 온갖 가십을 둘러싼 채 편히 숨도 쉬지 못하는 황궁에서 너만은 나를 아무 걱정 말라는 듯 옆에 있어주길 바랐건만.


“..황녀님, 소공작으로부터 온 서간입니다.”


배동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와 제국의 하나 뿐인 고귀한 황녀의 위치를 드높이 세우는 사무적인 서론을 시작으로 아라벨라의 병세의 차도가 없어 따뜻한 지역으로 가 함께 안정을 취하고 싶다는 본론. 편지를 읽던 에리스는 마지막 결론을 곱씹고 함께 온 화려한 꽃 바구니를 바라보며 다소 기괴하게 웃었다.


외람된다는 것을 알지만 해엄*을 간청 드립니다.

*해엄하다 : 경계나 단속을 풀다



에리스는 이에 대한 답신으로 아라벨라의 시체를 재현에게 선물했다.




짭성녀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루시는 뿌옇게 보이는 왼쪽 눈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지성이 제 성력을 가져가고 떠난 후 발코니에서 침대까지 그 짧은 거리에서도, 날이 밝아옴과 쓸데없는 치장을 위해 화장대로 가는 와중에도 넘어지기를 수 십번이다. 뒤를 따라오던 안나가 놀라 팔을 붙잡으며 어디 편찮으시냐 물었지만 루시가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재민의 말마따나 여명도 드리우지 않은 깊은 새벽녘, 후작가 정문 앞에는 마차가 준비 되어 있었다. 이미 마부도 타 있었고, 언제 챙긴 건지 안나가 얼마 없는 짐까지 싹싹 끌어모아 뒷 칸에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마차 앞에는 다소 정적인 옷 차림의 재민이 서있었다. 곧 있을 제 아비를 형식적으로나마 맞이하려는 듯 싶었다.


“개선식이 끝나면 들를게. 그때까지 먹고 싶은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안나 한테 말해.”


마차에 올라탄 루시 앞으로 재민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제 약혼녀한테도 이렇게까지 지극 정성이진 않을 것 같은데. 세이디는 재민에게 진심인 듯 보였는데 말이다. 어쩐지 재민과 자신의 사이를 물으며 경계하던 그녀가 조금은 안쓰러워졌다.


“눈이 왜 그래?”

“..아무것도. 그냥 잠을 못 자서 그런가.”


가만히 루시를 바라보던 재민이 낮게 물었다. 멀리서 보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긴 했으나 세이디를 향한 쓸데없는 연민 탓에 재민과의 거리가 이리 가까운 줄 모르고 있었다. 현재 루시의 왼쪽 눈은 오른쪽 눈에 비해 안개가 낀 듯 뿌옜다. 안나도 눈치 못 챈 걸 어찌 이리 쉽게도 알아 차리는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해명하는 루시를 빤히 올려다보던 재민은 질기게 캐물어 봤자 결코 저 입술은 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묻는 것을 그만 두었다.


“난 널 부른 적이 없는데.”


마차 문이 스르륵 닫히며 루시 또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낯선 이물감에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던 루시는 고단한 몸을 잠시나마 뉘일 참이었다. 제 아무리 후작가 마차라 한들, 이 세계 속 엽자가 이끄는 이동 수단은 착용감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서도.


“..제가 가겠습니다.”

“레오. 어서 출발해.”

“제가, 가게 해주십시오.”


분명 그랬는데. 익숙한 음성에 작게 탄식했다. 이미 레오 경은 앞에 타 있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가겠다며 자처하는 이는 안봐도 뻔했다. 괜히 앞에 있던 레오 경은 재민과 앞의 루시 눈치를 보는 듯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한 겨울의 서리 처럼 서늘한 재민의 어성은 마차에 엉거 주춤 타 있던 레오 경의 등에 소름을 돋게 하기 충분했다. 가늘게 뜬 눈에도 여실히 보이는 단색丹色*이었다. 동혁의 머리칼은 그런 색이었다. 제 아무리 제국을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는다 한들 표면적으로 지금 제 주군은 소후작인 재민일텐데, 저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어도 된단 말인가. 

난 누구처럼 고상하게 학문을 배운 것도 아니고 태생부터 고귀한 자제님도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일전에 동혁이 했던 말을 떠올리니 그럴만 하다고, 또 수긍하게 된다. 

*단색[丹色]:사람의 입술이나 피의 빛깔과 같이 짙고 선명한 색. 


“어어, 루시님..!”


그냥, 펠리시아... 장님이라고.

그렇게 매섭게도 베더니만. 무엇이 또 거슬리기에 친히 마중을 나와 주셨을까. 마차 안에 등을 기대 동혁을 바라보던 루시가 별안간 입고 있던 단촐한 드레스 자락을 한 손으로 잡고 마차의 층층대에 발을 딛었다. 반만 개안된 시야 때문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던 것을 바로 앞에 있던 재민도 아닌 동혁이 빠르게 다가와 잡아챘다. 눈치만 보던 레오 경도, 마차 안에서 좌불안석이던 안나도, 하다 못 해 바로 옆에 있던 재민 마저도 갑작스러운 루시의 어색한 거동에 눈을 키우는데 동혁만은 이상하게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거야.”

“뭐가.”


가슴을 꾹 억눌렀던 저주에서 풀린 동혁은 느껴지는 수상한 해방감에 밤새 고심했다. 제 손목에 묶인 천에 저주가 깃들었다던 루시의 말에 부러 천을 더욱 세게 묶어도 봤지만 몸은 저주에 걸리기 전보다도 훨씬 가벼웠다. 잠을 잘 수가 없어 뜬 눈으로 지새운 탓에 일찍이도 루시를 만날 준를 하고 있던 동혁이었지만, 웬 새벽부터 부산 스러운 외부에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론가 또 홀연히 떠나려는 듯 레오 경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타는 루시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몸이 먼저 나간 뒤였다.


“..알잖아. 하.. 제발, 내가 알아 듣게 말해.”


저주가 풀렸는데도 동혁은 자신의 심장 위로 쇳덩어리가 얹힌 기분을 느낀다. 특히 루시와 대화할때면 그랬다.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애원하는 어투의 동혁에도 루시는 여전히 그의 손목에 묶여 있는 천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별 다른 말 없이 손을 뻗어 동혁의 손목을 잡아 단단히도 묶인 천을 풀기 시작했다. 


“전부 나 때문은 아니야.”

“......”

“검을 잡고 여기든 아스타냐든, 살아 남은 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한거니까.”


살짝씩 닿는 살갗에 동혁은 티를 내지 않으려 반대편 주먹을 세게 쥐었다. 루시는 꼬일 대로 꼬아져있는 매듭을 쉽게도 풀었고, 얼마나 세게 동여맨건지 그대로 붉게 자국이 나 있는 동혁의 손목을 엄지로 천천히 쓸었다. 마치,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였다.  


“그러니까 예전 일 때문에 나한테 죄책감 갖는 건 그만 해.”

“...루시.”

“말했잖아. 너 안 싫어한다고.”


맞닿은 손을 붙잡고 싶었는데 동혁은 루시가 미련 없이 자신의 손목을 놓고 재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타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다. 울컥 하고 치민 이 감정에 목이 메어 이름을 부르지도 못 했다. 파테르가 죽었을 때도 이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다. 

이 벅차오름이 '구원' 이라는 것을 알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만 같다.





짭성녀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아라벨라의 사망 이후 공작은 에리스 황녀의 계승권을 반대하며 황후의 세력을 기반으로 조직되어있는 의회파의 수장이 되었고, 황제의 정책을 계속해서 반대하며 황가와 대립하게 된다. 황가가 공작가를 어찌할 수 없는 이유, 공작가는 대대로부터 어마 어마한 군사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제국민에게 높은 추앙을 받고 있었다. 왕당파와 의회파 두 파의 분당 시점 중립을 지켰던 공작가가 의회파로 행보를 정했다는 것은 큰 영향을 불러 왔다. 의회파는 든든한 아군을, 반대로 왕당파에서는 위험한 적군을 두게 된 셈이니.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마차를 세워주시죠.”


마차 안, 눈을 감고 이제는 숨 쉬 듯 하는 원작 복기를 이어가던 루시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이 마차의 행선지는 따뜻한 지방에 위치한 크레타로 향할 참이었다. 재민만의 별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수도를 넘어 지방으로 향하는 마차들은 성문을 통해 나가야 했으며 성문 앞에는 통행하는 마차들을 검문하는 보초병들이 있었다. 다만 대다수의 귀족들은 그들의 직위에 따라 검문이 제외 되었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끌고 다니기 때문에 눈이 먼 보초병이 아닌 이상은 마차를 세울 일이 없었다. 그런 후작가의 마차를 세운다는 것은 필시..


“루시님 제가 나가 볼게요. 여기 계세요.”


마차는 보초병들에 의해 세워졌고 밖은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이제야 여명이 드리우니 곧 있으면 상인들이 터져 나올 것이다. 정오에 진행 될 동혁의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제국민과 타 지역에서 온 내객을 맞이하려 분주하게 준비할텐데. 의아함을 느낀 안나가 자신이 나가보겠다며 마차 걸이를 붙잡았다. 


“혹시 소후작께서 여쭈면, 죽진 않을 거라고 전해줘.”

“...네? 그게 무슨...”


 마차에 달린 창유를 바라보니 공중에 달랑 거리는 제국기가 펄럭 였다. 그 제국기를 빤히 바라보던 루시는 제국기 위로 여명이 떠오름과 동시에 마차를 출입문을 두드리는 섬짓한 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바로 앞에 있던 안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무른 채 침까지 꿀꺽 삼키었다. 


“황녀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정확히 두 번 두드린 이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그리 알렸다. 내포된 뜻과는 달리 단조로운 말투에 안나는 기겁하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루시를 바라보았다. 예상이라도 한 듯 차분하게 앉아있던 루시가 아까까지 안나가 잡고 있던 걸이에 손을 댔다. 그리고 가볍게 밀면 앞에 보이는 이들은 흔히들 보던 보초병이 아닌 왼쪽 가슴팍에 황금빛 휘장을 단 황실 기사단이 있었다. 


“루시님..!”


보살핀지 오래 된 것도 아닌데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생이별을 하는 듯한 안나에게 괜찮다는 기색을 보였다. 안쓰럽기도 하지. 재민이 크게 내치지 않았으면 하는데. 루시는 그리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시야로 악착 같이 버텼다. 이 상태로 그 에리스 황녀와의 독대라니. 솔직히 말하면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속은 까마득하게 타들어갔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마차를 갈아 타는 동안에도, 홀로 그 안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황궁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루시는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리아를 원했던 재민에게 뜻밖의 장애물이란 후작이 추진한 세이디 영애와의 약혼이 그것이었다. 루치아를 혐오한 나날들 속에서 제 어미를 떠나 보내고, 제 손으로 아비를 죽여 새하얀 후작을 새빨간 장미로 물들였다.


"식은 미루고 그곳에서 안정을 취하며 몸조리를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후작가를 감싼 장미 처럼 새빨간 사랑을 바랐던 세이디는 그의 냉담함에 매일을 울었다. 밤 낮으로 곡소리가 새어나가 재민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니 세이디는 반강제로 크레타로 보내졌다. 정확히는 그곳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어서와요."

"제,제국의...황녀님을 뵙습니다."


유폐 신세로 마차에 오른 세이디를 붙잡은 것은 황녀 에리스였다. 세이디를 불러낸 에리스는 그녀에게 악마와도 같이 괴인했다. 몸을 녹여줄 따뜻한 홍차가 앞에 있고, 그 옆에는 제국의 황녀가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약혼자의 사랑을 받지 못 한 채 유폐될 위기에 처했던 세이디의 너덜 너덜한 마음을 알아챈 에리스는 그녀에게 유연하게 사어했다. 


"같은 여인으로서, 안쓰럽고 가여워서."

"...황녀님, 저는..."

"나도 영애와 같은 기분을 이미 증험한 바 있어요."

"......"

"처절하고. 비참해서 이 세상에서 그냥 사라지고 싶었어요."

"......"

"하지만, 생각해보니 정작 사라져야할 건 내가 아니더라구요."


개선식 당일, 에리스는 세이디에게 무색 무취의 독약을 내밀며 아리아를 밀살하라 일렀다.

구원의 성녀 中 



고작 응접실일 텐데도 황궁의 위엄을 나타내는 웅장한 규모였다. 층고는 하늘을 뚫을 듯 높았고 곳곳에는 계속 바라보고 있기도 아플 만큼 빛나 금이 칼럼과 가구에 박혀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놓여져 있는 두 개의 홍차와 황족을 상징하는 금빛 자수가 박힌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 옆의 황녀 에리스. 이 다음 상황이 어렴풋 예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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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아리아는 동혁과의 서임식 이후 공작가로 돌아가기 위해 도로 연회장으로 들어와 재현을 찾던 도중 세이디를 마주한다. 대성당에서 소공녀님의 거룩한 세례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감언을 꾀한다. 


"다른 영애들도 소공녀님을 무척이나 뵙고 싶어 한답니다."


아리아를 살살 구슬리며 데려간 곳에 각국에서 온 귀족들과 수도 내 내노라하는 가문들의 영애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 눈이 닿는 곳에 있으렴. 연회장으로 돌아가야하는데. 마차 안에서 자신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걱정 어린 말투로 제게 이르던 재현을 잠시 떠올린 후 아리아는 주춤거리며 그곳에 발을 내딛었다. 아리아는 당시, 남자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 만나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제 속 마음을 털어놓을 교우를 원했다. 


"곧 제 탄신연회가 있을 예정인데, 그 때 자리를 빛내주심이 어떠신지요."

"반나절 뒤에는 제 오라비의 성혼식이 있습니다. 소공작과 함께.. 와주시면 더 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아요..!"


공작가를 뒤에 둔, 소공녀라는 위치의 아리아에게는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물론 그 사이 소수의 왕당파 소속 가문의 영애들도 더러 있었으나 그들은 혹 자신의 가문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미적지근해진 차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침묵을 지켰다. 대다수의 영애들은 아리아를 중심으로 둘러싸며 그녀에게 아부 아닌 아부를 떨어댔으니 그 사이 세이디는 미리 심어둔 황녀의 심복에게서 받은 소서와 찻잔을 받아들었다. 


"..소공녀께서 곤란해 하시는 것 같아요. 다들 잠시 숨을 고르시지요."


어색해 하던 아리아는 세이디가 이른 것 처럼 처음 맞이하는 낯선 환경에 숨을 고를 겸 홍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 독은 천천히 아리아의 몸 속으로 기생해 있다가 정확히 그녀가 영애들과의 만남 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재현을 발견 하고 다가가는 순간 터졌다.


"..아리아!!!"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곳곳에 박힌 채, 취광을 띄는 수려한 드레스는 새빨간 혈로 젖어가니 삽시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며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자 주인공들이 모여든다. 맥 없이 쓰러지는 아리아를 품 안에 받친 이는, 아리아만큼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카엘룸의 추기경이었다. 





세이디는 제가 어찌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느냐며 황녀의 명령에 부정적인 의사를 내비쳤으나 제국의 1황녀 에리스에게 작은 북쪽 지방 루고에서 온 그녀는 거슬리면 치워버리면 그만인 쥐새끼일 뿐이었다.


“영애의 집에는 라무스가 많다죠?”


라무스는 추운 지방 루고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자 신채*였다. 그 목재를 키우고, 수확하며 토지를 관리하는 세이디 가문에 있어서 라무스는 중요한 판매 상품이며 그녀의 집안을 귀족으로 승직하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라무스가 얼마나 중요한지 제 아무리 사랑에 눈이 먼 멍청한 세이디라도 그건 아주 잘 알았다. 

*신채:땔감이 되는 나무. 


“꺼지지 않는 불길을 낸다는 그 신채 말이에요.” 


황녀의 한 마디면 라무스는 모두 작목될 것이 저명했다. 

구원의 성녀 中 





원작의 흐름을 뻔히 알고 있는 루시는 제 앞에 있는 보랏 빛 용기에 담긴 투명한 독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물론 원작에서의 아리아를 죽이는 것은 아니지만 위독하리만큼 주인공을 괴롭히는 매개체 중 하나는 분명했다. 게다가 이 세계에서 루치아의 뜻을 받드는 자에게 살상을 하란다. 무려 제국의 하나 뿐인 황녀께서.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을 독살하는 게 가당키나 할까. 아리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여자 주인공의 생명은 무조건적으로 보장 되어 있다는 걸 제 앞의 황녀는 새카맣게 모르고 있다. 이깟 독으로, 아리아를 죽일 순 없는데. 황녀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지만 이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오늘이 지나면, 황녀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이루실 수 있는지요.”


온화하다 느낄만큼 잔잔했던 물결에 파동이 일었다. 띄고 있던 미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춘다. 

모 아니면 도였다. 제 아무리 루시가 루치아의 재림이라며 모두에게 추앙받아 마땅한 신성한 몸이라 한들 실질적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황족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것은 정말 도박이었다. 아리아를 죽인다고 한들 네가 소공작인 재현의 사랑을 얻을 수 있어? 면밀히 따지고 들면 그 건방진 물음은 제국의 황녀를 기풍하는 것이랴. 원작을 읽어 황녀의 성미를 아는 자신이 아닌 이상은 이런 도발을 그 누가 생각이라도 했을까. 감히, 제국의 황녀에게. 에리스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제를 모르는 자를 끔찍하게 싫어해요. 얼마만큼 이냐면...”

“......”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딱 그만큼.”


서리찬 분위기를 곧이 곧대로 감당하기 버거워 차가워진 손 마디를 동아줄이라도 된 듯 교차해 세게 맞잡았다. 고고하던 낯짝은 어디가고 살벌하게 일그러진 미간은 금방이라도 밖에 있는 기사를 불러 루시의 목을 베라고 할 듯 했다. 가녀린 미성만이 응접실을 가득 메우니 내뱉어지는 음절 사이 사이 어찌 숨을 쉬어야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당신은 죽이면 안될 것 같아.”

“.....”

“제국민이 열렬히 받들어 모시는 그 분을 닮아서 그런가. 벌이라도 받을까 싶네.”


유하게 올라가는 구각에 절로 숨을 삼켰다. 어여쁘다 못 해 소름이 끼칠 만큼의 미소가 다시금 황녀의 얼굴에 피었다. 홍차를 입가에 가져다 댄 후 그 작은 소리 조차 내지 않게 내려 놓는 모양새가 황족이라는 제 위치를 더욱 여실히 나타내준다.


“아, 내 아버지와는 달리 난 꽤 우호적이에요.”

“.....”

“몰래 카엘룸에 헌납도 했거든.”

”..그러셨군요.”

“그 미친 베르딕 경 에게 고명 딸이 있을 리는 없고. 소후작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는 걸로 아는데.”


도대체 넌 어디서 온 기인이니? 완전하게 끝맺음 된 문장은 아니었으나 그리 묻는 듯 했다. 후작가의 마차를 타고 있었으니 후작인 베르딕과 그의 자식인 재민과의 연결고리를 의심하는 황녀에게 루시는 그제서야 스스로 틀어막고 있던 숨을 뱉었다.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 보란 듯이 느껴졌기 때문에, 한 고비는 넘겼다 싶었다.


”..그곳은 사정이 있어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아하. 치정인가보죠?”


치정은 무슨 치정. 저도 모르게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면 황녀는 붉게 물들어 반지르르 윤기 나는 입술을 씨익 말아올린다. 후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받은 후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더불어 불안하기도 했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재민은 세이디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그의 연모 대상이, 특별한 사람이 자신이 되길 바란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늘이 지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냐고 물었죠.”


일정한 침묵 끝에 다다랐다. 황녀는 처음 마주했던 순간 그대로의 여유로운 태를 갖춘 채 루시의 찻잔 근처에 있던 독약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마개를 열어 한 입도 대지 않았던 루시의 홍차 안에 그것을 천천히 들이 붓기 시작했다. 홍차에 스며들어 융화되는 독약은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난 원하는 게 많아요. 그건 누군가의 죽음일 수도 있고, 절절한 사랑 일 수도 있고.”

”.....”

”어쩌면 가장 높은 자리일 수 도 있죠.”


마지막 남은 한 방울 까지 털어넣은 채 약을 내려놓은 에리스는 다소 섬뜩한 말을 잘도 했다. 아리아의 죽음, 재현의 사랑, 그리고 황위까지도 바란단다.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줄만 알았던 황녀는 갈망하는 것 투성이었다. 


”그러니까 한번 보죠. 오늘이 지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날 밤, 루시는 황녀의 호위기사와 함께 황궁 연회장에 발을 들인다. 강압감 때문인지 몸에 덧대고 있는 값 비싼 드레스의 천 자락이 너무 까칠하게 느껴졌다. 


”이만 가시죠.”


더불어 맞잡은 손에는 온기라곤 없었다. 


”모시겠습니다.” 


비로소 개선식으로 포장된 살인극에 막이 올랐다. 






짭성녀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제국의 저주 받은 황태자황가와 대립하는 공작가의 소공작루시를 선망하는 빈민가의 개새끼신전 카엘룸의 추기경상단 제일 가는 후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황가와 맞먹는 크기의 마탑 주인






황녀 호위무사.. 특출임. 주식 사지 마세요. 난 말했어요. 

다음 회차 재밌게 써보겠음. 

+사담은 천천히

먼저 다음 18회차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남주들 대부분 다 나올겁니다. 한 두 명 빼고.. 그리고 별 말 안하고 그냥 도파민 폭발하게 써볼게요 이상하게 자신만만

황녀 호위무사 진짜 망사랑도 아닌 범주니까 잡수지 마셔요 손대지도 마!!!! 게다가 저 분은 이미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계세요. 정말안될까요이렇게빌게요자까님! 하시는 분들을 위해 나중에,,, 외전,,,,? 생각은 있으나 안 쓸 가능성이 큰... 반응 있으면 모를까..

황녀 꽤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씀 드렸다시피 재현의 과거 중 찐 소공녀 아라벨라의 마차 사고는 황녀의 소행.

황녀 기준 주제를 모르는 자 = 아라벨라(재현의 동생)

드디어 후작 이름 나왔슴다 베르딕.. 사실 이렇게 많이 나올 인물인 줄 모르고 이름 안 정했다가 정한거 맞음.

이상... 처음에는 그냥 도파민 폭발하는 역하렘을 쓰자!!! 라고 시작한 글인데 진짜 쓰다보니 정통 로판으로 가는 듯 하네요,, 하 이럼 안되는데 글은 가볍게 많이 써야하는데. 

는 무슨 이번 회자 14,000자 넘음. 칭찬해조요.

18회차에 봅시다. 그때까지 날이 추워지니 무사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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