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굶주린 영혼과 배부른 인간이 공존하는 점심시간은 모름지기 쉬는 시간보다도 소란스러워, 길게 뻗은 복도의 어디나 할 것 없이 와글거렸다. 클로에와 라스티카는 평소 그 활기의 중심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이었는데, 주로 운동장 근처를 산책하거나 한적한 구석 벤치에 앉아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다만 오늘은 운동장서 축구 연습이 있다며 사방으로 공이 튀고 와글와글 시끄러웠으므로 어쩔 수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거였다.


창가에 기대어 서서 수다를 떠는 학생 무리를 피해 계단을 올라갈까 내려갈까 고민하다가 올라가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올라간 4층은 특별실이 뭉쳐 있는 탓인지 시끌벅적한 아래층과 대비될 만치 사람 하나 없고 조용했는데, 줄지어 늘어선 미술실과 도서실, 창고로 쓰이는 빈 교실 하나를 지나쳐 복도 맨 끝 가장 크게 붙은 문 쪽으로 다가서면……. 라스티카보다 두 걸음 앞서 먼저 다가선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만 문고리를 찰칵거렸다. 작은 힘에도 문은 속절없이 열린다.



"라스티카, 오늘은 열려 있어!"


"그렇네. 요즈음엔 미리 허가받지 않으면 잠가 뒀었지."



예체능 전반을 취미나 장래 희망 삼은 학생이 삼분지 일이나 되었으니 대체로 학교 시설물은 옥상을 포함해 전부 학생에게 개방되어 있었는데, 근래 불량교 학생들이 그중 몇 곳을 아지트 삼아 드잡이질을 하는 바람에 임시방편으로 막아두기에 이르렀다. 음악실에 틀어박혀 작업하던 라스티카에겐 비보나 다름없었는데, 선생 몇몇이 편의를 봐주어 사용 일자를 미리 알리면 그 시간에 열쇠를 대여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이게 다 그 녀석들 때문이라며 불평할 법도 한데 라스티카나 클로에나 남 탓을 도무지 못 하는 성정이라, 얼굴도 모르는 학생을 욕하기보단 오늘 점심으로 나온 크로켓 빵과 딸기 우유가 맛있었단 얘기를 하는 걸 더 좋아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음악실로 들어섰다. 텁텁한 공기를 몰아내려 가장 먼저 창문부터 열자 알루미늄 재질의 창틀 끄트머리에 걸려 있던 햇빛이 느슨하게 번뜩이며 클로에의 눈가를 찌르고 달아났다. 클로에가 움츠리는 법 없이 커튼까지 옆으로 밀어젖히곤 숨을 푹 내쉬고 들이마시며 상쾌한 공기를 만끽하는 사이, 라스티카는 눈에 익은 음악실 풍경을 쭉 한 바퀴 둘러 구경하더니만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늘상 은은하게 미소짓는 입꼬리를 보면은 라스티카는 학생보다도 선생님 쪽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라스티카는 피아노 연주, 잘하지?"



난데없이 운을 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어릴 적부터 보아 왔으나 때로는 겸연쩍을 정도로 아득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친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곁에 있다 해서 당신의 손금 모양과 지문 하나하나를 욀 수 없는 것처럼,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보아온 라스티카는 언제나 다정한 친구였으나 종종 자신의 손위 형제 같았고 가끔은 억겁을 더 살아온 스승 같기도 했다. 그가 의뭉스러운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삶을 몇 번씩이나 반복해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는 것처럼, 어떤 주술이나 마법처럼.


클로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슨하게 미소지은 라스티카가 책걸상을 밀어서고 일어났다. 수업 듣는 것보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구경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열일곱 살 작곡가는 음악실 오른편에 놓인 피아노로 다가서더니 인사라도 건네는 것마냥 건반 하나를 띵, 누른다. 소리가 맑았다. 라스티카는 백슈타인이니 스타인웨이니 어떤 차이가 있는지 늘어놓는 위인은 아니었으므로 클로에는 보면대 아래 금빛 음각으로 수놓인 글자를 흘긋 보기만 하였다. 야마하. 강당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와는 숫제 다른 모양새다.


세로가 좁고 가로로 긴 피아노 의자에 앉은 라스티카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그림이 되었다. 가볍게 톡톡 두드리기만 하던 손동작은 점차 커지더니 일곱 건반을 동시에 눌렀는데, 클로에는 라스티카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적과 마찬가지로 손쉬운 음계에도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만 기뻐한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선율이라는 것처럼.


이 작곡가는 언제나, 음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처럼, 가장 잘 알려지거나 귀에 익은 부분을 잘라 연주하지 않고 악보의 첫 부분부터 시작하곤 했다. 첫 음을 누르는 손가락은 아주 조심스럽고 다정하여 클로에는 친구의 그런 배려를 아주 좋아했다. 지금도.


정오의 한구석, 빛의 테두리로 이루어진 음악실에서 클로에를 위한 작은 연주회가 열렸다. 의자 뒤에 우두커니 서서 손이 흘러가는 방향과 해머가 현을 퉁기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다 보면 창문 너머서 들어오는 자그마한 잡음이 섞였는데, 축구 연습을 한다던 그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고 만다. 라스티카의 연주는 언제나 값졌으나 커튼을 흔드는 여름 바람과 단 둘뿐인 적막한 교실 덕택인지 평소보다 좀 더 마음을 내리누르는 구석이 있었다. 라스티카는 발판을 소리 없이 밟으며 마지막 음을 죽 끌더니, 몸을 옆으로 살짝 옮겨 앉는다.



"클로에, 이리 와."


"응?"


"여기 앉으렴."


"어…. 그치만, 그러면 라스티카의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줄곧 지근거리에 서 있던 것이 못내 신경 쓰였는지 곡이 끝나자마자 라스티카는 나긋하게 권유했다. 클로에는 뺨이 조금 붉어진다. 새삼 이제 와 그런 것이 열없다기보다, 글쎄, 뭐라고 할까. 여태껏 없던 일도 아닌데. 아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고 햇살은 눈부시고 열린 창문에선 기분 좋게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 7월 초의 여름이라…….



"괜찮아. 클로에가 내 조수가 되어 줄래?"


"내가? 어떻게?"


"자."



라스티카는 엉거주춤 곁에 앉은 클로에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건반 위에 살포시 얹어 주었다. 미끄러지는 작은 손가락. 클로에의 덜 여문 손가락은 라스티카보다 아직 반 마디쯤 작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바닥이 엄지부터 소지까지를 한데 모아 세 개의 하얀 건반에 정렬한다. 그러고는 한 옥타브 위로 옮겨 가더니 시범을 보이듯 음정 몇 개를 번갈아 누르며, 도-도-파-도-도-파-도-도-파 스타카토…… 한다. 왼편에 놓인 클로에는 그 간단한 동작을 열심히 따라 하더니, 도에서 도까지 손가락을 쭉 뻗어 가볍게 퉁겼다. 응, 이제 알겠어. 대꾸하는 클로에의 얼굴은 방금보다 조금 더 상기되어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으로 은은하게 붉다. 라스티카는 기껍게 웃었다. 잘하네, 클로에. 계속해줄래?


단지 간단한 음절을 반복하는 동안 라스티카는 손가락을 재게 놀리며 복잡한 음을 차곡차곡 쌓아 갔다. 노래가 흐른다. 귀에서 귀로, 손목 아래에서 손목 아래로 흘러가는 동안 바람은 반대 방향으로 불더니 복도 쪽을 향해 파도치듯 쓸려가기 시작했다.


점차 풍부해지는 음 속에서 클로에는 제 어깨에 부딪히는 라스티카의 어깨가 어느 순간 단단하게 지지하듯 맞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교차하는 손가락. 낮은음을 치기 위해 왼쪽 손으로 제 손등을 넘어와 건반을 누르는, 짧은 손톱. 창밖에서 나부끼는 신선한 여름 공기. 기분 좋게 어질어질한 감각 속에서……



"앗."



클로에의 손가락이 자리를 벗어난다. 띵. 그건 도-시-파. 라스티카는 실수를 질책하는 대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멋진 연탄곡이었어, 피네를 찍는 손길은 단호하나 의자에서 클로에를 몰아낼 생각이 없다는 듯 오른손은 아까의 그 자리서 못 박혀 있다. 클로에는 수줍어하거나 사과하는 대신 비슷하게 웃으며, 라스티카랑 함께 연주하는 건 더 즐겁구나, 화답한다. 다 카포.


이윽고 피아노 소리에 이끌린 미스라와 루틸이 음악실 문을 벌컥 연 순간에 두 사람의 여름은 조금 더 소란스러워진다. 쾌청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연탄곡은 뭘 생각했냐면 이겁니다...

https://youtu.be/918YaC2a-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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