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기억을 회수하여, 거대한 강에 물방울을 흘려 보내듯, 그렇게 기억을 감싸 안는 일이 나의 몫이다. 그렇게 쌓인 기억은 일종의 저장고가 되어,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자 동시에 그 누구도 될 수 있도록 만든다. 나는 그 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힘이 다 빠져나간 시신을 움직일 힘도, 제가 죽지 않았다 소리칠 시간도 없다. 인간의 100년 남짓한 세월은 한순간에 흡수되고, 그 사이에 또 누군가가 죽기 마련이므로.

그러므로 나는 궁금해졌다. 왜 다음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는가? 나는 벌써 채워지지 않는 기억의 허기를 느꼈다. 나는 눈을 떴다. 그래, 내가 눈을 떴다. 한 번도 근육을 움직여 본 적 없는 내가, 눈을 떴다.



눈앞에 들어온 것은… 야구장이었다. 시야를 가로지르는 듬성한 네트 뒤로 선수도, 관중도 없는 거대한 야구장이 푸른 하늘 아래에 있었다. 수없이 많은 기억의 입이 떠들었다. 그것들을 전부 꾹 눌러 버리고 힘없는 한 기억을 겨우 끌어올렸다. 이 몸의 원래 주인, 갓 죽은 인간의 기억. 그 입은 한 가지 질문만 던지고 있었다.

“나는 왜 죽은 거지?”




아찔하게 무너져내리는 의식을 겨우 붙잡았다. 이렇게 오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육체는 살아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움직일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와있다는 것이 곧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건만, 이 육체는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시야 외의 다른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죽은 몸에 파리가 얹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거대한 기억의 강물 속에서 육체의 주인을 찾아냈다. 이 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주인의 기억이 마치 ‘원래의 나’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내가 그 기억을 흡수한 것인데도, 육체의 주인이 나를 흡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끝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나는 기억에게 말을 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억이 말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나는 왜 죽은 거지?”

제가 흡수한 기억들에게 말을 시키면, 보통 신이 나서 이야기를 마구 해댔다. 궁금하지 않은 것들 것도 마구 말해버려 짜증이 날 정도로.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기억들은 저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그 사실을 믿고싶지 않아했다. 그 사실을 언제까지고 덮어두려 했다.

그러므로 내가 이야기를 계속 시킬수록, 다른 기억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들이 죽은 것을 똑똑히 기억했기에, 죽음을 상기시키는 입을 경멸했다. 나는 결국 몸의 주인에게 묻는 것을 그만 두고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손 끝, 발 끝의 감각이 되돌아오며 서서히 근육통도 느껴졌다.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 몸은 놀라울 정도로 싱싱했다. 마치 죽은 적이 없다는 듯 모든 세포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탄탄하고 계획적으로 잡힌 근육은, 죽은 지 며칠 지나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아도 어림없다며 당장이라고 뻐길 것 같았다.

몸의 기억이 아직 정신을 다 차리지 못했으므로, 나는 보다 무의식적인 부분에 의존하기로 했다. 이 몸은 근육을 사용하는 데에 아주 익숙했다. 그리고 눈앞의 야구 경기장 또한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제가 있는 공간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 것 같은 곳이었음에도 무의식은 익숙한 공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부진 몸, 야구장이 익숙한. 야구 선수인가? 아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소년, 소녀 정도로 불릴 법한 나이. 야구 연습생이다. 무의식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야구가 정체성인 것은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켠에 몸을 말고 있었던 탓인지 돌아온 신경이 짜증을 냈다. 나는 무의식이 기억하는 대로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아, 햇살이었다. 나는 비척비척 걸어가며 제발 이 모습이 눈에 띄지 않기를 빌었다.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얼굴에 묻은 때를 지우고 거울을 살피니 보통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거울을 보고 다시 깨달았다.

아, 나는 이 몸에 갇혀버렸구나.

원리는 알 수 없었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죽은 자들의 기억을 흡수하며 돌아다니는 현신한 신이었다. 그런 내가, 한 순간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린 몸에 들어와버린 것이다.

이 몸은 죽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오면 모든 세포가 작동한다. 그것은 명백히 살아있는 작용이기 때문에 나는 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나가면 이 몸은 죽는다. 이 모든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감각이 느리게 돌아오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 몸은 일 초에도 몇 십, 몇 백번씩 죽음과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이 몸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렬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려줄 기억은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 같은 질문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죽었을 때의 충격이 컸던 탓이다. 간혹 그런 기억이 영원한 패닉 상태에 빠져 제대로 흡수되지 않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빠른 강물에 흡수되지 못한 물은, 단순히 갈려 나가고 굴러 떨어져 마모되고 힘을 잃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몸의 주인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대신, 스스로 이 몸에 남아있는 기억을 찾기로 했다. 뇌세포에 남은 기억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나는 기뻐해야 하는지, 비참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걷다 무의식이 ‘익숙함’의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멈추었다.

카페였다.

평범한 카페. 하지만 익숙한 곳이었다. 나는 뇌에 남은 기억을 살살 끌어냈다.



단편적인 사진 하나가 떠올랐다. 손을 대지도 않은 따듯한 라떼 한잔,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누군가. 따듯하고 노란 전구가 위에서 쏟아지고 IN COFFEE WE TRUST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컵. 나는 고개를 들어 카페 이름을 살폈다. 일치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고 삐죽 튀어나온 지폐 몇 장을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안타깝게도 라떼 한 잔을 시키는 동안 아르바이트생은 나를 아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쉬워하며 익숙한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맛이 나지 않았다. 입에 대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은 어떻게든 되었으나 커피의 맛과 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각과 통각을 제외한 감각이 아직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받고는 곧 카페에서 나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카페 바로 옆에 위치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카페에서 돈을 대부분 써버려서, 그 박물관이 무료로 운영된다는 사실에 조금 기뻐했다. 나는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걸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바닥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목걸이처럼 보이는 그것은, 인간의 척추뼈로 만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원형으로 빙 둘러싸고는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기웃거리며 빈 틈에서 그것을 살폈다. 설명이 무어라 써 있었으나 글자를 읽을 정도로 시각과 정신이 온전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모든 척추뼈는 다른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은 설명을 읽고 다소 주춤대는 것이 보였으나, 나는 그런 이들을 조용히 관찰할 뿐이었다.

척추는, 뇌만큼이나 신경에서 중요한 곳이다. 무조건반사가 일어나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신경들끼리 상호작용하고 적절하게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 척추인 것이다. 그런 척추가, 맞물리지도 않는 다른 인간들의 것과 함께 있으며 하나를 이뤘다. 나는 그 아이러니함에 조금 웃었다.

나는 그것을 계속해서 내려다보았다. 아직 시간 감각이 온전치 않은지, 정신을 차리자 이미 몇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았다. 나는 뻣뻣해지고 욱신대는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 때, 나는 순간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인간의 척추, 그것에 남아있는 그것의 피 냄새를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다른 모든 인간에게 향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끝없는 허기에 휩싸였다. 그 대상은 인간이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들의 목을 물어뜯고 나와 같은 상태로 만들겠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곧장 온 근육을 다해 박물관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질책하는 소리와 시선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려 한산한 거리로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이 몸은 죽은 것이다. 그것도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방법으로.

이 몸은 좀비다.

 



나는 한산한 공원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최대한 감각을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양 다리를 모아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쉬었다. 이미 죽은 몸이지만 숨을 쉬어야만 한다는 사실보다도, 내 자신이 숨 쉬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미 한차례 힘껏 뛰어보지 않았던가, 나는 이미 이 몸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건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맥박을 짚어보았다. 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심장은 뛰고 있었다. 나는 살아있었다. 나의 모든 것은 과거였는데, 현재로 등이 떠밀렸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날 이루고 있는 모든 기억들도 입을 다물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각자의 과거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다 제각기 흩어져 혼자가 되었다. 날 이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 이 육신 빼고는. 어리고 작은 길을 잃은 육신 하나만이 온전한 나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척추뼈 전체를 가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현재로 떠밀리고 나니, 과거의 기억들은 전부 과거일 뿐이었다. 나는 고작 이 육신의 본래 기억만을 옆에 붙들 수 있었다. 그 외로움에 어깨가 약하게 들썩이는 것을 느끼며 숨을 참았다.

현재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자기들만의 무릎에서 빼꼼 고개를 든 모든 기억들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들은 이렇게 멈추어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빠른 강처럼, 서로가 뒤섞이고 흘러들어가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었다. 이렇게 고여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나 서로 외롭다면, 이 작은 웅덩이들은 모두 썩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모든 기억은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각자 죽은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딱 하나, 육신의 주인은 여전히 공허하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속이 뒤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배를 움켜잡고 뛰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고 비틀대다, 결국 풀숲 위에 콜록대며 배 속의 것을 게워냈다. 커피였다. 몇 모금 마신 커피가 체액과 뒤섞이지도 않은 채 풀숲 사이로 버려졌다. 나는 몇 번 더 콜록거리다 주변 화장실을 찾아가 입을 헹궜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느낀 순간 다시 구토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뱉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런 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몸은 자연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왜 이런 죽음이 생겨나게 된 것인가?

“나는 왜 죽은 거지?”

그러게, 넌 왜 죽은 걸까, 넌 왜 이렇게 죽어서 나를 가두어 둔 걸까. 나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카페의 장면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다면 그런 명확하고도 단편적인 장면이 떠오를 리 없다. 그것은 죽기 직전의 기억, 너무나도 강렬해서 죽음을 상징하는 기억이 되어버린 것이다.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왜 죽은 것이냐는 질문은 죽음을 일으킨 사고를 기억하지 못해서 뱉는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도, 이것은 의도된 죽음이었고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의 계획에 의하여 잡혀있는 셈이다.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자 나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정신과 몸을 지배했다. 나는 그러다 내가 앉아있던 벤치 앞에서 멈추었다. 그 맞은편에는 깊은 호수가 있었다. 나는 완전한 도피처를 발견한 것이다. 죽음. 수도 없는 기억 속에서 이미 겪어본 그것. 나는 주저 없이 물 앞으로 다가갔다.

이미 해는 땅 아래로 떨어진지 오래이고, 공원에는 가로등과 바닥의 조명이 사람들을 밝혔다. 나는 깜깜한 물을 내려다보며 다시 이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죽음을 실감했다. 나는 죽음을 경험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읽었을 뿐이다. 나는 평생을 죽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당장은 죽음이 내 눈앞에 있었다. 오, 인간들은 어떻게 죽음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다시 도망쳤다. 죽음으로부터, 또 동시에 삶으로부터 도망쳤다. 그 무엇이라도 겪어보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실은 그 무엇도 겪지 않은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걷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나는 눈앞의 건물이 낮에 가 보았던 카페가 있는 박물관임을 깨달았다.



퍼엉-

갑작스럽게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중앙에 밝은 불꽃이 들어왔다. 한순간 밝게 빛나고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이 육신도 삶을 다 불태우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모든 걸 두려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삶도 죽음도 온전히 가지지 못한 채로 두려움에 떨 일도 없었을 텐데…

사그라드는 불꽃, 화약의 잔상, 새까맣게 남은 냄새, 그리고 목을 까끌하게 쓸어넘기는 텁텁한 감각. 고개를 들어 그것들을 전부 맞이했다. 알싸한 화약의 냄새에 나는 인간들이 내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몰려드는 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제압하기 시작하고서야 나는 고개를 틀어 눈앞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었다. 카페 안에서 마주 앉아 있던 사람.

“□□□.”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인지, 저 사람의 이름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심장이 어느 때보다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뼈를 뚫고 나가 바닥에 떨어질 것처럼 심장은 아프게 뛰었다. 죽음 앞에서 몸의 마지막 투쟁이었다. 하지만 이젠 안 돼, 이제는 아니야. 더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육신을 온 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눈앞의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근육이 뜯겨 나갈 것만 같았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그의 목을 잡은 채로, 죽음도 삶도 두려워하던 몸이 방향을 찾고 모든 힘을 다했다. 다른 이들이 나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 눈앞의 육신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을 놓고, 육신을 놓았다. 의식 없는 몸은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으나, 바로 앞에는 이제 기억이 흡수되길 기다리는 인간이 있었다. 나는 미련없이 육신을 뿌리쳤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인생- 하루가, 삶도 죽음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한 채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허겁지겁 갓 생겨난 기억을 먹어치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입에는 씁쓸하고 차가운 커피의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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