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한 기류를 먼저 눈치챈 것은 연극부 아이들도, 반 친구들도 아닌 감독 선생님이었다. 

 

 “보라야, 너 무슨 일 있어?”

 “네?”

 “고운이랑.”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던 감독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만나는 아이들의 변화를 눈치챘다. 마주하는 장면에서 묘한 공기가 맴돌았다. 긴장감과는 달랐고, 미움처럼 꺼려지는 감정도 아니었다. 

 

 “아…. 저희 원래 안 친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질문을 피해 가려 드는 보라를 보며, 감독은 짧게 숨을 몰아쉬고 웃었다. 

 

 “뭔지는 몰라도 잘 풀어.”

 “네….”

 “둘이 마주치는 장면이 한둘도 아니고, 너네 서먹한 게 내 눈에 보일 정도면 관객도 알아.”

 “네….”

 “친하게 지내라는 거 아니야. 그냥…. 불편한 부분 있으면 풀고 가라고. 같이 호흡 맞춰야 하잖아?”

 

 보라는 감독 선생님의 말씀 중, ‘맞춘다’라는 표현에 집중해버리는 자신이 싫어졌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보라의 어깨 너머에서 바닥만 보던 고운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 고운에게는 말을 한 건지…. 감독은 고운에게 둔 눈길을 거두며 가볍게 숨을 쉬었다. 

 

 “다들 잘 맞춰왔으니까. 다음 주에는 통으로 가자.”

 “네.”

 “보라랑 고운이는 선생님 말 기억해.”

 

 장난스러운 마지막 당부에 보라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발끝만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고,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말아 넣었다. 감독 선생님이 떠나고, 하나둘 눈치를 보다 자리를 뜨는 아이들 사이. 보라와 고운은 떨어져서 서 있었다. 먼저 용기를 낸 것은 고운이었다. 

 

 만우절, 고운은 거짓말 같은 고백에 잠시 넋이 나갔다. 

 

 기쁘게 받아들이면 쉬웠을 것을…. 고운은 보라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잘라냈다.


 고운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보다,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편이 편했다. 감정이 기울어버리면 고운이 이뤄야 하는 것들을 이룩하는 데 힘들기만 했다. 경쟁자는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제게 다가올 지원과 관심이 경쟁자에게 쏠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이 년 먼저 나온 오빠가 미리 이뤄둔 것을 도장 깨기라도 하듯 차근차근 이겨냈는데, 이번에는 비슷한 선상에 섰다. 그래서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보라야.”

 

 직전의 연애처럼 다시는 안 볼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고운에게 보라는 절대 가까워질 수 없지만, 그래서 더 애가 타는 사람이었다.

 

 “어?”

 “그날은….”

 

 복도 벽에 기대어 서서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고운이 보라를 불러세웠다. 고운과 마주칠까 가장 나중에 나오던 보라는 이미 갔을 거라 여긴 고운을 보고, 그런 고운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그날….”

 

 그날, 보라가 느끼던 봄밤은 유독 쌀쌀했다. 감기라도 걸린 듯 자꾸만 콧물이 흘러나와서 교복 소매가 다 젖어버렸다. 

 

 “어…. 그러니까 만우절 날….”

 “응. 만우절 날.”

 “내가 한 말은….”

 

 망설이는 고운을 보고, 보라는 가방끈을 꼭 쥐며 말했다. 

 

 “차고운, 만우절이잖아.”

 “어?”

 “장난이었어.”

 “아….”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같길래.”

 

 보라는 고개를 떨구고 발을 옮겼다.

 

 “문은…. 네가 잠그고 가.”

 

 부적처럼 꼭 쥐고 있던 열쇠를 고운 옆의 창틀에 걸쳐둔 보라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찬바람 부는 보라의 태도에 고운은 보름 전의 저녁이 떠올라 어깨를 떨었다. 한결 따스해진 기온에 사람들 옷차림이 변했다. 아이들은 재킷을 벗었고, 조끼를 착용하는 춘추복 규정에도 덥다는 핑계로 하얀 블라우스만 입은 채로 오갔다. 진회색의 학교가 하얗게 변했지만, 고운의 마음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보라가 사라진 복도 끝, 계단을 따라 왁자지껄하게 이동하는 아이들 소리만 울렸다. 고운은 창틀에 걸쳐진 열쇠를 집어 들고, 묵직한 자물쇠를 잠갔다. 

 

 문단속을 마친 고운이 연습실 안을 살폈을 때, 마치 연극의 한 장이 마무리된 것 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 

 

 “연보라, 잠 좀 자라.”

 “언니, 전 꼭 이래요.”

 

 히죽 웃는 보라의 입술은 가운데가 갈라져 피딱지가 맺혀있었다. 

 

 “무리하지 좀 마.”

 “아잇! 무리라니요? 이쯤이야 거뜬하죠.”

 

 천연덕스럽게 구는 보라를 보며, 작년의 실장이자 올해의 부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들 보라의 입술을 두고 한 마디씩 건넸는데, 끝까지 입을 열지 못한 것은 고운이었다. 고운은 보라의 입술을 볼 때면 거짓말 같던 입맞춤이 떠오르고는 했다. 이런 고운의 속도 모르고, 보라는 연신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연기를 했다. 맞은편에서 번들거리는 보라의 입술을 보는 것은 고운에게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날 이후, 고운의 밤에는 종종 보라의 입술이 찾아온다. 잠들기 전 베갯잇에 수놓은 기억은 꿈이 되어 오거나 잠에서 깨고 난 후 환상처럼 남고는 했다. 

 

 “옆으로 좀 가 봐.”

 

 보라는 살갑게 구는 후배에게 마음을 주기로 결심한 듯, 근래 부쩍 가까이 지낸다. 이 사실은 고운의 입장에서 전혀 달갑지 않았다. 후배를 보는 보라의 눈빛이 자신을 보던 그날의 눈빛과 어딘가 닮아 보여서 유독 그랬을지도 모른다. 고운은 버스에 앉아 앞자리의 목받이를 부여잡고, 연신 몸을 움직여 보라를 몰래 관찰했다. 후배와 나란히 앉아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어떻게 웃는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든 것이 궁금했다. 

 

 고운은 보라의 마음을 거절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후회하고 있다. 

 

 온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지 않은 결정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오만했는가를 깨닫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연보라.”

 

 고운은 뒤쪽에 앉아서 보라를 불렀고, 보라는 복도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왜?”

 “이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맞춰줘.”

 

 팔랑거리는 극본은 손때 묻은 가장자리가 너덜거렸다. 얼마나 본 건지…. 보라는 고운이 뭐든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다. 선우에게 듣자 하니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과반 아이들에게 건너 건너 들어보니 수행평가에도 성심을 다한다고 했다. 연극마저 몰두하는 고운을 보며, 보라는 고운이 참 피곤하겠다고 여겼다. 고운의 옆에 서서 몸을 숙인 보라를 두고, 고운은 쌜쭉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긴장 안 돼?”

 “연습 많이 했잖아.”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 쳐둔 대사를 손끝으로 읽던 고운이 초록 형광펜으로 밑줄 친 지문을 짚었다. 

 

 “뺨.”

 “응.”

 “손…. 대기 싫으면 안 대도 돼.”

 “어.”

 “근데…. 어제 연습할 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얼굴을 더 가까이 붙였으면 좋겠어.”

 “응.”

 

 무뚝뚝한 답을 들으며, 고운은 묘하게 열이 올랐다. 보라는 제게만 차갑게 굴었고, 그 때문에 여태 데면데면하다. 

 

 “연보라, 이거 끝나면 배역 바꾸던가.”

 “무슨 말이야?”

 “나…. 공부하려고. 부모님도 연극 하는 거 안 좋아하시고, 여기에 시간을 너무 뺏겨.”

 

 보라는 통로에 서서 고운이 앉은 좌석과 그 앞좌석 등받이를 양손으로 짚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생님들은 아셔?”

 “아직 말씀 안 드렸어.”

 

 정말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는 했다. 삼월 모의고사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온 것을 보면, 이제 딴짓을 그만둘 때가 됐다. 보라는 고운의 말을 듣고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네 마음이지.”

 

 고운은 왠지 서운함이 밀려드는 기분에 코가 먹먹해졌다.


 버스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고, 버스 안의 아이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입술에 힘을 풀거나, 목을 가다듬었다. 구의회 건물의 대회의실. 민의를 다루는 곳에서 오늘은 군상을 재현한다. 아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구의회 주차장에서 지도 교사의 주의사항을 듣고, 하나둘 버스에서 내렸다. 대기실로 쓰이는 곳에 도착하자 실감이 났는지…. 몇몇은 긴장감에 파랗게 질린 입술을 꼭 물고 있었다. 

 

 “언니, 이거 봐줘요.”

 

 보라는 후배 곁에 서서 후배가 준비한 소품을 하나씩 꺼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잔과 주전자를 꺼내고, 후배가 무겁다며 칭얼거리는 것을 들어가며 테이블보를 다시 접었다. 고운은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며, 풀리지 않는 답답한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만 했다.

 

 풀리지 않는 고운의 가슴과 달리, 연극부는 지역 연극제에서 가볍게 입상했다. 애초에 해당 지역구에서 출전하는 학교 수가 적었고, 작년 전국 단위 연극제에서 금상을 입상한 주역들이 포진했다. 신입생들의 연기도 흠잡을 곳이 없었고, 시간당 돈을 받는 감독의 지도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극본이 좋았다는 칭찬도 있었는데, 보라는 제가 쓴 것이 아님에도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고기 먹고 갈까?”

 

 이사장이 선뜻 내민 카드였다. 지도 교사는 감독에게 일정을 물었고, 감독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주말 저녁, 누구든 바쁜 시간. 지도 교사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 인근 고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왁자지껄한 고깃집 구석의 작은 방, 4인용 테이블 두 개가 좁은 틈을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난처해하던 지도 교사가 방 한쪽의 가림막을 걷자, 꼭 닮은 공간이 드러났다. 사장은 몇 명인지를 묻더니, 그 가림막을 속 시원히 걷어내 자리를 만들었다. 친한 아이들끼리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앉았고, 오늘의 감상을 나누는 목소리는 마치 아침의 참새 소리 같았다. 지지배배 떠드는 목소리를 흐뭇하게 듣고 있던 지도 교사는 당당히 주문했고, 아이들을 위해 미리 식사마저 주문했다. 

 

 “보라야, 여기 앉아.”

 

 오던 길에 있던 약국에서 연고를 사 온 보라는 뒤늦게 들어와 실장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의자와 테이블 사이 좁은 틈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동했다. 하필이면…. 옆에 앉은 사람이 고운이라는 것이 걸렸지만, 보라는 태연하게 굴기로 했다. 


 고운은 내심 제 옆자리에 보라가 앉기를 바랐는데, 고운 나름의 선심이었다. 제일 깨끗한 앞접시를 골라두고, 물 자국 없는 수저를 올렸다. 물잔 가득 물을 채워두고, 물수건은 잘 보이도록 한쪽에 가져갔다. 게다가 이 자리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라 피곤한 몸을 기대어 둘 수도 있었다. 이런 고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보라가 실장과 무언가를 속닥이며 킬킬거렸다. 

 

 “입술은 괜찮아?”

 

 겨우 용기를 내어 묻는 고운을 빤히 보던 보라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몇 마디 더 이어가고 싶은 대화지만, 보라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고운도 입을 다물었다. 

 

 “얘들아, 고생 너무 많았어. 우리 전국제는 이번에 대상 도전하자!”

 

 밑반찬과 공깃밥이 깔리고, 숯불이 들어왔다. 훈기가 도는 상 앞에 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잔에 음료수를 따랐고, 지도 교사는 신이 나서 잔을 들었다. 눈높이로 들어 올린 유리잔에는 맥주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상표를 가릴 정도로 사이다를 따라 둔 보라의 잔과 물을 채운 고운의 잔이 허공에서 스쳤다. 고운은 부러 잔을 밀어가며 보라의 잔과 부딪혔고, 종소리를 닮은 청명한 소리가 소음 사이로 울렸다. 

 





GL 차곡차곡 담는 중 / e-Book: ‘밤과 밤’, ‘친구 사이에’, ‘첫사랑’, ‘사랑이 스미는 중’, ‘옆에 누워요’, ‘물 만난 언니’ / 포스타입 오리지널: ‘옆집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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