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에 억지로 채워진 재갈이 거슬렸다. 로키는 눈을 내렸다 올리며 제 앞에 서 있는 작자들을 노려보았다. 공명정대한 척 정의를 수호하겠다 나서는 개미들. 한 사람씩 달려들면 자신에게 손 끝 하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할 것이 뻔한 나약한 필멸자들이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녹색 괴물 하나를 제외하고. 이딴 세계, 모조리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했어. 입 안으로 으르렁거리는 로키를 두고 토르가 테서렉트를 담은 케이스 반대편을 잡았다. 로키는 필멸자 무리를 노려보던 눈을 토르에게로 옮겼다. 토르가 엄한 눈으로 말 없이 자신을 꾸짖는다. 오, 그렇게나 화가 나셨나. 토르의 화를 실감하자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흥은 오를 법 하다 다시 가라앉았다. 아홉 세계의 수호자인 양 행동하는 토르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스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토르가, 저들이.




수갑이 철그럭거렸다. 로키는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을 구경하는 어벤져스를 눈에 똑똑히 아로새겼다. 분노와 모멸감이 로키를 휘감았다. 하지만 가장 크게 그를 뒤흔드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분노는 공포를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자신은 패배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뿐이다. 죽음. '그'가 자신을 찾을 것이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분명했다. 아니, 죽음은 달콤한 행운이었다. 쉽게 죽일 리가 없었다. 지금껏 그들에게 받은 고통보다 더한 것을 선사하겠지. 알고있는 사실이 뒤집혔을 때 토르는 어떤 얼굴을 할까. 바보같이, 아직도 자신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저 멍청이가. 사실은 모든 것이 로키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옷 안 쪽에 채 아물지 않은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들이, 토르와 어머니의 존재를 두고 로키를 협박했다는 것을 알게된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슬퍼할까? 분노할까? 분노의 대상은 누구일까. 그들? 전사답게 죽지 못하고 굴종한 자신?




로키는 천천히 토르를 따라 테서렉트가 담긴 케이스를 돌렸다. 테서렉트가 빛나고 두 사람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에서 내려질 처분이 궁금해졌다. 사형일까? 아니면 남은 일생동안 가장 깊은 감옥에 그를 구금한 채 빛을 보지 못하게 할까? 그에게서 마법을 벗겨내고 인간보다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방치할까? 무엇이 되었든, 요툰헤임의 서리 거인 따위에게 베풀 만용은 없을 것이다. 그래. 그런 감성적인 것 따위 남아있지 않을 터였다. 궁니르를 스스로 놓고 우주로 떨어지면서 모든 건 끝난 거였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처벌을 받든, 그들이 찾아올 것이다. 아스가르드가 아닌 다른 세계의 감옥이 나을지도 몰랐다. 올파더를 더 자극시켜야 할까. 뻔뻔한 학살자에게는 그에 맞는 더욱 비정한 판단이 떨어질 터이다. 로키는 토르를 바라보았다. 아스가르드의 하늘 같은 밝고 푸른 눈이 로키를 바라본다. 눈 안에 담긴 껄끄러움, 화, 분노. 저걸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어. 로키는 눈을 깜빡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눈에 조금, 물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토르, 내가 원한 건 하나 뿐이었어.
그는 눈꺼풀을 내려 시야를 차단했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Sir. 무기를 내려놓게'



로키는 급히 헐떡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서둘러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기억 속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자세를 하고 미드가르드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치타우리의 셉터로 계약이 이루어진 뒤 테서렉트를 사용해 막 미드가르드에 떨어졌을 때의 상황.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셉터를 든 자신이 현실감이 없다. 머리 위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한 테서렉트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로키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그들이 자신을 순순히 보내줄리가 없었다. 계약이란 건 이것을 말하는 거였나.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라면 망설임없이 사용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는 없으리라. 로키는 셉터를 들어 미드가르드인을 겨냥했다. 중요한 것을 위해서라면 개미 정도는 죽어도 됐다. 너희도 중요한 것을 우선하잖아? 불행히도 나에게 이 세계가 덜 중요할 뿐. 나에게 중요한 건. 로키가 숨을 들이마셨다. 이를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내뱉었다.



'나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다'
'로키? 토르의 동생?'



저번과 같군. 로키는 포탈을 여는 데에 크게 기여했던 인간을  차갑게 응시했다. 자신을 경계하는 자들도 저번과 똑같았다. 서 있는 자세, 위치, 모든 것이 동일했다. 마치 정해져 있는 것처럼. 순간 흐르는 소름에 로키가 셉터를 다시 움켜쥐었다. 애써 잡념을 털었다. 지난 번에 고른 자들은 제법 쓸만 했다. 이번에도 유용할 것이다. 로키는 저번과 같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박사와 활을 쓰는 어벤져, 요원 두어 명을 세뇌시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안대를 쓴 남자를 보았을 때 이 자로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에 기각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이번에야 말로 세계는 불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것이다.








상황은 무서울 정도로 똑같이 흘러갔다. 차를 타고 도망가는 일행을 쫓는 헬기를 격추시켰다. 호크아이는 저번에도 그랬듯, 이 쪽에 힘을 보탤 적절한 세력을 발견해 연결시켜 주었다. 박사는 포탈을 만들고 안정화 시키는 것에 열중이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놓친 부분이 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로키는 입술을 세게 씹었다. 메말라 부르튼 입술이 갈라져 쇠 맛이 났다. 손으로 무심히 쓸자 희미한 붉은 것이 묻어나왔다. 아. 선득한 피에 로키는 위화감의 실체를 퍼뜩 깨달았다. 그들의 연락이 없었다. 진작에 머릿속으로 자신을 불렀어야 했다. 그동안의 고통은 무엇보다 달콤했던 것임을 실감하게 해주겠다 협박하며 계약을 다시금 일깨워줘야 했는데, 잠잠하다. 로키는 셉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계약의 증거는 손 안에 있었다. 기억도 멀쩡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치타우리 측에서는 여전히 아무 접촉도 없었다. 첫번째, 로키만이 기억하는 지난 번 시도에서 모든 것은 타인이 자신을 조종하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했다. 페이지 너머로 책을 읽어내려가는 것처럼,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일이 진행되었다. 로키는 아주 가끔만 입을 벌려 말을 토할 수 있었으며, 눈물을 떨구는 정도만 가능했다. 녹색 괴물이 천박하게 그를 집어들고 충격을 준 이후에서야 주도권을 되찾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 정신 어딘가가 치타우리와 연결되어있는 느낌이 전혀 없다. 로키는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시험일까?
스스로의 의지로 계약을 지키라는 뜻일까?


사악한 거인과 그 추종자 무리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로키는 주먹을 세게 틀어쥐었다.




계획만이 진행되어갔다. 테서렉트를 이용해 포탈을 열 방법을 중얼거리며 설명하는 박사를 보면서 로키는 기억 속 그가 말했던 물질을 떠올려냈다.



'이리듐이 필요한가?'
'그걸 어떻게?'
'독일. 눈이 필요한가?'
'....정확히 알고 있군요'



화살을 든 호크아이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이건 저번에는 없던 일이군. 로키는 입 안을 혀로 쓸었다. 내가 가지. 저번에는 잡힐 필요가 있어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다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쉴드와 그 어벤져들은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로키는 셉터와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키고 눈에 보이지 않게 했다.





일부러 소란을 피울 필요도 없었다. 로키는 필요한 인간을 조용히 구석에서 죽였다. 눈알을 파낸 건 덤이었다. 손과 소매에 피가 묻어 진득했다.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살해당하다니. 기구한 운명이야. 시체의 옆구리를 구두 앞코로 툭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이것도 정해진 것이겠지. 고통에 일그러져 뒤틀린 죽은 이의 얼굴이 보기 추했다. 약하군. 로키는 마법으로 손과 옷을 씻어냈다. 지팡이로 변화시킨 셉터를 우아하게 거머쥔 채 출구로 향했다. 쓸데없이 인간들을 무릎꿇일 필요도 없었다. 한 번 겪어봤던 일이라서일까, 모든 것이 감흥없었다. 변덕스런 기분이 되어 로키는 마법을 풀었다. 미드가르드인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테고, 열심히 수색중일 터였다. 만약 이 곳에서 자신이 발견된다면. 앞으로의 전개도 변함없이 흘러갈까?



등 뒤로 누군가 시체를 발견해 지르는 비명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려왔다. 흠. 이건 조금 재미있군. 또각이는 구둣굽이 대리석 바닥을 차갑게 가로질렀다. 유유히 걸어나오려는데 입구가 시끄러웠다. 발을 뒤로 물릴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로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얌전히 있으시지? 사슴 양반'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마법이 풀린 건 방금 전이었는데. 로키는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눈치챘다. 아, 이것도 지난번과 같았다. 지난번에 자신은 정확히 이곳에서 방패를 든 인간과 저 이상한 갑옷을 입은 인간에게 잡혔던 것이다. 인간들이 이리듐을 더 빠르게 추측해 낸 것일까? 어찌되었든 독일까지 수사망을 좁힌 거로군.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곧 어딘가에 태워져 수송되며, 머지않아 토르가 등장한다는 뜻이었다. 왜지? 왜 저번과 똑같이 진행되는 거지? 로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두 어벤져는 로키를 어딘가로 끌고가 운송수단에 태웠다. 사소한 것이 비틀려도 큰 줄기는 같다는 것일까. 로키는 유드그라실이 그리는 미래의 다양성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하나의 큰 줄기에서 수십 개의 잔가지가 뻗어나는 것처럼 모든 게 같을 수는 없을 텐데.




곧 번개가 쳤다. 로키는 웃었다. 움츠러든 모습에 그들 중 하나가 말을 건다.



'뭐지? 번개가 무서운가?'



이 말도 똑같아. 우레와 같은 소리가 울린다. 로키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그도 같은 대답을 해 줄 수 밖에.



'번개 다음에 나타나는 게 무서운거지'



갑옷을 입은 미드가르드인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토르가 나타났다. 토르. 로키는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토르가 로키를 잡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어딘가의 숲, 이것도 저번과 같았다. 로키는 바닥에 몸을 눕히고 키득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삼 일 만이네. 보고싶었어'
'로키!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아니? 안 그래 보이는걸'
'...네가 죽은 줄 알았다'



토르의 흔들리는 눈.



'그래서. 슬펐어?'



답을 아는 질문을 구태여 다시 묻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이 있을까. 로키는 그런 멍청한 작자들을 싫어했다. 아스가르드에서 그런 이들을 볼 때마다 하찮은 두뇌를 가졌다며 맘껏 비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그 짓을 하고 있다. 토르가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슬퍼했다 말하길 기다리고 있다. 이미 들은 말인데도. 지금의 토르에게는 이게 처음이겠지. 그러니 괜찮지 않을까? 아예 바보같은 일은 아닐 거야. 로키는 가만히 토르를 응시했다. 자. 어서 말 해.



'당연히 슬펐지. 특히 우리의-'
'그만. 네 아버지 이야기는 됐어. 우리는 형제가 아니잖아?'
'로키. 우리는 같이 자랐다! 함께 놀고 함께 싸웠지. 다 잊은것이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군'
'뭐?'
'며칠 전에 들은 말과 토씨 하나 안 틀려. 대체 무슨 일일까? 토르'
'로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테서렉트는 어디있지? 당장 그걸 넘기거라. 그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나한테 없어. 집도, 그 물건도. 나는 몰라'
'로키!!!'



로키는 감정을 잔뜩 토해내는 토르를 보다 수를 세기 시작했다. 토르가 뭘 하냐며 재촉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억대로라면, 이제 곧-



'넷- 셋- 둘-'
'로키. 장난은 이쯤 하고 잘 듣거라-'
'하나'



토르가 갑옷을 입은 이에게 밀쳐져 날아갔다. 저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로키는 그 자리에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했다. 무서울 정도로 같은 흐름. 그렇다는 건 결말도 정해져 있다는 건가. 아니, 그럴 수는 없어. 로키가 주먹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유리 감옥에 들어왔다. 일부러 잡힌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없어도 포탈을 여는 것에만 집중하라 일러두었으니 큰 문제없이 포탈은 열릴 터다. 이곳을 급습하는 인원에서 호크아이는 제외시켰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편에 있을 것이었다. 로키는 등을 기대고 앉았다. 쓸데없는 정보를 발설하지도 않을 것이고, 스타크 타워를 포탈의 거점으로 열지도 않을 것이다. 실수는 없었다. 저번의 실수는 모두 메꾸었다. 그런데. 왜. 왜 이리 불안한 기분이 드는지. 로키는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묻었다.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미친놈 치고 너무 얌전한데'
'말 조심하게. 그래도 나의 동생일세'
'아무 말도 안 해. 이상하다고.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잡힌게 아닌가?'




급습이 성공했다. 토르를 유리 감옥 안으로 유인했다. 이번에는 로키가 아닌 다른 이가 쉴드의 요원을 쏘았다. 그의 허물어진 몸 아래로 피가 고인다. 영혼이 미약해져간다. 죽어가고 있다.

입가에 피가 어린 그가 로키를 보며 웃었다.



'당신은 질 거야'



그의 대사도 같았다. 말이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아무도 들을 수 없었지만 로키는 토르를 떨어뜨린 뒤 엉망이 된 비행선 안에서 중얼거렸다. 아니, 나는 져서는 안 돼. 로키는 쉴드 요원이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발을 돌렸다. 모든 것이 같으니 떨어진다고 토르도 죽지 않겠지. 그렇기에 더욱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안녕 토르, 잠시 후에 봐. 로키는 셉터를 다시 들었다. 기한이 임박했음을 고지하듯 셉터의 에너지가 따가웠다. 그는 나아갔다.







포탈이 열렸다. 치타우리 군대가 쏟아져나온다. 로키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센트럴 파크 한 가운데에 열린 포탈은 일광욕을 즐기던 시민들을 아주 쉽게 짓밟고 뭉갰다. 비명이 즐비했으며 푸른 잔디와 나무에 벌건 핏물이 튀었다. 아스가르드를 위해 참전했던 어느 전쟁터보다도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구역질이 인다.



'제기랄!!! 끝이없어!'
'누가 호크아이 좀 정신차리게 해볼래?'
'내가 가지'
'지금이야말로 '그 녀석'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군'




어벤져스들이 우왕좌왕했다. 스타크 타워보다 학살에는 더 적합한 장소군. 로키는 큰 나무에 손을 대고 기대어 무심하게 광경을 관람했다. 이윽고 천둥과 함께 그가 나타났다. 곧바로 로키의 앞에 떨어진 그가 로키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든다. 로키는 저항하지 않았다. 투구도, 단검도 불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모든 것이 기껍지가 않았다.




'로키!!! 당장 이 짓을 멈추거라!
'너무 늦었어. 이제 못 막아'




감정없이 중얼거리자 토르가 어깨를 꽉 잡아왔다.



'우리가 함께라면 가능해'




로키는 입 안을 세게 씹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토르. 너는 왜. 어째서. 이딴 세계가 그렇게 중요해? 너의 그 필멸자 여인 때문인가? 그녀를 위해서인가?
나는.... 모두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로키는 그제야 손 위로 단검을 소환했다. 칼을 빼어들고 토르를 찔렀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여전히 어리석고 멍청했다.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토르가, 그런 토르를 보며 안도하는 스스로가.



'감상적이야...'



텔레포트로 치타우리의 탈것에 올라탔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주 장관이었다. 나무와 풀이 불타며 비명을 지른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집어삼킬 듯 널름거린다. 호크아이가 붉은 머리 여자를 상대하고 있다. 아이언맨이 손에서 빔을 쏘아 치타우리 하나를 박살냈다. 캡틴 아메리카가 시민들을 구하려 제 몸을 날린다. 멍청한 인간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우습게도. 이 역시 저번과 같았다. 그리고 녹색 괴물이 점프하더니 로키를 잡아채 던졌다.

끔찍했다.


마지막으로 인간들의 무기 하나가 날아오며 같은 결말이 났다. 로키는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스가르드의 하늘보다는 못하지만 파란 색이었다. 토르를 필두로 어벤져스가 그에게 무기를 들이대며 다가온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다가올 처후는 이미 아는 바이다. 그리고, 계속되던 위화감이 맞다면 자신은 아마도.






재갈과 수갑을 찬 로키가 토르와 함께 테서렉트가 담긴 통을 들었다. 아무 말도, 아무 저항도 없이 순순히 따르는 로키를 보며 되려 그들이 불쾌한 얼굴을 했다. 로키는 눈 앞의 토르를 바라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로키를 꾸짖는다. 똑같군. 그렇다는 건 역시. 로키는 눈을 감았다. 토르와 동시에 손잡이를 돌렸다. 힘의 파동이 느껴지며, 그들의 모습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흐려지던 눈 앞이 선명해졌다. 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손에 쥐어진 물건에서 스산한 느낌이 밀려온다. 바닥을 딛고 있는 발, 한 쪽만 닿은 무릎, 감긴 두 눈 너머의 인기척.


'Sir. 무기를 내려놓게'


로키는 조용히 눈을 떴다. 녹색 눈이 차갑게 얼었다.



이번에 로키는 시작부터 박사를 뺀 모두를 죽였다. 지나가면서 닉 퓨리의 손을 짓밟았다. 어벤져스가 모였다. 사흘 째 되는 날, 토르가 나타났다. 포탈이 열리기 전까지 로키는 박사와 함께 잠적했다. 포탈을 열자 그들이 자신을 막아섰다. 동료의 죽음이 각성제였는지 눈에 분노와 독기가 가득했다. 블랙 위도우가 로키의 어깨를 노리고 총을 쏘았다. 치타우리가 무자비하게 인간을 학살했다. 토르가 그를 붙잡고 이러지 말라며 소리쳤다. 하루가 넘는 긴 싸움 끝에 인간 측이 승리했다. 토르가 그에게 재갈과 수갑을 채웠다. 테서렉트를 돌렸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로키는 '다시' 눈을 떴다.




'Sir. 무기를 내려놓게'




이것은 저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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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가 제일 재밌지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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