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소설은 픽션입니다.

* 초고완성 :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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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저는 지금 문형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마루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어? 정말? 어쩐지 교복이 낯이 익더라니. 나도 거기 나왔어! 문형고. 중학교도 같은 문형중. 우와 그럼 내 후배네? 인연도 이런 인연이 다 있네. 알게 모르게 나하고 뭔가 통하는 게 있었나? 아닌가? 하하하. 그런데 정말 신기하네. 마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야.”

내 들뜬 목소리에 마루도 기쁜 듯이 웃어 보였다. 내 연기가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근데,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여기서는 꽤 멀잖아? 혹시 집이 내가 다니는 학교 근처야?”

마루는 다시 우물쭈물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스르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를 보며 이번에는 스스럼없이 살짝 넘겨주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편해졌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마루는 내 손길에 마루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내 손이 지나간 머리를 매만지면 말했다.

“음. 제 친구가 이 근처에 살아서.”

“아, 그래?”

약간은 무심하게 대답해 버렸다. 내 반응에 마루는 눈치를 보다 예의 그 해사한 미소를 보이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저. 저, 그럼 선배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 말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이런 귀여운 후배라면 언제라도 환영이라는 뜻이다.

“물론. ‘님’ 자는 빼. 선배라고 불러. 너같이 귀여운 후배라면 형도 괜찮겠지만.”

은근슬쩍 앞서가는 말을 하자 마루는 기분 좋으면서도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요. 아직은. 그냥 선배가 좋아요. 아, 음- 예, 그냥- 선배…. 가. 좋아요.”

“그래? 그렇게 부르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 난 상관없으니까”

우연한 인연으로 귀여운 후배가 생겼다. 아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우울한 기분이 사라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 전 학교는 나름대로 애정이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더욱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저 그리고 혹시, 학교 다니실 때, 그러니까 그 전 학교에서는 무슨 동아리 하셨어요?”

“동아리라면 무척 괴상한 걸 하나 하고 있었지.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나름 친해져서. 전학 가면서 좀 아쉽긴 해. ‘백귀야행’ 이라고 원래 목적은 전 세계 요괴나 귀신에 대해 연구해보자 였지만 모여서는 서로 겪은 이상한 체험이나 어디서 보고 들은 괴담을 얘기하다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 뭐 아직 연락을 계속하고 있긴 하지만 학교가 다르니 만나기도 힘들고, 이제 고3이니까.”

“아, 다행이다. 사실 저 그 동아리 회원이에요! 선배들이 없애기 아쉽다며 계속 회원들을 모았거든요.”

마루는 뜻밖의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건 정말 몰랐다. 나는 이 기막힌 인연에 다시 한번 놀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정말? 와, 그랬구나! 회원을 모집했단 말이지! 어차피 놀고먹는 동아리였는데. 그것들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해주고. 내가 전학 간 뒤에 했나 보지? 연락 정도는 해줄 것이지. 애들은? 많이 왔었니? 신입회원은 몇 명이나 돼?”

문형학원의 동아리 활동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적인 그룹 활동과 더불어 외부활동으로 학생들의 자신감과 사회성을 길러준다는 거창한 목적을 내세웠지만, 결국엔 마음 맞는 친구들이 모여 스트레스를 날려보자 정도로 하향 평준화되었지만, 간혹 발명이나 예술 창작 활동으로 SNS에서 유명해지는 일도 있긴 했다. 교내나 전국 대회에서 상을 타는 일도 있었고. 그리고 중학생들도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업과 성취를 위해 적극 참여를 유도했다.

나는 연락을 안 해준 친구들이 못내 아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추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어 주어서.

“저까지 해서 세 명이요. 중3은 저랑 제 친구. 다른 한 분은 고1 선배예요. 고3 선배들은 아무래도 입시 때문에 바쁘셔서 잘 못 보지만. 하지만 동아리 시간 때는 꼭 오셔서 얘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래요. 선배 말처럼 그런 괴담들도 여전하고요.”

마루 역시 즐거워하며 이야기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라면 무슨 짓을 해도 즐겁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 너랑 나랑 우연히……. 만났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깊게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신기해. 그렇지? 여유가 생기면 녀석들한테 연락 좀 해봐야겠네.”

내 웃는 얼굴에 마루도 웃어 보였다. 말랑말랑해진 얼굴이 어느덧 어두워진 그림자에 드리워져 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루의 눈만이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네가 찾는 거, 꼭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후배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마루의 얼굴에 다시 알 수 없는 따스함과 설렘, 그리고 묘한 긴장감이 묻어져 나왔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절대 싫지 않은, 오히려 가슴속에 끌어 앉아 놓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네. 선배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지하철 안의 조명도 환하게 켜졌다. 지하철은 다시 캄캄한 터널로 내려가고 있었다. 덜컹거림도 조금 멈춰졌고, 속도도 빨라졌다.

[ 이번 역은 해류. 해류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늘어진 안내 방송이 나오자 곧바로 알아들을 수 없게 웅얼거리는 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입니다. 내리실 때는 빠진 물건 없이-]

마이크를 입과 너무 가까이 갖다 대는 것일까, 아니면 발음이 안 좋은 것일까. 안내 방송은 알아듣는 데 별 무리가 없지만 직접 사람이 말하는 소리는 소리가 울려서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충 본인의 물건을 챙기라는 말이겠지만.

“또박또박하고 성우들 목소리 듣다가 갑자기 웅얼거리는 역무원 아저씨의 웅웅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정말 뭐라고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다니까요.”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한껏 소리를 낮춰 말하며 웃는다. 나는 오히려 마루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어서 따라 웃고 말았다.

 

***

 

아마 이 종착역에서 마루가 찾고자 하는 것을 얻고 나면 헤어지겠지?

말처럼 행동을 쉽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도 이미 수많은 불안감을 뒤로 한 채 현실 도피하지 않았는가. 벌써 아쉬움이 물밀 듯이 밀려 왔다.

종착역이 되자 내리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나와 마루를 포함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끝내 노을도 사라지고 시린 푸름을 내보내는 하늘 너머로 바다 냄새가 흘러 왔다.

비상구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어디로 가면 마루가 찾는 것이 있는 걸까.

“네가 찾는 거. 오래 걸리니?”

마루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쉽게 찾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마루에게는 오히려 반대로 들렸나 보다.

“아, 죄송해요. 아니요. 금방.”

그러면서 미안해하는 모습에 내가 더 미안해져서 괜히 물어봤다고 후회했다.

핸드폰 번호를 물어볼까? 하지만 내가 바빠서 아마 잘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 쪽을 생각해서 마루가 그 먼 곳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보다 그 정도로 친해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이제는 1m 정도 앞서 걸어가는 마루의 뒷모습을 보며 지하철을 타며 느꼈던 편안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초조함이 밀려 왔다.

“바다로 나가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조용하게 침잠해진 내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 온다. 괜히 혼자서 초조해하고 있다 막상 중요한 문제를 풀기 위한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며 마루에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꾸며댔다.

“괜찮아! 여기까지 왔는데 바다를 지나친다는 게 더 이상하지. 네가 찾는 건 거기에 있나 보지? 어서 가자! 빨리 찾아야지. 나도 점점 궁금하고.”

그건 사실이었다.

나 자신과 상대방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앞장서서 바다로 향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바다의 모습은 처음이다. 평일이라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아서 파도 소리만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푸른 바닷물은 검게 빛나고 파도는 그에 어울리듯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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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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