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대는 비에 세성 길드 건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바짓단은 하나같이 젖어 있었다. 올해 들어 가장 긴 장마가 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이번에도 엇나갈 것이라 수군댔지만, 기상청도 이번만큼은 진실만을 공표한 듯했다. 날씨와 관련된 각성자 하나가 능력을 쓴다면 쉽사리 바뀔 날씨일 텐데. 억지로 기상을 바꿔봐야 좋을 것이 없다며 장마는 나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이어 터지는 던전 덕분에 세성도 기존 던전 관리와 신규 던전 관리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시기였다.

대형 길드가 그 정도였으니 헌터 협회의 업무 강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연이은 철야에 회의실에서 눈을 붙이는 것도 채 세 시간을 못 넘겼다. 각성자가 생기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폭우로 인해 발생하는 인명사고는 물론이고 힘없는 인간들은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하나뿐인 S급 공무원으로서 송태원은 오늘도 어깨에 가득한 짐을 진 채였다. 한층 더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그는 세성 길드 앞에 서 있었다. 건물에 들어가려는 방문객을 막지 않도록 출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남자는 구두와 바지가 전부 젖도록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쏟아지는 빗물은 검은 우산을 수도 없이 때렸지만 검은 인영은 미동조차 없었다. 

비 냄새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축축해진 옷에 걸음은 무거워졌다. 시간이 지나며 차갑게 식은 몸이 느껴졌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성 길드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송태원의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알 수 없고 이상한 감정투성이라 갈피를 잡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연락한다면 성현제가 곧바로 저를 맞이하러 오리라는 걸 송태원은 알고 있었다. 던전 공략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 집이나 회의실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쏟아지는 비를 보며 쉬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10분, 20분이 지나도 꼼짝하지 않는 낯선 사람을 처음 발견한 건 세성 길드 로비에 있는 경비원이었다. 길드 건물 앞에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제보와 함께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 바깥에 나간 경비원은 익히 봐왔던 검은 정장 차림의 키 큰 남자를 봤다. 우산에 가려진 그 얼굴을 보고 경비원은 짐짓 모른 척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나라를 위해 애쓰시는 분인데 별일이야 없겠지. 하지만 세성에는 무슨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사람이라 경비원은 조용히 무전을 들었다. 로비에 위치한 카페에서도 밖에 '저 사람 송태원 아니야'란 수군거림이 돌기 시작할 무렵에는 남자가 빗속에서 40분을 넘겼을 때였다.

그래도 메시지를 보내거나 통화 버튼을 누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를 불러서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바쁘다며 거절한다면 그냥 돌아가면 된다. 그 정도로 끝날 무언가였다면 이렇게 찝찝하게 마음에 남아있지도 않았겠지. 문득 성현제가 보고 싶단 생각에 오랜만에 하는 퇴근에도 방향을 돌려 현충원까지 왔다. 몸은 멋대로 움직였고 세성 길드 건물을 코앞에 마주한 후에야 송태원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대중교통으로 집에 돌아가려면 적어도 1시간이 걸릴 터였다.

세성까지 온다고 해도 직접 부르지 않는 이상 우연히라도 얼굴을 마주치기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송태원은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다며 마른세수를 했지만, 이미 온 이상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뭐라고 하지? 보고 싶어서 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보란 듯이 기뻐할 얼굴이 눈에 선했다. 거짓말 하는 건 아니냐며 되려 시험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사실이었다. 보고 싶다는 생각 전에 어떤 마음과 기분이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후.... 하얗게 새어나간 입김이 빗속으로 사라졌다. 밤 9시를 넘긴 시간에도 세성 로비는 밝기만 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송태원은 눈의 초점이 나간 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가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송태원은 그렇게 믿었다. 각관실은 일주일 넘는 철야에 시달렸고 이제야 마무리된 프로젝트로 직원들은 드디어 두 발 뻗고 잘 수 있다며 집에 돌아갔다. 일은 힘들었고 제아무리 S급인 송태원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성현제가 보고 싶어졌다. 기대고 싶었나...? 그 사람에게? 송태원은 비어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우두둑 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



"...보고 싶으면 말을 하지, 송 실장."

멍하니 서 있던 송태원 앞에 성현제는 텔레포트라도 한 듯 갑자기 나타났다. 생각에 잠겨 오는 것조차 모르고 서 있었다. 우산을 든 채 옆에 와 있는 성현제의 바짓단도 빗물로 젖어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송태원은 휴대폰을 찾아 주머니에 손을 넣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침묵 속에 잠겨 있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송태원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쁘시지 않습니까."

곧 죽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할 것 같지 않은 남자를 성현제는 웃으며 바라봤다. 하루종일 길드 안에 있었건만 반가운 손님이 왔단 사실을 이제야 알려주다니.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었지만 성현제는 반가움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바쁜 듯해 부러 연락을 끊었더니 제 발로 찾아와주고 제법이잖나, 송 실장. 희미하게 스미는 성현제의 미소에 송태원은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세성 길드장은 비에 젖은 강아지를 바라보듯 송태원에게 손을 뻗었다. 빗속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서 있던 송태원의 볼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와닿은 손의 온기에 송태원은 제 몸이 얼마나 차가운지 깨달았다. 어루만지는 따듯한 손에 슬며시 고개를 기댔다. 그순간 성현제는 들고 있던 우산을 내던지고 송태원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송태원은 잠시 놀랐지만, 자연스레 끌어안는 성현제의 팔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성현제 씨."

"몸이 차네, 송 실장."

이리 귀엽게 굴면 어떡하나. 송태원을 끌어안은 채 밀착한 성현제는 송태원의 너른 등을 쓸어내렸다. 무의식중에 온기가 좋아한 행동일 테지. 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리 기대준다면 얼마든지 내 가슴이고 어깨고 전부 내어줄 수 있는데. 맞닿은 가슴을 통해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질까 성현제는 잠시 숨을 멈췄다. 들이마쉬고 내쉴 때마다 전해지는 고동에 안은 팔에 힘을 줄 때였다.

"...보고 싶단 말만으로는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해 고민 중이었습니다."

천천히 몸을 떼고 성현제는 송태원을 바라봤다. 듬직한 송태원의 어깨를 손으로 붙잡은 채였다. 곧은 눈동자가 그를 봤다.

"그 말은 내가 좋다는...."

"단순히 좋다는 말로도 안 됩니다."

단호한 말에 성현제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송태원은 나름대로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왔다. 모두가 집에 돌아가고 없는 이 시간에 세성 앞까지 와 한참이나 서성일 정도로. 

"저는 성현제 씨의 위치를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것도 다 상관없을 만큼 당신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건 좋다는 말만으로도 안 되고 또 싫다는 말로도 다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입니다만. 그와는 별개로 성현제 씨가 보고 싶고 또 기대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속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병에 걸린 것처럼 하루 종일, 성현제씨 생각만 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듯 말하는 모습에 성현제는 조용히 기다렸다. 이 말 끝에 붙을 한마디가 무슨 말일지. 송태원이 고뇌 끝에 찾아낸 대답이 무엇일지 궁금해 입을 열지 않았다. 성현제는 손끝을 매만졌다. 손끝에는 차가운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 아십니까?"

보통 온종일 누군가가 생각난다면 그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답은 한 가지뿐일 텐데. 정작 중요한 마지막을 제게 넘긴 송태원을 봤다. 송 실장이 장난을 칠 리 없지. 아직도 망설이고 있는 거라면 길 잃은 어린 양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밖에. 붙잡은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성현제가 답했다.

"사랑이네만."

"...사랑이군요."

잠시나마 물결이 일던 눈동자는 금세 올곧은 눈으로 돌아왔다. 답을 찾은 송태원은 그제야 밀려드는 한기를 느꼈다. 유하게 미소짓는 상대를 보며 송태원은 우산 손잡이를 꼭 쥐었다. 성현제의 손이 닿은 어깨가 따듯했다.


글 쓰는 사람 Free! 소스마코 / 내스급 현제태원 / 베스타 규혁도윤 E-mail: sleep_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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