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상품의 가장 열렬한 소비자. 미디어가 유통하는 사랑의 형태에만 심취해 있다는 비난에 정통으로 마음이 찔리는 유치한 족속. 나는 나의 그런 얄팍한 면모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 철이 덜 들었다는 핑계로 여태껏 사랑을 주창해온 바 있다.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해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가끔 내가 해서를 두고서 잠깐씩 어딘가를 다녀오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주말에 부산 다녀오려고.”


토요일에 출발해. 2박 3일 여행⋯. 손끝에 걸리는 머리칼을 살살 만지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더니 해서의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친구들이랑요?’ 한다. 웃으며 귓불을 가볍게 꼬집었다. ‘혼자서 갈 거야⋯.’ 그러자 해서가 꿍얼거리며 품으로 고개를 묻어 온다.


“왜 혼자 가⋯ 나도 데려가야지⋯.”


분리불안 남자친구를 왜 자꾸 떼놓고 다니느냐며 볼멘 소릴 한다. 자연스레 머리를 감싸 쓸어내리면서도 뭐라 특별히 대꾸하진 않았다. 딱히 진지하게 한 소린 아니겠지만 투정부리는 말투가 귀엽긴 했다. 학기중에 뭘 부산까지 가겠다고. 시험기간이면서. 졸업했답시고 벌써 학사일정 같은 건 전부 잊어버렸지만 해서가 요새 알바며 시험공부를 병행하려 잠을 줄인 건 나도 알았다. 며칠간 늦게까지도 연락에 답이 드문드문 왔으니까. 봐, 지금도 눈이 막 감기는데. 정해서의 귓가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다가 조금 몸을 뒤척여 좀 더 편하게 뉘였다.


“이제 자, 오늘 나 보느라 고생했는데.”

“뭔 말을 그렇게 해⋯ 형 좋아서 보는 거지.”

“알았어, 자.”


안겨 있는 어깨를 규칙적으로 토닥이자 얼마 안 가 금새 숨소리가 새근거린다. 소리 죽여 웃음소릴 흘렸다. 하하, 애기 같애⋯.







Love for Sale

정해서 여영교







최지안과 황세빈은 소위 미친 겟잇뷰티 끼순이 클럽이라 통칭하는 게이 모임으로 정해서와 만나게 된 직후 한 번 봤던 이래 꽤 오랫동안 보지 않았다. 오랜만에 봐도 당연히 여전했다. 예나 지금이나 만날 때마다 전 남친 현 남친 미래 남친 얘기를 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현남친 담당이고. 이전에 만났을 때엔 지안의 러브프라블럼이 한창 구차했던 타이밍이라 내 연애가 구설에 오를 일이 없었다. 그 때 밀린 화제를 이제 와 갚겠다는 듯 지안과 세빈은 오늘 아주 날을 잡은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부산에 간다고 청승을 떨었어?”

"도대체 니 남친은 널 뭘 보고 만나는 거냐? 나 같으면 처 답답해서 못 만난다⋯."

"몸이 외로운갑지⋯."

“여영교가 그런 쪽으로 별볼 일이 있어?” 

"뒤진다~”

“걔도 원래 여자 좋아했대매. 여영교가 헤테로한테 먹히나?”


지안은 영교의 턱을 잡아 이리저리 돌렸다.


“우리 영교 봐줄 데가 대체 어디 있을까...”

“돈 잘 쓰잖아.”

“아, 맞네.”

“다 집에 가~ 짜증나~”

“넌 김위랑 그렇게 지지고 볶고 했으면서 또 바로 남자가 만나지냐?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게 돼?”

“자기는.”


너도 할 말 없다고 지적하자 세빈이 모른 척 위스키 글라스를 들여다보는 시늉을 했다. 하여간 이렇게 셋이 모이면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남자 얘기밖에 없다. 유일하다시피 한 공통 분모가 성적 지향이니 당연했다. 다른 주제를 꺼내기에는 각자 관심 분야도 생활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이렇게 남자만 끼운 대화는 금방 저속해지기 마련이다.


“솔직히 김위랑 헤어지기 전에 걔랑 했지?”

“아하하하⋯.” 

“했네, 했어. 좋디?”

“안 했어.”

“지랄⋯ 우리가 니를 몰라?”


진짜 안 했는데. 황당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자 세빈이 눈을 가늘게 떠 보인다. ‘우리 세빈이 대가리 건전해지게 해주세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시늉을 하자 세빈은 다시 한 번 지랄이라며 코웃음을 쳤다. ‘너 김위 만날 때 원나잇⋯.’ 세빈이 뭐라 말을 이으려 하길래 닥치라며 위스키 잔을 들어 억지 건배를 시켰다. 


“근데⋯ 걘 너 남친 있는 거 몰랐어?”

“몰랐겠지⋯.”

“왜? 알았는데?”

“알았는데? 근데 상관 없대?”


눈을 한 번 굴리며 ‘해서는 별로 그런 거 신경 안 쓸 걸⋯.’ 하고 대답하는데 뭔가 기시감이 든다. 언젠가, 사귀게 될 줄도 몰랐을 시점에 해서와 했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남자앨 데려가서 술을 사 줘도 남자친구가 신경 쓰지 않냐던. 그 때에도 ‘걔는 그런 거 별로⋯’ 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야⋯ 아무튼 니가 좋긴 하대?”

“좋으니까 만나고 있겠지~”


이 말조차 익숙하다. ‘아무튼 니가 좋긴 하대?’ 위를 만날 때 익히 듣던 이야기. 치즈 플레이트를 포크로 헤집으며 간단하게 대꾸하자 지안이 웬일이냐는 듯이 옆구리를 한 번 툭 친다. 


“김위 만날 땐 진짜 좋아하는지 어떤 건지 모르겠다고 맨날 징징징 처우는 소리 하더니⋯ 많이 컸다?”


많이 컸다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입에다 과일치즈 조각을 밀어넣었다. 다시 한 번 술을 몇 모금 곁들이면서. 그런가, 많이 큰 건가. 그러고 보면 위와 해서는 생김새며 성격이며 정말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사랑 하나만큼은 닮았다. 굳이 사랑이나 사람 없이도 잘만 살 수 있다는 점이. 그래도 이제 더는 울고불고하진 않는다. 정말로 조금은 큰 걸까⋯. 별로 석연치는 않다.



***



숙소에 짐을 내리고 택시를 불렀다. 뭐가 꼬였는지 어플 상에서 택시가 잡히는 데만도 한참이 걸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가져올 걸 그랬다. 술도 마실 생각이라 운전이며 주차에 스트레스 받기 싫답시고 KTX를 타고 왔더니 택시비까지 돈이 이중 삼중으로 나갔다. 게다가⋯ 아직까진 꽤 밤공기가 쌀쌀한 탓에 택시를 기다리느라 밖에서 담배 몇 대 피우며 버티려니 좀 춥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이 뜰 때엔 지나간 대화가 자꾸 맴도는 법이다.


‘아무튼 니가 좋긴 하대?’


그건⋯ 나도 자주 생각해보는 주제였다. 

정해서는 내가 좋긴 좋은지.


해서는 꼬시면 꼬시는 대로 순순히 넘어와 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정이었으면서 착실하게 세우고 섹스에 열중하기도 한다. 착하면 이런 것도 되는 건가? 착한 성격이 발기도 도와주는 것일까? 평생 여자를 좋아했으면서 이게 된다니. 종종 욕실에서 안으로 받은 걸 흘려보내면서도 늘 어느 정도는 얼떨떨했다. 어지간한 여자친구를 만났더라면 1박 2일 여행엘 따라가서도 봄잠바나 얻어입고 왔을 애지만⋯. 또 한편으론 그간 누군가 정해서를 자빠뜨려 감아버릴 작정을 하고 적극적으로 작업을 쳤다면 지금쯤 애가 두셋은 있었을 지도 몰랐다. 남잘 안 좋아하던 앤데도⋯ 되는데.


해서는 마음이 있으니까 되는 거라는 식으로 얘기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미심쩍다. 그냥 25년 정도 쌓이면 누구와도 되는 게 아닐까. 딱히 호감 같은 것으로 극복한 게 아니라.


스스로 이런 의혹이 있단들 정해서 같은 애한테 예전 같은 방식을 써먹기는 싫다. 뭐가 문제인지를 말하는 대신 씹이나 뜨는 거. 그러고 나면 그냥 이거면 됐다면서 혼자 대충 넘겨 버리는 방식 말이다. 이제는 가끔 우울할 때면 예전처럼 침잠하는 대신 그냥 우울한 마음을 걷어올려 대강 치운 후 술이나 마셔 버렸다. 지안이 날더러 많이 컸다는 건 이런 걸지도 몰랐다. 예전엔 제정신 아닌 채로 분풀이를 하려고 마셨는데 지금 와선 우울을 살해하려고 마셨다. 조금 더 의지적이고 그나마 생산성 있는 방향이다. 정해서와 처음 잔 날 이래 소주도 다시 어느 정도는 마실 수 있게 됐다. 온더락 글라스에 소주를 찰랑찰랑 붓고서 연거푸 몇 잔 마시고 나면 위스키보다 빨리 취했다. 정말 사람마다 받고 안 받고 하는 주종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소주만 마시면 뒈지게 빨리도 갔다. 다음 날이면 마음이 한결 깔끔해진다. 그러고 나면 해서도 내가 나름 좋은 점이 있으니 만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강 생각을 봉합해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런 생각들을 몰아넣어 가둬 두었다가 한 번씩 이렇게 혼자 여행이라도 와서 꺼내 보는 거다.


전에 한 번 차승조가 대뜸 물었던 적이 있다. ‘잘해 줘?’ 하고. 해서가 잘해주느냐고. 그 말에 어쩐지 대답이 선뜻 안 나왔다. 질문이 어딘지 떨떠름했다. 


걔가 나한테 왜 잘해 줘? 잘 하는 건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딱히 그렇게까지 정해서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손해 보게 하기가 싫다. 내 생각에, 정해서는 애가 좀 누군가 꼬드기는 데 약하고 제법 순했다. 나랑 만나게 된 것도 좀 그런 맥락인 면이 없지가 않다. 가뜩이나 나한테 휩쓸려서 이렇게 된 애한테 뭐라도 잃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나를 만나면 시간은 좀 뺏기겠지만⋯ 그러니까 정작 제대로 된 애인을 찾을 시간 같은 거 말이다. 아무튼 손해라 치면 그게 다였으면 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정해서가 취향 하나는 어차피 별로였다는 점이다. 애를 두고 가버리는 사람들만 골라 좋아했으니까.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만. 그러니까 정해서가 고른다 한들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짝이겠는가. 차라리 나 같은 남자앨 만나다가도 눈이 번쩍 뜨여 제정신을 차릴 만큼 운명 같은 상대를 찾게 되는 편이 낫지⋯.


만약 정해서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이해하고 놓아줄 생각이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내게 똑같이 마음으로 보답하라는 식의 강매는 결코 원치 않는다. 김위 때와는 다르게 굴겠다고 이미 생각했다. 김위를 만날 때 나는⋯ 다 끝난 문제들을 지지부진 붙들고 혼자서 매달리고 있었다. 다른 애들과 있을 때에만 김위와 하고 있는 게 연애 같았다. 다른 애들에게 이 연애가 현재진행형인 양 떠들고 있을 때에만. 그 애들은 증인이었다. 김위와 한 일들을 보고 전해들은 목격자. 이별은 다른 사람과 잤을 때부터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었다. 최지안이나 황세빈은 나를 오해하는 감이 있는데, 내가 무슨 배덕감 따윌 즐기는 파렴치한 걸레 새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뻔히 보이는 실연을 외면하고 있었고⋯ 그냥⋯ 슬펐다. 


해서와는 슬플 일이 있다면 외면하진 않아야지.

물론 애 손해 안 보게 해서 슬플 일을 되도록 안 만드는 게 일차적인 목표고. 



***



주류가 괜찮았던 기억을 더듬어 찾아 들어간 바의 바텐더는 초면이나 다름없는데도 말을 잘 붙였다. 겨우 두 번째의 방문에도 단골을 대하듯 시그니처 칵테일에 들어가는 재료와 술의 풍미를 설명하며 급기야는 묻지도 않은 안주까지 페어링해 추천을 해 댔다. 나야 워낙 바텐더와는 금방 친해지는 편이라 금세 말문이 트였지만 정해서를 데려왔다면⋯ 옆에 구겨져서 불편하게 물이나 홀짝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술이 좀 들어가자 상대가 연애 상담에 통달한 듯한 전형적인 바텐더 포지션에 너무 충실한 바람에 좀 웃길 지경이었다. 더구나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내 얘길 더 편하게 한다. 바텐더의 살가운 스몰토크에 한동안 잦아들었던 병이 또 도졌다. 묻는답시고 커밍아웃까지 불사하며 구구절절 연애사를 얘기해 대는⋯. 혼자서 오직 술을 마시려고 나온 건 오랜만이라 조금 과하게 마신 탓도 있고. 다행히 바텐더는 ‘편견 없음’ 태도를 고수했다. 편견이 있대도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취기 어린 웃음을 섞으면서 위며 해서에 대해 띄엄띄엄 늘어놓자 바텐더는 지안이나 세빈이와는 사뭇 다른 걸 물었다.


그럼 지금 남자친구를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


나는 그 말에 꽤나 한참 전으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 얘길 하려는데 어째 위를 사귀고 있을 때까지로 차근차근 기억이 타고 간다.





⋯ 위는 단 한 번을 조르는 법이 없는 애였다. 위가 질투 비슷한 걸 보였을 땐 딱 한번 뿐이다. 전에 잠깐 만나던 남자앨 좋아하는 애라고 불렀을 때. 예전 짝사랑 얘기를 하다가 할 건 다 했어도 사귀지는 않았다고 했더니 위가 물었다.


‘안 사귀었던 거면. 파트넌가.’

‘그냥, 좋아하는 애.’


그 말에 위는 나를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나는?’

‘뭐가? 넌 남자친구지⋯.’


그랬더니 마음에 채 다 안 차는 표정을 했다. 웃으며 왜, 했더니 나도 아까처럼 불러 보라고 그랬다. 검지로 위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좋아하는 애.’ 하자 그제서야 흡족해하는 기색이었다.


‘뭐야? 좋아하는 애라고 부르는 게 좋게 들렸어? 좋아하는 애면서, 당연히⋯.’


그 때는 그렇게 위를 끌어안고 품에다 얼굴을 묻은 채로 웃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위에게 듣기 좋았던 이유는 어쩌면 그 편이 사실에 더 가까워서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남자친구보다는 좋아하는 애. 누굴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고서 나 혼자서도 되니까. 아무튼 위 말로는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귀여웠다고 했다. 좋아하는 애, 라고 할 때 정말로 걜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그 이후로 여영교는 밖에서도 김위를 말할 때 그 애는, 그 애가, 하고 자주 말하고는 했다.


나는 무심코 김위 앞에서 정해서를 그 애라고 하면서 그걸 깨달았다.


‘그 애 다음에도 술 사주기로 했어. 귀여워.’


그 애. 해서는 그 애구나.

좋아하는 애.


그래서 나는 내가 해서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김위를 앞에 두고서. 

그 때부터였다. 위와 만나고 있을 때부터. 





당시에 해서를 좋아하게 된 건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다. 차승조나 민소린에겐 물론이고 심지어는 스스로도 꺼내놓지 않았다. 위에게 죄책감이 들어서는 아니다. 위는⋯ 어차피 모를 텐데. 이제 헤어진 마당에. 내가 몇 번이고 딴 사람과 자고 와도 당최 모르는 애다. 헤어지기 전에 애먼 곳에 마음이 기울었다고 해서 그걸 알겠는가. 게다가 헤어져도 마음 아픈 건 나 혼자일 걸 알고 있어서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위가 씨발놈이어서가 아니라⋯ 김위는 그냥 그렇게 타고 태어났다. 


마음을 꺼내두지 못했던 건 해서와 제법 친해졌기 때문이다.

친하다고 생각하는 애 뒤통수라도 치는 것 같아서⋯.


사실 해서가 친한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놔두고 싶었다. 어차피 해서 말마따나 반 년 잘해주다 졸업하면 끝인데. 일 년쯤 지나면 정해서가 여영교를 기억이나 하겠느냐고. 전여친들 이름도 가물거린다는 애다. 잠깐 친했던 형 정도야 뭐⋯. 해서로 환승할 작정을 하고 위와 헤어진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솔직히 연애는 지긋지긋한 취미다. 누굴 좋아하는 것도. 환승이고 뭐고 하기 싫었다. 근데 또 금세 정해서를 좋아하고 있는 거다. 


제 버릇 개 못 주고서⋯ 그 수많은 기도와 다짐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해서를 좋아하는 건⋯ 연애에 질려있지 않았대도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다. 어떻게 될지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자친구만 만나 오던 애. 딱히 남자와의 관계에 호기심이 있지도 않고. 어느 모로 봐도 그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 나는 이런 일방의 감정에는 이름조차 붙이지 않는다. 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수신자가 없는데 메세지가 어떻게 가겠는가. 그러니 진작에 정해서가 좋아졌어도 나는 그걸 없는 셈 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듯이 굴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나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렇게 염치나마 챙기고 싶었는데. 기껏 이렇게 생각해 놓고는 조금 틈이 생기니, 형이 편하니까 자기 머릴 쓸어 재워 달라는 애를 기어코 꼬여내서 나는⋯.


한 번만 자고⋯ 한 번만 자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자고 나서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된다고. 그러면 해서도 곧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만약 그 한 번으로 정이 붙는다 해도 네가 없으면 안 된다거나⋯ 해서는 아마 그렇게까지 날 좋아하진 않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나저나 우리 해서는 아다를 남자로 떼서 어쩐다, 이런 거나 걱정했다.


결국 이렇게 만들 거면서 꽤나 자기합리화가 심했지.

해서의 자취방에 처음으로 발 딛기 직전까지도 해서와 만나게 될 줄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더했다. 설마 해서가 나한테 연애하자고 비집을 만한 기회를 줄 거라고는 생각 않고 있었으니까.


“⋯저 잠깐 담배 좀.”


얘기가 점점 구질구질해지는 걸 자각하고는 잠시 술을 깨겠다고 나가서 담배를 물었다. 인기척에 돌아보자 바텐더가 따라 나오고 있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뭐냐는 듯이 올려다보자 바텐더는 자기가 몇 잔씩 먹여 놓고 입 싹 씻을 수는 없다는 둥, 나가서 손님이 토하면 등이라도 두드려줘야지 않겠냐는 둥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토해요? 자기도 한 대 피우려고 온 거면서.’ 어이없어서 웃자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들켰다며 태연하게 전자담배를 꺼내 보인다. 


“아⋯⋯. 취하니까 남자친구 보고 싶다⋯.”

“와. 연애 안 하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요.”

“그쪽도 하시던가요⋯. 응?”


술기운에 제법 친해졌다고 그를 핀잔 주듯 대꾸하는데 때마침 전화가 걸려 온다. 해서다.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딱. 웃으며 액정에 뽀뽀하는 시늉을 하고서 전화를 받자 옆에서 바텐더가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 남자친구?’ 하고 묻는다.


“해서 왜애.”


전화 한 통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말꼬리가 저절로 늘어졌다. 취기 탓인지 기분이 쉽게 왔다갔다 했다. 전화기 너머 정해서는 조금 우물쭈물하는 듯 하다가 꿍얼거리는 투로 항의를 한다.


「부산까지 가 놓고 왜 연락이 느려요.」

“짐 풀고 이동하고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저녁 먹었어?”

「시간이 몇 신데, 먹었지 그럼⋯. 형은?」

“나도 먹었어. 맛있는 거.”

「치사하게 나 두고 맛있는 거 먹네.」

“하하⋯.”


정말 두고 와서 조금 삐쳤나? 내일 맛있는 거 시켜 줄까 물으니 됐으니까 빨리 오기나 하란다. 혼자 거하게 먹어봤자 무슨 맛이냐고. 떨어져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귀엽게 굴었다. 달래는 말을 몇 마디 하고 있는데 바텐더가 티나게 부스럭거리며 전자담배를 집어넣고는 ‘저 먼저 들어가요.’ 한다. 


다음 날 아침에 전날 통화기록을 확인해 보니 담배 피우러 잠깐 나와서 했다는 통화가 43분이나 찍혀 있다. 어쩐지 바텐더가 자리 잘 맡고 있었다면서 생색을 내더라니. 



***



좋아하는 것치고는 여행에 큰 즐거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머리 비우고 오는 거지⋯. 그저 일상에 할애되는 정신적 피로를 할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 때문에 이런 짧은 여행을 좋아했다. 이번에도 딱 그 정도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좋은 일은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부터였다. 


서울에 언제 도착하냐는 말에 답장한 이후 그에 대한 대답이 없길래 쪼끔 삐쳐있는 줄로만 알았던 해서가 역으로 마중을 나온 거다. 자기 지금 서울역 앞이라면서.


“여기까지 올 생각을 다 했어, 기특하게.”

“그냥 학교 끝나고⋯. 어차피 학교 때문에 나온 김에⋯.”

“삐친 줄 알았는데.”

“삐치긴⋯. 가요.”


눈에 띄게 좋아하자 정해서가 멋쩍어한다. 손을 뻗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바깥만 아니었다면 뽀뽀라도 했을 텐데. ‘뭐라도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팔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소근거리자 해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이고 호텔까지 온 김에 방에 들어왔다가 잠깐 잠든 모양이었다. 잠들기 전에도 해서에게 기대어 있었는데 깨어나서도 여전히 어깨에 기대어 있는 채였다. 그래봤자 한 십 분쯤 잔 줄 알았는데 시계를 확인하니 한 시간이 흘러 있다. 대충 옆의 베개에다 괴어 놓고 가면 될 걸 정해서는 한 시간이나 가만히 있었나 보다. 


“깨우지⋯ 한 시간이나 어깨 빌려주고 있고.”

“네? 아니⋯ 뭐⋯ 폰으로 캔디크러쉬사가 하느라 가만히 있었던 것도 있고⋯.”


감동적이라는 티를 내고 있으니 정해서가 약간 머쓱해하는 기색으로 그랬다. 안다. 뭐 엄청 위하고 절절매는 마음으로 그랬겠는가. 그냥 딴 거 하는 겸사겸사 이러고 있던 거지. 그래도 기특했다. 


“갸륵한데 뭘 해주지? 응? 봄잠바 사줘?”

“아, 무슨 봄잠바야.”


놀리는 말투에 해서가 조금 삐죽거린다. 양 손으로 뺨을 감싸 꾹 누르자 입술이 붕어처럼 밀려 나왔다. ‘확 찐하게 키스를 아주.’ 당장이라도 입맞출 것처럼 해 놓고 볼만 꼬집고 그냥 말았다. 만지작거리는 류의 스킨십은 습관처럼 했지만⋯ 그건 남의 살 만지는 게 버릇이라 그런 것뿐 키스 같은 건 자주는 않는 편이다. 그런 건 너무 애틋한 연인 사이에나 할 것 같은 일이니까⋯.


해서에겐 여지껏 어느 정도는 편한 형을 표방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룸서비스 시켜 줄까?”

“⋯ 뭐 있는데요?”


동아리에서 좀 친해진, 나한테 잘해주는, 밥도 잘 사주는 편한 형⋯. 처음 사귀게 됐을 때도 그게 섹스 한 번으로 달라질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냥 해서 맘이야 어쨌든 분위기 탄 김에 내 욕심으로 끌어들인 거다.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잘 만나고 있으니 좋기야 하겠지만 엄밀히 따지면⋯ 분위기에 휩쓸려서 착각하는 면이 있다고 여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착각은 감정의 탈을 쓰기 쉽다. 그러니 굳이 일깨워주지 않고 내버려둘 생각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 정해서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해도⋯. 확실히 같은 맘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뭐? 그건 늘 그랬다.


네가 날 좋아해 봤자 얼마나 좋아하겠어.

내 기준에 뭐가 차긴 하겠는가⋯ 상대가 나랑 완전히 똑같은 인간이 아니고서야.


역까지 데리러 오든, 어깰 빌려주며 한 시간을 버티든 해서의 마음을 온전히 믿질 않는 건 나 때문이다. 만족해본 적이 없는 것도 나 때문. 그러니까 더는 어디다 꺼내놓을 것도 없다. 해서에겐 더더욱. 틀어둔 영화를 성의 없게 보고 있는 반질반질한 볼을 한 번 쿡 찌르고서 조금 웃었다.


“안주류, 맥주랑 깔라마리도 있고⋯. 맞다, 여기 버거도 있다.”


옆에 기대어 객실에 비치된 작은 메뉴판을 보고 하나씩 읽어 주자 해서가 눈을 깜빡거린다. 바보. 코끝을 한번 콕 눌렀더니 건드려진 코를 만지작거리며 웅얼거린다.


“전에 여기 와봤어? 뭐가 맛있어요?”

“몰라, 룸서비스 안 시켜봐서.”

“⋯사실 아직 배불러서 안 먹어도 되는데, 그냥 궁금해서⋯.”


그런 얘기나 하고 있는데 몇 차례에 걸쳐 진동이 울린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잠금을 해제하자마자 알림 메세지가 뜬다. 인스타그램 디엠이었다.


“뭐가 이렇게 울려요?”

“나 부산 바에 라이터랑 담배 두고 왔대네. 라이터 어딜 갔나 했더니.”

“그런 걸로 연락을 해요?”

“술 마시고 조금 친해졌어.”

“누군데?”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

“그래서 두고 간 거 어쩌래요?”

“다음에 올 때까지 갖고 있겠대.”

“뭘 다음에 또 가⋯. 잘생겼어요?”


질투하나? 뜻밖의 타이밍에. 귀엽다는 얼굴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까 해서가 변명하듯 덧붙인다. 


“나, 나도 질투 많다니까.”


잠시 눈을 굴리다 해서 머릴 복슬복슬 쓸어 만졌다. ‘아니, 이런 걸로 나한테도 하는 게 신기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자꾸 만져대자 자기도 머리 끝을 잡아 살살 매만지며 혼잣말을 한다. ‘진짜 머리 한 번 자르고 와봐? 그⋯ 흠, 정대만?’ 


바보⋯. 이럴 때면 귀여워서 누가 누굴 좋아하고 말고는 그냥⋯ 다 됐단 생각만 든다. 


한참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정해서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오늘 형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그랬다. 꽤 비장한 게 어떤 변태 플레이도 감수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나 한 명 더 불러도 돼?”


정해서의 입이 벌어진다. 바보 같은 표정⋯.


“다 하라며⋯.”

“아니, 그⋯ 뭐⋯ 아 좀⋯ 그럼 두 명이 형한테⋯? 나한테는 아니겠지⋯?”

“하하하⋯ .”

“혹시 그 바텐더⋯?”


웃기고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쳐다보는데 쭈뼛거리다가 아무것도 아니랜다.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해서를 툭 건드렸다.


“됐으니까 뽀뽀 한 번 해. 지금 말고 나중에, 타이밍 좋게."

“뽀뽀로 돼?”

“나를 엄청 밝히는 줄 알아⋯.”

“아니야⋯?”


그렇게 얼떨떨하게 말할 것까지 있나. 좀 억울한데 해온 언행이 있다 보니 딱히 할 말은 없어서 그냥 말 돌릴 겸 딴 소리나 했다. 다소 느닷없이 여길 만한 질문을.


“⋯정해서 물건에 정 잘 붙이는 편이야?”

“글쎄? 정은 모르겠는데 한 번 사면 망가지기 전까진 계속 쓰긴 하지⋯ 아깝잖아요.”


맥락 없이 묻는데도 순순히 대답이 나온다. 음⋯ 무슨 끝내주는 서비스는 됐으니까 물건 아까워하듯 하던 연애도 아까워서 계속 두고 쓰기나 했으면 좋겠다. 해서를 꼭 끌어당겨 힘껏 껴안고서 이번에는 내가 해서의 품에다 얼굴을 묻었다. 정해서 가슴팍에 막혀 웃음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그래, 아끼고 살아.”


내 말에 해서가 실없다는 듯이 따라 웃는다. 내가 왜 웃는 줄도 모르면서.


얘를 데려다 놓고 룸서비스 시키듯 사랑을 간편히 사서 떠안길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사서 들려줄 수 있는 거라면 필요 없는 애한테도 산 값만큼은 값어치 매길 수 있는 게 될 테니까. 그러나 하필 사랑은 공짜여서 살 수도 없고 가치도 없다. 무작정 얹어 주면 짐만 된다. 


하지만 사지 않았으니 반품도 못 하는 게 아닌가.


얼굴을 묻은 채 조그맣게 하품을 하며 해서의 쇄골 언저리로 뺨을 비볐다. 다음엔 데려가야겠다. 부산이든, 어디든. 


“좀 더 잘래⋯. 옆에 있어.”

“응? 그냥 자요?”

“응⋯ 내일 부산 사진 보여줄게, 너도 자⋯.”

“어어, 응⋯⋯.”



발라당도 하고 납작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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