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방 안으로 쏟아지고,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돼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여주가 머리칼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흘깃 보고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한 손으로는 여주의 어깨를 감싸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티브이 볼륨을 서너 칸 낮췄다.

티브이에서는 작년에 열린 유도 국가 대표 선발전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꼭 쥐고 멈췄다 재생했다 반복하던 정국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시 맨 앞으로 돌려 분석했다. 여주는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정국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잘하네.”


정국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선수 생활 내내 자리를 위협할 만한 적수가 없던 여주와 달리 매번 라이벌과 치열한 다툼을 해 온 정국이었다. 보고 또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 선수의 경기에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정국보다 딱 두 살 많은 상대는 정국과 전적이 비슷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국이 성인 무대로 나오자마자 상대가 매번 발목을 잡았다. 지금은 선수촌에 가 있어 얼굴을 잘 볼 수 없지만 정국과 여주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몇십 번이나 영상을 돌려 보던 정국이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티브이를 껐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정적이 여주의 숨소리를 더 잘 들리게 했다. 정국은 순간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등으로 여주의 볼을 쓸었다. 정국이 여주의 귀를 아프지 않게 살살 깨물자, 여주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국의 허리를 껴안았다.


“일어나. 운동 가야 돼.”

“좀만. 졸려.”

“그래. 그럼 10분만.”


정국은 여주의 머리 위로 턱을 괴었다. 배를 살살 쓰다듬는 정국의 손길에도 여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앉은 자세로 어찌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순간 호기심이 생긴 정국이 여주의 몸 이곳저곳을 찌르고 쓰다듬고 주물러 봤지만, 여주는 새근새근 소리를 내며 잠에 취해 있을 뿐이었다.

잠시라도 편히 잘 수 있게 정국이 제 품으로 여주를 꽉 끌어안는 순간, 삑삑삑 도어 록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정국이 어찌할 새도 없이 벌컥 열린 문틈으로 일주일 새 살이 쪽 빠진 태형이 들어왔다.


“….”


태형은 신발장에 서서 여주와 정국을 번갈아 보았다. 태형의 등을 모두 덮고도 남는 큰 가방과 손에 든 운동화와 볼에 난 생채기가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탁 소리 나게 운동화를 바닥에 던진 태형이 곧장 신발을 벗고 두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한마디 말 없이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쓱쓱 소매를 걷었다. 태형은 정국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잠든 여주를 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와 함께 양손으로 정국의 멱살을 잡으려는 찰나, 여주가 귀신같은 타이밍에 스르르 눈 뜨며 태형을 올려다봤다.


“왔어?”

“….”

“정국아 가자. 운동 늦겠다.”


여주는 일주일 만에 만난 태형을 앞에 두고도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늘어지게 하품하고 정국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떨떨한 정국이 자기도 모르게 여주에게 끌려 일어나고 나서야 태형의 헛웃음이 터졌다. 여주는 태형을 한 번 꼭 안아 주고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이따 저녁 같이 먹자. 쉬고 있어.”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태형도 소파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발을 동동 구르며 짜증 내는 모습이 여주와 꼭 닮았다. 한참을 뚱한 표정으로 애꿎은 쿠션을 퍽퍽 때리던 태형은 리모컨을 들며 앉은 자세로 바꿨다. 전원 버튼을 꾹 눌러 티브이를 틀자마자 두 사람이 보던 경기 영상이 나왔다. 그제야 표정이 좀 풀리며 픽 웃음 지었다.


“그래. 너희가 해 봤자 뭘 하겠냐.”

“….”

“유도 영상이나 보겠지.”



점국이에게



“아, 싫어. 타타 밴드 뭔데?”

“얼굴 상처가 더 보기 싫어.”

“창피하다고!”

“이거 진짜 잘생긴 사람만 소화할 수 있는 거야.”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에 온 여주와 태형은 밴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신 티격태격했다. 태형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보다 못한 여주가 약국에 밴드를 사러 갔는데, 하필이면 좀 전에 누가 죄다 긁어 가서 캐릭터 밴드밖에 남지 않았다는 답이 들려왔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던 여주는 그나마 태형이 좋아하는 타타 밴드를 사 왔다.

태형은 다 큰 성인 얼굴에 타타가 웬 말이냐며 격렬히 저항했다. 여주는 온갖 달콤한 말로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 앞에 앉은 쌍둥이 형제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김태형 너, 상처 긁고 만지고 난리 치다가 또 흉터 생겨라?”

“안 만진다고.”

“너 목 봐 봐. 그것도 안 만진다고 했다가 흉 졌지. 오른 소매 걷어 봐. 그건 또 뭐고. 다리까지 봐야 돼? 그래야 말 들을래?”

“아니. 그때는,”

“또 고집부리다가 얼굴 흉 져서 찡찡대지 말고 그냥 붙여.”


여주는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태형의 양손을 다리 사이에 끼웠다. 다른 데도 아니고 얼굴이라서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태형이 잡힌 손을 빼기 위해 낑낑거리는 새, 여주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밴드를 뜯었다. 꽤 크게 이어진 상처 위에 타타 밴드를 붙이자마자 장르가 한순간에 누아르에서 깜찍 발랄로 바뀌었다.


“싫어. 싫다고 했잖아….”


태형은 울상 지으며 이러는 법이 어딨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바꿔 보여 준 여주가 태형의 어깨를 토닥이며 설득했다.


“봐 봐. 예쁜데? 네 얼굴 아니면 아무도 소화 못 한다니까.”

“….”

“너 무슨 굵직한 사연 있는 사람 같아. 하나도 안 유치해.”

“….”

“걸어 다니는 타타 입간판, 그런 거 아니야? 웬일이니.”


태형은 점점 저항이 약해지며 핸드폰 화면 속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각도까지 바꿔 가며 요리조리 꼼꼼히 보는 태형의 모습에, 여주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살짝 깨물고 손뼉을 쳤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기계처럼 손뼉만 치는 여주를 보며 점국이 티 나지 않게 고개 숙여 한 손으로만 얼굴을 감쌌다.


“완전히 인간 타타 김태형.”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내 말에 동의하는 쌍둥이는 박수를 주세요.”


여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쌍둥이 형제가 손뼉을 쳤다. 영혼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는데도 태형은 어깨를 으쓱이며 타타 밴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긴가민가하며 의심하던 표정이 조금 풀린 것처럼 보였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행여라도 마음이 바뀔까 걱정한 여주가 태형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며 환히 웃었다.


“태형이 배고프지? 일단 먹어.”

“응.”


순한 양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태형 때문에 정국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한 태형이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흘깃 고개를 들자, 점국은 하하하 웃으며 정국의 허벅지를 때렸다. 정국은 방금 전과 똑같이 피식 웃으며 뚝배기를 뒤적거렸다.


“진짜 맛있겠는데?”


마치 음식의 풍미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나온 헛웃음인 척, 정국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픽픽거렸다.






오랜만에 4층 집에 모인 쌍둥이 완전체는 둘씩 나눠 앉아 무언가를 심각하게 들여다봤다. 전과의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남매끼리 형제끼리 편을 나누던 것과 달리 정국, 여주가 한 팀이 되고 점국, 태형이 한 팀이 됐다. 여주는 정국에게 반쯤 기대고 앉아 눈을 끔뻑거리다가 살며시 귓속말했다.


“토끼 왼쪽 귀에 줄무늬 없어.”

“아….”


정국은 여주의 말에 공감하며 파란 색연필로 토끼 귀에 큼지막하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 위에 적힌 ‘아주 쉬운 다른 그림 찾기’ 글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빨간 색연필을 들고 그런 정국을 못마땅하게 보던 태형은, 점국을 향해 흘깃 고개 돌려 눈짓했다. 뭐 없느냐 재촉하는 듯했다. 점국은 열심히 쳐다보기는 하는데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해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그 순간 여주가 정국에게 한 번 더 귓속말했다. 바닥에 깔린 버섯들 중 하나에 동그라미를 친 정국이 여주를 와락 끌어안으며 습관적으로 볼에 입 맞췄다. 태형은 게임이 끝남과 동시에 정국이 바닥으로 툭 내려놓은 파란 색연필을 보고 한 번 놀랐다가, 그 뒤로 들리는 쪽 소리에 경악했다. 아차 하며 정신이 돌아온 정국은 여주를 놓아줄 생각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태형이 신경질적으로 색연필을 던졌다.


“나 안 해.”

“안 하긴 뭘 안 해. 졌으면서.”


여주는 단호하게 답하며 색연필을 정리했다. 뒤늦게 여주를 놓아주고 눈치를 보던 정국은, 눈으로 레이저를 뿜어내는 태형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주는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그림 찾기 종이를 차곡차곡 접으며 태형과 점국에게 눈짓했다.


“얼른 가서 치킨 사 와.”


여주의 말에 점국이 지갑을 챙길 때까지도 태형은 정국을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점국아. 수영은 축구 예선 탈락했어?”

“응. 이긴 적이 없어.”


점국이 여주에게 대답하며 멋쩍게 웃었다. 각자 앞에 치킨을 한 마리씩 두고 먹기 시작한 쌍둥이들은 때마침 열리는 축구 국가 대표 친선 경기를 보는 중이었다. 여주는 티브이를 보고 있자니 학교에서 열린 이벤트성 축구 대회가 떠올라 점국에게 넌지시 물었다. 예선에서 단 한 경기도 이긴 적이 없다는 점국의 말에 태형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전점국. 우리랑 같은 팀 할 때가 좋았지?”

“맞아. 점국이 부창 체고 스트라이커였잖아.”

“축구 말고 수구를 해야 이겨 보려나.”


축구 이야기에 신난 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대화를 이어 갔다. 여주는 괜한 말을 꺼냈다 생각하고 닭 다리를 뜯으며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고등학생 때는 축구 시청에 축구 게임도 모자라서 축구 경기까지 미친 듯이 하던 세 사람이었다. 어느덧 선수들의 경기에는 관심 없고 학창 시절 추억에 푹 빠진 쌍둥이들을 보며 여주가 슬쩍 채널을 변경했다. 곧바로 귀신같이 알아차린 태형은 다시 채널을 돌린 뒤 리모컨을 숨겨 버렸다.


“보지도 않으면서….”

“야, 전정국. 열심히 해서 결승까지 올라와라. 발라 줄게.”

“어디 태권도가 입을 놀려. 발차기나 열심히 해.”

“이왕이면 정국이가 이겨라. 나도 은근슬쩍 사진 찍게.“


세 남자는 여주의 불만 어린 말은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계에 푹 빠졌다. 정국인 척하고 사진을 찍겠다는 점국의 말에 다들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데도, 여주는 뚱한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결국 포기한 여주가 정국의 어깨에 기대 가만히 대화를 들었다. 정국은 그런 여주를 흘깃 보고 허리를 살며시 토닥였다.


“태형이는 이미 결승 올라갔지?”


점국이 부러운 마음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태형은 별거 아니라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응. 당연하지. 축구 하면 태권도 아니냐.”

“뭔 소리야. 작년에 결승에서 육상한테 발렸잖아.”

“쉿. 전정국 쉿.”


정국의 훼방에 태형이 감자튀김을 입에 가져다 대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정국 너는 내일모레 육상한테 발릴 것이야.”


약 올리는듯한 태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엔 정국이 빨대를 입술 위에 살포시 얹었다.


“조용. 김태형 조용.”


점국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손뼉까지 치며 소리 내 웃었다. 태형이 점국을 노려보며 손을 저었다.


“예선 떨어진 애는 웃지도 말 것.”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점국은 다시 한번 예선 탈락의 충격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부창 체고 스트라이커가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여긴 판이 너무 좁았다. 정국이 픽 웃으며 손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한 손으로는 습관적으로 여주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전점국 솔직히 수영 애들 너무 못해서 욕 조금 했다, 아님?”


점국은 정국의 말에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점국이가 욕을?’

처음으로 눈을 빛내며 호기심을 보인 여주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점국을 봤다. 입술을 달싹이며 한참 동안 고민에 잠긴 점국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웃어 보였다.


“두 번… 두 번 진심으로 욕했어.”


여주는 신기한 표정으로 점국을 빤히 보았다. 7년을 알았지만 점국이 욕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점국은 경기 때 큰 실수를 했을 때조차도 아쉽다며 씁쓸한 미소를 보인 게 다였다.

‘점국이는 어떤 욕을 하려나?’

궁금해진 여주가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정국이 볼을 콕 찔렀다.


“왜?”


정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여주를 밉지 않게 흘겼다.


“너무 빤히 보지 마.”

“뭘?”

“전점국 너무 빤히 보지 말라고. 질투 나니까.”


소곤소곤 여주에게만 들릴 듯 속삭이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말하지 말라고 했지!”


귓속말은 반칙이라며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태형에게 밀려나면서도 여주는 눈을 찡긋거리며 정국의 팔을 토닥였다.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태형은 점국에게 무어라 귓속말했지만, 정작 여주와 정국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서 꽁냥꽁냥 장난치기 바빴다. 그것만으로도 태형의 속을 뒤집기에 충분한데, 점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태형아. 속닥속닥이 무슨 말이야?”

“아, 전점국! 좀!”






점국이에게



오전 운동이 끝난 여주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찌뿌둥한 어깨를 주물렀다. 대충 운동복 하나를 걸치고 늘어지게 하품하는 여주의 앞으로, 아직 씻지도 않은 동기가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다. 여주는 물어볼 힘도 없어 고개만 까딱였다. 동기는 여주를 스쳐 지나 바삐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며 무어라 소리 질렀다.


“야, 야, 오늘 축구 결승이래. 세상에 나 모르고 있었음.”

“뭔 축구?”

“태권도랑 우리랑 결승이래. 나 씻을 때까지 기다려. 같이 가, 김여주.”


여주는 아차 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며칠 전 생각지도 못하게 육상을 이겼다던 정국의 말이 이제야 떠올랐다. 빨리 점심 먹고 낮잠을 좀 자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어쩐지 귀찮은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들도 다 갈 테니 2학년인 여주는 더더욱 빠질 수 없는 걸 깨닫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자연스레 시선을 앞으로 향해 탈의실 거울을 본 여주가 아까보다 더 경악스러운 얼굴로 티셔츠를 움켜쥐었다.


“아… 옷 어떡하지.”


여주의 등판에는 “태권도” 글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다. 여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옷을 펄럭이며 어쩔 줄 몰랐다. 한낮 온도가 21도인 와중에 겉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하다가 다급하게 탈의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기다렸다 같이 가자는 동기의 말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체육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여주는 마침 나오는 정국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어리둥절한 정국이 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달려오자, 여주가 다짜고짜 건물 뒤편으로 끌었다.


“왜 그러는데.”


정국의 걱정 섞인 물음에 여주는 답 없이 대뜸 옷을 벗었다. 다행히 이너 웨어는 입었지만, 갑작스러운 행동에 너무 놀란 정국이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뭐 하는 거야?”

“네 거 옷 좀.”

“내 옷?”

“응. 나 이거 입고 가면 태권도 스파이인 줄 알아.”


정국은 여전히 얼떨떨한 채 티셔츠를 벗었다. 어차피 축구는 단체복을 입고 할 거라 상관없지만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기는 여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애정이 담긴 정국의 물음에 여주가 씩 웃으며 옷을 받아 들었다. 정국은 드러난 맨살 위로 단체복을 입고 시계를 흘깃 보았다. 자기 옷을 다 입은 여주를 확인하고 나서야 뽀뽀해 달라며 볼을 톡톡 쳤다. 여주가 곧장 입을 맞추고 정국의 엉덩이를 두어 번 토닥였다.


“경기 잘해.”

“응.”






“야, 김여주. 같이 가자니까.”

“헐. 맞다. 미안해.”


여주는 옆자리에 털썩 앉는 동기를 보고서야 기다리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주가 미안한 표정으로 동기를 끌어안자, 동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저었다. 동기가 이제 슬슬 경기가 시작되려 하는 운동장을 빠르게 훑고 여주에게 시선을 옮겼다. 몸집에 맞지 않는 큼지막한 노란색 티셔츠가 이목을 끌었다.


“그거 전정국 옷 아니야?”

“맞아.”

“하다 하다 옷도 같이 입냐?”

“오늘 깜빡하고 태권도 옷 입고 와서 좀 빌려 달라고 했어.”


동기는 풋,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태권도 옷 입고 왔으면 너 스타 될 수 있었는데.”


원래 다른 종목 운동복을 입고 다니면 옷을 빌려준 사람이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하는데, 여주는 스무 살 때부터 하도 많이 그래서 예외적인 케이스가 됐다. 이제는 태권도 사람들도 여주를 보고 ‘쟤 태형이 쌍둥이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같은 날 태권도 옷 입고 유도 응원석에 앉아 있으면 그냥 튀는 정도가 아닐 것이다. 재밌는 상상에 동기를 따라 웃던 여주가 갑자기 옆에서 소리 지르는 후배들 때문에 깜짝 놀라서 심장 부근을 움켜쥐었다. 그새 경기가 시작된 건지 여기저기서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와… 심장 떨어지는 줄.”

“야, 김여주. 주장 선배 쳐다본다. 얼른 응원해.”


여주는 곧장 손뼉 치며 응원에 합류했다. 앞에서 응원을 주도하는 1학년 후배를 귀엽다는 듯 보며 열심히 따라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경기에는 관심이 없어서, 공을 보는 게 아니라 태형과 정국을 한 번씩 힐끔거리기만 했다.

그 순간 날쌘돌이처럼 개인기를 뽐내며 공을 뺏는 태형을 보고는 너무 웃겨서 입을 틀어막았다. 남들은 술렁이며 감탄하는데도 여주 눈에는 그저 다람쥐 타타처럼 보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어깨까지 떠는 여주의 모습에 동기가 따라 웃는 그때, 누군가 여주의 어깨를 툭 치며 옆에 와 앉았다.


“어? 오빠!”


여주는 의외의 인물을 보고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빠라는 말에 유도부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을 향했다가, 역시나 의외라는 듯 수군거렸다. 여주는 남자를 끌고 옆으로 좀 더 떨어져서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는 한진 체대생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거든?”

“아, 진짜? 몰랐어.”

“선수촌에 있는 거 아니었어? 여긴 어떻게 왔어.”

“이 근처 지나가다가 잠깐 얼굴이나 볼까 해서 왔지. 체육관 갔더니 유도부는 다 여기 있을 거라고 하더라.”


남자는 여주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동시에 정국과 숙명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여주는 어느새 몸까지 돌리고 앉아 남자와 대화를 이어 갔다. 어쩐지 때깔 좋은 남자를 보며 부러운 마음에 눈을 반짝였다.


“와… 선수촌이 좋긴 한가 봐. 김석진 얼굴 엄청 좋아졌다.”

“너도 얼른 들어와야지.”

“올해 꼭 간다. 정국이랑 같이.”

“정국이랑 같이? 아… 나 쫓아내고?”


석진은 장난스레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그사이 골이 들어갔는지 운동장이 시끄러워졌다. 잔뜩 흥분한 태형이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여주는 그런 태형을 향해 살며시 미소 짓고 다시 석진을 봤다. 자기를 쫓아낼 거냐는 석진의 말에 해명해야 했다.


“상비군도 있고 연습 상대도 있고. 들어갈 일은 많지.”

“전정국 무서워. 준비 빡세게 한다는 소문이 있더라.”

“원래 정국이가 오빠보다 아주 약간 더 잘하잖아.”

“쌍둥이라고 또 편든다.”


살짝 사심이 들어간 여주의 말에 석진이 진심으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석진은 고등학생 때도 그러더니 정국과 여주는 쌍둥이가 아닌데도 꼭 둘을 같이 묶어서 말했다. 쌍둥이라는 말에 미간을 구긴 여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새 또 한 번 골이 들어가며 함성이 터졌다. 이번에는 유도의 골이라 바로 옆자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여주가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운동장을 봤다.


“야. 전정국 골 넣었다.”

“그러네.”

“축구도 잘하네. 재수 없게.”


석진은 유도 응원에 섞여 함께 소리 질렀다. 재수 없다는 말과 달리 정국을 바라보는 석진의 눈에 애정이 가득했다. 워낙 큰 목소리에 이쪽으로 흘깃 고개를 돌린 정국은, 못 볼 거라도 본 표정으로 살살 뛰어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정국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석진이 여주의 팔을 퍽퍽 쳤다.


“쟤가 저기 왜 있냐는 표정이야.”

“아파. 그만 때려.”

“전정국이 아직도 너 좋아하냐?”

“뭔 소리야.”


짓궂은 표정의 석진이 여주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여주는 헛소리 말라며 가볍게 넘겼지만, 어깨를 으쓱이는 석진의 얼굴에 온갖 호기심과 장난기가 담겼다. 어느샌가 이쪽을 힐끔거리는 정국을 눈치챈 석진이 여주에게 바짝 다가가 의도적으로 귓속말했다.


“쟤가 고딩 때 너 좋아했잖아.”

“헛소리 좀 그만해.”

“김여주 너만 모른다니까.”


정국은 심기가 불편한 듯 잔디를 걷어찼다. 남들은 게임이 잘 안 풀려서 그러는 거로 생각했지만, 석진은 정국이 왜 그러는지 아주 잘 알았다.


“정국이가 날 싫어하는 건 유도 때문만이 아니지.”


의미심장한 석진의 말에 여주가 무슨 뜻이냐며 눈썹을 추켜세웠다. 석진이 얼굴을 더 가까이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봐라. 이제 전정국 엄청 열받을걸.”

“글쎄. 오빠가 잘못 짚은 것 같은데.”


여주는 미소 띤 채 정국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헛다리를 짚었다고 생각했다.

정국은 코가 닿을 듯 여주에게 바짝 붙은 석진을 보며 있는 대로 인상 쓰다가, 때마침 날아오는 패스를 받아 신경질적으로 슛을 때렸다. 그 공은 그대로 골키퍼 다리 사이를 지나 골 망을 흔들었다. 전반이 끝날 때쯤 터진 역전 골에 선수들이며 학생들이며 난리를 치는데도, 정국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응원석 쪽으로 달렸다.

정국과 함께 세리머니 하려던 동료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지 의문을 품을 때쯤, 정국이 어느새 유도부 응원석 코앞에 멈춰 섰다.


“….”


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국을 보았다. 도대체 여긴 왜 온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석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옆으로 살짝 비켜 주고, 정국은 응원석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여주의 양 볼을 잡고 단번에 입을 맞췄다. 너무 놀라서 소리 지를 생각도 못 하는 유도부 학생들과 저 멀리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태형이 보였다.

뽀뽀라기에는 조금 진한 입맞춤이 끝나고 떨어지는 순간 진득하고도 민망한 소리가 났다. 여주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져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딸꾹, 딸꾹, 터질 듯 빨간 볼로 입을 틀어막은 여주에 반해 정국은 태연한 얼굴로 운동장으로 돌아가 버렸다. 유도부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김여주… 너네 뭐야?”

“헐, 대박….”

“오늘 만우절이야? 아, 뭐야. 장난하지 마, 진짜.”

“말도 안 돼.”


석진은 그 와중에 정국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저 싸가지. 선배 보고 인사도 안 하네.”


핀잔하는 듯하면서 애정이 담긴 석진의 목소리에도 여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보다 못한 석진이 죽은 거 아니냐며 어깨를 흔들자, 여주가 새빨간 볼을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전정국 미쳤어.”


미세하게 떨리는 여주의 목소리에 석진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점국이에게



정국은 학교 안에서도 거리낌 없이 여주에게 스킨십했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 여주가 자꾸 밀어내는데도, 이제 다 아는데 뭐 어떠냐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여주는 그날 일 이후 학교 스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말이 좋아 스타지, 그냥 엄청난 관종에 가까웠다.

정국은 노려보는 여주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씩 웃으며 어깨에 기댔다.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는 듯 여주의 어깨에 머리를 마구 비비적거렸다.


“나 진짜 쟤네 보기 싫잖아.”

“어우, 적응 안 된다.”


동기들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속이 안 좋다며 명치 근처를 쓰다듬었다. 그 소식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유도부 안에 소문난 것은 물론이고 중고등학교 동창들의 연락까지 쏟아졌다. 그 이후로 동기들은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살았다. 남자 동기가 조금이라도 잘해 줄라치면 ‘웬일이야. 너 전정국이야?’ 하며 유행어 아닌 유행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여주는 지나친 관심이 민망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정국의 팔을 끌었다.


“전정국 너 때문에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왜. 내가 뭘.”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어?”

“나 김석진 진짜 싫어. 둘이 붙어 있지 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정국은 석진과 티격태격하다가도 막상 만나면 잘 지내면서 꼭 그랬다. 둘이 라이벌이긴 해도 대표 시절도 함께 했고 학교 다닐 때부터 워낙 격의 없이 지낸 터라, 석진은 정국이 반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선배 중 하나였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운동으로 자극받을 때조차도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면서, 정국은 요새 부쩍 석진의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을 굳혔다.

여주는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집에 거의 도착했으니 토라진 마음을 표하고자 먼저 들어갈 생각이었다. 바람과 달리 정국은 여주를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종종걸음으로 빌라로 향하던 여주가 갑자기 멈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왜?”


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잡힌 여주에게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여주 어깨에 손을 얹고 묻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사색이 되어서 돌아보았다. 여주는 잔뜩 겁에 질려 정국의 손을 부여잡았다. 정국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느릿느릿 눈만 깜빡였다.


“정국아. 엄마….”

“응?”

“엄마 차.”


여주가 가리킨 손끝에 자주 본 검은색 세단이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차 번호까지 외운 정국이 여주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왜 왔지.”


여주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엄마 때문에 멘탈이 나가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국은 침을 꼴깍 삼키고 애써 태연하게 여주의 손을 잡았다. 정국이 호기롭게 먼저 빌라 안으로 들어서며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뭐 해. 가서 인사드리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파에 정 자세로 앉아 있는 태형이 가장 먼저 보였다. 점국은 언제 왔는지 그 옆에서 볼만 긁적였다. 함께 들어오는 정국과 여주에게 태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주가 그 뜻을 몰라 조심스레 신발을 벗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화초 잎을 닦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여주는 침을 꼴깍 삼키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엄마. 오셨어요?”

“어? 여주 왔니?”


엄마는 곧장 손에 있는 걸 내려놓고 여주 앞으로 다가갔다.


“잘 있었어, 우리 딸?”


여주는 꼭 안아 주는 엄마 덕에 조금 안심했다. 안 좋은 일은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뒤에 선 정국을 발견한 엄마가 아까보다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정국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자마자 엄마는 대뜸 정국의 멱살을 잡아 몇 번 끌어 보았다.


“오, 우리 정국이는 힘이 더 좋아졌네.”

“아… 네. 감사,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무슨. 그냥 아줌마라고 불러.”


정국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들어오라 손짓한 엄마가 소파의 남은 자리를 가리켰다. 정국과 여주가 우물쭈물하며 나란히 앉자마자, 태형이 여주에게 조심스레 귓속말했다.


“아까 점국이 오자마자 정국이인 줄 알고 멱살 잡아 봄.”


여주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그걸 꼭 지금 말해야겠냐며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진 후였다.


“여주 왜 웃니?”


의아해하는 엄마에게 여주가 세상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선발전 준비는 잘 하고 있고?”

“네, 감독님.”

“네, 엄마.”


정국과 여주가 동시에 대답했다. 정국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줌마라는 호칭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감독이라는 말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엄마는 다시금 화초 잎을 닦기 시작했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왜 오셨대?”


아주 조용히 속삭이는 여주의 말에 태형은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여주는 혹시라도 정국과 만나는 걸 알고 온 것은 아닐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평소라면 조금 아양도 떨고 운동이 힘들다고 어리광도 피웠을 텐데, 지금은 쥐 죽은 듯 앉아 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그사이 화초 잎을 다 닦은 엄마가 손을 털며 천천히 뒤를 보았다. 갑작스레 향한 시선에 놀란 정국과 여주가 동시에 몸을 곧추세웠다.


“그래.”

“….”

“그래서 둘은 언제부터 만난 거야?”


태형은 남몰래 고개를 돌리고 입을 떡 벌렸다. 점국 역시 입을 틀어막으며 표정을 관리하려 애쓰고, 정국과 여주는 동시에 멘탈이 나가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고 소파 앞에 가까이 섰다.


“물었는데. 언제부터 만났냐고.”


재차 묻는 말에 여주는 소파에서 미끄러지듯 내려가 무릎으로 착지했다. 자연스레 무릎을 꿇고 앉은 여주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중얼 말을 잇자, 정국은 자기도 그래야 하나 싶어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태형이 그런 정국을 말렸다. 네가 왜 무릎을 꿇느냐며 표정으로만 말했다. 그 와중에도 여주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한 달, 두 달. 그쯤이요.”

“여주야. 너 왜 무릎을 꿇어. 일어나.”

“죄송해요. 엄마.”


엄마는 다급하게 여주를 일으켰다. 얼떨떨한 표정의 여주가 눈을 맞추자, 어이없는 듯 웃음을 터트린 엄마였다.


“뭐가 죄송해. 내가 뭐 잡아먹니?”


엄마의 말에 태형은 자기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네.”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그 말을 들은 여주가 웃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김태형 가만 안 둬.’

여주는 마음속으로만 태형을 저주했다.

그사이 엄마는 여주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누가 뭐라고 한대?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

“다 큰 성인이 연애도 하고 그런 거지. 다만 항상 피임,”

“엄마! 엄마… 제발….”


여주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성교육을 확실히 받아서 그런 말에 익숙했다. 그래도 남자 친구 앞에서는 듣기 싫었다. 여주의 간절한 목소리에 점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으로 접은 허리를 좀처럼 못 펴고 눈을 질끈 감았다. 태형은 점국 때문에 덩달아 웃음이 터지려고 해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슬픈 생각을 했다.

‘엄마한테 혼나는 아빠를 생각하자.’

그게 통했는지 태형이 점국보다 표정 관리를 좀 더 잘했다. 정국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여주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엄마의 손을 붙잡으며 제발 그만하라며 애원했다. 엄마가 그런 네 사람을 쓱 훑고 이해하지 못하겠는 듯 표정을 구겼다.


“너희가 연애한다고 운동 게을리할 애들도 아니고. 서로 잘 챙겨 주면 좋지, 뭐.”

“네.”

“근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내가 그렇게 무섭니?”

“네…니요. 아니요. 전혀요.”


여주는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런 여주를 걱정스레 보던 정국이 함께 바닥에 내려가 앉았다.


“여주야. 편히 앉아.”


다정한 정국의 말에 여주가 흘깃 시선을 돌리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은 자기도 긴장했으면서 마음속으로 작게 결심하고 엄마와 똑바로 눈을 맞췄다.


“걱정하실 일 없게 할게요. 감독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뭐든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 하겠습니다.”

“….”

“운동하는 사람은 특히나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한다는 말,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

“폭력적인 감정의 학습만큼이나 자신의 이성 판단을 맹신하는 것 또한 위험하다.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행동해라.”


어려서 운동 조금 배웠다고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쉽게 폭력 행사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실시한 인성 교육 중 일부였다. 엄마는 자기 말을 인용해서 당돌하게 뜻을 전하는 정국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주보다 키가 작던 정국이 어느새 훌쩍 커서 내려다보기까지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엄마가 정국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여주는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려서 침을 꼴깍 삼켰다.


“가만히 둬도 알아서들 할 것을 내가 너무 오버했네.”

“아닙니다. 걱정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정국은 멋쩍게 웃는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 앞에서 어떻게 저렇게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지 신기해하던 태형조차 결국 웃으며 점국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점국은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감추며 제 볼을 쓰다듬었다. 그 안에서 오직 여주만 여전히 얼떨떨한 채 앉아 있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엄마의 말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와 허둥댔다. 정국은 좀처럼 마음을 편히 먹지 못하는 여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정국의 다정한 목소리에 여주가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정국아. 너는 우리 엄마 안 무서워?”

“….”

“정국아?”

“…응?”


여주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책을 보다가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정국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어 대답을 안 했다. 여주가 몸을 몇 번 흔들고 나서야 정신 차린 정국이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맞췄다. 그런 정국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 주려던 여주가, 미세하게 떨리는 정국의 손을 보고 놀라 몸을 일으켰다.


“너 왜 손을 떨어?”

“아, 나 너무 긴장했나 봐.”

“미쳤어. 우리 엄마 때문에?”


여주는 안타까운 마음에 울상 지은 채 정국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국은 여전히 경직된 몸에 힘을 풀지 못하면서도 자연스레 여주의 허리를 감쌌다. 침착하게 조곤조곤 말할 때는 언제고, 여주 엄마가 떠나고 나서야 모든 긴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익숙한 향기 덕에 조금 편해진 정국이 여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리 처음으로 대표팀 뽑혔을 때 스승이 감독님이었잖아. 난 그때 기억 때문인지 아직도 감독님이 어렵거든.”

“알지. 나도 우리 엄마 진짜 무서워.”

“남들 시선이 있으니까 너한테 더 엄하게 하신 것 같은데. 그땐 어려서 그랬나. 그게 너무 무섭더라.”

“맞아.”

“아까 정말로 중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어. 기억나지? 너랑 나랑 선수촌 애들이랑 대판 싸우고 운동장 백 바퀴 돌았던 거.”


여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감독이라서 실력도 안 되는데 대표로 뽑혔다는 말을 듣고 흥분해서, 처음 본 친구랑 주먹질하며 싸운 적 있었다. 그 아이가 여주의 얼굴을 할퀴어 피를 내는 바람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정국까지 합세해서 난리가 났다. 먼저 폭력을 쓴 건 그쪽인데도 여주가 체격이 더 좋다는 이유로 배는 크게 혼났다.

아무리 그래도 엄만데 자기한테만 뭐라고 하는 게 너무 서운했던 여주는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운동장을 돌았다. 묵묵히 옆에서 같이 달려 준 정국이 없었더라면 주저앉아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일이 생각난 여주가 정국의 품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의 말이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감독님도 엄청 속상하셨을 것 같아. 딸 얼굴에서 피가 철철 나는데, 흉이라도 질까 봐 얼마나 걱정하셨겠어.”

“그런가.”

“근데 나 아까 감독님 표정에서 그 마음을 읽었어. 어렸을 때는 몰랐던 거. 널 걱정하는 마음.”


정국은 시선은 허공을 향한 채 여주의 머리칼을 끊임없이 쓰다듬었다. 그 느낌이 좋은 여주가 정국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허리를 감싸는 여주의 손길에 잠시 시선을 옮긴 정국이 미소 띠며 여주를 끌어안았다. 여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정국은, 여주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내가 잘할게. 다들 걱정 안 하게.”

“나한테만 잘해도 돼.”


여주는 장난스레 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냥 연애하는 것뿐인데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예상외의 대답에 정국이 웃음을 터트리자, 여주가 그의 배 위에 올라타 몸을 낮추고 쪽쪽 입 맞췄다. 그렇게 스리슬쩍 옷 속으로 파고드는 손을 보며, 정국은 당황한 나머지 다급하게 여주의 손목을 잡았다. 정국의 말간 눈이 여주를 향하고 말랑한 귀가 붉게 달아오르며 웃을 듯 말 듯 한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행동하라는 말 잊었어?”

“생각 많이 했어.”


여주는 잡힌 손목을 비틀어 뺐다. 그리 힘주지 않았는데도 스르르 놓아주는 정국을 보며 어이없는 듯 웃었다. 정국은 살며시 몸을 돌려 여주를 제 아래에 오게 했다. 다치지 않게 뒤통수를 살며시 감쌌다가 놓고 여주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렇게 더 뭘 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떼어 옆에 누웠다. 여주는 그런 정국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빤히 봤다. 정국이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이내 여주에게 팔베개해 주더니 어서 자라며 토닥였다.


“생각 더 하고 와.”

“….”

“나처럼 백 번은 해야지.”


여주가 정국의 복근을 콕콕 찌르며 투정 부렸다. 그런데도 꼿꼿하게 뉜 몸을 고칠 생각을 안 하던 정국은 점점 빨개지는 귀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참기 힘들어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여주를 와락 껴안았다.


“백 번 생각하고 다시 오라니까.”


정국이 여주에게 하는 건지 자기에게 하는 건지 모를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결국 포기한 여주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품에 안겼다. 정국의 빨간 귀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정국은 귀만큼 뜨겁게 끓는 가슴을 애써 외면하며 여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여주야. 잘 자.”


다정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간지럽게 느껴졌다.






점국이에게



2016년 -월 -일.


“김여주. 빨리 나와. 통금 시간 다 돼 간다고.”

“알았어. 잠깐만.”


교복을 입고 책상 앞에 앉은 앳된 얼굴의 여자는 한참 동안 편지지를 펼쳐 놓고도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잘근거렸다. 결국 참다못한 여자의 오빠가 문을 벌컥 열고 소리 질렀다. 여자는 다급하게 편지지를 재킷 주머니에 넣으며 얼굴을 붉혔다.


“왜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데!”

“오늘 사감 누군지 몰라? 빨리 나와.”

“아, 진짜!”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챙겼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운동복이며 먹거리며 짐이 가득했다. 부모에게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서자 두 사람을 기다리는 쌍둥이 형제가 보였다. 여자는 연신 오빠에게 투덜대던 말을 멈추고 그중 한 사람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점국아.”

“응. 여주야.”


여자는 당연하게 남자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나온 오빠가 무어라 소리를 지르는데도 무시하고 재잘거렸다. 그런 오빠를 기다리던 나머지 한 남자는 앞서가는 두 사람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좀 늦게 뒤따르는 두 사람 앞으로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쪽지 한 장이 보였다. 남자는 여자의 오빠를 힐긋 살폈다. 오빠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쪽지를 주웠다. 들키지 않게 쪽지를 살며시 펴 본 남자가 표정을 굳히고 씁쓸하게 웃었다.

‘점국이에게.’

달랑 다섯 글자밖에 적지 못한 편지지에는 수많은 시간을 고민한 흔적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남자는 걸음을 빠르게 옮겨 여자의 뒤에 바짝 붙더니, 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재킷 주머니에 쪽지를 슬그머니 넣어 주었다. 불가피하게 이뤄진 접촉에 깜짝 놀란 여자가 올려다보니 남자가 시큰둥하게 눈을 맞췄다.


“뭘 봐?”


남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을 스쳐 지났다. 여자의 오빠가 후다닥 달려와 무어라 말하는데도 남자의 신경은 온통 뒤로 가 있었다.


“전정국. 내 말 듣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묻는 친구의 말에 남자는 발에 걸리는 돌부리를 뻥 걷어찼다. 무언가 짜증 나는 듯 머리칼을 마구 헝클고는 교복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난다.”

“뭐라고?”

“학교 갈 생각하니까 짜증 난다고.”


‘점국이에게’ 다섯 글자가 머릿속에 콕 박혀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남자였다.






점국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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