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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살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게 큰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치, 호열아?”

“어.”

 

20년 지기 친구가 웃는 얼굴로 대답해줬다. 그러고도 산뜻하게 덧붙여 줬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여기서 “그럴 수도 있지.” 부분은 30살까지 동정인 부분에 대해서다.

 

강백호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다는 주의다.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소연이랑 지금도 친구고, 소연이는 아직 결혼 안 했다. 언젠가 꼭 나랑―하고 강백호는 생각한다. 타고난 낙천주의자답게.

 

“그럼, 마법사가 된다는 건 무슨 뜻이지?”

“다른 사람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모양이야. 몸이 닿으면.”

“오. 초능력이야?”

“그런 거겠지. 일종의 텔레파시?”

“와, 그럼 재밌겠다.”

 

강백호가 즐거워했다. 양호열이 가만히 웃었다.

 

“너 내일 생일이잖아. 조금 있으면 알 수 있겠네. 진짜 마법사가 될지.”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쳐다보니 밤 열 시다.

 

“그럼 한번 봐볼까. 동정이 마법사 되는 얘기.”

 

백호의 팬 중 귀여운 여고생이 추천해 준 드라마였다. 손편지에다 1할은 백호의 플레이에 대한 감탄, 3할은 자신의 학교생활, 6할은 요즘 빠져 있다는 이 드라마에 대해 줄줄이 썼다. 뭘 볼까 고민하던 차에 한번 찾아 틀어본 것이다.

 

두 사람은 느긋이 소파에 기대서 맥주를 마시며 드라마를 쭉 봤다. 반절까지 봤을 때 주인공이 고백을 했다. 백호가 하품을 했다.

 

“재미있네. 좀 졸리지만.”

“백호 네 취향이라기엔 액션이 좀 부족하지?”

“아냐, 나이 먹으니까 이런 것도 괜찮다. 근데 좀 졸려서.”

 

백호가 다시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호열이 넌 어떤데. 재밌냐?”

“어, 볼 만해. 여고생이 좋아할 법은 한데.”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둘이 다 잘생겨서 그런가 어울리네.”

 

왜냐면 이 드라마는 두 남자가 사랑하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백호는 꾸벅꾸벅 졸면서 별 코멘트 없이 봤다. 호열도 마찬가지. 그는 말끔한 낯으로 가만히 화면을 지켜봤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아, 자정 지났다.”

 

옆자리의 백호를 돌아봤다.

 

“생일 축하한다.”

“…….”

“자냐? 백호야.”

“…….”

“애같이 자네.”

“…….”

“넌 어떻게 하나도 변한 게 없냐.”

 

큭큭. 웃음소리.

 

“머리 뻗쳤네.”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다. 스윽. 슥.

 

“잘 자라.”

 

“좋은 꿈 꾸고.”

 

“아프지 말고.”

 

“내일도,”

 

“같이,”

 

“함께,”

 

“가능하다면,”

 

“평생…….”

 

파도 소리.

 

열려 있던 창문으로 쉴새 없이 넘나들던

 

소리,

 

소리,

 

소리…….

 

 


*

 


 

“백호야.”

 

호열이 부른다.

 

“어어…….”

 

백호는 부스스 눈을 떴다.

 

“깼냐?”

“으음. 몇 시야?”

 

백호가 버석버석한 목소리로 물었다. 페트병을 건네주며 호열이 대답했다.

 

“열한 시.”

“아, 늦잠 잤다.”

“가끔 그럴 때도 있는 거지. 모처럼 휴일인데.”

 

뚜껑을 열어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정신이 한결 깨어났다. 백호가 물었다.

 

“어. 근데 너는. 출근 안 해?”

“나도 휴일이지.”

“그랬나?”

“휴가 냈다고 했잖아.”

“휴가 내기 빡세다며. 지금 직장.”

 

호열의 손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네 생일이잖아.”

“음?”

“침 흘리고 잔 거 봐라. 애냐.”

“세수하면 되지 뭐.”

“귀엽기는.”

“응?”

“뭘 봐. 일어나. 아침 먹자.”

 

백호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호열이 침실을 나갔다.

 

백호는 어딘가 아리송한 기분이 되어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침대에서 나왔다.

 

호열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슥슥, 익숙하게 프라이팬을 움직이며 호열이 흘끗 뒤돌아봤다.

 

“앉아. 먼저 먹고 있어.”

“같이 먹어.”

“그래, 그럼.”

 

백호는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았고, 호열이 물었다.

 

”달걀 프라이가 좋냐, 스크램블이 좋냐?”

“달걀 프라이.”

“둘 다 있지.”

 

호열은 프라이팬을 가지고 와서 백호 앞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었다. 달걀 스크램블과 프라이 둘 다. 거기다 식탁에는 대량의 베이컨과 햄과 소시지, 산처럼 쌓여 있는 토스트와 팬케이크, 치즈와 과일과 채소가 넘치는 샐러드, 버터와 꿀과 세 종류의 잼.

 

“이야, 이걸 언제 다 했대.”

“그러게. 이걸 다 언제 했대냐. 요리사나 될걸. 그치?”

 

호열은 히죽 웃으며 백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백호는 산더미 같은 첫 끼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구단 식당이나 호텔 조식에서도 익숙한 조합의 음식이라 입에 잘 맞다. 원체 강백호는 음식을 가리는 법이 없지만.

 

“잘 먹네.”

“그럼. 이 천재는 다 잘 먹지. 호열이 네가 진짜 맛있게도 하고. 고맙다.”

“크크. 강백호 다 컸네. 칭찬해줄 줄도 알고.”

“진짜 맛있다고. 어떻게 이렇게 만드냐? 아, 호열아, 나 잼 좀. 그쪽 빨간 거.”

“자.”

 

손가락이 닿았다.

 

“오믈렛을 더 했어야 했나?”

“야, 무슨 여기다 또 뭘 더 한다 그래.”

“응?”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너 무슨 오믈렛 뭐시기 더 할 걸 그랬다며.”

“…….”

 

호열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상태로 그가 말했다.

 

“그것도 금방 만드니까.”

“됐어. 호열이 너도 실컷 먹어. 고생 많이 했는데.”

 

백호는 달걀 스크램블 한 대접을 밥숟가락 가득 퍼먹으며 새는 발음으로 말했다.

 

“호열아, 이따 저녁은 나가서 먹자.”

“어. 예약해 놓은 데 있어.”

“오, 진짜? 양호열. 진짜 너는 뭐 그렇게 빈틈이 없냐?”

“생일만큼은 서비스 좀 해주는 거지.”

 

하고 말하면서도, 이 남자의 안배는 끝이 없다. 생색도 안 내면서 물 흐르는 듯한 배려.

 

“참, 그러고 보니까,”

 

백호는 식탁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말했다.

 

“꿈을 꿨다.”

“무슨 꿈?”

“바다 보는 꿈. 나 고등학생 때.”

“아, 그때.”

“응. 재활했을 때.”

“응, 그때.”

“너 자주 왔었지.”

“갔었지.”

 

호열이 말을 받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강백호의 재활 전문 요양원이 바닷가에 있었다. 양호열이 주말마다 보러 왔었다.

 

잿빛 바다. 해가 비치는 바다. 비가 내리는 바다. 눈이 내리는 바다. 해가 지던 바다.

 

함께 해안에 앉아 온갖 바다를 다 봤다.

 

“갑자기 그리워지네. 그 시절.”

 

백호가 씩 웃었다.

 

“참 대단했지. 그 시절 강백호.”

 

아낌없이, 모든 것을 퍼부었던, 후회 없는 청춘.

 

장면,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호열이 너도 대단했다.”

“나? 내가 뭘.”

“자주 보러 와줬잖아. 어떨 땐 학교도 빼먹고.”

“하하. 나야 불량 학생이었으니까.”

 

호열이 눈을 반쯤 접으며 웃었다. 백호는 두툼하게 썬 햄을 우적우적 씹으며 말을 계속했다.

 

“거기 창문 열어놓고 자면 계속 파도 소리가 들렸거든.”

“야, 너 그렇다고 겨울에도 창문 열어놔서 거기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추웠는지 아냐?”

 

호열은 그 추위가 생각났다는 듯 자기 팔뚝을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어 보였다.

 

“거기서 자다가 감기 걸렸잖냐, 나.”

 

호열이 보조 침대에서 자고 간 날도 때때로 있었다. 백호는 잠들 때까지 계속 호열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금세 잠에 곯아떨어지는데. 아무리 천재 강백호여도 그 시절에는 무서울 때가 아주 가끔, 있었다. 죽도록 무서워서, 심장이 멈춰서, 자다가 죽는 건 아닐까 싶었던 순간이.

 

그래서 호열이가 있어 주는 밤이 정말 좋았다. 말로는 한 적 없어도.

 

왜 그때 생각이 갑자기 났을까.

 

“……어젯밤에 계속 그 소리가 들렸어.”

“파도 소리?”

“응. 처음엔 시끄러웠는데 나중엔 익숙해지더라.”

 

마치 시계 초침 소리처럼.

 

그곳에 당연히 존재하는 무언가처럼,

 

계속 말을 걸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되어서.

 

“나중에는 파도 소리가 안 들리면 왠지 좀…… 그랬는데. 이야, 갑자기 그때가 다 생각이 나네.”

 

백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날의 괴로움을, 두려움을, 막막함을, 그것을 달래주었던 친구의 존재와 파도 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쑥스러운 데가 있었으므로.

 

“그랬구나.”

 

호열이 웃는 낯으로 말을 받아줬다.

 

“바다 보러 갈까.”

“응, 가자. 오랜만에.”

“그래. 시간 맞춰봐서 가자. 아, 백호야, 이거 더 먹어라.”

 

호열이 자기 쪽의 베이컨을 덜어 주었다. 받다가 손가락이 부딪쳤다.

 

“그때. 끔찍했지.”

 

백호가 호열을 쳐다봤다.

 

“너 보는데, 심장 걸레짝 되는 줄.”

“……엉?”

“웃는 거 뒤지게 힘들었다. 네 앞에서.”

 

호열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왜. 뭘 그렇게 보는데.”

“힘들었어? 그때? 너 그때도 맨날 웃는 얼굴이었는데…….”

 

지금처럼. 백호가 말을 삼켰고, 순간 호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백호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잠깐, 웃었다. 습관처럼 짓는 멀끔한 미소.

 

백호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평소 강백호는 눈치가 죽도록 없지만, 오랜 세월 붙어 있으면서 학습한 결과 저 자식이 뭔가를 무마하려는 순간의 여백에 잘 지어 보이는 얼굴이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모든 걸 무로 만들고 싶거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할 때 짓는 미소라고 할까.

 

“아, 뭐야. 왜 그러는데, 양호열.”

“아냐, 그냥.”

 

호열이 손을 뻗어 백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댔다. 백호가 단박에 물었다.

 

“어? 목마르냐? 물 줄까?”

 

호열의 표정이 다시 갸웃이 기운다. 다시, 웃는다.

 

“어떻게 알았어? 와, 강백호. 눈치 빨라졌네. 생전 이런 일도 다 있냐?”

“이 몸은 천재니까.”

 

백호가 벌떡 일어나 물을 더 갖다줬다. 호열은 웃는 얼굴로 그 물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 시절의 바다에 대한 화제가 더는 나오는 일 없이, 가벼운 잡담을 나눴다.

 

식사를 마친 후에 백호가 먼저 일어났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넌 가만 있어.”

“……그럼 오늘은 부탁할까.”

“엉. 푹 쉬어. 티비 보고 있어.”

 

백호는 다 비운 접시를 개수대로 가져갔고, 호열은 남은 식탁 정리를 했다.

 

모두 치운 후로도 식탁에 기대선 채로, 설거지를 하는 백호를 바라봤다. 정리 안 된 빨간 머리, 냉장고만 한 등짝, 박자 엉망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만두지 못하는 발 두 짝. 번갈아 종아리를 긁었다가, 발등을 눌렀다가,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스텝을 밟다가.

 

겉모습은 달라진 게 없고, 익히 아는 백호인데.

 

호열은 골똘해졌다. 그럴 때 그의 눈은 무표정해진다.

 

“야, 호열아.” 백호가 돌아봤다.

 

“응. 왜.”

 

금세 호열의 눈가가 선선히 접혔다.

 

“설거지 다 했어?”

“아니, 밥 먹고 공원이나 가자고……. 근데 왜 거기 서 있냐? 가서 티비나 보라니까. 어제 드라마는 다 봤어? 난 보다 잤네.”

“아니, 그거나 마저 봐야겠다. 수고해.”

 

호열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그 짧은 거리만큼의 걸음마다 생각이 깊어진다.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말도 안 되지만,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기도 하고,

 

재앙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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